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신귀환기-188화 (189/270)

188화

지천번회는 아무도 몰라야 하지만.

그 이름 정도는 알려져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실체를 찾을 수 없으니 그대로 묻혀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질 것이 자명했기에.

그런데 증거라니?

남궁천은 당황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지천번회가 존재한다는 증거라니,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하오문의 전 문주 세강협, 그가 지천번회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는 정보가 하오문의 문주의 입에서 직접 나왔다면 되겠습니까?”

“세강협?”

그걸 내가 알 리가 있나.

남궁천의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그런 일이 있었나? 망할! 하필이면 하오문의 문주를! 지천번회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가.’

일그러지는 얼굴로 드러나는 당혹감에 청강이 눈빛이 더욱 빛났다.

“지천번회가 이미 망한 흑도 조직 미흑천의 강일택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도 나왔습니다. 절강성에 문의하면 직접 승선포정사사가 사실이라는 증표를 발행한다 했고, 이것이 그 증표입니다.”

촤악.

청강이 종이를 펼치자 절강성에서 직인까지 찍어 내보낸 문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천번회의 위치를 알려 주는 사람에게는 금화 열 냥을 포상한다는 이야기까지 적혀 있습니다.”

“…….”

남궁천의 얼굴은 질리다 못해 새파래졌다.

‘절강성의 직인까지 있다면 빼도 박도 못하겠군.’

남궁천의 기울어지는 고개에.

청강은 이제 확신한다는 마음 하나만이 선명하게 가슴속에 남았다.

맹주라는 이자가 그동안 해 온 일은 악행임이 분명했다.

“지천번회는 흑도 조직에 가까운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들이 생긴 역사와 활동 내용도 하오문에서 보냈습니다. 무려 일백 년이 넘은 사악한 패도의 무리. 혈교보다도 더 지독한 일을 일삼았더군요. 호남성에서 생겨 세를 넓히다가 이제는 무림맹까지 침투했고, 그들과 합을 맞춰 일을 저질러 온 것이 남궁천, 바로 맹주이시오.”

“말도 안 된다!”

“증거 앞에서 부정한들 그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청강의 손에 종남파를 치라고 사천당문에 보낸 전장의 전표 기록이 들려졌다.

바로 당강용이 화해의 선물로 주었던 것.

이제야 그것을 손에 들고 일그러진 남궁천의 얼굴을 바라보는 청강은 원한이 씻겨 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것도 지천번회와 손을 잡고 한 일이 아닙니까?”

“그…… 그것은 나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모른다고 하시겠지요. 그동안 왜 종남파를 치려고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흑도 무리와 손을 잡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나는 모른다고 했다!”

청강의 얼굴에 미묘하고 기분 나쁜 웃음이 지어졌다.

정말로 지천번회와 관련이 없을까.

이 개 같은 남궁천이라는 놈 때문에 죽은 전 장문인과 무인들을 생각한다면.

핑계여도 좋고 진실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단지 냄새나는 쓰레기를 치울 뿐.

“남궁천, 당신이 가진 무림맹 맹주의 자리를 이 자리에서 박탈할 것을 공표합니다. 아니, 이제는 존댓말도 필요 없을 듯하군. 더는 맹주도 아니니.”

“뭐라고? 이놈이 건방지게 어딜 감히!”

“아직도 말귀를 못 알아들은 것인가. 당장 눈앞에서 사라지라는 말을 에둘러 전한 것인데.”

“네 이놈! 다 무너져 가는 종남파의 장문인 따위가 어딜! 청가아아앙!”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 당신이 저지른 죄로 인해 능지처참을 당해도 모자라지만, 남궁세가가 멸문한 것을 참작하여 이대로 그냥 놓아준다는 것을 말이다. 마지막 남은 인정을 베푼 것이니 그만 인정하고 집으로 돌아가라. 죄인에게는 반말 정도가 아니라 욕까지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정도로 참아 주마.”

“네…… 네……이……놈…….”

남궁천의 목소리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그 이상 무슨 말을 할까.

덜덜덜.

손이 떨렸다.

기가 막혔다.

분노도 끓어올랐다.

당장 기운을 끌어 올려 이놈들을 전부 죽여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결국 무림맹의 해체와 함께 나 역시 중원에서 쫓기는 몸이 된다. 남궁세가의 재기도 포기해야 한다.’

어찌할 수 없이 수긍할 뿐.

천천히 머리가 땅을 향해 기울었다.

그때.

새로 무림맹의 총관이 된 목연호가 검을 들고 남궁천의 앞에 섰다.

“맹주님의 개인 물건이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가. 고맙군.”

항상 맹주의 집무실 한편에 놓여 있던 어용지천참대검(御用地天斬代劍).

남궁천은 검을 받아 들었다.

“남은 물건이 있으면 제가 정리하여 남궁세가로 보내도록 하지요.”

“부탁하지.”

비척거리는 발걸음으로 등을 돌리려 하자.

