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무림맹의 계략은 철저히 부서졌다.
‘그도 그럴 것이 무림맹의 기마대는 사혈련과 천마신교에 의해 무참히 당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비로 불어난 물에 휩쓸려 운 나쁘게도 산사태에 깔려 죽은 것이니까.’
이것으로 무림맹이 낄 명분이 사라졌다.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책임을 지라면 물과 돌덩어리들에 고함을 지르는 수밖에 없으니까.
책략의 내용을 파악한 사람들은 치가 떨릴 정도로 무서움을 느꼈다.
‘황실의 무인들이 싸움은 없었다고 증명해 줄 테지. 천마신교의 무인들은 한 명도 죽지 않고 돌아가게 됐으니 정마대전이 벌어질 일도 없다.’
금채홍이 물을 이용하여 만든 함정.
황실에서 나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고, 천마신교도 불렀다.
그 두 세력이 죽지 않고 적절한 때에 물꼬를 터 무림맹만 죽인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금채홍과 천일영은 괴물처럼 보이기만 했다.
‘역시 천마님이다. 이런 것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차경철은 빠르게 고개를 돌려 가며 천마를 찾았다.
‘어디야. 분명 있었는데.’
사실은 한량 짓을 한다며 천마신교 밖으로 나와 전국을 돌며 천마를 찾았다.
잠이야 기루에서 잤지만.
그것도 떠도는 정보를 알아볼까 하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경으로 그랬을 뿐이다.
‘어떻게 찾은 천마인데! 놓칠까 보냐.’
후웅.
기감을 펼쳤다.
기감으로 천마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펼쳤다.
‘천마님의 특징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때.
폭포 옆으로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타타탓.
아무도 없는 외진 곳.
그곳에 혼자 있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다는 듯.
차경철은 뛰었다.
“헉헉.”
습관처럼 사용하던 경공도 잊고 외공만으로 뛰었다.
눈앞에 보이는 돌무더기를 돌면 이제 보일 터.
차경철은 있는 힘껏 지면을 박찼다.
“천마님!”
“여전히 눈치채는 것이 늦구나. 알아차리라고 기운도 조금 흘렸는데.”
“하하, 여전히 엄하십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얼굴에 천일영은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아까 절벽 위에서 기웃거릴 때부터 알아봤다. 행여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 두건까지 두르고 있었건만 설마 네가 올 줄이야.”
“그동안 오래 찾았습니다. 이제야 드디어 만났습니다.”
차경철이 무릎을 꿇었다.
“저도 데리고 가십시오. 죽을 때까지 따르겠다고 예전부터 마음속으로 맹세했었습니다.”
“너는 천마신교에서도 마왕의 직계 혈통에 가까운 사람이 아니더냐. 그것은 아니 될 말이다.”
“그따위 것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마음속에서 떨어낸 지도 오래입니다.”
참 의외의 인연이었다.
‘과거 귀주성 전투에서 파천마왕 패범휘의 조카로 거들먹거리며 나를 벌레 보듯 했었지.’
진형을 무너트리고 방계 혈족과 무인 수백을 이끈 채 적진으로 끌고 들어가 퇴각 작전을 망치게 했던 사람.
그것이 차경철이었고, 천일영이 목숨을 걸고 구해 냈었다.
이후 패범휘는 사죄의 의미를 핑계로 삼아 차경철을 무명암살대에 던져 줬었다.
그래서 차경철을 데리고 있었다.
“천마님이 그때 저를 데리고 가르치지 않았으면 사람이 못 된 채 개 같은 인성으로 평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첫해에는 거들먹거리고 사람들을 무시했었지. 두 번째 해에는 무명암살대의 사람들이 죽어 나갈 때 눈물을 흘리게 되었고, 삼 년째에는 수하들의 앞에 서서 죽지 않도록 이끌었던가. 오래된 추억이구나.”
“그때 제가 얼마나 형편 좋고 편안하게 살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환경이 독인 것도 알게 되었지요. 무명암살대를 이끄시던 천마님이 왜 대주가 아닌 단주인지를 알게 되고 억울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쯤에는 그저 따르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대주가 아닌 단주의 지위.
이유는 간단했다.
견제를 위해서.
혹은 천하게 팔려 온 자에게 대주라는 지위를 주기 싫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한 단계 아래인 단주라는 지위를 천일영에게 마왕들이 선심 쓰듯 던져 줬었다.
‘그리고 사 년이 채 되지 않아 파천마왕 패범휘는 사죄가 끝났다는 핑계로 차경철을 무명암살대에서 빼내어 출셋길에 올려놓았다. 사죄도 무명암살대가 아닌 차경철의 실수로 죽은 자들의 가문에 보이기 위해서 그랬을 뿐이었지.’
지금의 차경철은 천마와 독대를 할 수 있고 마왕을 제외한 천마신교에서 가장 높은 위치.
마왕 바로 아래 직책인 천마신교 총관이다.
그런 그의 입에서 담담한 말이 계속 흘러나왔다.
