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벌컥.
다음 날 아침.
개점하지도 않은 별유천지의 문이 활짝 열렸다.
“제가 왔습니다.”
“빨리 오느라 고생했다.”
“천…… 아니, 공자님께 인사드립니다.”
“새삼스럽게.”
차경철이 큰절을 올린다.
“이제 같은 식구인데 그런 거창한 인사는 그만두어라.”
“오랜만에 뵈었으니 오늘만 허락해 주십시오.”
차경철이 몸을 일으켜 객잔을 빠르게 둘러보고는 천일영의 곁에 있는 금채홍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반가움이 얼굴에 한가득하다.
“소저군. 청해성에서는 활약이 아주 대단했다.”
“활약은요, 아니에요. 에헤헤. 근데 누구세요?”
말을 하는 도중에도 손을 붙잡고 붕붕 휘두르며 활짝 웃는 남자의 정체가 가늠되지 않는 사이.
“아니! 이런! 이렇게나 예쁜 아이가!”
“네?”
금채홍의 손을 휙 집어 던지고.
혜령을 보자마자 공중으로 들어 올리더니 빙글빙글 돈다.
“아하하하. 이름이 무엇이냐.”
“꺄르륵. 혜령이라고 해요.”
“얼굴도 예쁘고, 이름도 귀엽고. 너 내 딸 할래?”
“네, 아저씨 딸 할래요. 까르르륵.”
방금 만났는데 아버지와 딸 사이가 됐다.
그러다 백유화와 타진표가 객잔으로 들어서자.
“이따가 놀자. 아빠, 저분들에게 인사하고 올게.”
“다녀오세요, 아빠.”
이젠 평생을 같이 살아온 부녀보다 더 사이가 좋아 보이기까지.
차경철은 고개를 숙이며 타진표에게 인사를 올렸다.
“앞으로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타진표 어르신.”
“허허, 내가 오히려 부탁해야 할 것인데.”
차경철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젓고 백유화를 바라봤다.
“이거, 이거. 백유화 님이 아니십니까.”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나? 공자님께 온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나야말로.”
그때 천이영이 물에 젖은 손으로 객잔의 개점을 준비하다 밖으로 나왔다.
“아침부터 꽤 소란스럽네요. 무슨 일이 있나요?”
“헉!”
차경철이 천이영을 보는 순간.
훅. 훅.
거친 콧김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얼굴도 새빨개졌다.
빠르게 다가가 서더니.
차경철은 천이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양팔을 크게 벌렸다.
“사랑합니다.”
“네에?”
천이영이 기겁하는 표정을 짓자.
차경철이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니 ‘뿅’ 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은 착각과 함께 꽃이 나타났다.
“첫눈에 반했습니다. 저와 혼례를 올리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네에에에?”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내 인생에 여인은 앞으로 소저 단 한 명뿐, 혼례를 올리기 전에는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하아…….”
천이영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천일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아침부터 이런 미친 사람을 객잔에 들이신 거예요?”
“아니…… 나도 저 녀석이 저런 성격인 건 오늘 처음 알았다.”
“아시는 분이에요? 아무래도 의원에 보내야 할 사람 같은데.”
“이따가 유화한테 봐 달라고 하지.”
“제발 그래 주세요.”
천이영이 찬바람을 쌩하니 풍기고 주방 안으로 돌아가자.
차경철이 손가락으로 뒤통수를 슬쩍 긁으며 몸을 일으켰다.
“사랑이군요. 비록 차였지만 그래도 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혹시 너 예전보다 사람이 너무 변했다는 말 자주 듣지 않느냐.”
“어떻게 아셨습니까. 자주 듣습니다. 하하하.”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차경철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누구?’
금채홍은 아무래도 본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 얼굴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런 괴상한 사람을 내가 만난 적이 있다고?’
아무래도 모르겠다.
그때 서하린이 부스스한 꼴을 하고 배를 벅벅 긁으며 객잔으로 들어섰다.
어젯밤에 천일영과 마교에서 영약에 목숨을 걸 만한 이유에 관해서 이야기하느라 늦게 잠든 탓이다.
순간.
차경철과 눈이 마주쳤다.
서하린은 급히 머리를 다듬고 옷매무새를 고친 후 입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천마신교의 총관님께서 어찌 여길…….”
“독천마왕님 아니십니까. 오랜만이십니다.”
뻘쭘하게 서하린이 인사를 하자.
‘아니! 이 사람의 정체가!’
금채홍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언니! 마왕이었어요?”
“응?”
아니 그걸 이제 눈치채면 안 되지.
서하린을 만난 지 얼마 안 된 월영도 아는 사실인데.
객잔에 있는 사람들이 안쓰럽게 금채홍을 바라봤다.
‘이 바보 녀석.’
여러 가지 무례한 생각과 안쓰러운 감정이 섞여 동네 바보를 바라보는 듯한 따스한 눈길.
설마?
나 빼고 다 알고 있었다고?
