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멸살(滅殺)이라고 했다.
그 말은 남궁세가에 단 한 사람도 존속시키는 일 없이 멸문절호(滅門絶戶)하겠다는 말.
천일영이 한기가 서늘하게 내리듯 차가운 눈동자로 입을 열었다.
“남궁세가의 본문뿐만 아니라 분가조차 남기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남궁을 지우겠다.”
“……!”
천량도사가 기겁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고.
도철용은 조금 놀랐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뜻은 알겠다. 허나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다른 방법도 있을 터인데.”
“오래 생각한 일이다.”
도철용의 얼굴에 떠오른 의미.
그것은 천일영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도철용과 천량도사, 그리고 백유화가 중원 십육 대 고수다. 또한 차경철과 타진표가 중원 오십 대 고수. 월영과 건청, 서하린과 금채홍이 절정 고수다.’
그뿐인가.
성운은 과거 중원 백 대 고수에 들지 못했지만, 내공이 5갑자가 된 지금은 중원 십육 대 고수에 이름을 올려도 될 정도의 실력이다.
귀문살도 빼놓을 수 없다.
다섯 명이 모두 중원 백 대 고수인 살인 집단.
거기에 사천당문의 당강용까지 포함하면 중원 오십 대 고수가 또 한 명 추가된다.
사천당문을 통째로 움직일 수 있으니, 이번에 공동파에 건네준 무림맹의 무인까지 합하면 거대한 전력이 되는 것은 물론.
하오문을 손에 쥐고 있고, 도철용을 통하면 개방을 이용할 수도 있다.
중원의 정보 단체를 전부 다 가진 것이다.
종남파의 협력은 물론이고, 심지어 해남파에 지원을 요청하기까지 한다면.
‘이대로 무림맹을 통째로 뒤집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정도의 세력이 집결하면 천마였던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되니 전쟁으로 번질 가능성도 적어지지.’
도철용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었다.
남궁천을 끌어내리고 새로운 맹주를 추대하여 발표하자는 것이다.
쉬울 수도 있는 일이다.
그 이면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너무 많은 피가 흐른다. 또한 전쟁으로 번질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남궁세가를 멸살하는 것이 더 빠르고 흐르는 피도 적다.”
“말은 알겠지만 내키지는 않는구먼.”
멸살이란 의미는 남궁의 핏줄을 잇는 사람만 죽이는 것이 아니다.
그의 가문에 종속된 하인과 관련된 모든 사람을 죽인다는 의미.
천일영이 말을 이었다.
“하인과 사용인은 죽이지 않겠다. 남궁세가의 사람들도 나이 십오 세 이하는 살려 두겠다.”
“그래도…….”
“무림맹이 그동안 해 왔던 짓에 비하면 신선 같은 일이다. 여기 있는 백유화의 가문은 무림맹의 손에 의해서 젖먹이까지 모두 살해당했다. 유일한 생존자가 겨우 도망친 유화 한 명일 뿐.”
“할 말이 없구먼. 뜻은 이해했다. 그렇다면 남궁세가를 절멸시킨 이후는?”
“알 거 없다.”
“뭐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천량도사가 말했다.
“우리도 한배를 탔는데 어째서 알 것 없다는 것인가.”
“이 일은 나 혼자 한다.”
탕!
천일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유화가 탁자를 손으로 내려쳤다.
“안 될 말씀입니다. 저하고의 약속을 잊으셨습니까.”
“잊지 않았다. 하지만 무고한 죽음에까지 같이 하겠다는 약속도 한 적이 없구나.”
“공자님!”
“이야기는 끝이다. 더는 말을 꺼내지 말아라.”
“하지만!”
쿠웅.
천일영의 몸에서 핏빛과도 같은 살기가 흘러나왔다.
아무도 저항할 수 없는.
지옥보다 더 끔찍하고 지독한 무엇인가가 온몸을 파내고 갉아 먹는다.
