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실컷 재미있는 시간을 보낸 남궁무애가 바닷물 속에 소중한 듯 조개를 내려놓았다.
서후량이 의아한 듯 물었다.
“조개는 그냥 물속에 두시고 가시는 것입니까. 발치에 꽤 많은 수가 있는데 먹으려고 모아 두신 줄 알았습니다.”
“먹다니, 불쌍하잖아. 내일 또 같이 놀 거야.”
물에 젖은 발로 신을 신고.
남궁무애가 서후량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너에게 줄 게 있어. 정확하게는 혈천회(血天會)에서 주라고 한 것이지만.”
“동정호에서의 일이 가까워지니 혈천회도 제법 급한가 보군요.”
“급한 건 아닐 거야. 다만 후일 대업(大業)을 이루고, 서로 공을 얼마나 세웠는지로 싸우게 될 테니 미리 일을 나누자는 거겠지.”
“혈천회의 수장을 본 적은 없지만, 상당히 똑똑한 사람인 듯합니다.”
“만나지 않는 게 좋아. 가능하다면 죽을 때까지. 그건 사람이라고 부를 수도 없어.”
남궁무애는 바닷가 근처에 세워진 작은 장원의 문을 열었다.
주인을 알리는 현판 하나 없는 장원의 안으로 들어서자 서후량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세간살이가 하나도 없는 건 여전하군요.”
“밥은 밖에서 먹고, 옷이야 돈을 주고 빨아 달라고 하면 되니까. 이래 봬도 삼 일에 한 번씩 동네 아낙이 집을 청소해 주러 와.”
“먼지가 없는 것은 알겠지만 다른 것도 없으니 하는 말이지요. 옷도 지금 입고 있는 거 한 벌뿐이지요? 빨래하는 동안에는 무엇을 입고 있으신 것입니까.”
“이불.”
덤덤하게 말한 남궁무애는 장원 안에 딱 하나 있는 살림인 이불 옆에서 뒹구는 책을 집어 서후량에게 건넸다.
“이걸 일만 권 필사(筆寫 - 책을 베끼는 것)해서 중원에 뿌려.”
“만 권이요?”
서후량은 종이를 두세 장 넘기고는 곧바로 헛기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쿨럭, 쿨럭. 무공 책? 이런 것을 왜 중원에 뿌리라는 것입니까. 만 권이면 필사를 시키는 데 종잇값과 인건비까지 금화가 수십 냥은 깨질 일입니다. 게다가 이름도 알지 못할 이런 하급 무공을…….”
“좀 더 읽어 보면 알 거야.”
심드렁하게 말을 내뱉고 툇마루에 앉아서 다리를 흔들며 하늘을 바라보는 남궁무애의 모습.
이미 책 따위는 마음에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서후량은 남궁무애를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기에.
시키는 대로 이어서 책을 읽었다.
‘보통의 무공 책들은 비급을 숨기려는 이유로 두루뭉술 뜬구름 잡는 듯이 써 놓는 경우가 많지. 나머지는 구전으로 이어지고. 그런데 이건 반대군.’
검술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지만 지나치게 상세하다.
또한 내공심법의 방법도 숨을 몇 번 들이마시고 얼마만큼 참아야 하는지.
자세는 어떻게 해야 하고, 고개를 드는 위치까지 완전한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삼류 무인이라도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나 반색하며 기뻐할 만한 것.
서후량은 심드렁하게 연이어 책장을 넘겼다.
‘이따위 책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검법의 설명이 끝나고 권법을 가르치기 전 또 다른 내공심법을 설명한 부분에 이르자.
서후량은 끼쳐 오르는 소름에 하마터면 책을 떨어트릴 뻔했다.
“이…… 이것은!”
“눈치챘어? 만 권이 부족하다 싶으면 이만 권쯤 뿌려.”
“뿌리라는 말은…… 싸게 팔라는 말입니까.”
“응, 누구나 살 수 있게 해. 저잣거리의 삼류 무공 책도 동전 삼십 냥 정도 하니까, 이 책은 무공의 성취가 대단하다는 소문까지 만들어서 동전 열 냥 정도.”
“왜 이런 책을…….”
“이제 영약은 끝이잖아. 그러니까 대체할 것을 찾는 것뿐이야. 그리고 돈은 항상 들르는 전장에 가서 내 이름을 대고 찾아 써.”
별일 아니라는 듯.
여전히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툇마루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남궁무애의 모습에 한숨이 나온다.
“제가 그 돈을 전부 들고 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보셨습니까. 전장에 있는 돈이 금화 만 냥을 가볍게 넘습니다.”
“괜찮아. 너라면 안 그럴 거라고 생각하니까. 만약 어느 날 돈 욕심이 생기거든 훔쳐서 도망가 봐. 어디까지고.”
