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금채홍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스며들었다.
두두두두두두.
거대한 말이 지축을 울리는 소리.
하지만 절망이 어디 금채홍에게만 찾아왔겠는가.
꿀꺽.
손대법의 목이 크게 일렁이며 침이 한 움큼 넘어갔다.
자신들도 안전하게 일을 끝내기 위하여 본대와 거리를 크게 두지 않았다.
그것이 마음을 방심하게 만들어 오히려 화를 불렀다.
말을 탄 무인이라니.
기마대라니.
말 위에 올라탄 무인은 당연하지만 땅 위에 서 있는 무인보다 훨씬 강한 힘을 낼 수 있다.
그것이 창을 든 무인이라면 얼추 세 배 정도는 유리한 싸움을 펼칠 수 있기에.
손대법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미친 듯한 고함을 질렀다.
“방어의 진을 펼쳐라! 최우선이다.”
“네!”
타다다다닷!
삼백 정도의 사혈련 무인들은 급히 무림맹 무인들과의 싸움에서 떨어져 새로운 진을 구성했다.
그 과정에서 무림맹의 무인들이 끈질기게 달라붙어 십수 명의 사혈련 무인의 목을 잘라 냈지만, 그보다는 이곳에서 몰살당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기에 진형을 만드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르르르!
척!
무인들은 병장기를 들고 눈을 빛냈다.
그리고.
사혈련 무인들이 무림맹의 무인들과 떨어져 새로운 진형을 만들자마자, 천량도사와 도철용은 미련 없이 고개를 돌리고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돌아가거라.”
“천량도사님,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림맹의 기마대가 코앞까지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라니요.”
“순진한 녀석들. 너희들은 불과 며칠 전의 나하고 같구나. 너희들은 버림받았다. 그것을 아직 눈치채지 못했단 말이냐.”
“그것이 무슨 말씀…….”
모두가 서로를 바라보며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중 몇몇은 천량도사의 말에 뭔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을 하기도 했다.
그중 한 명이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축출입니까.”
“그렇다. 너희들은 무림맹에서도 그 위상이 높은 사람들. 중원의 약자를 위해 검을 휘두른 자들이다. 너희의 얼굴을 내가 알건대 진정으로 협과 도리를 위해 살아온 사람들이구나.”
“그렇다면 천량도사님, 저희는 협과 도리를 지켰기 때문에 버림을 받은 것입니까.”
“…….”
천량도사는 무인의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임만을 거듭하다, 이내 결국은 굳게 입술을 다문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마땅히 천량도사가 해야 했을 대답은 끝내 도철용의 입으로 매듭이 지어졌다.
“무림맹의 본대가 오기 전에 도망가라. 저들과 부딪히지 않고 무림맹으로 돌아가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예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갈 수 있겠지. 뭐 나중에 이런 일에 또 휘말리기는 할 테지만 그땐 그때고.”
“후우…….”
우격다짐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증거 또한 없는지라 먹히지 않을 것 같았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천량도사와 도철용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무림맹의 무인들은 그렇지 않다는 듯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어쩐지. 특히나 뜻이 잘 맞아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이번 일에 모두 투입이 되었다 했더니.”
“알고 보니 불합리한 일이거나 옳고 그름이 불분명한 일에 대해서는 하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뜻을 전하던 사람들이 여기 몰린 것이었군.”
“말을 듣지 않는 개들의 모임이라는 것인가. 하하핫.”
“주인을 물어뜯는 개겠지.”
자조 섞인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몸을 일으키고 천량도사와 도철용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살려 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그저 너희들이 죽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 빨리 도망가거라.”
고개를 들고 자신을 바라보는 무인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자, 도망가야 할 발소리 대신 느닷없이 검이 뽑히는 소리가 천량도사와 도철용의 귓가를 때리듯 울린다.
의아한 천량도사가 답답한 마음에 다급한 목소리를 터트렸다.
“빨리 안 가고 뭐 하느냐.”
“도망이라뇨. 두 분을 두고 어찌 가겠습니다. 또한 목숨을 살려 주셨으니 평생 따르겠습니다.”
“뭐라?”
무인들의 불같은 눈빛이 맹렬하게 타오른다.
진정 원래대로라면 무림맹에 넘쳐야 했을 눈빛.
도철용은 한숨을 내리쉬었다.
“살려 준다는데도 죽겠다는구먼. 이 망할 놈의 똥 멍청이 새끼들.”
“뭐 어차피 저희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놈들입니다. 똥 멍청이니까요.”