“일 년이 넘도록 전국을 뒤지며 천마님을 찾았습니다. 이제 천마님을 만났으니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천마신교를 버리라 하신다면 그리할 것입니다. 무엇이든 명만 내리십시오.”
여전히 차경철은 한번 사람이 변한 이후로 그대로였다.
‘과거 천마가 된 이후에도 독대가 가능한 사람 중에서 유독 술병을 들고 자주 찾아왔었지.’
일이 아닌 마음속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찾아왔던 사람.
“따라온다면 말리지는 않으마. 다만 같이 온 자 중에서 강환수가 있더구나.”
“저 말귀 어두운 부관 녀석 말씀입니까?”
“원래는 무명암살대가 해체하고 천마신교의 정문을 지켰을 터인데 어찌 이곳에 있는 것이냐.”
천혜향루에서 가짜 천마가 나타났을 때만 해도 하오문 회주 윤의강이 강환수에게 직접 범인들을 넘겨줬었다.
그런 그가 왜 이런 곳에?
“마왕들이 무명암살대였던 자들을 전 중원에 영약을 찾으라 내보냈습니다. 그만큼 다급했던 모양이니까요. 하지만 이곳이 마지막이라 생각했을 테니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낼 것입니다.”
“그렇구나. 강환수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데려갈 수는 없으니 조용히 보내거라. 그런데?”
“네?”
“나는 이제 천마가 아니라 일개 객잔 주인이다. 그래도 따라올 텐가.”
“객잔 주인이요? 처…… 천마님이?”
차경철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너무도 지나치게 자신의 상상과 다른 동떨어진 모습이었기에 그랬을까.
아니면 감히 천마가 객잔을 하는 것이 못마땅했을까.
“크윽!”
온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이내 들어 올리는 고개에는 기묘한 표정이 잔뜩 퍼져 있었다.
“너무 좋습니다. 골치 아픈 일에서 멀어져 태평하게 살기에 딱 좋지 않습니까. 평생의 꿈이었습니다.”
“호오?”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고?
과거 허영덩어리 같은 녀석이었는데.
“그런데 천마님? 객잔에 혹시 미인이 있습니까?”
“미인?”
“천마신교 때려치우는 김에 장가나 갈까 해서요.”
“아직 때려치우지는 말아라. 나중에 쓸 데가 있을 테니.”
“명이시라면.”
아이가 혈통에 의해 망가지는 것이 싫었을까.
차경철은 일 년 하고 조금 전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까지만 해도 혼례를 올리지 않고 있었다.
피식.
웃어진 입가가 열렸다.
“미인이 있는지 같이 찾아보면 되겠군.”
“재미있겠습니다. 하하핫.”
천일영은 차경철의 손을 꽉 잡았다.
* * *
“앞으로는 너를 지킬 자들이 생길 거다.”
“그것이 정말입니까?”
문목화가 영문을 알기 힘들다는 표정을 보였다.
“황실에서 개입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라 생각은 했다만.”
“그렇다면…….”
유의선과 높은 사람이라는 자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이 움직일 것은 이미 알고 있었고.
또한 그들이 이 싸움을 끝낼 유일한 패라는 것도 처음부터 생각한 일이었다.
푸드드득.
황실에서 전서구가 날아들었다.
잠시 펼쳐 읽던 민무영이 고개를 들고 몸을 꼿꼿이 세웠다.
황제의 명을 읽기 위해서.
“이제부터 이 땅을 황실에서 관리한다고 선포한다. 앞으로 땅의 소유주를 영약을 키우는 사람에게 넘길 것이며, 곤륜파에 매년 금화 오십 냥을 하사한다. 곤륜파는 이 땅을 지키는 일에 협력할 것을 명한다.”
“젠장.”
손대법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의 무인이 나타날 때부터 뭔가 이상했었다.
“아울러 황실에서 이 땅을 보호하는 것과 동시에 관무불가침으로 무인들이 이 땅에서 난 그 무엇 하나, 심지어 풀 한 포기까지 취하는 것을 금한다.”
헛고생했네.
강환수와 타진표도 하늘을 보며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무인들이 이곳으로 들어오려면 곤륜파를 제외하고는 황실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의를 제기하려는 자는 정1품 태사(太師)에게 말을 할 것. 이것으로 모든 내용을 전달했습니다.”
“하아.”
종1품도 엄청난 관직인데 정1품이 나왔다.
그것도 가장 높은 관직인 태사다.
대명국에서 황제를 제외한 권력의 정점이 태사.
이것이 무슨 뜻인가.
황실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말이었다.
또한 경고의 의미도 담겨 있었다.
‘다 끝났네.’
모두가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단 한 명, 곤륜의 장문인 청유원만을 제외하고.
‘한 해에 금화 오십 냥이면 곤륜파의 재정에 엄청난 도움이 되겠구나.’
청유원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장문인, 좋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흠…….”