“사람의 길을 벗어나는 것은 나 하나면 될 일. 이미 패악의 길을 따라 걸은 지 오래되었다. 이젠 돌이킬 수도 없으니 그대로 그 길을 따라갈 뿐. 그러니 모두 입 닥쳐라.”
“…….”
천일영은 끈적하고.
한번 몸에 붙으면 죽을 때까지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끔찍한 죽음이 쌓여 만들어진 어둠의 그림자를 살기라는 이름으로 남긴 채 밖으로 나가 버렸다.
* * *
천일영이 어둠을 뿌리치지 못한 채 객잔으로 들어섰을 때.
눈앞에 앉아 식사하는 사람 둘이 시선에 들어왔다.
그대로 걸어가서.
털썩.
앉아 버리자 유의선이 심장을 부여잡고 천일영을 바라보았다.
“헉! 고…… 공자?”
“할 말이 있을 테니 빨리해라.”
“윽…….”
건청에게 수모를 당해도 매일같이 객잔을 찾아왔었다.
벼룩이라도 낯짝은 있었기에 천일영을 찾지는 않았지만.
“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소개해 준다는 높은 분인가?”
“그…… 그렇습니다.”
“나이를 보니 황자. 아니, 황태자인가.”
“……!”
어찌 알아본단 말인가.
얼굴을 가리고 다녔고, 밥을 먹을 때도 최대한 알아보는 자가 없도록 했다.
‘그보다 오히려 나를 호위하는 무인들이 이 공자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지도 못했군. 곁에 앉을 때까지도 알아채지 못하다니.’
그때 천일영이 얼굴을 황태자에게 들이밀었다.
“옷부터 갈아입어라. 이런 비싼 옷을 항주에서 몇 명이나 입을 것 같은가. 정체를 알리고 죽고 싶어서 환장한 모양이로군.”
“공자! 말씀을 삼가시오.”
황태자가 유의선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괜찮다는 의미였겠지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들어 주지. 그동안 매일같이 찾아온 모양인데. 게다가 내가 청해성에 갈 때 따라오다가 포기까지 했었지?”
“거기까지 알고 있었나. 자네가 너무 빨라서 따라갈 수가 없었지. 그래서 급히 전서구로 청해성 근처에 있는 황실의 무인들을 보낸 것인데, 선물은 잘 받았나.”
“황실이 관리하는 땅으로 선포하고 곤륜파에 매년 금화 오십 냥 주는 거로 때울 생각은 하지 말아라. 빚은 아직 그대로이니.”
“하하하, 그걸로 때울 생각은 없네.”
호쾌하게 웃던 황태자.
그가 천천히 웃음을 멈추고 천일영을 노려보았다.
“나에게 이렇게 막 대하는 사람은 그대가 유일하군. 황태자를 능멸한 자로 용모파기에 그 잘난 얼굴을 그려 놓고 싶은 것인가? 황실을 대적하면 어찌 되는지 모르는 철부지였나 보군.”
천일영의 몸에서 아직 지워지지 않은 살기가 피어올랐다.
“철부지인 내가 생각건대, 제일 먼저 황실의 정1품 관리들을 죽여 버릴 것이다. 나라면 그것이 가능하지. 그리하면 종1품의 관리들이 서로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툴 것이다. 또한 환관들이 그 공백을 이용해서 세를 넓히고 권력을 손에 쥐려는 암투가 벌어진다. 겨우 그 정도만으로도 대명국은 일 년 이상 혼란에 빠지겠지. 나라가 기울 정도로.”
“……!”
“그 혼란을 틈타 너 하나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것쯤 애들 손목을 비트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황태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백련교도들도 그런 방법을 썼으면 지금쯤 나라의 주인이 되었겠지.”
“충고 고맙군. 참고하지.”
오금이 저리고 온몸이 쪼그라드는 것 같다.
황태자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나에게 볼일이 있는 것 같군.”
“동정호.”
황태자의 눈빛이 달라졌다.
“자세히 말해 보아라.”