툇마루가 따뜻했는지 남궁무애는 기지개를 켜고는 드러누워 눈을 감고.
서후량이 지켜보는데도 그대로 잠이 들었다.
‘도대체 이 사람은…….’
꽤 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 때문에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자신한다는 서후량도 이 사람의 감각만큼은 이해할 수 없었다.
‘조개는 애지중지하면서 불쌍하다고 놓아주고. 이 책이 퍼지면 벌어질 일이 다리가 떨려서 서 있기도 힘들 지경인데! 이 위험한 물건을 그냥 던져 주고 잠이 들다니.’
삶의 경계선이 모호하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의 기준이 보통의 사람과는 너무도 달랐다.
게다가 도망갈 수 있으면 가 보라는 말.
‘믿는 것인지, 아니면 도망가도 잡을 수 있다는 자신이 있는 것인지.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무관심일지도 모른다.’
곤히 잠들어 있는 남궁무애의 얼굴을 한 번 힐끔 바라본 서후량은.
왜인지 무섭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
빠르게 장원의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
* * *
부비적. 부비적.
쌀쌀한 한기가 들어 남궁무애는 눈을 떴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멍한 눈으로 하늘을 봤다.
“언제 잠이 든 거지. 벌써 밤이네.”
으드득.
불편하게 잠을 잤는지 기지개를 켜니 몸에서 소리가 났다.
남궁무애는 다시 툇마루에서 앞뒤로 다리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왔으면 깨울 것이지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워낙에 곤히 자고 있어서 그대로 두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남자 한 명이 툇마루에 앉아서 술병 두 개를 내밀었다.
“손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서 술을 들고 찾아왔더니 설마 태평한 얼굴로 자고 있을 줄이야.”
“별로 슬프지는 않네.”
“살아오며 떠나보낸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겠지. 그렇다고 해도 여인의 몸으로 툇마루에서 잠을 자다니 무방비한 것은 여전하구나.”
“백 살이 넘은 할머니를 누가 건드려.”
피식.
남자는 웃음을 지으며 술병을 열었다.
“금존청이다. 돈이 쌓여 있는데도 구하기가 어려워서 한참을 기다렸지. 너하고 마시려고 가지고 왔다.”
“혈천회는 어쩌고?”
“알아서 돌아가겠지. 해야 할 일은 전부 전해 두었다.”
남자는 술잔까지 챙겨 왔는지, 어느새 품에서 꺼낸 잔에 술을 채웠다.
조금 걱정이 어린 남자의 눈동자에 남궁무애의 얼굴이 비치고.
그는 술잔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고 이 외진 곳에서 살 거냐.”
“여기는 내가 한참 멋모르고 살던 백 년 전의 그때와 비슷해.”
“백 년이 지나도록 변하지 않을 정도로 변방이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오십 년 전에 지천번회는 삼천 명의 무인이 있었다. 아무리 그때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는 해도 이곳에서 평생을 살 생각인 것이냐.”
“응. 오십 년 전에 신선들과의 싸움 이후 그들의 무덤을 삼천 개 만들면서 맹세했어. 조용히 지내겠다고.”
꿀꺽.
기분 좋은 향기를 콧가에 남기고.
남궁무애와 남자는 술을 들이켰다.
흐응흥. 흐흥.
기분이 좋은지.
아니면 술 때문인지.
남궁무애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남자를 바라보며 술잔을 내민 남궁무애가 말했다.
“태고의 신선이 피를 나눠 준 혈족은 못 찾았어?”
“딱히 마음먹고 숨은 것도 아닐 텐데 꼬리조차 보이질 않는군.”
“혈천회의 주인인 계도 해내지 못하는 일이 있구나.”
“계라는 이름은 이제 안 쓴다. 지금은 하은월이라는 이름이면 된다.”
은월(隱月).
숨은 달이라는 이름.
“지금의 나에게 딱 맞는 이름이지.”
서른이 조금 넘은 듯하지만, 맑고 깨끗한 얼굴에서 풍기는 단정함이 많은 여인에게 연정을 품도록 했을 터.
부드러운 표정이 남자답지 않은 고운 머릿결에 가려져 더욱 미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하지만 얼굴과는 전혀 다른 싸늘한 눈동자.
항상 남궁무애가 볼 때마다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얼음 같은 눈이다.
그 차가운 눈이 웃음을 따라 살갑게 휘어졌다.
“이제 절강성 항주를 비롯하여 강소성과 복건성 바닷가의 도시들을 공격할 거다. 왜구들과 해적들을 그동안 모아 왔으니, 규모로는 황실의 군함을 능히 감당하고도 남겠지.”
“곧 전쟁이라면 어용지천참대검이 필요할 테니 가져가. 원래 네 것이었고, 내 손주가 꽤 많은 피를 먹였으니 쓸 만할 거야. 공격은 언제부터 시작?”
