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상황이 미묘하게 돌아가는 것을 느낀 문호창의 심장이 덜컥였다.
무림맹의 지원으로 나온 이십 명의 무인들이 하나같이 강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빠르게 정리가 될 줄 알았는데.
‘이거, 빨리 도망가야 할 상황이군.’
문호창은 급히 말을 돌려 협곡의 입구로 다가갔다.
“무림맹에 추가 지원을 해야겠소. 기마도 보충하고.”
“지나가시는 것은 안 됩니다.”
“뭐라고? 무림맹에 지원을 요청하러 가는 것인데 가지 말라니?”
“장문인의 명입니다. 아무도 통과시키지 말라고 하십니다.”
“젠장, 내 직접 곤륜의 장문인과 이야기를 해야겠군.”
장문인 청유원을 만나기 위해 말을 돌리는 순간.
문호창은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바로 앞에서 청유원이 이미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문호창은 입을 열려고 했다.
한시가 급한 판국이니.
“못 나가오.”
“……?”
입도 열기 전에 청유원이 못을 박듯 말을 꺼냈다.
“이 일에 대해서 모든 원인이 설명될 때까지는 그 누구도 나가지 못할 것이오.”
“무림맹의 일인데도 말입니까?”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지 마시오. 그른 일은 무림맹의 명이라 할지도 거절할 수 있다고 분명 말했을 텐데.”
더는 말조차 섞지 말라는 듯 청유원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안광을 날카롭게 가다듬으며 문호창을 바라봤다.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는 즉시 죽인다는 듯.
‘젠장, 갇힌 것인가.’
문호창은 곁에 서 있는 부관에게 다급히 말했다.
“전서구. 있는 새를 모두 동원해서 전부 날려라. 쓸 말은 하나다. ‘살려 달라.’ 그것만 써서 보내라.”
“살려 달라는 말만 말입니까? 그 말은 저희가 죽는 것입니까?”
“멍청한 놈, 너는 생각은 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만 해라. 전서구의 절반은 무림맹으로, 나머지는 각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로 보내라.”
“그건 또 무슨…….”
“하아, 한 번만 더 입을 열면 네놈부터 죽인다.”
“알겠습니다!”
망할 새끼, 넌 여기에서 나가도 죽인다.
문호창은 관자놀이를 짚어 지끈거리는 머리를 달랬다.
개싸움판이 정리되고 사혈련과 무림맹의 무인들이 손을 잡았다.
압도적 불리함.
‘오대세가든 구파일방이든 하나만 얻어걸려라. 그게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쿠르르릉.
쏴아아아아.
빗줄기가 더욱 강해진다.
퍼붓는 비를 오롯이 온몸으로 맞고 있는 문호창의 눈에 광기가 서렸다.
‘개싸움이 끝났다면 다시 시작하면 되는 일. 여기에서 죽지 않겠다.’
그의 주먹이 터지도록 쥐어졌다.
* * *
고문을 하던 백유화가 주변에 쓰러진 신형을 그 작은 몸으로 둘러업고 천일영에게 왔다.
“공자님, 부디 이 사람을 살려 주십시오.”
“이 사람은 타진표구나.”
천일영은 어깨를 꿰뚫린 채 정신을 잃은 사람의 얼굴을 알아봤다.
“제가 사혈련에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저를 무시했지만 유일하게 잘 대해 준 사람입니다.”
“타진표가?”
이 무뚝뚝하고 고집스러운 사람이?
의외라는 표정이 얼굴에 번지자 백유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말을 걸어 주고 웃어 주었던 사람입니다. 무시하지 않고 제게 먼저 다가와 주었던 분이라 이대로 보내는 것은 마음이 허락지 않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이야기하지 말아라. 네 부탁을 내가 거절할 리 없지 않으냐.”
손마디가 뚫린 어깨 사이로 진기를 밀어 넣었다.
슈우우욱.
순식간에 상처가 아물었다.
어긋나고 부서진 뼈도 제자리를 찾았다.
“피를 많이 흘려 정신을 차리는 것을 조금 이후다. 고문은 어찌 되었느냐.”
“슬슬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쓸 만한 정보는?”
“없습니다.”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천일영 앞에서 백유화는 남은 이야기를 이어 갔다.
“어렸을 때부터 비천운이라는 살수 단체에 소속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이 무림맹의 소속이라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밖에서 활동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라고 하는군요.”
“무공에 관한 이야기는 어찌 되었느냐.”
“처음 비천운에 소속된 아이는 천 명. 지금 남은 것은 이십. 저들이 전부이고, 나머지는 모두 중간에 죽었다고 합니다. 무공을 배우는 도중에 죽거나, 채기법이 맞지 않아 온몸이 터져 죽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중간에 낙오할 것 같은 아이들의 기운부터 빨아냈다고 합니다.”
“알았다. 나머지도 부탁하마.”
“네.”
천마신교가 무명암살대를 만든 것과 같이 무림맹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지천번회가 오래전부터 남궁천하고 손을 잡은 모양이군.’
