165화
아이들의 무덤을 떠나 길을 걷기 시작하고 난 후, 눈치 빠른 백유화는 아이들의 죽음보다 더한 무엇인가가 천일영의 얼굴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이들도 무덤이나마 생겼으니 그것을 집이라 생각하고 편히 길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마님의 얼굴은 더욱 심한 근심이 가득하니 어찌 된 일이신지요?”
“현황우가 던져 놓고 간 일이 너무 무겁구나.”
똑같이 피 값을 짊어지기로 한 백유화에게 무엇을 숨기랴.
“지금의 무림에는 화경에 든 무인조차 없다. 정마대전이 벌어진 지 벌써 일백 년의 시간이 흘렀고, 초절정 고수에서 더 높은 경지로 올라야 할 절박함을 사람들이 잊은 지 오래구나.”
“그렇다면 초절정 고수가 과거보다 상당수 많아진 것도 같은 연유입니까?”
“평화가 길어지다 보니 무림인들은 실전을 뒤로하고, 경지에 오를 수많은 방법을 찾기 시작했지. 경지에 오르기 힘든 화경이나 현경보다는, 더욱 빠르게 초절정 고수가 되는 길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백 년간 이 일에만 몰두했으니 지금에 와서는 초절정 고수가 되는 길이 수도 없이 알려진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기에 만족해 버린 것이지.”
천일영의 얼굴이 씁쓸함을 떠올렸다.
초절정 고수가 많아졌지만, 큰 전쟁이 없는 지금에 와서는 과거와 비교해 무인의 질이 심각하게 떨어지는 것도 사실.
천마의 권한으로 과거의 기록을 읽어 볼 기회가 있었던 바로는, 일백 년 전의 초절정 고수는 지금의 무인들과 비교해 압도적으로 강했다.
“우스운 일이다. 초절정 고수는 많은데 화경에 들어설 사람은 없다 하니, 이것이야말로 풍요 속의 난세라 하지 않으면 그 무엇이라 하겠느냐.”
“그렇기는 합니다만…….”
천일영의 말의 끝자락에서 백유화가 무엇인가 느낀 듯,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혹 누군가가 뒤에서 이렇게 되도록 조종했다고 생각하면 너무 과한 생각일까요?”
“어찌하여 그리 생각을 하였느냐.”
“백 년 전 정마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 마교와 정파는 다음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이후 서로 간에 탈마나 현경에 이른 무인들이 나타나지 않았지요. 지금의 세상에서야 이해가 되는 일이라고 하지만, 그때는 서로의 증오가 극에 달해 있을 때인데 어째서 현경은커녕 화경에 든 무인조차 나오지 못했을까요.”
“……!”
백유화의 지적은 타당하다. 적어도 천일영은 그 말에 깊이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현경에 도달한 무인을 배출한 가문이 어디지요?”
“남궁…… 세가.”
무엇인가가 천일영의 가슴에 쿵 하고 떨어졌다.
과거와 현재의 남궁세가를 이어 주는 현경의 연결 고리가 이유 없이 끊어질 리는 없다는 불안함이 속을 울렁이게 만든다.
‘젠장, 설마 했던 다음의 경지를 생각해야만 할 때인가.’
여러 가지의 단서가 하나씩의 불안감을 품고 다음 경지로 나가라며 천일영의 등을 떠민다.
과거를 생각하면 남궁천이 초절정 고수에서 끝날 리 없을 것이라는 생각.
또한 지천번회에는 현황우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고수들도 많을 터다.
하지만.
‘지금 내 경지는 한계에 도달했다. 마교의 무공은 정파와는 달리 탈마(脫魔)가 경지의 마지막이니. 그러나 정파에는 지고무상(至高無常)의 경지인 생사경(生死境)이 있다.’
꿈같은 소리일지도 모른다.
생사경의 경지에 올랐다는 말은 있지만, 증거도 없고 무림의 역사에 기록된 바도 없다.
기록된 것은 오직 같은 경지에 가까운 현경과 탈마.
그러나 현경에 오른 자가 지천번회의 무공을 알게 된다면 탈마의 경지에 오른 자신은 죽임을 당하게 될 터다.