“앞으로 십 개월 후에 그곳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진다.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라.”
“정보의 신뢰도는?”
“일 할.”
“움직이기에는 충분한 숫자군. 오히려 믿지 못할 숫자는 구 할이니까.”
황태자가 곁에 서 있는 무인에게 귓속말을 하고는 천일영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번 정보의 대가는 뭘 원하나.”
“정적(靜寂). 즉 조용함이다.”
“무엇을 하려고 중원 전체에 입막음을 시키려는 것인가.”
“남궁세가를 멸살한다.”
황태자의 눈이 커졌다.
“나…… 남궁세가를! 언제?”
“오늘.”
천일영은 그 말만을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그날 밤의 안휘성.
거대한 도시를 지키는 성문에 남궁세가를 뜻하는 짙은 남색의 깃발이 휘날린다.
황실 소유의 성문에 세가의 깃발이 꽂혀 있는 것은 안휘성이 유일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궁세가의 위세가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고 생각했다.
남궁세가를 능가할 곳은 무림을 전부 따져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궁의 이름으로 불가능한 것은 없었으니.
천하제일 무림 세가다.
저벅. 저벅.
천일영은 일부러 발자국이라도 남기려는 듯 거칠게 관도를 밟으며 성의 정문을 지났다.
‘천주산(天柱山)에 기반을 두고 있는 남궁세가지만, 본문까지 그곳에 있지는 않지.’
천일영이 들어선 곳은 바로 천주산에서 멀지 않은 안경(安慶).
바로 이곳에 남궁세가의 본문이 있었다.
‘보통은 안휘성의 성도인 합비(合肥)나 천주산에 본문이 있을 거로 생각하지만 그곳은 전부 분가다. 공공연한 비밀이긴 해도 무인 중에서 모르는 자가 제법 많지.’
방금 통과한 성문도 안경을 지키는 성채의 일부다.
천일영은 자신의 몸에서 배어 나오는 피비린내를 느꼈다.
몸에 피가 튀지는 않았지만 깊게 배인 듯 역할 정도로 강한 냄새가 났다.
‘분가라고 해도 제법이었지. 역시 남궁세가인가. 천주산과 합비, 그리고 청양(靑陽)에 있는 분가들을 모두 합하면 이백 명 정도였군.’
이미 모두 죽였다.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게 육신을 잘라 냈다.
공포가 퍼지지 못하도록 목과 성대를 도려냈다.
언뜻 잔인하지만.
자신이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하도록.
죽을 때 죽을지언정 그때까지는 평온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그것이 천일영이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친절이었다.
‘그래도 죽을 때의 표정은 모두 같았지만.’
무거운 발걸음이어도.
천일영은 묵묵히 남궁세가의 본문이 있는 안경을 가로질러 길을 걸었다.
* * *
콰앙!
남궁세가의 현판이 걸려 있는 거대한 정문이 터져 나갔다.
나무들은 수만, 수십만 갈래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남궁세가의 무인 중에서 무공이 약한 자 일부는 몸이 날아가기까지 했다.
“침입자다!”
“감히 창천에 남궁 하나만이 있을 뿐인데 사도의 무리가 정신이 나간 채 이곳을 찾아왔구나!”
“모두 나무 분진이 사라지면 적을 파악하고 포위하라!”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분진이 사라지길 기다렸다.
휘이이잉!
분진의 가운데에서 무엇인가 빛이 번쩍인 듯했다.
순간.
“커…….”
“윽…….”
“으…….”
외마디 비명도 끝까지 지르지 못하고 목이 베여 날아갔다.
“미친! 고수다. 다들 진형을 만들어라.”
“네.”
본문을 지키는 무인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박살 난 문으로 천천히 다가가는 동안.
“시끄럽군.”
“그렇네요.”
남궁천의 첫째 아들 남궁세강은 비명을 온전히 들으며 방 안에서 차를 마셨다.
“아무래도 손님이 제법 쓸 만한 실력인 모양이다.”