“퍽이나 자랑이다. 아니, 자랑해야 할 만하구나.”
서로가 신뢰를 보이고 믿음으로 마무리되는 훈훈함이 사방으로 퍼진다.
그때.
“저기 죄송한데 이제 말씀 끝난 거 맞죠? 기다리느라 지쳤어요. 잠시 잊으신 것 같은데 지금 무림맹에서 저희를 전부 죽이려고 말을 타고 온다고요?”
“응?”
천량도사와 도철용이 고개를 돌리자 금채홍이 조금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비릿한 표정을 띠고 고개를 돌린 채 냉랭한 목소리를 사혈련의 무인들이 있는 쪽으로 내보냈다.
“거기, 오십 대 중반의 깔끔한 체하는 옷을 입은 아저씨.”
“엉? 나?”
손가락으로 정확하게 짚어 금채홍이 가리키자 손대법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지금 손가락질을 하는 것이냐?”
“알 게 뭐예요. 그냥 가장 높은 사람 같으니까 부른 거지. 그보다는 일단 잠시 휴전하는 게 어때요?”
“휴전? 그따위 걸 할 리가!”
손대법은 무슨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하는 금채홍에게 실소 같은 웃음을 지었다.
많이 나오기는 했다.
시중에 유행하는 무림 이야기를 보면 살기 위해 적과 손을 쉽사리 잡는 내용이 종종 나온다.
그리고 마무리도 훈훈하게 이뤄지더라.
적인데.
하지만 그게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 현실이 어찌 그러할까.
손대법은 그동안 제법 많은 소설을 읽다 집어 던진 전력이 있기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회만 닿으면 바로 네년의 목부터 날릴 것이다.”
“하실 수 있다면.”
금채홍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비웃음을 지었다.
“쯧, 마지막으로 살 기회를 드린 것인데.”
“쯧? 혀를 차? 이년이 진짜 미쳤구나!”
너무도 당당한 미친년의 반응에 손대법은 자신이 혹 잘못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상황을 정리했다.
불리해도 적과 손을 잡는 것은 뒤로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손대법은 앞서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기마대가 온다고 하지만 그 뒤를 사혈련의 본대가 치고 들어오면 상황을 역전시킬 기회는 무수히 생길 것이다.
즉 자신이 지금 해야 할 일은 기마대의 첫 공격을 막기만 하면 되는 것.
‘그렇지, 첫 번째 공격만 막으면…….’
순간 손대법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저 미친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설마! 잠깐…….”
손대법의 입이 채 떨어지기도 전.
금채홍의 눈짓에 천량도사와 도철용의 입에서 내공을 가득 실은 거대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평야 앞으로 삼형방어진(三形防禦陣)을 만들어라!”
“네!”
무림맹의 이백오십 무인들이 석 줄로 길게 늘어서 영약 밭 아래 평야가 시작하는 지점에 서자, 손대법은 식은땀을 흘렸다.
처음부터 지형을 고려해야 했거늘.
‘저년이 우리를 기마대의 첫 번째 희생양으로 만들 생각이었구나.’
지축을 울리며 말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고 난 이후, 반 각도 되지 않아 그들이 도착하리라는 것은 처음부터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것을 알고도 일부러 천량도사와 도철용이 무림맹의 무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준 것이고, 그래도 시간이 조금 남자 자신을 건들며 협력하자는 개소리를 씨부렁거린 것이었다.
처음부터 무림 삼대 군사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망했다.’
평야 위로 올라가는 길을 삼형방어진으로 막아 버리면!
당연하게도 협곡이 끝나 넓은 지형이 나오는 곳의 양면은 벼랑이라서 발끝 하나 내릴 수 없고, 그 어디로든 퇴로가 없어 정면으로 기마대를 마주해야 한다.
‘유일한 퇴로가 바로 영약 밭이 있는 방향인데 그곳을 막아 버리면!’
두두두두두두두두.
“이런 젠장, 무림맹 놈들이 벌써 온 것인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진형으로는 저들의 첫 번째 공격을 막을지 미지수다.
휘몰아치는 엄청난 말의 힘이 더해진 날카로운 창에, 피를 얼마나 묻히게 될지를 생각한 손대법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창을 앞으로!”
창은 창으로 상대한다.
“검을 든 무인은 양옆으로 퍼져 이자진형을 펼쳐라.”
지나치는 말은 검으로 다리를 베어 낸다.