‘정파의 무공을 수련하여 생사경으로 가야 할 것인가. 탈마의 경지를 더욱 갈고닦아야 하는가. 정파의 무공을 수련한다고 하여도 언제쯤이 되어야 생사경에 들어간단 말인가. 아니, 생사경이라는 뜬구름 같은 경지에 오르기는 할 수 있는 것인가.’
천일영 그 자신도 오랜 시간 검을 부딪쳐 왔기에 정파의 무공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한 번만 보면 베낄 수 있었으니까.
또한 정파의 내공심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딱히 무공을 익히는 데 지장조차 없다.
하지만 그 내공의 결과 질이 다르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래서는 차라리 내가 지천번회의 무공을 배우는 게 빠를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천일영의 고개는 이내 가로저어졌다.
지천번회의 무공은 극살태마신공의 부작용보다 더 지독한 것은 물론이고, 또한 사람의 몸을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방식이야말로 사도의 길을 걷는 자조차 고개를 저을 정도이니.
사람의 내공을 빨아들이고 죽이는 방식을 따를 생각은 추호도 없음이다.
‘큰 전쟁이 없는 평화가 지속될 때, 그때가 가장 위험할 때라는 것이 맞는 말이로군.’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이 지금까지의 무림을 부수고 중원을 해체한다.
천일영과 백유화는 불어닥치는 바람을 피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때.
타다다다다다다다! 쿠우우웅.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서라! 이 망할 놈들아!”
“드디어 나타났나, 요소령. 때가 되었다고 생각은 했다만.”
“죽어! 죽으라고! 이 망할 놈아!”
휘이이익.
이제는 문답무용이라는 식으로 요소령의 거친 수공이 천일영에게 날아든다.
하지만 천일영은 조금의 손속도 두지 않은 채 수공을 피하며 요소령의 뒷덜미를 잡았다.
“엉?”
“아무래도 하늘을 나는 데 재미를 붙인 모양이구나.”
“자…… 잠깐!”
부우우우우우웅. 휘이이이잉.
“꺄아아아악!”
천일영은 하늘로 날아가는 요소령을 보며 잠시 자신의 손을 바라보다 이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화가 나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너무 많이 힘을 줬나 보다. 백 리쯤 날아가겠군.”
“괜찮습니다. 저 여자는 기감보다는 냄새로 찾아오니까요. 괜히 미친개라고 하겠습니까.”
“그럼 다음에도 백 리쯤 날려도 되려나. 슬슬 귀찮구나.”
천일영과 백유화는 불안한 마음이지만 항주를 향했다.
꼬옥.
서로 말하지 않았는데도 둘은 손을 꼭 잡았다.
피 값을 짊어지기로 한 마음을 확인하는 손길.
이 손길이 있는 한, 지천번회가 거대한 힘으로 휘몰아친다 해도 서로가 등을 맞대고 목숨을 맡긴 채 정면으로 마주할 것이었다.
* * *
“거기 안 서?”
“잘 가라.”
“꺄아아아악.”
이미 똑같은 짓이 반복되기를 십수 번.
그러나 요소령은 과거에 그래 왔듯이 상대에게 이길 때까지 끊임없이 덤비고 또 덤볐다.
그것이 바로 요소령을 장강수로채의 주인이 되도록 만든 것이기에, 그녀는 이번에도 이길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한 채 질리지도 않고 계속 천일영을 찾아왔다.
따지고 보면 이제는 왜 이기려 했는지조차 기억도 안 나겠지만.
“드디어 항주구나.”
“경공으로 오기는 했지만 오래 걸렸습니다. 그래도 제법 재미있었네요.”
단둘이 있는 시간이 이제는 끝난다는 생각에 조금은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백유화는 이내 개운한 표정을 지으며 항주의 시내로 들어섰다.
“쳇.”
하지만 기분 좋았던 백유화의 얼굴은 눈앞에 나타난 신형으로 이내 일그러졌다.
“공자님, 오시는 것을 알고 배웅을 나왔습니다.”