“그러한 듯합니다. 마저 차를 들고 계시는 동안 제가 처리하지요.”
“네가 마실 차는 새로 만들어 놓겠다.”
“네.”
남궁세강은 자신과 차를 마시던 사촌 남궁선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고운 선이 몸을 그리듯 펼쳐져 있고.
무엇보다도 아름다웠다.
사촌만 아니었으면 아마 결혼까지 생각했을 터다.
‘아름다운 것뿐만 아니지. 여자이지만 아깝게 죽은 남궁서우보다 한 수 위의 실력이다. 손님을 처리하는 시간은 반 각도 안 될 터.’
후륵.
차를 마시는 남궁세강은 눈앞에 놓인 검을 바라보았다.
과연 검을 잡을 일이 있을까.
아니.
없다.
남궁선영을 이길 정도라면 중원 오십 대 고수 정도는 턱도 없다.
중원 십육 대 고수 정도는 되어야 초식이 오갈 것이다.
남궁세강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차향을 음미했다.
순간.
‘잠깐, 어째서 남궁의 무인들이 기감에서 이렇게나 빨리 사라지고 있는 것이지?’
눈 한 번 깜빡일 때마다 무인이 수십 명씩 죽어 간다.
그것도 단 한 번에.
‘일격에 남궁의 무인을 수십이나 죽인다고?’
그럴 리가.
무엇인가 긴장의 실 같은 것이 팽팽하게 당겨지다가.
‘툭’하고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인들과 사용인을 피해서 날아가는 검에 수십이 죽는다는 것은!’
그냥 고수가 아니었다.
검로를 자유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
‘젠장. 남궁선영이 위험하다!’
남궁의 무인이 수백이나 죽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초고수는 수백의 무인보다 귀하고 중요하다.
남궁세강은 급히 몸을 일으켜 검을 잡으려 했다.
그때.
콰장장창!
남궁선영의 몸이 문을 뚫고 날아 들어왔다.
문을 뚫은 것도 모자라 벽에 몸을 들이박기까지 하니.
“선영! 괜찮으냐!”
남궁세강은 급히 남궁선영의 몸을 들어 올렸다.
순간.
‘머리가…….’
없었다.
몸 위로는 아무것도.
“크아아악! 어떤 놈이 이런 발칙한 짓을!”
남궁세강이 검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휘이잉!
“컥…….”
어느새 자신의 목이 검날에 꿰뚫려 있었다.
일직선으로 깨끗하게 목을 관통하는 공격.
피도 거의 튀지 않았을 정도로 깨끗한 찌르기였다.
‘오는 것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젠장…….’
풀썩.
남궁세강은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신형이 무너지듯 쓰러졌다.
휘익.
천일영은 검날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느리다. 남궁세강과 남궁선영이라는 이름값에 못 미치는 실력이었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번에도 익숙해지지 않는 피 냄새가 천일영을 괴롭혔다.
‘본문에서 이백인가. 하루에 거의 사백 명을 죽이다니.’
고개가 떨궈졌다.
미칠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아무리 살인귀라고 해도.
정도가 있었기에 천일영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때.
스으으윽.
등 뒤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천일영이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니.
남궁세강이 일어서서 검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아프잖아, 이 개X끼야.”
“심장은 분명 멈췄을 텐데. 너도 같은 종류의 인간이었나.”
남궁세강의 목을 꿰뚫은 상처가 아물어 가고 있었다.
하얀 연기와 함께.
“네놈의 모습을 보니 죄책감이 덜어지는 기분이군. 마땅히 죽여야 할 것을 없애버린 것이니.”
“네놈의 목을 잘라 안경의 성채에 걸면 기분이 풀리겠군. 네놈은 남궁의 발아래에도 못 미친다는 것을 알게 해 주마.”
끈적하고 기분 나쁜 정적이 공간을 감싸고.
천일영과 남궁세강은 서로의 목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순간.
검날이 달빛을 반사하며 동시에 튀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