금채홍이 안 그래도 큰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왜 그런 눈으로……. 나 바보 아냐. 그렇지, 나 바보 아니지?”
아무도 대답을 안 한다.
딱 한 명만 빼고.
“으하함, 언니 바보 맞잖아요. 그것도 왕(王)바보.”
“손가락으로 허공에 왕(王) 자 그리면서 바보라고 하지 마!”
예서란이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겨우 한 시진만 눈을 붙인 채 객잔으로 들어섰다.
“그러게, 같이 공부하자고 했는데 매일같이 검만 휘두르니 바보가 되지요.”
“나 바보 아냐!”
“바보가 아니긴요. 채홍이 언니가 바보라는 사실은 항주에 있는 사람 대부분이 아니까아아아아아아악?!”
“하하하.”
눈이 팽글팽글 돈다.
차경철이 예서란을 들어 올리며 또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이렇게 예쁜 아이가 또 있었구나. 너도 내 딸 할래?”
“내. 려. 놔.”
눈 밑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예서란이 객잔 안을 얼리자.
“네.”
차경철은 조용하고 예의 바르게 예서란을 내려놨다.
* * *
쫑알쫑알.
일각이 넘는 시간 동안 차경철에게 잔소리를 퍼부어 대는 예서란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보니.
천일영은 문득 과거의 생각이 떠올랐다.
‘건방과 콧대가 하늘을 찌르던 예전의 차경철도 지금 되짚어 보면…….’
조금 알 것 같다.
직계 혈통에 가까운 방계 혈통의 자제라 하더라도 과거 차경철의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다.
‘직계 혈통이나 다른 마왕 가문의 방계 혈족과 비교해도, 비슷하거나 더 높은 위치에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차경철을 따르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지.’
혈통에 목을 매고 천마신교의 정통 가문이 아니면 벌레 보듯 했어도 신기하게도 차경철의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는 것은.
‘사람을 잘 챙기고 저런 호탕한 면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당긴 것인가.’
그뿐인가.
‘게다가 잘생겼지. 내가 선이 가늘고 곱상하게 생겼다면, 차경철은 호쾌한 미남이다. 천마신교에서도 흠모하는 여인들이 줄을 서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러니 그가 귀주성 전투에서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그 많은 방계 혈통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차경철의 뒤를 따랐을 것이다.
‘직위 때문에, 가문의 체면을 위해 아닌 척하고 살아온 모양이군.’
그나저나.
차경철은 잔소리를 듣는 동안 점점 몸이 쪼그라들어 이제는 땅속으로 들어갈 기세다.
천마신교의 총관씩이나 되는 사람이 스물도 되지 않은.
심지어 외모는 일곱 살에 불과한 여아의 잔소리를 모조리 듣고 있다니.
천일영이 몸을 일으켰다.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다. 반성하고 있겠지.”
“공자님. 처녀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우고 들어 올리다니, 지금 생각해도 화가 가라앉지 않습니다.”
“어른인 네가 참아라.”
“어른……. 그렇지요. 저는 어른이지요. 엣헴, 알겠습니다. 어른인 제가 참겠습니다.”
예서란이 손으로 허리를 짚고 콧대를 세웠다.
귀여워라.
“학당에 갈 준비를 해야지. 오랜만에 유화가 데려다줄 거다.”
“알겠습니다.”
예서란이 객잔 밖으로 나서자 천일영이 입을 열었다.
“꽃이 느닷없이 나타나는 해괴한 재주는 어디에서 배웠느냐.”
“아……. 기루에서 배웠습니다. 호남성에 있는 기루에 얼굴은 못생겼지만, 재주가 많은 기녀가 있었는데 신기한 기술을 많이 알고 있었지요.”
“기루를 가는데 호남성까지?”
“그야 세상의 모든 정보는 기루에 모이니까요.”
천마님을 찾으려고 기루에 갔습니다.
차경철은 다음의 말을 꾹 삼켰다.
잠시의 침묵이 둘을 감싸고.
이윽고 천일영이 입을 열었다.
“고맙다.”
“아닙……니다.”
차경철이 툭 떨구듯 고개를 내렸다.
“그곳에는 오직 천마님을 제외한 모든 정보가 있더군요.”
“뭔가 재미있는 정보가 있더냐.”
차경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활동을 재개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활동을 재개한 사람이라?”
“서후량입니다.”
“기어이 죽지도 않고 움직이는구나.”
끄덕여지는 고개에 천일영은 일의 앞뒤가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무림맹 총관 사마정을 죽인 이후 무림맹의 움직임이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서후량이 배후였나.’
너무도 은밀하고 자연스럽게 남궁천이 무림맹의 일에 몰두하게 했다.
‘그것을 오갈 데 없게 된 남궁천이 일을 하여 만회하려 했다고 생각했구나.’
사실은 일하는 척해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신뢰를 얻어 자신의 지지 세력을 늘리려 했을 뿐.
‘제법이군. 그런데 서후량은 무림맹이 있는 하남성에 만든 기루 목천월향에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는데, 호남성에 있는 기루에는 나타났다? 행동 범위가 이상하군.’