목연호의 목소리가 남궁천을 붙잡았다.

“맹주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직 모르시는 것 같아서…….”

“무엇을 모른다는 것인가. 이제는 놀랄 기운도 없으니 말하게나.”

“그것이……. 남궁세가의 지회가 모두 사라졌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맹주님이 충격을 받은 상태라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고 지금까지 온 것 같습니다만.”

사실은 지회까지 당했다고 말했으면, 말을 전한 자는 남궁천의 손에 죽었을 터.

목연호가 무림맹에 속한 문주와 장문인들이 뒤에 있는 지금이 말을 전할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남궁천의 떨리는 목소리가 뒤를 이어 왔다.

“뭐…… 뭐라고?”

“단 이틀 사이였습니다. 겨우 그 시간 만에…….”

“아…… 알겠다.”

더는 화도 나지 않는다.

그저 허망하기만 했다.

지회까지 사라졌으면 이제 남궁세가는 정말로 멸문이었으니까.

게다가 중원에 퍼져 있는 지회를 이틀 만에 박살 낼 정도면 철저하게 계획을 한 이후, 여럿이서 실행한 것.

원한을 많이 쌓았으니 누가 한 짓인지도 모른다.

‘업보가 되돌아온 것인가.’

웃음이 나왔다.

남궁천은 실성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아하하하하하!”

크게 웃으니 모든 감정이 사라진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다.

아니, 사실은 이미 미친 것이 아닐까.

실없는 웃음이 계속되는 사이.

목연호가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그간 무림맹에서 조사한 것입니다. 이제 저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니 알려 드려도 되겠지요. 범인은 어둠에서 홀연히 나타나 남궁세가를 어지럽힌 후, 다시 어둠으로 사라진 듯 목격자가 없습니다.”

“초고수인가. 하긴, 그 정도의 실력이니 남궁세가를 무너트렸겠지.”

“살아남은 남궁세가의 사용인들도 조사했지만, 범인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너무 빨라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합니다.”

“그렇구먼. 고맙네.”

“하나 더. 서후량이 찾아뵙는다고 했습니다.”

“알았다. 이만 들어가거라.”

“살펴 가십시오.”

목연호가 고개를 한 번 더 숙인 후 무림맹으로 돌아가자.

남궁천은 웃음을 멈추고 광인의 눈동자로 세상을 바라봤다.

‘이제 남은 것은 십오 세 미만의 남궁세가 아이들인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런 수모를 당하고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남궁천의 머리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떠올라 있었으니.

‘실험은 끝났다. 비천운에게 했던 것과 같이 아이들에게 내공을 키우는 방법을 가르친다.’

비록 배우는 동안 구 할의 아이들이 죽게 되겠지만.

무려 30갑자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다.

‘남궁세가를 다시 일으키는 데 구 할 정도의 목숨 따위 아까울 것도 없지. 앞으로 이 년이다. 이 년 만에 맹주의 자리를 다시 찾아 주마. 그것도 이 자리에서 나를 내쫓은 놈들을 전부 죽이고!’

남궁천은 이를 드러내고.

꽉 쥔 주먹에 들린 어용지천참대검을 들어 올리며.

더는 잃을 것이 없는 미친 사람의 발걸음으로 휘적거린 채.

남궁세가의 본문이 있는 안휘성을 향했다.

* * *

전이화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천일영을 바라봤다.

이제 막 잠이 깨서 잘 보이지 않는 눈을 비비며 자세히 바라보니.

공자는 검을 차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공자님? 오늘도 동정호에 나가 보시게요?”

“아니다. 동정호는 볼 만큼 봤구나.”

“그럼 어딜 가시게요?”

열흘이 넘도록 기루에 있던 손님은 오 일 전부터 낮에는 온종일 동정호를 돌아보고, 밤에는 술만 마셨다.

“네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동정호에 무슨 일이 생기나 궁금했던 참에 이리저리 둘러보기는 했다만, 내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구나.”

“그 말씀을 믿으신 것이 더 재미있습니다.”

“실감 나게 이야기한 네 말재주 덕분이겠지.”

전이화가 말하기로 십 개월 후에 동정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차경철에게 이야기했다지만.

직접 이야기를 들어 보니 추가로 꽤 많은 이야기가 나왔다.

‘전이화에게 서후량이 천마신교가 있는 방향인 광동성과 광서성으로는 발길도 하지 말라고 했단 말이지. 게다가 강서성과 절강성으로도 가지 말라 하고, 섬서성이나 사천성, 그리고 감숙성으로 가라고 했다면…….’

농담치고는 지나치게 구체적이었다.

‘내가 사는 절강성으로도 가지 말라고 했다. 재미있군.’

절강성에서도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그때.

푸드드득.

전서구가 천일영이 있는 방 안으로 날아들어 왔다.

느닷없이 날아들어 온 새 때문에 화들짝 놀란 전이화가 잠을 깨려고 마시던 물을 뿜었다.

푸확.

“콜록, 콜록. 아니 웬 저리 큰 새가!”