백유화의 손끝이 움직일 때마다 비명이 계속 울렸다.
저 손끝에 걸리면 세상 누구라 할지라도 아는 것을 모두 토해 낼 수밖에 없으니까.
비명의 끝에는 얼마만큼의 진실이 담겨 나올까.
‘불편한 진실이겠지.’
천일영은 크게 눈을 뜨고 바라보는 천량도사와 손대법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밤이 되어 온몸을 가려 주는 편안한 어둠이 퍼졌건만.
천량도사와 도철용의 얼굴엔 불편한 기색만이 가득했다.
모든 일을 전부 다 들었기 때문이었다.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눈으로 본 사실이니 달리 할 말이 없군.”
“채기법을 이용한 기괴한 내공의 상승이라니. 그것도 사람이 죽을 때까지 기운을 뽑아낸단 말인가. 내가 먹은 인육이 그 죽은 자들이고.”
공동파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듣고, 그동안 무림에서 벌어진 일을 종합하여 들었다.
“무림맹인가, 모든 일의 원흉은.”
“지천번회라, 개방의 방주인 나조차도 처음 듣는 이름이군.”
해남도와 하오문의 전 문주 세강협의 일까지 들으니, 오래전부터 거대한 단체가 암약해 왔다.
그것도 무림맹을 등에 업고서.
천량도사가 걸레짝이 된 팔을 덜렁거리면서도 한숨을 내쉬었다.
천일영은 그 모습이 마땅치 않아 눈살이 찌푸려졌다.
“팔을 이리 내밀어라.”
“팔을?”
견딜 수 있는 아픔의 한계를 넘었지만, 계속 버티고 있던 천량도사의 팔을 잡아챈 천일영은 진기를 집어넣었다.
“채홍이를 버리지 않고 도와주었다. 그리고 무림맹의 진짜 모습도 보았구나.”
“잠깐! 팔이!”
안에서 터진 내공으로 넝마 같은 팔이 순식간에 아물었다.
천량도사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팔을 이리저리 돌려 봤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아니! 그보다 자네는 대체 누구인가.”
“그저 은퇴한 전 살수일 뿐이다.”
“은퇴한 살수?”
그럴 리가 있나.
살수가 이런 무공을 가질 리가.
그때 도철용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몸을 떨며 손으로 천일영을 가리켰다.
“너…… 너…… 설마!”
“쉿, 비밀이다.”
천일영이 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말을 하자 도철용은 깨끗하게 입을 다물었다.
이제 모든 게 이해가 갔다.
사혈련과 안면이 있고.
백유화를 거뒀다.
곁에는 마교의 고수도 있다.
젊은 외모와 상상을 초월하는 무공을 가진 전 살수.
온 무림을 그 이름 석 자에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사람.
‘천일영이 왜 여기에!’
손에 땀이 배어났다.
몸이 떨렸다.
극마의 경지에 오른 저자라면 지금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도륙하는 데 반 시진도 안 걸릴 터.
그리한다면 천마신교에는 엄청난 이득이 되는 일이다.
그런데 그는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자신이 거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편안한 웃음을 퍼트리고 있었다.
‘왜지? 천마라면 악독인 인간이 아닌가!’
도철용은 유심히 천일영을 살폈다.
그런데 그때 천일영이 무극지검을 들어 올렸다.
‘설마 저놈이 기어이 살육을?’
도철용이 몸을 일으키려 할 때.
“채홍이, 너는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고 몰래 빠져나간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네.”
“내 벌은 이것이다.”
휘이이익!
검이 금채홍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도철용은 그것을 막기 위해 몸을 날렸다.
‘늦었다. 미리 준비하고 있어야 했는데. 저 아이를 이렇게 죽이다니! 역시 악독한 놈이 아닌가!’
그런데.
까앙!
응? 슈악이나 퍼걱. 쓰악이 아니라 까앙?
도철용은 그 자리에 굳은 듯 금채홍을 바라보았다.
“끄아아아아압. 꺄으으으으르르르. 으갸갸갸갸각.”
머리를 쥐고 사방을 굴러다닌다.
‘검으로 벤 것이 아니라 면으로 머리를 때린 것뿐?’
도철용은 허탈하여 눈을 끔뻑였다.
“끼야으으으으. 여태 맞은 것 중에서…… 제일 아……파욧!”
“그것으로 끝일 거 같으냐.”
순간 금채홍의 곁에서 눈을 반짝이고 있던 서하린과 백유화의 신형이 날아올랐다.
콱. 콰각. 콱.
“밟아. 이 나쁜 녀석, 네가 속이고 나가는 바람에 건청은 공자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었어!”
“요 못된 것, 감히 언니들을 속여? 더 밟아요. 내장이 튀어나오도록.”
두 여자가 금채홍의 몸 위에서 널뛰기하듯 뛴다.
