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신귀환기-195화 (196/270)

195화

붉으락푸르락.

여인에게 창피를 주려고 했는데.

‘반대로 내가 창피를 당한 기분이군.’

안대관은 주먹을 꾹 쥐었다.

부들거리며 떨리는 어깨가 제법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보일 정도였는지.

등 뒤에 있던 호위무사가 귓가에 작은 목소리를 흘렸다.

“말씀만 하신다면 실수를 가장하여 처리할 수 있습니다만.”

“흐음…….”

여인을 바라보는 안대관의 눈길이 조금 떨렸다.

죽이기에는 지나치게 아까울 정도의 미인이었기에.

“죽이지는 말고 말을 잘 들을 정도로 만들어 주는 게 낫겠군.”

“세상모르고 우물 안에서 잘난 척하는 계집에게 잘 통하는 방법이 있습지요.”

호위무사는 생각했다.

세상에는 무공을 말로만 하는 것들이 제법 많다고.

자신이 보기에 이 멍해 보이는 여인이 딱 그러했다.

나이 서른아홉에 일류 고수 끝자락의 경지에 오른 자신이 보았을 때.

솔직히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 가지고 있는 검이 대단한 물건이라는 데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다만 상단주는 장사하는 사람의 눈으로 보니 비싼 검으로 보이는 모양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뭐? 금화 천 냥? 무슨 개 같은 소리를!’

계집이나 쓸 만한 검.

짧고 얇은 검 따위 준다고 해도 거절할 물건밖에 안 된다.

스르르릉.

호위무사는 자신의 등에 짊어진 대도(大刀)를 꺼내 들었다.

‘길이가 5척에 무게가 25관. 보통 사람이 들 수 있는 검이 아니지. 내공과 외공 모두 강해야 한다. 이게 진짜 무기지.’

스으으윽.

호위무사는 여인의 목에 대도를 들이밀었다.

“네년, 상단주께서 좋게 말씀을 하시니 네가 대단한 사람인 양 착각하는 모양이구나. 잘못했다고 빌면 목숨만은 살려 주마. 꿇어라.”

“내가 왜? 잘못한 것도 없는데.”

“뭐? 내가 왜? 그것을 몰라서 묻는 것이냐!”

멍하니 눈도 마주치지 않고 천장만 바라보며 툭 내뱉는 여인.

호위무사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대도에 힘을 주었다.

꾸욱.

연한 목살을 대도의 두꺼운 날이 자국을 내며 파고 들어간다.

호위무사는 고개를 돌려 같이 있던 무사에게 눈짓했다.

‘실수로 걸어 나오다 넘어지는 척하여 나를 치면…….’

목에 댄 검날이 박히며 여인은 피를 뿌리게 될 터.

‘사고로 보여 현청에서도 무죄 방면하겠지. 사고로 증명해 주는 것은 이 객잔에 있는 사람들이고, 게다가 현령도 상단주에게 받아먹은 게 많으니 도와주는 것은 당연하다.’

실수하는 척.

죽이지는 않고 큰 상처를 입힌다.

그것을 상단주가 의원에게 보여 살리는 척을 한다.

‘뻔한 이야기지만 가장 잘 먹히는 방법이기도 하지.’

이후로 살려 준 척한 상단주가 이 여인을 어찌 다룰지는 알아서 할 일.

무인은 등 뒤에 서 있는 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터벅. 터벅.

무인이 걸어 나오며.

툭.

예정대로 안대관의 발에 걸려 넘어지는 척을 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객잔 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허공을 가르는 듯.

굉음과 함께 광풍이 휘몰아쳤다.

휘이이이이잉!

촤아아악!

빠악!

베이는 소리와 함께 강한 타격음이 동시에 객잔 안을 울렸다.

천일영이 넘어지는 척하는 무인의 얼굴을 검면으로 때려 날려 버리는 것과 함께.

