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다급한 금채홍의 모습에 천량도사와 도철용이 깜짝 놀란 표정을 하였다.
‘이 젊은 나이에 절정 고수? 게다가 기운을 숨기는 데 익숙할 정도의 실력이라니!’
아미파에서 이 정도의 무인이 활동했다면 모를 리가 없을 터.
천량도사와 도철용은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고수와 함께하는 것에 이견은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리하마.”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그 순간.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의 금채홍이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 바닥으로 쓰러졌다.
털썩.
“아가야! 이게 어찌 된 일인고!”
“천량도사님. 처음 봤을 때부터 몸이 나빠 보였는데, 아무래도 정신을 잃을 지경까지 이 소저가 버텼었나 봅니다.”
“어허, 어찌 이 어린 사람이 정신을 잃을 때까지 몸을 혹사했단 말인가.”
천량도사는 급히 금채홍을 안아 들고 객잔에 방을 빌렸고, 도철용은 급히 뛰어나가 의원이 있는 곳을 찾아 경공술로 신형을 날렸다.
* * *
쿠르르릉.
쏴아아아아.
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지는 소리에 금채홍이 눈을 떴다.
아니, 그보다는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 위에 물에 적신 천을 올려 주는 손길에 잠에서 깼다.
따뜻한 손.
환자를 대하는 조심스러운 행동.
금채홍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며 고열로 갈라진 입술을 벌렸다.
“공자님?”
하지만 대답 없이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는 손길.
금채홍은 그 다정한 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 손은 공자님의 손처럼 매끈하지 않고 투박하며, 거칠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따뜻하네. 아미파에 있을 때 스승님의 손 같아.’
설마 그럴 리는 없지만, 비몽사몽간에 판단이 서지 않는 금채홍이 눈에 힘을 주어 눈앞의 신형을 바라보자 이내 초점이 맞으며 그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량도사님?”
“내가 깨운 것인가. 조금 더 자도록 하여라.”
“제가 어찌 된 것이죠? 왜 여기에 누워 있는 것인가요?”
“아가는 아까 고열로 쓰러졌니라.”
“아!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빨리 떠나야 해요.”
“안 된다.”
금채홍이 급히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천량도사가 힘으로 어깨를 눌러 다시 눕게 만든다.
“아가의 모습으로 보건대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씻을 시간도 없을 정도로 급히 움직인 것 같더구나. 먹을 것도 제대로 안 먹고 잠도 거의 자지 않은 것 아니냐. 그 반동으로 몸이 많이 상해서 아픈 것이니 지금은 누워 있어야 한다.”
“시간이…… 없어요. 제가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요.”
금채홍은 팔을 들어 눈을 가리며 울먹였다.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힘.
그동안 무림 최고수들과 함께 있으면서 자만해졌을지도 모른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고, 친구의 목숨을 살리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 자신했는지도 모른다.
금채홍의 목이 잠기며 끓는 소리를 냈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후회할지도 몰라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어요. 그것을 위해서 저를 보살펴 주신 분에게 말도 하지 않고 나와 상처를 드렸는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제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움직여야 해요. 안 그러면 저는 저를 용서할 수 없을 거예요.”
금채홍이 다시 한번 억지로 몸을 움직이자 천량도사가 인자한 표정으로 금채홍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가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번 이야기를 해 보지 않으련. 내 비록 노인이기는 하다만 도움을 줄 정도의 힘은 있단다. 그러니 울지만 말고 이 노인에게 너의 이야기를 해 다오.”
“하지만 오늘 처음 뵌 분에게 어찌 그런…….”
“네가 우리에게 준 물값이라 생각하면 되지 않겠느냐.”
자신의 손 위에 포개지는 천량도사의 손길에 금채홍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타지에서 만난 이 자상함이란.
금채홍은 커다랗게 큰 숨을 한번 들이켜고는 눈물을 털어 냈다.
그리고 마음을 굳게 다진 후, 이내 자신이 항주에서 이곳까지 오게 된 연유를 설명했다.
금군의 이야기, 그들이 저지른 만행, 그들과 엮인 무림인들, 그리고 친구가 청해성에서 영기의 땅을 돌보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하지만 공자님에 관한 이야기나 백유화, 서하린의 이야기는 빼었다.
‘분명 사천성에서 사귀진 님이랑 사천당문을 칠 때 천량도사님은 아녀자로 분장하고 천에 싸여 있던 나를 구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셨었지. 이런 분이라면 믿어도 괜찮을 거야.’