하지만 이것도 말이 몇 마리쯤이나 있을 때의 이야기.
두두두두두두두.
다가오는 말을 보며 손대법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훔쳐 냈다.
“밀리지 말고 자리를 사수하라!”
“네!”
콰앙!
무림맹의 무인들이 창을 앞세워, 창을 들고 있는 사혈련의 무인들부터 쳐 내고 말발굽으로 깔아뭉개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커헉!”
사방으로 사혈련 무인들이 날아갔다.
그 수가 단 한 번의 공격에 불과한데 일백에 달하는 무인이 날아가는 것을 보자 손대법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무림맹의 기마대는 산악 지형에 맞춰 두 개로 조를 나누어 공격하니 이제 겨우 첫 번째 공격이 지났을 뿐이었다.
“두 번째가 온다! 창을 더 길게 빼라!”
“네!”
하지만 무슨 소용일까.
두두두두두.
콰아아아앙!
또 한 번의 공격이 이어지자 애써 길게 빼낸 창도 소용없이 무인 백이 또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이토록 기마는 강하다.
“빌어먹을…….”
말의 발치에 치이고 밟히는 무인들의 입에서 피가 토해지고, 비명이 산자락 하나를 가득 메우는 모습에 손대법은 허탈한 심경을 가누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들을 지나친 말들이 어찌 영약 밭 앞의 평야를 지키는 무림맹의 무인들도 그냥 지나치랴.
그들은 분명 저 미친년 일당도 처참하게 도륙할 터.
그것이 손대법에게 남은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망할 년, 저따위 방어진으로 말을 어떻게 막겠느냐.’
두두두두.
첫 번째로 자신들을 공격했던 기마대가 삼형방어진으로 다가갔다.
이제 그대로 창으로 무인들을 찌르고 깔아뭉갤 것을 생각했는데.
그 순간.
“길을 터라!”
“네!”
천량도사의 말에 방어진의 가운데가 열리며 기마대를 그대로 통과시킨다.
손대법은 지금 눈앞에서 보이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여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냥 지나가네…….”
하지만 그때.
콰악! 히이이잉! 털썩!
달리던 말들이 차례로 순식간에 넘어가기 시작했다.
뭔가에 걸려 쓰러지는 듯했다.
기마대로 자신들이 그리 쉽게 통과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다급한 마음에 말을 급히 돌리자 함정에 걸릴 확률이 더 높아지며 그 피해는 커져만 갔다.
말들이 일제히 쓰러지는 것을 본 천량도사는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나머지는 자리를 지키고, 길을 연 무인들만 평야로 들어가서 적을 처리하라!”
“알겠습니다.”
말을 통과시킨 무인 일백이 검을 들고 일제히 평야로 뛰어들었다.
그 선봉에 선 사람은 바로 천량도사와 도철용.
그 모습이 전광석화다.
미리 언질이 있었고, 생각해 두었던 작전이었기에 가능한 속도였다.
촤아아아악! 채챙. 채챙. 채챙. 촤아아악!
“크악!”
“으헉!”
말이 쓰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져 충격을 받은 무인들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쏟아지는 검날을 무방비하게 온몸으로 받아 냈다.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모조리 쓸어 버리겠다는 작전이었다.
‘저 아가가 생각한 것이 여기까지 통하다니.’
천량도사는 적을 도륙하면서도 금채홍의 기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딱 발목까지만 빠지는 함정.
그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말들에게도 유효하게 통했다.
말발굽은 튀어나온 뾰족한 나무를 꺾어 눌렀지만, 좁은 함정은 대신 발목이 걸려 말의 균형을 잃게 했다.
게다가 함정의 수가 수천에 달했기 때문에 평야의 절반을 가기도 전에 첫 조의 말들은 남김없이 전부 바닥에 누웠다.
개중에는 빠른 속도로 내팽개치다시피 했기에 발목이 부러졌고, 일부 말들은 목이 꺾여 죽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함정은 여기까지였다.
“저 평야로 들어가지 말아라!”
“네!”
기마대를 이끄는 사람이 피가 튀길 정도로 고함을 질렀다.
“젠장, 이게 무슨!”
기마대의 대주 문호창.
그는 순식간에 당한 백오십이 넘는 기마대를 보며 이를 갈았다.
게다가 같은 무림맹의 소속인 무인들이 검을 들고 덤비는 것을 보고는 악이 받쳐 온몸이 떨렸다.
