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신귀환기-192화 (193/270)

192화

새하얗고 기다란 손가락.

그곳에 반짝이는 가락지가 끼워졌다.

스윽.

손가락을 등불에 비춰 보니 예쁜 손가락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가격만 따져도 금화가 수 냥쯤 오갈 만큼의 고가인 물건.

침을 삼킬 만큼이나 탐이 났다.

하지만 여인은 손가락에서 가락지를 빼내어 건네준 남자에게 돌려주었다.

“이것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어째서이냐? 훔친 물건도 아니고 내가 벌어서 산 물건이다. 내 온 성의를 다해서 너를 주려고 산 물건인데 거절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단지 가락지일 뿐이라면 대인의 호의를 감사하게 생각하며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마음이 담긴 물건. 그러하기에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아…….”

답답한 마음에 목이 탄다.

거칠게 술 한 잔을 들이켜고.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나 내가 싫은 것이냐.”

“싫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참으로 속을 타게 만드는구나. 네가 나에게 나쁜 점을 이야기하면 고칠 것이고, 바꾸라 하면 속히 그리할 것이다. 속 시원히 말을 하여 타들어 가는 내 마음을 진정시켜 다오.”

여인은 고개를 숙였다.

거절하는 이유가 달리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훌륭한 분이시고 이곳에서의 영향력도 강대하시지. 또한 인물도 좋고 성품 또한 나무랄 데가 없는 분이다. 이런 분이 나를 사모해 주시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화려한 방과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신을 보니 여인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다름 아닌 자신의 있는 장소와 직업이 문제이다.

여인도 남자에게 마음이 있었다.

아니, 사실은 자신 하나만 바라봐 주는 이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여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첩으로 들이신다면 아마도 대인을 따라갔을 것입니다. 그러한데 정실로 들어와 달라고 하시다니요. 제 직업을 잊으셨습니까. 저는 기루에서 일하는 기녀입니다.”

“겨우 그런 이유에서였느냐. 기녀라는 직업이 어때서 그러한 것이냐. 춤과 노래, 시와 재주를 파는 것이지 몸을 파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아니, 설령 몸을 파는 직업이었다 해도 내가 너를 마음에 들어 하니 정실로 맞이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더냐.”

“대인…….”

“내 너의 과거로 인해 입을 놀리는 자가 있으면 모두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단호한 남자의 말에 여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들었다.

대인의 진심이 완강하게 버티던 마음을 눈 녹듯 사라지게 했다.

이제 더는 자신을 속일 수 없다는 생각에 입이 열리고.

그동안 참아 왔던 진심이 쏟아져 나온다.

오늘.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못 할 말이다.

“대인, 사실은 저도…….”

“그래, 이야기해 보아라. 네 진심을 말해 다오.”

“저도 대인님을 사모…….”

여인의 말이 끝나기 직전.

드르르륵.

문이 거칠게 열리며 신형 하나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의강아, 여기에 있었구나. 급히 찾을 사람이 있으니 따라오거라. 한시라도 서둘러야 하는 일이다.”

“공자님?”

윤의강은 멍한 눈으로 천일영을 바라보다가.

기녀 송체란을 바라보고.

이내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못 갑니다. 지금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데요! 제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십니까!”

“내일 또 오면 되지 않느냐.”

“내일이라니요! 안 됩니다! 절대 여기에서 못 나갑니다.”

송채란의 말이 ‘사모’에서 끝났다.

다음 말을 들어야 하는데!

“죽어도 못 갑니다. 아니, 차라리 저를 죽이십시오!”

윤의강의 입에서 피를 토하듯 절절한 말이 퍼져 나갔다.

“녀석, 잠시 안 본 사이에 말이 많아졌군.”

파바바밧.

천일영의 손가락이 혈도를 짚자.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진 윤의강은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몸이 되어 송체란에게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가자. 내일 술은 내가 살 테니.”

윤의강은 피눈물을 흘렸다.

‘안 돼. 안 된다고. 오늘이 아니면 안 돼! 게다가 공자님이랑 같이 있으면서 체란이한테 혼례를 올리자는 말을 하라고?’

아무리 소리를 지르려 하고.

버둥거려 봐도 소용없었다.

윤의강은 머릿속에 떠도는 말이 입 밖으로 토해지지 않은 채 그대로 끌려 나갔다.

그리고.

“하필 큰마음을 먹은 오늘…….”

천혜향루의 화려한 방 안을 뒹구는 가락지만이 반짝이는 가운데.

송체란은 허탈한 마음으로 한숨을 내리쉬었다.

사모한다는 말을 어찌 다시 하랴.

‘정말로 큰 용기를 냈었는데……. 다시 어찌 말을 할까.’

