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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귀환기-179화 (180/270)

179화

조금 비가 잦아들고.

흐르는 물기가 줄어들어 질척한 진흙이 드러나는 깊은 밤.

천일영은 무극지검을 앞에 두고 홀로 하늘에 떠 있는 먹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으시나요?”

“문목화였지? 이름이.”

“맞습니다. 깨어 있으시길래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곁에 앉으며 찻잔을 건네기에 받아 마시니 향이 온몸에 스며드는 것 같다.

“뭔가 걱정이 있으신 표정입니다.”

“채홍이는 어찌하고 있느냐.”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할 일이 있다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해도 괜찮겠구나.”

오늘 천량도사와 도철용, 그리고 금채홍과 이야기를 나누며 기묘함을 느꼈었다.

아팠던 채홍이가 영기를 받아들여 몸이 나은 일. 그리고 영기를 느끼는 범위가 기감보다도 넓다는 말.

마지막으로 비천운이 곁에 왔을 때 영기가 그들의 몸 안으로 잡아먹히듯 빨려 들어간 것을 금채홍이 느낀 것까지.

천일영은 문목화에게 이 모든 이야기를 전부 다 말했다.

“채홍이의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어 지난 일을 되짚어 보고 있던 참이다.”

“그랬군요. 공자님께라면 아마 말해도 되겠지요. 두 번이나 목숨을 신세 졌으니.”

“무엇인가 아는 것이 있는 모양이군.”

문목화는 조용한 웃음을 퍼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백 년 전, 어쩌면 몇천 년 전일지도 모릅니다. 저희 일족은 여덟 명의 선인(仙人), 즉 팔선(八仙)에게서 영약을 기르라는 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팔선? 전설에나 나오는 그 선인들을 말하는 것인가.”

“네, 팔선은 일백 년에 한 번씩 지상으로 내려와 키운 영약을 가지고 선계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대신 영약을 키우는 중책을 위하여 신선의 피를 나눠 주었다고 하지요.”

“팔선이란 경지의 끝에 이르러 신선이 된 자들이라 알고 있다. 피를 나눠 준들 무슨 소용일까 싶다만.”

언뜻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문목화는 그 말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더 끄덕였다.

“사실인지 어떤지는 모릅니다. 오래된 이야기이기에. 팔선의 위에는 태고(太古)의 신선이 있다고 합니다. 그분의 피를 나눠 받았다고 하지요. 저희는 반신선의 일족입니다.”

“채홍이가?”

“영기를 느낄 수 있고, 흡수하여 몸을 강하게 할 수 있습니다. 다친 몸이나 아픈 몸도 낫게 할 수 있지요. 또한 그 무엇을 해도 보통의 사람보다 훨씬 빠르고 쉽게 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기가 어린 흙을 만들어 낼 수 있지요.”

“이곳에 있는 영기의 땅이 사라져도 말이냐.”

“채홍이가 새로운 곳에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

천일영의 얼굴에 놀라움이 그대로 여과 없이 드러났다.

“그런데 일백 년마다 영약을 가지러 오던 신선이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저희가 위기에 처하면 도와주셨던 팔선도 어느 날부터 사라지듯 그 모습을 숨겼습니다. 그래서 채홍이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쩔 수 없이 일족의 보호를 위해 맡긴 것입니다. 아미파에.”

“무공의 성취도 다른 사람보다 빠르므로 그리한 것이군.”

“위기에 대처하려면 그 방법뿐이었지요. 때마침 아미파에서 여승이 채홍이의 무재를 알아보고 먼저 제의를 하기도 했을 때입니다. 어렸을 때 아미파로 갔기에 채홍이는 아직 자신의 혈통을 모릅니다만…….”

의문이 풀렸다.

금채홍의 평범치 않음의 연유가 무엇 때문인지.

천일영은 그러나 또 다른 의문이 생겨 문목화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문목화는 영기의 땅이 시작된 이곳으로 찾아온 것일까.

“너도 반신선의 일족이라면 영기의 땅을 만들 수 있을 터인데 왜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냐.”

“제가 영기의 땅을 만드는 것은 불가합니다.”

“어째서이냐.”

문목화는 잠시 영기의 땅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저는 방계 혈통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약하게 영기를 느낄 수 있는 정도와 영약을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잘 키울 수 있는 것뿐. 직계 혈통의 능력 대부분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 말은…….”

“직계 혈통은 모두 죽고 채홍이 한 사람만 남았다는 것이지요.”

일그러진다.