그때 백유화의 입에서 울화가 터진다는 듯 거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모두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공자님은 넋이 나갔었고, 천이영 여주인은 종일 울고만 있어. 무슨 일이 있으면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네가 도움을 요청하면 거절할 사람이 그 누구 하나 있냔 말이다!”
“죄송해요. 유화 님…….”
“시끄러워. 더 맞아!”
콱. 콰악. 콰가각.
눈 다섯 번 감을 만큼의 시간 동안 금채홍을 밟던 백유화와 서하린이 뻗어 버린 금채홍의 뒷덜미를 잡고 끌고 가며 천일영을 바라봤다.
“이 녀석, 냄새도 나고 발자국도 많으니 빨아서 올게요.”
“너무 심하게 빨지는 말아라.”
“빨래는 잘하니까 알아서 깨끗하게 만들어 오겠습니다.”
조금 과격하기는 하지만 나름 애정의 표현이다.
천일영이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리는 순간, 달리는 자세와 누군가를 구하려는 듯 팔을 뻗고 그대로 굳어 있는 도철용을 보았다.
“내가 채홍이를 죽인다고 생각이라도 했던 것인가?”
“큼큼, 그런 건 아니고……. 뭔가 굉장히 폭력적이면서도 훈훈한 광경이네?”
“모두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다.”
살인귀 백유화가?
마교의 너구리가?
풋.
설마 그럴 리가.
‘그렇지만 이상하리만치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었지.’
도철용은 인정했다.
천일영이 소문처럼 살인에 미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나름대로 상식이 있고, 거친 성정의 사람은 아니라고.
‘근데 나름대로 상식이 있는 사람이 왜 여기에 있어?’
도철용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상한 의문에 갇혔다.
* * *
풍덩.
물속으로 거칠게 던져진 금채홍이 고개를 내밀자.
휘릭. 휘릭.
백유화와 서하린도 물속으로 뛰어들어 금채홍의 옷을 모두 벗겼다.
그리고 거친 손아귀로 살을 박박 문지르며 때를 벗겨 내기 시작했다.
“아파요! 유화 님.”
“고 주둥이를 다물어라.”
백유화의 손길이 머리의 오래된 때를 벗기고, 이내 가슴에 이르자 더욱 거칠어진다.
“에잇, 짜증 나게 무슨 가슴이 이렇게 커! 나는 절벽인데. 안 그러냐, 하린아.”
“미안, 언니. 그것만은 편을 못 들어 주겠네.”
서하린이 은근히 가슴을 가리며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바라봤다.
서하린의 가슴이 금채홍보다 더 컸으니까.
백유화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래, 나만 절벽이다. 이 못된 년들아!”
벅벅.
박박.
빡빡.
시간이 지날수록 더 거칠어지는 손길에 금채홍이 비명을 지르려 할 때.
와락 하고 백유화가 안는 느낌에 금채홍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듯 굳었다.
“다시는 그러지 마. 절대 혼자 짊어지지 마.”
“유화 님…….”
“혼자 오래 있어 봐서 아는데, 그거 할 만한 게 아니야.”
“네, 알았어요.”
“약속이다.”
“약속이에요.”
물은 차가웠다.
그런데 금채홍은 백유화가 얼굴을 파묻은 목 언저리에 따스한 물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언제나 항상 같이 있을게요.
하고 싶은 이야기.
그러나 수많은 이야기는 떨리는 목울대 안으로 잠겨 들어갔다.
목을 감고 있는 백유화의 손에 점점 힘이 더해지고.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백유화는 고개를 떼고 얼른 자신의 얼굴에 물을 뿌렸다.
“나도 씻어야겠다.”
“다 같이 씻죠. 먼지투성이니까요.”
세 명의 여인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 이렇게 친해졌을까.
달빛이 없는 비가 오는 밤이지만.
그들은 서로를 안고 고개를 맞댄 채 웃음을 지었다.
정파, 사혈련, 마교의 각각 다른 세력에 소속되어 있지만.
그따위 거 무슨 상관이겠는가.
“배고프다. 먹을 거 있니?”
“말고기가 잔뜩 있어요. 이제부터 구워야 하지만요.”
“그거 좋네.”
“근데 두 분은 언제 그렇게 친해지셨어요?”
금채홍이 서하린과 백유화를 바라보자.
“목숨을 살려주고 난 이후 그렇게 됐네. 채홍이 너도 앞으로는 나를 언니라고 부르거라. 스승님이나 유화 님 말고.”
“알겠어요.”
“빨리 씻고 가자.”
“네.”
한동안 몸을 씻고, 옷을 빨래하여 젖은 채 그대로 입은 세 사람이 내려오는 길.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금채홍이 고개를 꺄우뚱했다.
“그러고 보니 군사 손대법이 말뼈라고…….”
뭔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끄떡일 때.
“푸엣취.”
손대법은 느닷없는 재채기를 했다.
곁에 있던 부관이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천막을 치기는 했지만, 비가 오니 추우십니까?”
“아니……. 그런 거하고는 다른 한기가 갑자기 드는데.”
손대법은 이상하게 오싹하여 몸을 부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