천일영이 생각에 골몰하자 차경철이 눈치껏 입을 열었다.
“이 정보는 두 달 전 것입니다. 과거에 서후량은 재주만 많은 이 기녀와 제법 친했던 모양입니다. 십 년 만에 나타나서 꽤 놀랐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서후량이 이상한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상한 이야기?”
“네. 제가 간 기루는 호남성의 악양(岳陽)에 있는 곳으로, 동정호 바로 곁에 있습니다. 헌데 서후량이 말하기를 동정호부터 시작하여 호남성 전체가 뒤집힐 테니 몸을 피하라고 했답니다.”
“호남성 전체가 뒤집힌다니.”
어떤 방법으로?
지천번회와 무림맹이라면 호남성에 사는 사람들을 몰살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지만.
‘연유는 알 수 없음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마음이 다급해지는 순간.
차경철이 안심하라는 듯 이야기를 이어 갔다.
“다만 단서가 붙었는데 일 년 뒤라고 했다 합니다.”
“일 년 뒤라. 무척 구체적이구나.”
“기녀는 과거에도 매일같이 농담이나 했던 사람이라 이번에도 그럴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지만, 저는 이 이야기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동감한다는 듯 천일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달 전이라면 앞으로 십 개월 남았군.”
“저도 제 개인적인 사람들을 이용해서 알아보고 있습니다.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나도 알아보지.”
천일영은 즉시 안과 혜, 그리고 하오문의 세하월에게 전서구를 날려 보냈다.
* * *
그날 저녁.
스윽. 스윽.
예서란은 천일영의 무릎 위에 앉은 채 머리를 쓰다듬어지는 바람에, 한 시진이 넘는 시간 동안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계속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의문이 들기를.
‘예랑도 있는데 왜 나를?’
예서란이 눈길을 돌리자 바닥에 엎어져 있던 예랑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다.
자신도 한 시진이 넘도록 쓰다듬어지는 것은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인 것 같다.
‘저 배신자!’
예서란은 공자님의 손길에 머리를 내준 채 멍하니 앉아 있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하! 이것이 무한 고양이 상태라는 거구나.’
한 가지 생각에 골몰했을 때.
혹은 답을 내기 힘든 어려운 문제를 생각할 때.
뭔가 푹신하고 부드러운 것을 무한히 만지며 생각을 정리하는 상태다.
‘그럼 내가 고양이? 뭐 나쁜 건 아닌데……. 아니, 오히려 좀 좋을지도?’
공자님의 손길에는 조심스레 자신을 아끼는 것이 느껴질 정도니까.
예서란도 공자의 손길에 마리를 맡기고 기분 좋음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때.
공자님이 허리 앞으로 손을 빼내어 껴안자 화들짝 놀라 예서란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공자님?”
“놀랐느냐. 미안하구나. 아이의 몸이라 체온이 높아 따뜻해서 나도 모르게 안아 버렸다.”
“안으시는 건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혜령이도 아이인데 왜 저만?”
“혜령이는 아마도 아빠가 생긴 것 같더군.”
아.
삐쳤네. 삐쳤어.
조금 울퉁불퉁한 얼굴을 하는 공자님의 얼굴을 예서란이 쓰다듬었다.
“걱정이 있으십니까?”
“빠르게 목적을 이루려면 죄 없는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고, 또한 도리에 맞게 일을 하자니 당장은 아니어도 이후에 죽게 될 사람이 많구나. 둘 중에서 어떤 길을 가야 할지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
“사람들이 죽지 않는 선택지는 없는 것입니까?”
“아마도 없을 것 같구나.”
“그렇다면 사람들이 덜 죽는 선택지를 선택하시면 될 일입니다. 제가 병법은 모르지만, 한 명이라도 덜 죽게 하여 죄책감이 조금이라도 덜어 내려 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죄겠지. 손에 묻은 피가 언제까지고 지워지지 않는구나. 내가 뭐라고 사람의 생명을 선택한단 것인지.”
예서란은 자신을 상대로 처음 꺼내는 이야기에 조금 놀랐다.
‘나에게는 거친 이야기를 하지 않는 분인데, 이번에는 제법 중증이네.’
예서란은 양손을 뻗어 천일영의 뺨을 늘어트렸다.
“가장 나쁜 것은 사람이 얼마나 죽느냐를 계산하는 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도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공자님은 한 명이라도 더 살게 하려고 고민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냐. 고맙구나.”
예서란이 천일영의 머리를 웃으며 쓰다듬었다.
“걱정거리가 생기면 또 고양이가 되어 드릴 테니까요.”
“말하는 고양이라서 제법 좋다고 생각하던 중이다.”
웃음이 나왔다.
머리에는 아직도 예서란이 쓰다듬은 온기가 남아 있는 듯도 했다.
‘위로를 받은 김에 충고대로 해 볼까.’
천일영은 말하는 고양이가 제안한 대로 남궁천을 상대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