그러지 않으려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지고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을 참기 힘들었다.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모든 사람이 채홍이를 가지기 위해 전쟁이라도 벌이겠군.”

“그러합니다. 제가 처음 뵈었을 때, 공자님이라면 채홍이를 지켜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미련 없이 보낸 것입니다.”

“그리된 것이었군.”

“또 하나. 원래 팔선은 태고의 신선이 명한 대로 저희 일족에게 무공을 배우는 것을 금했다고 합니다. 지나치게 강해져서 중원의 균형이 흐트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하는군요.”

“그 말은…….”

“채홍이가 금기까지 어기고 무공을 배울 정도인데도 팔선이 내려오지 않는 것을 보면 선계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맙구나. 이 이야기를 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믿기 때문입니다. 채홍이와 저를 실망하게 하지 말아 주세요.”

“알았다.”

떨리는 손에 들린 찻잔을 받아 든 문목화가 절반쯤 부서진 집 안으로 들어갔다.

“후우.”

알지 말아야 했을 것을 알게 된 느낌.

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언제였을까.

마지막으로 손이 떨린 것은.

그만큼 충격을 받은 천일영의 고심은 밤과 같이 깊어져만 갔다.

* * *

조금 늦게 일어났다.

교착 상태에 빠진 전황이 해결되고,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겨 긴장이 풀렸나 보다.

손대법은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으아아함, 배고프네.”

“오늘은 제법 많은 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제 사혈련과 무림맹의 버림받은 무인들이 협력하면서, 늘어난 인원으로 인해 식량 준비가 미흡하여 겨우 허기를 모면할 만큼만 음식을 먹었다.

‘삼 일을 굶고, 어제 고기 두세 점 먹은 게 전부니까.’

하지만 오늘은 배가 터지도록 먹을 수 있다.

손대법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점심을 먹고 배를 두드리는 사혈련의 무인도 있었다.

“밥 다오. 배고파 죽겠다.”

“여기요.”

금채홍을 바라보며 기대 어린 눈빛을 보냈던 손대법은 당황했다.

다름 아닌 금채홍의 손에 의해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은 미묘한 맹탕의 국물이 전부였으니까.

“이건 무엇이지?”

“군사님이 말뼈라고 하시며 우린 국물을 드시고 싶어 하시길래 아침 일찍부터 만들었어요.”

아닌데.

말뼈로 때려죽이지 않는다고 했을 뿐이지.

입으로 꺼내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어서 드세요.”

싫어.

“맛있어요.”

고기를 달라고.

“제가 아침 일찍 일어나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고기를…….

“성의를 무시하시는 건 아니죠?”

성의보다 고기…….

그때 손대법은 금채홍의 등 뒤에 서 있는 천일영과 눈이 마주쳤다.

금채홍이 조금 실망한 얼굴로 고개까지 숙이자 왜인지 무시무시한 천마의 표정이 조금 날카로워진 것 같다.

손대법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 아니다. 먹고 싶었다, 말뼈 우린 국물.”

“어머? 역시 제 생각이 맞았군요.”

두근두근.

진짜 딱 말뼈만 넣고 삶았을 줄이야.

고기 좀 넣지.

‘에잇, 일단 먹고 보자.’

벌컥. 벌컥.

눈을 감고 한꺼번에 삼켰다.

“우웁!”

“왜 그러세요?”

“아니! 맛있어서. 빈속이라 놀라 그런 것뿐이다.”

천마가 지켜보고 있다.

그래서 마셨다.

‘근데 진짜 맛본 거 맞아? 맛있다며!’

속이 뒤집혔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이상한 맛.

뭔가 더러운 맛이다.

‘말뼈는 원래 단단해서 가마솥에 넣고 오십 시진 이상 끓여야 하는데.’

아침부터 삶았으면 두 시진이나 길어야 세시진 끓인 거다.

“더 있어요.”

“응? 잠깐!”

“많아요.”

금채홍의 손길이 커다란 가마솥을 가리킨다.

엄청나게 큰 가마솥.

‘아니! 왜 저렇게 무식한 가마솥에 끓인 거야.’

백 명은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천마가 보고 있다.’

손대법은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방금 먹은 사발을 내밀었다.

“더…… 먹을까……?”

“네.”

방긋 웃으며 큰 국자로 떠 넣는 국물에 몸이 떨려 온다.

“에잇!”

벌컥. 벌컥.

살기 위해 들이켰다.

잠시 후.

다섯 사발이나 먹은 손대법은 바닥에 대자로 뻗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환영이 보인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하늘에서 자신에게 이리 오라며 손짓을 하는.