“유의선인가. 언제 올지도 모를 나를 계속 기다렸다는 것은 급한 볼일이 있다는 말이겠군.”
천일영의 말에 유의선의 관자놀이를 가로질러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그때.
“이 망할 놈아! 거기 서라! 아니…… 벌써 서 있네?”
“왔나, 요소령.”
천일영이 사악한 표정을 짓자, 요소령은 급히 자신의 뒷덜미를 손으로 가렸다.
“또 날리려고!”
얼마나 뒷덜미를 많이 잡혔는지, 지금은 하늘로 날아오를 때 양손을 펼치고 바람을 타는 경지에까지 이르러 새와 같은 기분조차도 느끼고 있었다.
“이…… 이놈! 던지지 말고 수공으로 결판을 내자.”
“그러지.”
스으으윽.
천일영의 기운이 음기로 가득 차는 순간.
파바바밧.
요소령이 때를 노렸다는 듯 뱀처럼 손을 휘며 천일영의 팔을 감아 온다.
그 실력이 무림 수공의 일인자 명천마왕 소초련 다음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
그러나 요소령은 몰랐을 것이었다.
천일영이 스승인 소초련의 실력을 뛰어넘은 지 제법 오래되었다는 것을.
파바바바박! 파바바밧!
피가 튀기고 살이 찢어질 것으로 생각했던 요소령은 당황스러움에 눈을 끔벅거렸다.
손과 손이 마주치는 수공의 결착을 보려 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법으로 혈도를 무려 수십 군데나 짚여 몸이 마비된 것인가.
“네…… 네놈!”
“그동안 잘 따라와 줬다, 요소령.”
“뭐라고? 잘 따라와? 그렇다면!”
머리 위로는 마비가 오지 않았기에 말을 하면서도 요소령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요소령이 몰랐던 것은 천일영의 수공이 천하제일이라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천일영의 신위라면 하루 만에 항주에 도착하고도 남았어야 했거늘.
천천히 걸어서 항주로 온 것은 자신을 유인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차린 것이었다.
사실은 천일영이 천천히 항주로 돌아온 것은 이유가 있었는데, 지나치게 빠르게 항주에 도착하면 유의선을 비롯하여 그의 윗선에 있는 사람들이 무공의 경지를 눈치챌 것 같아 일부러 천천히 온 것이 온 것.
“망할 놈아! 네놈, 처음부터 이러려고 했던 것이냐.”
“처음부터 하늘로 날린 것은 천량도사와 도철용을 처리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너를 잡으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하의 요소령도 눈치가 이렇게 없어서야. 중간부터 감숙성이 있는 방향이 아니라 항주가 있는 절강성 방향으로 던졌는데도 눈치를 못 채더구나. 덕분에 수월하게 왔다.”
“이 개자식아! 이거 안 푸냐! 이 요소령이 겨우 감옥에서 썩을 것 같으냐!”
“어차피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인데 입 다물지 않으면 단전부터 부순다.”
“헙.”
재빨리 입을 다문 요소령을 유의선에게 던져 주며 천일영은 의도된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선물이다. 장강수로채의 채주다.”
“이…… 이것이 어찌 된 일인지!”
“황실의 뜻대로 녹림의 채주 현황우를 죽이고 산적들을 도륙했다. 또한 녹림을 무너트리는 김에 수적도 한 번에 처리하려고 했다. 이것은 일단 빚으로 달아 두지.”
“가…… 감사합니다.”
유의선의 얼굴에 낭패의 빛이 스며들었다. 국송연이 현황우를 부추겨 요소령을 유인했고,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요소령은 현황우의 손에 죽어야만 했다.
‘큰일이다. 녹림을 삼키는 것도 실패. 요소령은 빚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제일 큰 문제는…….’
유의선의 목울대로 침이 넘어가는 순간.
“태자태사가 유배 가는 날이 언제인가.”
“그것이…….”
“대답 못 할 이유가 있다면 듣지 않겠다.”
꽈악.
자신도 모르게 눈이 감긴다.
유의선은 식은땀을 흘리며 겨우 입을 뗐다.