“명령해 놓은 대로라면 왜구들을 시작으로, 아마 며칠 후부터 조금씩 공격을 시작해서 각 지역의 약점을 캐내겠지. 때마침 남궁천이 죽는 바람에 무림이 혼란한 상태여서 황실에서 돈을 주고 무인들을 고용하기 힘들 때라 일이 쉬워졌다. 남궁천이 떠나면서 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신중하네. 하긴, 무려 이백 년 동안 계획해 온 일이니.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때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잖아.”
“몇 년 천을 살아온 것에 비하면 별거 아닌 시간이다.”
“역시 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겠어. 그래도 해남…….”
남궁무애는 해남도를 삼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다름 아닌 남궁천이 실패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툇마루에서 흔들던 다리를 멈추고.
남궁무애는 술잔을 들어 올렸다.
“역시 손주 남궁천이 죽은 건 아쉽네. 이 잔은 남궁천을 위해서 드는 거야.”
“나도 네 손주의 죽음 정도는 슬퍼하게 해 다오.”
“얼굴도 모르면서.”
지천번회의 주인과 혈천회의 주인은 죽은 남궁천을 위해 달빛 아래로 술잔을 들어 올렸다.
* * *
칠 일 후.
“찾았다! 이 망할 놈의 백강천!”
“호언장담한 대로 칠 일 만에 찾았구나.”
“하오문의 문주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불가능했겠지만요.”
윤의강은 솔직하게 말하고 전서구에 실려 온 편지를 천일영에게 넘겼다.
“체란이가 이제 만나 줘야 할 텐데 말입니다. 크흑.”
“여전히 맡은 일을 끝내기 전에는 만나 주지 않는다고 하더냐.”
“네, 좋은 남자라면 맡은 일을 외면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요. 여인에게 한눈을 파는 것보다 해야 할 일을 먼저 끝내야 한다니, 정말로 훌륭한 여자가 아닙니까.”
아니, 그건 용기를 내어 속마음을 말하려고 했는데, 그것이 중간에 끊어졌으니 창피해서 피하고 있는 거 아닌가?
천일영은 왜인지 송체란의 마음을 이해했지만.
애써 윤의강에게 그것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모른 척하고 시침을 뚝 뗀 천일영은 슬슬 도망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생 많았다. 당분간은 괴롭히지 않을 테니 마음껏 기루에 있거라.”
“이제는 체란이가 속마음을 말할 때까지 천혜향루에서 나오지 않을 생각입니다.”
아니, 그게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거라니까.
끈질기게 치근덕대면서 대답을 강요하면 퇴짜 맞는데.
그 전에 말할 계기를 만들어야지.
하지만 천일영은 역시 입을 꾹 다물었다.
‘둘이 알아서 하도록 두는 게 제일 좋지. 그렇지 않아도 나 때문에 이 사달이 났는데 괜히 끼었다가 나쁜 결과라도 나오면 전부 뒤집어쓰니까.’
천일영은 윤의강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간다.”
“안녕히 가십시오. 제발 빨리 좀 가세요.”
“잘 있어라.”
타다닥.
천일영은 당장 기루로 뛰어갈 채비를 하는 윤위강을 뒤로하고.
빠르게 하오문 귀주성 지회에서 도망 나왔다.
부스럭.
귀천명의 마을 초입에서 윤의강이 건네준 편지를 꺼내 보니.
[흑룡강성(黑龍江省) 흑하(黑河).]
생각보다 훨씬 먼 곳이었다.
중원의 끝자락.
‘어지간히 시달린 모양이로군.’
원래 백강천은 많은 돈을 준다 해서 검을 만드는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이 직접 검을 만들어 줄 사람을 골랐다.
무공을 못 하는 사람이 겉멋으로.
혹은 손에 맞지도 않는 검을 이름 높은 사람이 만든 명검이라는 이유로 사려 한다면.
당장에 내쫓고 욕설까지 퍼부을 정도로 자신의 검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만금을 가져온 사람보다 동전 한 냥을 주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을 위해 망치를 드는 기인이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높은 사람의 의뢰라도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하곤 했지만.
검을 만드는 실력만큼은 중원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알려진 덕분에 돈이 쌓이고.
사람들은 의뢰를 위해 줄을 섰다.
심지어 황제까지 그에게 검을 의뢰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결국은 전에 있던 곳의 위치가 알려져서 흑룡강성까지 숨어든 모양이군.’
황제의 의뢰도 내팽개치고.
백강천은 있는 곳이 알려지면 계속 이곳저곳으로 집을 옮겨 다녔다.
다행히도 백강천은 천일영과 제법 인연이 있는 사람.
오랜만에 기인과 술 한잔 마실 생각을 하며.
천일영은 편지를 태우고 흑룡강성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