‘어머니, 밥이 먹고 싶어요…….’

또르르.

손대법의 뺨으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한편.

배가 불러 바닥에 쓰러진 것으로 생각한 금채홍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리다 뭔가 생각난 듯 우뚝 섰다.

이내 금채홍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러고 보니.’

폭포가 흘러내리는 옆으로 물이 빠지지 않고 고이도록 만든 곳.

일부러 그렇게 만든 곳이다.

그곳에서 물을 퍼서 말뼈를 우렸다.

‘어제 거기에서 목욕했는데.’

이 일을 어쩌나.

금채홍의 목이 손대법의 반대로 스르륵 돌아간다.

‘더러운 묵은 때를 다 벗겼는데.’

심지어 서하린 언니는 발도 박박 문질러 씻었는데.

몸이 손대법으로부터 스르륵 멀어진다.

‘죽을 때까지 비밀이야. 입이 찢어져도 말 못 해.’

스르륵.

금채홍은 손대법의 시선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리고.

‘태고의 신선이 이걸 보면 땅을 치고 울 일이군.’

어제 금채홍이 목욕한 곳을 알고 있고, 그곳에서 물을 퍼서 말뼈를 우린 것도 알고 있는 천일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리려고 손대법을 바라봤는데 왜 눈이 마주치자 들이켜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네.’

웃기는 녀석.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미 마셨는데.

아무튼 반신선의 직계 혈통이 바보라서 세상의 균형이 흐트러질 일은 없을 것 같아 안심되기는 했다.

* * *

유리하기는 했지만, 교착 상태라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무림맹의 기마대를 처리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런데 어찌하여 공격하지 말라는 것이냐.”

“공격하는 순간 천량도사와 도철용, 그리고 무림맹의 무인들과 곤륜파까지 무림공적이 되기 때문이다.”

도철용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천량도사는 잠시의 생각을 거친 후 역시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무림맹에서는 지원을 보내지 않을 것이었다.

오히려 공격해서 기마대가 쓰러지면 무림맹은 준비된 듯 화산파를 짓이기고, 개방을 쓸어 버릴 터.

그렇게 명분이 손에 쥐어지기를 기다리고 바라고 있음이 분명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내일쯤이면 내가 손을 써 놓은 놈들이 올 테니.”

“그것으로 이 교착 상태를 끝낼 수 있다는 말인가?”

“아마도 그렇겠지.”

다만 불안함이 없지는 않았다.

다름 아닌 천마신교를 부른 것이니까.

그만큼 앞뒤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내가 채홍이에게 약하긴 한가 보군.’

바보 같은 일을 저질렀지만, 후회가 들지는 않았다.

“조금 걱정이 되는 것은 천마신교가 이 일에 끼어드는 즉시, 과거 귀주성 전투 이후 가장 큰 싸움이 된다는 거다.”

“일이 크게 번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인가.”

“정마대전, 정사대전으로 번지지 말라는 보장이 없구나. 지금의 남궁천이라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부러라도 전쟁을 일으킬 수 있겠지.”

악독한 천마가 무림과 중원을 걱정한다.

적응이 되지 않아 도철용의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 올랐다.

그때 금채홍이 손대법과 함께 천일영의 이야기를 듣다 입을 열었다.

“그럼 부딪히지 않고 이기면 되는 것이지요?”

“뭔가 계획이 있는 것이냐.”

“땅을 열심히 팠거든요.”

“땅?”

금채홍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도철용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군. 그 방법이 있었구먼.”

“네, 딱 좋을 거로 생각해요.”

뭐라고 둘이 서로 좋아서 이야기하는 거야.

천일영의 얼굴이 울퉁불퉁 심술 섞인 것처럼 부풀어 오름과 동시에, 금채홍의 팔을 낚아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공자님?”

“알아듣게 말해 주기 전에는 풀어 주지 않겠다.”

“별건 아닌데…….”

천일영은 금채홍의 계획을 모두 들었다.

‘이것 참, 조금 전의 바보짓은 무엇인지.’

금채홍의 계획은 완벽에 가까웠다.

오히려 지나치게 좋은 책략이라 천일영은 혼란스러웠다.

‘얘는 천재인 건지 바보인 건지 예전부터 구별이 안 되는군.’

그래도 천일영은 웃었다.

‘채홍이는 아직 바보가 구 할, 천재가 일 할이니까.’

두고두고 곁에서 가르칠 명분이 생겨서 지어지는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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