아무래도 마음을 전할 날은 멀고도 먼 듯했기에.

송체란은 땅이 꺼지듯 내리쉬어지는 한숨을 그칠 줄 몰랐다.

* * *

하오문 귀주성 지회.

“너무하십니다, 공자님! 일생일대의 기회였는데!”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제가 송체란과 혼례를 치르지 못하면 전부 공자님 탓입니다.”

“아니…… 뭐, 앞으로 잘되겠지. ‘사모’까지는 들었다고 했으니까.”

“바로 거기! 거기가 가장 중요한 거라고요! 눈 한번 감았다 뜰 시간만 늦게 오시지! 뒤를 못 들었잖습니까! 이거 어떻게 책임지실 겁니까.”

“내…… 내일 술 사마. 나는 빠지고. 둘이서 다시 한번 이야기해 보아라.”

“으흑. 어헝헝헝.”

그게 딱 그럴 때일 줄 누가 알았나.

피눈물을 흘리며 종이를 넘기는 윤의강을 보며 천일영은 뒷머리를 슬쩍 긁었다.

팔락. 팔락.

윤의강은 찢어 죽일 듯 천일영을 노려보면서도 연신 종이를 넘기며 빠르게 일을 처리해 나갔다.

“공자님께서 찾는 사람의 이름이 백강천이고, 나이는 육십이 세. 마지막으로 있던 곳이 이곳 귀주성 태강(台江) 근처였다 하셨지요?”

“태강 인근 벌판에 집 한 채만 지어 놓고 있었지. 그것이 팔 년 전이구나. 찾는 데 시간은 얼마나 걸리겠느냐.”

“칠 일만 주십시오. 그 안에 무조건 찾겠습니다.”

화르르륵.

윤의강의 눈에서 맹렬한 불꽃이 타올랐다.

빠르게 넘기는 종이 사이로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

몇 가지의 정보를 확인한 윤의강은 전서구로 보낼 편지를 급하게 적으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 오신 것을 보니 남궁세가뿐만이 아니라 남궁천까지 손을 보신 모양입니다.”

“지금쯤 삼도천을 건너고 있겠지. 그런데 어찌 그것을 벌써 알았느냐.”

“황실에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입막음하고 소문을 진정시키는 실력이 보통이 아니더군요. 역시 황실하고는 척지면 안 된다고 뼈저리게 느끼던 중입니다.”

윤의강은 편지 여러 장을 각각 참매에 매달아 밖으로 날려 보냈다.

푸드드득.

빠르게 일을 처리한 윤의강이 한숨을 돌리자.

천일영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내가 천마로 있을 때 맡긴 검이 몇 자루 있을 것이다.”

“안과 혜에게 주었던 별학맹검과 비룡맹검을 제외하면 세 자루 정도 있을 겁니다.”

윤의강은 숨겨진 방 안에서 검을 꺼내 왔다.

“첫 번째는 아마 금화 열 냥 정도 하는 것으로 이름이 따로 있지는 않습니다. 두 번째는 금화 백 냥 정도 하는 것이고, 세 번째가 화극여월(華極攦刖)이라는 검입니다. 금화 천 냥 정도로서 명검 중에서도 이름이 드높아야 하는데…….”

“여인의 손에 맞을 만한 검이군.”

검면이 얇고 길이도 짧은 편에 속한다.

게다가 짙은 남색의 검집에 흐르는 구름이 그려져 있기까지.

하지만 윤의강은 고개를 저었다.

“여인이 쓰기에 적합하지는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지?”

“검을 들어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화극여월을 손에 들자 천일영의 얼굴에 뜻밖이라는 표정이 지어졌다.

“검의 크기에 비해서 무게가 상당하군.”

“빠르게 검로를 그리기 위하여 형태만 작게 만든 검입니다. 사용할 줄 아는 무인은 극히 적겠지만 보통 위협적인 물건이 아닙니다. 덕분에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요.”

“검속을 올려 극단적으로 빠르게 사용하는 데 특화된 것인가. 게다가 무게까지 제법 나가니 이 검의 특성을 살릴 만한 사람은 거의 없겠구나. 하지만 마음에 든다. 이걸로 하지.”

“사실 이것 말고 공자님이 사용하실 정도의 검은 여기에 없습니다. 금화 백 냥짜리라 해도 금방 부러질 테니까요.”

“무극지검도 부러졌다.”

“네에? 그 천하제일의 명검이요?”

윤의강이 기겁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동안.

천일영은 생각에 골몰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검을 만들 생각을 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극단적으로 사용자가 적은 이러한 검에 만년한철을 사용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스윽.