여인이 어느 사이에 발도(拔刀)한 검으로 목에 들이밀어 진 대도를 반으로 잘라 버린 것이었다.

“히익! 어째서 대도가!”

비명이 질러지는 동안.

휘리리릭.

잘린 대도의 반이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콰악.

안대관의 발가락 위로 떨어져 박혔다.

“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누가 보아도 크게 상처를 입은 사람이 지를 만한 비명.

여인은 그 모습을 보고 멍한 얼굴에서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뀌며 입을 열었다.

“발가락 사이에 검날이 박혔을 뿐이다.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으니 비명 좀 지르지 마라. 여자도 네놈처럼 그렇게 꽥꽥거리지는 않는다.”

“……!”

안대관은 잠시 비명을 멈추고 멍하니 있다가.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여인의 말대로 고통도 없고 모든 발가락이 움직인다.

“킥킥킥.”

“푸풋. 푸부붑.”

그때.

일의 경위를 처음부터 지켜보던 객잔의 손님들이 입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크윽, 젠장!’

안대관은 창피함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궈지다 못해 터질 것만 같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후두두둑.

순간 안대관의 위에 머리카락이 전부 잘린 채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깨끗하게 윗머리만 대머리가 되어 반질거리자.

객잔의 손님들이 기어이 포복절도(抱腹絶倒)하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하!”

“아유, 참. 애써 웃음을 참으려고 했는데 저걸 보고 어떻게 견뎌. 호호호호.”

“으하하핫. 웃겨서 미치겠네. 크하하하하!”

“풉. 대…… 대머리인데 옆머리만 길어. 푸푸풉.”

손님들이 웃다 못해 눈물을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크윽! 언제 머리카락을!’

안대관은 대머리가 된 반들반들한 곳을 손으로 더듬다 천일영을 씩씩거리며 노려보았다.

“네…… 네놈이 이렇게 한 것이렷다!”

“글쎄, 나는 모르는 일인데.”

천일영은 시침을 뚝 뗐다.

사실은 검면으로 무인의 얼굴을 때리기 전.

하는 짓이 너무 괘씸해서 날을 세워 머리를 밀어 버렸다.

‘물론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안대관도 의심만 할 뿐.

딱히 더는 추궁하지 못하고 얼굴만 시뻘게진 채 부들거리며 떨기만 했다.

그때 여인이 검집에 검을 넣으며 입을 열었다.

“잘린 대도의 날이 네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모양이다. 그래서? 대단하신 상단주님께서는 머리카락 값이라도 물어 달라고 할 텐가? 어디까지나 실수인데.”

“크윽!”

어디까지나 실수라는 말.

그것이 안대관의 양심을 찔렀다.

분명 자신들도 어디까지나 실수를 가장하여 사고를 내려고 했기에.

이미 여인이 그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고.

‘저 기생오라비 같은 놈도 눈치를 채고 있었단 말인가.’

부들거리며 떠는 안대관은 호위무사들을 돌아보았다.

당장에 저 미친 여자의 목을 베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한 명은 코뼈가 무너진 것인가. 대도를 들었던 놈은 얼어붙었고.’

속이 터진다.

‘지금 이놈들로는 상대하지 못하겠지.’

안대관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백강천을 노려보았다.

지금 이 사달이 나고 있는데 밥을 꾸역꾸역 처먹고 있는 모습을 보니 터지는 속은 이미 찢기고 갈라질 지경이다.

백강천이 뚫어질 듯한 시선을 느꼈는지 입에 음식을 문 채 안대관을 바라봤다.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밥만 먹고 있었다.”

“크윽!”

음식을 우물거리며 내뱉는 백강천의 뻔뻔한 말.

이가 악물린다.

지금 이곳에서 당한 채 물러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데 더 있어 봐야 비웃음거리가 되는 시간만 길어질 뿐이지.’

뿌드드득.