금채홍의 이야기가 끝이 나자 천량도사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큰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금군의 이야기를 듣고는 큰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천량도사보다 더욱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도철용이 그러했다.
‘하오문이나 개방, 혹은 정보에 빠른 사람들만 알고 있는 마을의 몰살 사건이 바로 금군의 짓이었다니. 그것이 새로운 녹림의 채주 현황우의 짓이라 생각하여 천량도사님과 찾아간 것인데, 잘못 짚은 것이란 말인가!’
순간 천량도사와 도철용의 눈길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천량도사는 도철용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금채홍에게 말을 꺼내었다.
“아가야, 나와 개방의 방주 도철용이 너를 도울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자거라. 밖에는 비가 오고 있느니라.”
“하지만!”
타다다닷.
순간 천량도사의 손길이 금채홍의 혈도를 짚었다.
금채홍은 그대로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는 아이를 만나다니, 우리가 이제야 운이 트인 것 같네.”
“정말로 충격입니다. 금군이 엮이다니요.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모를 정도로 숨겼다니 어찌 이런 일이.”
“아이가 전부 다 말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이야기를 듣다 보니 금군과 엮인 무림인들이 무림맹과 관련이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금군과 이어질 수 있는 것은 하나의 문파가 아니라 무림맹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을.”
“이미 남궁천의 이상한 행동은 눈치를 채지 않았습니까. 그 때문에 천량도사님과 제가 무림맹과는 별개로 움직이는 것이고요.”
“내일 이 아이와 영기의 땅이라는 것을 찾는 것이 좋겠네. 지금 무림의 삼대 세력이 영약 때문에 손을 대지 않은 곳이 청해성뿐이니, 영약에 눈이 뒤집힌 사람들이라면 분명히 이 아가의 친구를 노리겠지.”
“아이의 친구도 구하고, 사혈련도 골탕 먹이고. 잘하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겠습니다.”
천량도사와 도철용은 금채홍의 끓는 이마에 차가운 물에 담근 천을 바꿔 주며 비가 쏟아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비.
불길하리만치 퍼붓는 빗줄기가 이번 일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라며 천량도사와 도철용은 내리치는 번개를 바라보았다.
* * *
다음 날.
타다다다닷.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천량도사와 도철용, 그리고 금채홍은 곤륜산맥 자락을 헤집으며 경공으로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다만 금채홍은 여전히 몸이 아픈 상태인지라 천량도사의 등에 업혀 있었다.
몸이 젖지 않도록 천으로 두르고 천량도사의 등 뒤에서 눈만 내놓고 있는 금채홍은, 온 힘을 기울여 영기를 느끼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보통의 기운을 느끼는 것과 같이 생각하면 안 될 거야. 영기라는 것은 원래 신령한 기운. 이것을 느끼려면…….’
금채홍은 하나씩 기감으로 느껴지는 여러 가지 기운 중에서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들을 지워 나갔다.
처음에는 미세하게 느껴지는 작은 생물들의 기운.
두 번째는 크고 작은 동물들의 기운.
세 번째는 날아다니는 새의 기운.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의 기운.
이 모든 것을 지운 금채홍의 기감은 텅 비어 갔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의 하늘과도 같은 맑음만 남아 있는 기감은, 순간 어둠처럼 변했다가 이내 청명한 기운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금채홍은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수백 가지의 기운이 자신을 덮쳐 오는 것에 몸을 떨었다.
‘세상에! 영기란 게 이렇게나 다양한 것이었나.’
순간 금채홍은 떨어지는 폭포에서 느껴지는 청명함과 하늘 아래 떨어지는 비가 영기를 품고 더러운 기운을 씻어 내는 것을 느끼며 내심 감탄을 토했다. 평소 일상의 평범한 것으로 느꼈던 것들조차 작으나마 영기가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강한 영기가 흐르고 있을 영기의 땅을 구별해 낼 수 있을 거야. 제발 무사해 줘, 목화야.’
보통의 사람이라면 절대 느끼지 못할 영기를 전부 하나씩 구별해 낼 수 있게 된 금채홍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그때 몸을 떠는 금채홍이 걱정된 천량도사가 말을 걸어왔다.
“아가야, 몸은 괜찮은고? 영기를 찾는다고 하니 일단 도와는 준다만, 정말로 그것을 느낄 수는 있는 것이냐?”