“죽었습니다. 태자태사는…….”
“호오? 약속과는 다른 대답이구나.”
“황실에서 문제를 인지하고, 약탈과 살인을 일삼는 금군을 불러들인 날이었습니다. 밤사이에 태자태사는 사지가 잘려 암살을 당했습니다. 누군가가 사건을 급히 덮으려 한 것 같습니다.”
“내가 원하는 답변이 아니군.”
덥석! 뚜두두둑.
천일영이 혈광을 터트리며 유의선의 목줄을 잡아챘다.
이내 목에서 울리는 뼈가 비틀리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진다.
“그놈의 목은 내가 받는다고 한 것이 약속의 내용이었다.”
“커억! 고…… 공자!”
“다시 말하지. 태자태사를 내놔라.”
“이…… 이미 죽은 자를…… 어찌…… 크허허헉! 다만 다른 것이라면 말씀을 드릴 것…… 이 있습니다.”
툭. 털썩.
거친 손길에 의해 유의선의 신형이 땅바닥에 패대기쳐졌다.
하지만 아픈 것도 잊고 고개를 쳐든 유의선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가기 시작했다.
공자의 얼굴이 마치 저승사자와 같다.
“콜록, 콜록. 고…… 공자, 내일 황실의 높으신 분이 별유천지로 찾아가실 것입니다. 그분이 이 일에 대한 보상과 사죄를 하신다고 합니다.”
“그다지 필요 없는 것이구나. 황실 따위는 됐다고 전에 말하지 않았더냐. 그보다 이 일에 버금갈 만큼의 다른 것을 내놓지 못하면 죽을 것이다.”
“무림맹! 무림맹의 무인들 삼백이 태자태사가 죽은 다음 날 움직였습니다. 이것은 무림맹이 태자태사와 관련이 있다는 증거! 이것으로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앞으로도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모두 드릴 것이니!”
“무림맹의 무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까지 알려 주면 일단 이번에 한해서는 눈감아 주지.”
“아직 정확한 것은 모르나 보름 전에 길을 떠난 이후 방향을 가늠해 보건대 청해성이 아닐까 합니다.”
“요소령을 데리고 가라. 혈도는 삼사일 내에 풀릴 것이다.”
“공자! 내일 황실의 분을 만나시고 나머지 이야기를 꼭 들어 주십시오.”
천일영은 대답을 남기지 않고 백유화의 손을 거칠게 잡아 별유천지로 향했다.
잠시 후.
“유의선에게 강선은 연결했느냐.”
“예. 분명 유의선을 죽일 만큼 큰 벌을 내릴 상황이었는데도 선뜻 풀어 주시기에, 속뜻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강선을 연결했습니다.”
“잘했다. 이것으로 유의선이 하는 말은 전부 들을 수 있겠구나.”
“맡겨만 주세요. 바람피울 때 나는 소리까지 전부 들을 수 있으니까요. 꺄하하학.”
천일영은 피식 웃으며 백유화와 별유천지의 문을 열었다.
다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
한 달이나 자리를 비웠음에 반가움은 배가 되어 천일영의 얼굴에 웃음을 짓게 했다.
그때 건청과 월영이 천일영을 알아보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다들 잘 있었느냐.”
“그럼요. 서하린 소저도 회복했고, 다들 아무 일 없었습니다.”
“그래, 그런데 채홍이가 안 보이는구나. 언제나 제일 먼저 알아보고 나오는 녀석인데.”
“네? 채홍이요?”
순간 건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천일영은 그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다급히 입을 열었다.
“왜 그러느냐.”
“아니……. 채홍이는 공자님이 감숙성으로 오라고 하였다 해서 떠난 지 오래입니다만.”
“내가 채홍이에게 감숙성으로 오라고 편지를 보냈다고?”
“서하린 소저의 치료법과 저에게 산적들의 훈련을 시키라는 말씀을 보내셨을 때 채홍이에게도 편지를 보내셨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채홍이에게 오라고 쓰여 있었다던데…….”
“아니, 그저 안부를 묻는 편지였을 뿐이다.”
순간.
객잔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굳어지며 정적이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