이를 악무는 동안 같이 씹어 버린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안대관은 호위무사들에게 큰 소리를 질렀다.

“가자.”

“네.”

그는 등 뒤로 들리는 비웃음 소리를 온몸에 새기며.

거칠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물론 머리카락은 가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객잔에 울리자 사람들은 더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 돈 좀 있다고 사람들 무시하고 다니더니 아주 꼴좋다.”

“십 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기분이네. 내, 저놈에게 당한 게 많았는데!”

“속이 다 시원하다. 그러니 착하게 살았어야지. 나쁜 놈 같으니라고. 하하하.”

사람들은 고맙다는 이유로 천일영과 백강천, 그리고 여인의 앞에 음식을 잔뜩 시켜 주고는 밖으로 나섰다.

아마도 평소 쌓인 것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천일영은 편안한 얼굴로 여인을 보며 입을 열었다.

“고맙군. 내가 한 일을 덮어쓰다니 신세를 졌다. 나는 천무탁이라고 한다.”

마음에 드는 상대로 가명을 사용하는 것이 마음 편하지는 않았지만.

천일영은 천무탁이라는 이름을 댔다.

“아니, 내가 고맙다고 해야겠지. 실수로 넘어지는 척하는 놈의 얼굴을 공자가 날려 버렸으니. 나는 남가은라고 해.”

남가은은 친해지고 싶은 사람에게만 남궁무애가 사용하는 가명.

두 사람은 서로 가명을 댄 채 웃음을 지었다.

“이곳에 사는 것인가?”

“흑하에는 제법 오래 있었다. 공자는 이 외진 곳에 무슨 일로 온 거야?”

천일영은 이상하게 친숙함이 느껴지는 남가은에게 허물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검이 부러져서 저 사람에게 부탁하러 왔다.”

“유명한 사람인가 보네.”

“조금 전 소저가 알아본 이 검을 만든 사람이지.”

천일영이 화극여월을 내밀자.

“봐도 돼?”

“얼마든지.”

남궁무애가 검을 뽑았다.

한참 동안 검을 살피던 남궁무애가 멍한 얼굴 대신 화사한 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잘 만든 검이네. 검속을 한껏 살린 쾌속검에 어울리는 것도 그렇지만, 얇은 검면의 강도를 보강하기 위하여 만년한철을 이렇게 제련하여 두껍게 넣었으면서도, 이 날카로운 검날이란. 실제로 보니 이건 정말로 물건이야.”

“그것을 알아보다니 대단한 안목이다.”

더는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천일영도.

남궁무애도.

내공을 완벽하게 갈무리할 수 있지만.

검을 차고 다니는 동안에는 내공이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져서 절정 고수 정도로 기운을 유지한 채 다닌다.

그런데 이런 검을 사용한다면.

또한 이런 검을 알아본다면.

‘분명 절정 고수가 아니겠지. 아마도 초절정 고수의 끝자락 정도일까.’

서로 같은 생각을 하며 웃음을 짓는 동안.

“음식이 너무 많다. 탁자를 합쳐서 먹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백강천의 행복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사람들이 주문해 주고 나간 음식들이 하나씩 나오자 탁자 하나로는 부족해졌다.

천일영이 남궁무애에게 말했다.

“괜찮다면 같이 먹지 않겠나.”

“오랜만에 혼자 밥을 먹지 않겠네.”

세 사람은 술과 함께 음식을 먹어 치웠다.

그동안 안대관이 납치해 간 딸 이야기가 나오고.

백강천의 검에 관한 이야기도 나왔다.

하지만 천일영은 말을 돌리지 않고 남궁무애가 듣는 앞에서 모두 말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상하게도 이 사람은 익숙한 느낌이 드는구나. 모두 말해도 괜찮을 것 같은 이런 마음을 몇 년 만에 느끼는 것인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이렇게나 마음이 편해질 수 있을까.

오랜만에.

천일영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웃음을 지었다.