“놀라게 했구나. 미안하다.”

입에 가득 담았다가 뿜어낸 물.

창피하여 전이화가 다급하게 바닥을 닦는 순간이었다.

덥석.

공자가 손을 잡자 전이화의 얼굴이 붉어지고.

그 의미가 뻔했기에 전이화는 고개를 숙인 채 작은 목소리를 내었다.

“조금 일찍 일어나셨다 했더니 아주 가시는 거군요.”

“이곳에 제법 오래 있었구나.”

아쉬움이 가득한 전이화의 얼굴을 보자.

천일영은 주머니에서 금화 열 냥을 꺼냈다.

“십 개월 후에 이곳을 떠나거라. 이 돈이면 낙적 비용으로 사용해도 충분하겠지.”

“미치신 겁니까?”

전이화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기녀입니다. 한번 스치고 떠나면 그만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거금을 내놓다니 진정 제정신이십니까?”

“준 돈을 덥석 받지 않고 미친 것 아니냐고 따지는 사람이니 주는 것이다.”

“하…… 하하하. 그런 이유로 이런 거금을……. 공자님, 저에게 낙적 비용 따위는 원래부터 없습니다. 그러니 돈을 넣으시지요. 못생긴 퇴물 기녀에게 돈을 받을 기루의 주인도 없을뿐더러, 저를 사겠다는 사람도 없으니, 어차피 저는 몇 개월 후에는 이 기루에서 나가야 합니다.”

“그때부터는 어찌 살 것이냐.”

“늙고 퇴물이 된 기녀가 할 일은 몸을 파는 것뿐이잖습니까. 창부의 삶이 앞으로의 제 길이 될 것입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내가 너를 낙적하도록 하지. 불만은 듣지 않으마.”

“네에?”

천일영이 전이화를 번쩍 안아 들었다.

“꺄악!”

“여주인의 방이 어디인가?”

“한 층 아래로 내려가서 오른쪽 두 번째 방입니다.”

“빠르게 대답하는 것을 보니 따라오기 싫지는 않은 모양이군.”

“그저…… 창부보다는 낫지 않을까 해서요.”

“솔직해지니 좀 더 귀여워 보이는구나.”

“또 거짓말을…….”

천일영은 한 층 아래로 내려가서 전이화를 내려놓지도 않은 채 방문을 열었다.

드륵.

급작스럽게 문이 열리고.

안겨 있는 전이화까지 보자 여주인이 눈이 휘둥그레진 채 입을 쩍 벌렸다.

“이 여인을 사도록 하지. 얼마인가.”

“네? 이화를 사신다고요? 다른 좋은 아이도 많습니다만…….”

“다른 아이는 필요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 여자다.”

찾는 손님이 없어 돈도 모으지 못한 기녀.

못생겨서 재주를 익혀 밥벌이만 겨우 했지만, 불만 한번 토해 내지 않은 마음 착한 사람이다.

‘괴상한 취향이지만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 나타나서 다행이네.’

여주인은 욕심을 버리고 입을 열었다.

“아주 돈을 안 받으면 나쁜 선례가 생기니 은자 다섯 냥만 주시지요.”

“금화 다섯 냥이다.”

“네에?”

여주인과 전이화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을 바라보는 시선.

‘기루에 와서 돈을 쓸 게 아니라, 그 돈으로 의원을 찾아가야 하는 거 아냐?’

여주인이 눈앞에 놓인 금화를 바라보는 사이.

“네 방이 어디냐. 짐을 챙기거라.”

“앞에서 왼쪽으로 세 번째 방입니다.”

천일영이 방문 앞에 전이화를 내려놓자 쏜살같이 들어가서 짐을 챙긴다.

“후회하지 않으시죠? 금화를 다섯 냥씩이나 주고 저를 낙적하시다니요.”

“괜찮다.”

“나중에 무르기 없기예요?”

“안 무른다. 속고 살기만 했느냐.”

전이화가 짐을 챙겨 나왔다.

봇짐 반도 안 되는 양.

가난한 기녀에게는 겨우 이 정도가 전 재산이지만, 전이화는 봇짐을 소중하게 안아 들며 입을 열었다.

“속고만 살았습니다. 저에게 정을 준다고 하고 같이 살자는 말을 한 사람이 몇 명일 것 같습니까. 그중에 약속을 지킨 놈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직 저를 가지고 놀 생각뿐인 사람들 뿐이었는데 어찌 믿겠습니까.”

“그렇군. 나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내가 너를 데려갈 곳은 좋은 곳이다.”

“큰돈을 마구 쓰는 걸 보니 조금 미친 것 같기는 한데 일단 믿어 볼게요.”

천일영은 전이화를 안아 들고 밖으로 나섰다.

못생긴 기녀의 쓸쓸한 퇴장인 듯.

아무도 배웅해 주지 않는 전이화를 안고 천일영은 천지일축공으로 하남성을 향해 날아가듯 그 신형을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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