그동안 심기가 안 좋아 있었던 장문인이 좋은 소식에 기분이 풀렸을 거로 생각한 무인이 슬쩍 입을 열었다.
청유원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생각에 잠기다 말을 건 무인을 바라봤다.
“몸통을 만 조각으로 잘라 닭 모이로 던져 줘도 시원치 않은 똥 덩어리 같은 네놈들에게 이 중요한 임무를 맡기려면 한참 굴려야겠구나. 이 대가리를 쪼개 뇌수를 천 가닥으로 뽑아서 뿌려 버릴 놈들아.”
“끄헉!”
청유원은 민무영에게 다가갔다.
“황실의 명을 받들고 임무에 소홀함이 없을 것이라 아뢰어 주시오. 내 이놈들의 정신을 뜯어고쳐 하루 내내 영약에서 눈을 떼지도 못하게 할 것이니.”
“황제께 아뢰는 편지를 올리겠습니다.”
“고맙소.”
일이 끝났다고 생각한 민무영이 삼백의 무인들을 데리고 협곡을 빠져나갔다.
“나도 가야지.”
손대법이 몸을 일으켰다.
덥석.
누군가가 손을 잡고 바라보길래 의아한 느낌으로 바라보는 순간.
“타진표?”
“미안하군. 나는 사혈련을 떠나겠네.”
“뭐라고?”
타진표가 백유화의 곁에 섰다.
“예전부터 마음에 걸리던 녀석이다. 그래서 챙겨 주곤 했는데 사혈련을 나가는 바람에 걱정이 되어 잠도 못 잘 정도였지. 그런데 내 눈앞에 나타났고 목숨까지 구해 줬으니 나는 앞으로 이 녀석을 지킬 생각이다.”
“네에?”
백유화가 오히려 놀라서 타진표를 바라보았다.
나이 육십이 넘은 타진표의 인자한 표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예전부터 마치 아버지 같았던 사람.
“천주에게는 나중에 인사를 드리러 간다고 전해 주게.”
“아니…… 그게 내가 말로 해서 될 것이…….”
중원 오십 대 고수다.
내공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창을 다루는 실력으로만 따지면 무림 일인자다.
사혈련으로서도 최고로 중요한 전력.
‘그런데 이렇게 떠난다고? 백유화 때문에?’
미칠 것 같은 심경이 손대법의 가슴을 태웠다.
‘너까지 나가면 천주가 나를 반으로 쪼갤걸?’
손대법이 대답을 못 하자.
휘릭!
타진표가 창을 세웠다.
“알겠다는 대답이 안 나오면 전부 죽일 수밖에.”
“아니! 그렇게 할 것까지야!”
이 망할 영감이 노망이 들었나.
아무리 과거에 딸과 아내가 동정호에 여행을 다녀가던 도중 사건에 휘말려 비참하게 죽었다고 해도.
‘전부터 백유화를 딸처럼 대한다 생각했었지만, 이 정도였나. 하긴 살아생전의 딸과 닮기는 했지. 저 살인귀가.’
손대법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린다고 말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머리채를 붙잡고라도 끌고 갔다.
“천주에게 이야기는 전하겠다.”
“고마운 일이군.”
오롯이 패배만 등에 떠안고 중원 최고의 무인까지 잃었다.
돌아가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가자…….”
늘어지듯,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듯한 명령에 사혈련의 무인들도 협곡을 빠져나갔다.
“다음은 우리인가.”
차경철이 강환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얼른 돌아가자. 임무는 끝이다.”
“총관님은 어째서인지 임무에 실패했는데도 기분이 좋으신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 기분 탓이다.”
“정말입니까?”
“망할 놈이 따지긴. 돌아가는 길에 나는 사천성 신룡(新龍)에서 내 볼일을 보고 갈 테니 너희들은 알아서 천마신교로 복귀해라.”
“또 일은 팽개치고 기루에서 한량 생활을 하시려는 거군요.”
“뭐 그런 거로 해 두지.”
차경철도 이백의 무인을 끌고 협곡을 빠져나갔다.
이어 영약 밭을 지키는 일의 준비를 위해 곤륜파도 장문인 청유원의 손에 이끌려 협곡을 나가자.
천일영은 무림맹의 소속이었던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지금 돌아가면 무림맹에서는 어쩔 수 없이 받아 줄 것이다.”
“이제 그곳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어째서인가. 밝은 빛 아래에서 당당하게 사는 것이 좋을 터인데.”
천일영의 말끝에 무림맹의 무인들은 고개를 기울였다.
“이미 무림맹은 밝은 빛이 아니라 암흑으로 뒤덮여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천량도사와 도철용을 바라보니 무림맹의 무인들의 마음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살 텐가. 수가 많으니 내가 거두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
무림맹의 무인들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나 보다.
잠시 생각을 거듭하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천일영이 입꼬리를 올렸다.
“혹시 산적에 관심 없나?”
“산적이요?”
무림맹의 무인들은 말도 안 되는.
어림도 없는 소리에 눈을 치켜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