* * *

탁자를 하나 가득 메우고도 모자랄 만큼 많았던 음식은.

놀랍게도 세 사람의 배에 모두 들어갔다.

상당량은 백강천이 먹은 것이긴 했지만.

객잔의 밖으로 나오자 남궁무애가 천일영을 바라봤다.

“오늘 밤에 저 남자의 딸을 구하러 가는 거야?”

“그럴 생각이다. 상단주라는 놈이 복수할 생각으로 수하들을 모조리 긁어모을 테니 한꺼번에 처리하는 게 편하다.”

“공자의 실력이라면 딱히 당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 걱정하지는 않을게.”

“몸에 상처 하나 나지 않은 채로 돌아오도록 하지.”

“응, 그럼.”

남궁무애는 몸을 돌려 집으로 향하려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당분간은 여기에 있는 거지? 혹시 내일도 만날 수 있어?”

“검이 만들어질 때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 상관없다.”

“사실은 내가 좋아하는 바닷가가 있는데 같이 가고 싶어졌어. 보여 주고 싶은 것도 있고.”

“그럼 내일 만나기로 하지.”

“응.”

남궁무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장원으로 향했다.

이내 도착한 장원의 문을 열고.

남궁무애는 툇마루에 드러누워 저물어 가는 해가 만드는 붉은 노을을 바라보았다.

‘신기한 사람이네. 이렇게나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은 몇십 년만인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라고는 해도 혈천회의 주인 하은월은 꺼리는 상대다.

서후량은 그저 같이 일을 하는 사람일 뿐이고.

‘오십 년 전 수하들이 있었을 때, 아니 그 이전에 내가 현경에 도달하기도 전, 무공을 배우기도 전에 어머니와 함께 있었던 이후 처음이다.’

이제는 흐릿하게 기억되는 어머니의 얼굴.

유일하게 자신을 감싸 주었던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마음에 병이 든 사람처럼 자식들에게 현경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며 매일같이 고함을 지르던 분이셨지.’

무공을 배우다 팔이 부러지고 다리가 꺾여도 무능하다며 호통만 치던 분.

오라버니와 언니들은 자신이 마치 경쟁 상대라도 되는 듯 무공이 높아질수록 경계를 하고 웃음 한번을 지어 주지 않았다.

‘심지어 첫째 언니는 내 밥에 독약까지 집어넣었었고.’

모두가 남궁세가의 문주가 되기 위해.

현경이라는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서로를 질투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암약을 펼쳤다.

가족인데.

‘쓸데없는 게 생각나 버렸네.’

남궁무애는 공자를 만나서 편안해진 마음과.

몇십 년 만에 맛있게 먹은 밥 때문에.

오늘도 툇마루에서 잠이 들었다.

* * *

부르르르.

“으, 쌀쌀하네.”

남궁무애는 몸을 떨며 잠에서 깨어났다.

체온 따위 얼마든지 조절하며 살 수 있지만.

‘귀찮아.’

보통의 사람처럼 살아온 지 오래였다.

무공이 강해질수록 자신이 사람과 멀어진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남궁무애는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가로젓고 달을 바라보았다.

‘달을 보니 해시(亥時) 정도인가. 공자는 지금쯤 상단주라는 놈을 만나러 갔을까.’

왜인지 마음이 술렁였다.

‘이상하게 만나고 싶다.’

그 편안함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기감을 펼쳐서 공자가 있는 곳을 알아봐도 되지만.

‘그냥 내 발로 공자를 찾아보고 싶어.’

사랑 따위가 아니었다.

백 년이 넘도록 살아오면서 마음속에 채워지지 못한 것.

그것을 공자에게서 느꼈다.

‘나가자. 괜히 공자가 방심하다가 당할지도 모르니까.’

남궁무애는 몸을 벌떡 일으키고.

백 년 전 아버지에게서 빼앗은 검을 들고는.

장원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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