날을 불빛에 비춰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명검이라면 응당 쓰여 있을 검의 이름 밑에 아주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역시 이 사람이 만든 건가.”

일부 명검의 제작자는 자신의 이름을 건다는 의미로 예명을 새긴다.

화극여월에 새겨진 글씨는 담예(潭銳).

바로 천일영이 찾는 사람, 백강천의 예명이었다.

* * *

휘이이이잉.

쏴아아아아.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 한적한 바닷가.

청명한 하늘이지만 몹시도 강한 바람이 부는 이곳에서 서후량은 이십 대 중반 정도의 여인을 발견하자 손을 흔들었다.

“여기에 계셨습니까. 한참 찾았습니다.”

“생각보다는 빨리 왔네.”

“죽도록 고생했지요. 겨우 왔습니다.”

한적한 곳에서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아직은 차가운 바닷물에 발을 담근 채 웃고 있는 여인.

온갖 미인을 만나 본 서후량이지만 이 사람을 볼 때면 언제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만큼이나 미모의 여인이었으니까.

여인은 물속에서 혀를 내밀고 있는 조개를 꺼내 들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어떻게 됐어?”

“남궁세가는 멸문. 남궁천은 죽었습니다.”

“아쉽게 됐네. 거의 다 온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충격을 받지는 않으시네요?”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겠구나 싶은 정도의 감정이지.”

내밀고 있던 혀를 여인이 손가락으로 툭 치자 조개는 입을 다물고 죽은 척을 했다.

여인은 조개를 다시 바닷물에 넣고는 기지개를 켰다.

“범인은 누구?”

“사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할 정도의 예기를 뿜고 있었거든요. 실전에 익숙한지 싸움을 하면서도 기감을 거두지 않고 있는 듯했습니다. 조금만 더 가까이 갔으면 아마 제 존재도 들통났겠지요.”

“그 정도로 대단해?”

“그야 남궁천을 죽였을 정도니까요.”

“그 사람의 경지는?”

“모호합니다. 마기도 아니고 정파의 기운도 아닌 것이 어느 문파인지, 어떤 무공을 사용하는지조차도 가늠이 안 됩니다.”

“흐응, 재미있네.”

서후량은 허리춤에서 어용지천참대검을 꺼내 여인에게 넘겼다.

“겨우 회수했습니다. 운이 좋아서 검이 멀리 날아갔기에 가져온 것이지, 아니었으면 검을 되찾지 못할 뻔했습니다.”

“엄살은. 그래도 결국 가져왔을 거면서. 네 경지를 감당할 사람이 중원에 있어?”

“그렇다고 해도 솔직히 이번만큼은 자신 없었습니다.”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너스레를 떠는 서후량을 뒤로하고.

여인은 어용지천참대검을 뽑아 검날을 들여다보았다.

“남궁천에게 맡겨 놓았던 동안 제법 많은 피를 먹인 모양이네. 기운도 많이 빨아들여서 검날이 검게 변했고. 이 정도면 쓰는 데 지장은 없겠어.”

“조금 아쉽습니다. 남궁천은 그렇게 죽으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앞으로 해 줘야 할 일도 많았고요.”

“남궁천이 제법 마음에 들었나 봐?”

서후량은 웃음을 지었다.

“사람을 아낄 줄 알았지요. 그리고 아낌없이 베풀기도 했고요. 저도 그에게서는 많은 도움을 받았고, 세심하게 신경 써 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결코 그릇이 작은 사람은 아니었지요.”

“그래도 바보인 것은 변하지 않아. 영원히 살 수 있고 끝없이 강해지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 버리다니.”

“역시 아쉬움이 남으시는 것이지요? 그도 그럴 것이 남궁천은 당신의 손주이지 않습니까.”

여인은 서후량의 말에 잠시 고개를 숙이고 물속에 잠겨 있는 발로 조개를 건드렸다.

“별로. 그 정도였으니까 죽은 것일 뿐. 나 정도로 오래 살면 희로애락 같은 감정이 점점 사라져.”

“하긴, 일백 년 전 역사에 기록된 마지막 현경의 무인. 남궁무애가 바로 당신이니까요.”

남궁무애는 서후량의 말에 별로 관심 없다는 듯 여전히 조개를 가지고 놀았다.

“지천번회의 이름이 중원에 알려졌습니다. 다들 눈을 뒤집고 지천번회를 찾는 중입니다.”

“상관없어. 찾을 수도 없고, 흔적조차도 존재하지 않는걸.”

남궁무애는 조개에서 눈을 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천번회는 서후량 너하고 나, 단 둘뿐이니까.”

덤덤하게 말을 내뱉은 작은 입이 다물어지고.

남궁무애는 별일 아니라는 듯 조개와 다시 놀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