‘왜 저놈들이 살아 있는 거야! 제범재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문호창은 말을 돌려 이미 밟고 지나온 사혈련의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일단 사혈련부터 없애고 이곳에 진형을 만든다.”
“네!”
문호창은 앞서서 말을 달리며 얼마 남지 않은 사혈련의 무인을 향해 창을 꺼냈다.
이것으로 창을 든 사혈련의 무인들의 앞 대가리를 도려내면 진형이 무너질 터.
콰아아아앙!
문호창이 거대한 말의 힘으로 사혈련의 마지막 남은 진형을 깨부수고 들어갔다.
촤아아악!
“끄아아악!”
“꺼억!”
“끄합!”
또다시 수십의 비명이 울린다.
그때 문호창의 눈길에 뜻밖의 인물이 보였다.
“손대법! 네놈이 여기에 있을지는 몰랐구나. 네놈을 잡은 공은 금화 정도로만 끝나지 않겠지.”
“눈도 좋네, 망할 놈!”
두두두두두!
문호창을 태운 말이 피 냄새에 미친 듯 거친 숨을 내뱉으며 손대법을 향해 달려 나갔다.
콰앙! 쿠앙!
말에 치이며 날아가는 무인들을 등 뒤로 따라오는 기마대가 도륙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촤아아악!
문호창은 창을 위로 올려 들어 손대법에게 겨눴다.
그대로 머리를 관통시키려 하기 위함이다.
쐐애애액!
문호창의 손을 타고 창이 손대법의 눈앞까지 도달했다.
“죽어라!”
“이런 망할 새끼가!”
그 순간.
촤라라라라라라락!
“끄아아악!”
“아아악!”
기마대의 옆으로 수백 개의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손대법은 자신의 눈앞에서 옆으로 기우는 창을 바라보며 한숨을 터트렸다.
문호창이 탄 말도 옆구리에 수십 개의 화살을 맞고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쿠우우웅.
말에서 떨어진 문호창은 급히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그의 다급한 눈길에 보이는 것 한 가지.
궁수대(弓手隊).
약 일백에 달하는 궁사가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그 말은.
‘제길, 그새 사혈련의 본대보다 궁수대가 먼저 온 것인가!’
원래의 계획이라면 분명 기마로 한꺼번에 뚫고 들어가서 영약 밭까지 도달했어야 했다.
‘그러한데 어째서!’
궁수대를 시작으로 뒤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사혈련의 본대.
그들은 언뜻 보기에도 무인들의 질이 선발대로 온 자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촥. 촥. 촥. 촥.
진형대로 서서히 무림맹의 기마대를 감싸고 들어오는 사혈련의 본진으로, 순간 손대법을 비롯하여 살아남은 무인들이 빠르게 뛰어갔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 모습만 바라보던 문창호의 입이 비틀렸다.
‘이건 포위 상태인가!’
자랑하던 기마대가 무너졌고, 양옆으로 적들이 진형을 갖추고 있다.
‘그럴 리 없지! 그래서도 안 되고!’
다급한 마음이지만, 순차적으로 살아남은 말들을 일으키고 진형을 가다듬기 위해 문호창은 명령을 내리려고 했다.
“……?”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정작 급해야 할 자신의 목소리보다 더 다급한 고함이 사혈련 쪽에서 터진 것이었다.
“병력의 절반을 기점으로 뒤로 돌아라!”
“네!”
급작스럽게 사혈련의 본대 뒤에서 검이 부딪히고 피가 튀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악!”
“어째서 놈들이 뒤에서 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냐!”
“산의 협곡이다 보니!”
“선발대의 지원을 위해 기감을 펼칠 새도 없이 급하게 왔습니다.”
“이런 망할! 총공격이다!”
나무와 산에 울려 비명이 메아리친다.
한편.
금채홍은 그 모습을 평야 위에서 지켜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곤륜파가 결국 내가 피운 흰 연기를 보고 왔구나.”
이 비가 내리는데 그냥 연기가 날 리 있겠는가.
곤륜파는 뭔가 이상함을 직감하고 상당한 수의 무인들을 보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금채홍이 노렸던 것이었기도 하고.
“완전 개판이 됐네요.”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싸움을 지켜보는 금채홍의 모습에, 천량도사와 도철용은 혀를 내두르며 약간이나마 두려운 감정조차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곁에 있는 이백오십의 무림맹 무인들도 똑같이 금채홍을 바라보며 느끼는 서늘한 감정이었다.
모든 것이 이 젊은 소저 한 명의 뜻대로 돌아가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