“괜찮을 것 같아요. 이미 영기를 느끼고 있는걸요.”
“뭐라? 그것이 정말이냐.”
“네, 천량도사님. 요 앞에 폭포에서 상당한 영기가 느껴져요. 거기에서 잠시 쉬도록 해요.”
“알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움직였던 천량도사와 도철용은 금채홍의 제안에 기꺼이 폭포가 있는 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 * *
쏴아아아아아!
거대한 곤륜산맥에 어울릴 만큼이나 커다란 크기의 폭포에 천량도사와 도철용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야말로 장관.
천량도사의 등에서 내려온 금채홍은 뒤집어쓰고 있던 천을 벗어 버리고 폭포로 다가갔다.
비가 쏟아지며 수량이 엄청나게 늘었지만, 그곳에서 피어오르는 영기의 기운이 부르는 것만 같았기에 금채홍은 물이 튀어 오르는 곳에 섰다.
순간.
천량도사와 도철용은 금채홍이 폭포 가까이에 다가가는 것을 보고는 말리려 했으나, 물줄기가 떨어지며 굉음을 울리는 한가운데에서 뭔가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이…… 이보게! 저게 무엇인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천량도사님,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까?”
금채홍이 폭포 아래에 다가가자 아지랑이같이 피어오르던 것이 이내 하나의 빛 덩어리처럼 변하며, 하나씩 망울망울 피어올라 몸을 감싸기 시작한다.
스으으윽.
“이것이 영기인가.”
금채홍이 손을 들어 만져 보려고 하자, 영기의 덩어리들은 이리저리 피하며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그사이, 영기의 덩어리들이 더욱 늘어나 이내 수십 개 정도가 되었다.
그중 몇 개가 금채홍의 그늘진 눈 밑을 스쳐 지나가고, 또한 몇몇 개가 부어오른 다리를 쓰다듬듯 어루만졌다.
“뭘 하고 싶은 거니?”
금채홍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자, 영기의 무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가 다시 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햇살을 닮은 노란색의 빛 몽우리들은 곁에서 둥실둥실 떠다니다가 이내 스며들 듯 금채홍의 몸 안으로 사라져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천량도사와 도철용이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기겁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직접 일을 겪은 금채홍조차 크게 놀라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다.
“아가야! 괜찮은 것이냐!”
“네? 괘…… 괜찮은 것 같아요.”
“방금 그것이 무엇이냐.”
“영기예요. 저도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영기를 느끼게 된 이후 제 몸의 뭔가가 변한 것도 같아요.”
금채홍은 자신의 손을 들어 바라보았다.
지나칠 정도로 몸이 안 좋아져 피부가 거칠고 거뭇하게 변했었는데, 어느새 평소처럼 하얀색으로 돌아와 있다.
“아팠던 몸이 전부 나았어?!”
가벼워진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던 금채홍은 놀란 눈으로 폭포를 바라보았다.
다시 영기가 형상화되어 떠다니지는 않았지만, 마치 부르면 다시 영기가 도와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항상 곁에 영기가 머무는 듯한 느낌이었다.
“고마워.”
금채홍은 실눈이 되도록 폭포에 웃음을 짓고는 몸을 돌려 천량도사와 도철용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아가야, 놀라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구나.”
금채홍의 손을 덥석 붙잡은 천량도사의 눈에 걱정이 한가득하다.
“걱정해 주셨나요. 감사합니다.”
금채홍은 영기가 몸에 들어와 아픈 것을 낫게 해 준 것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아무래도 영기를 느낄 수 있는 범위가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어. 그리고 더 강하게 느껴지고.’
금채홍은 영기가 마치 친구를 빨리 찾으라고 기운을 넣어 준 것만 같았다.
“천량도사님, 방주님. 제 친구가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아요.”
“그게 정말이냐?”
“네, 영기가 강하게 느껴지는 곳이 있어요.”
“허허, 이것 참. 아가의 정체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구나.”
“저도 지금은 저에 대해 잘 모르는걸요.”
방긋 웃음을 짓는 금채홍의 얼굴을 살펴본 천량도사와 도철용이 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업어 주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사실은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하하핫, 그럼 빨리 떠나자. 친구가 무사한지 알아봐야지.”
“네.”
천량도사와 도철용, 그리고 금채홍은 영기가 알려 주는 대로 신형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