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해적의 숫자는 문제가 아니었다.
척계광이 혼자 해적들과 대치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일 뿐.
스르르릉.
날카로운 검을 빼 드는 소리가 해적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도지휘사라는 사람의 검.
하지만 비루한 인생을 살다가 해적이 된 사람들에게는.
백성을 지키겠다는 일념이 스며든 검의 무게 따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이 세울 공으로만 보였다.
해적이 입에서 냄새를 풍기며 말했다.
“도지휘사의 머리만 잘라라. 몸뚱이는 어디 나무에라도 걸어서 지휘관이 죽었다는 것을 알리고, 사기를 꺾어 빠르게 항주를 점령한다.”
“머리는 어쩌려고요?”
“머리는 선수(船首)에 걸어 항주의 바닷가를 돌아다니도록 하지.”
“크크큭. 하여간에 나쁜 쪽으로는 머리가 잘도 돌아가십니다.”
“쳐라.”
앞에 선 해적의 말이 끝나자.
휘이이이잉.
수십 개에 이르는 검날이 척계광을 향해 날아들었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검이 수십에 달하자.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예감한 듯 척계광이 거대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나를 죽여도 백성들에게는 한 걸음도 다가가지 못한다! 덤벼라!”
“네놈이 말하는 백성은 우리가 노예로 끌고 가서 잘 사용해 주마.”
“놈!”
챙. 챙. 채애앵.
수십 개의 검날을 튕기는 동안.
척계광의 몸에 수십 개의 상처가 생겼다.
그 자신은 무인이라기보다는 지휘관에 가까웠기에.
이내 휘몰아치는 검격을 버티지 못하고 다리가 수십 차례 베이며 신형이 무너졌다.
팔도 검을 들 수 없을 만큼이나 꺾이고 망가졌다.
그 틈을 비집고 앞섰던 해적이 검을 날렸다.
휘이이잉.
척계광은 여기까지가 자신의 명운임을 직감했다.
‘네놈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내가 죽어 선수에 머리가 걸리면 오히려 금군은 사기가 올라갈 것이다. 그것을 위한 죽음이라면 수백 번이라도 죽어 주마!’
꾹 다문 입술 사이로 척계광의 결심이 굳어졌다.
“컹. 컹.”
꺾이지 않는 결의를 내세우며 안광을 빛내는 척계광과 검날 사이.
그곳으로 무엇인가 새하얀 털 뭉치가 허공으로 날아올라 끼어들었다.
순식간에 검을 쥔 해적의 손목이 털 뭉치의 날카로운 이빨에 잘려 허공으로 날아갔다.
“크아아악! 이게 뭐야! 내 손목!”
해적의 비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채앵. 채애앵. 채애애앵.
자신을 향해 수십 개의 검격을 날린 해적들을 향해.
반대로 수백 개의 검격이 날아가며 핏덩이를 솟구치게 했다.
‘누구? 금군은 아닌데!’
척계광이 당황하며 생각하는 사이.
타닷. 타닥.
척계광의 앞으로 두 명의 신형이 나타났다.
싸늘한 미소를 짓던 금채홍이 척계광에게 말했다.
“이제부터는 저희가 할게요. 도지휘사님은 지휘만 하세요.”
“당신들은 별유천지의……!”
“저희가 검 들고 설친 건 비밀로 해 주세요. 앞으로 벌어질 일도요.”
“앞으로 벌어질 일?”
궁금함에 척계광이 되물을 때.
콰아아아앙!
해적들의 뒤로 그들이 타고 온 배가 반으로 쪼개지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해적들은 그 광경을 보고 눈이 뒤집힐 만큼이나 놀랐고.
입까지 쩍 벌렸다.
아무리 소형선이라고 해도 천자뇌포를 싣고도 사람이 열 명이나 타는 배다.
그런데 그것이 반으로 쪼개진 충격으로 인해 선수와 선미가 동시에 허공으로 떠오르다니?
도지휘사의 목을 베겠다고 말했던 해적이 예랑에게 잘린 손목을 움켜쥐며 당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포…… 포탄이 날아든 모양이다. 다들 신경 쓰지 말고 도지휘사를……?!”
그런데.
콰아아아앙!
또다시 연거푸 배가 쪼개져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것도 거의 동시에 배 두 개가 용골(龍骨)이 산산이 조각나며 날아오른 것을 본 해적은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이후로도.
콰아아앙. 콰아아앙. 콰아아아앙!
눈 한 번 깜빡일 사이에 자신들이 타고 온 배가 침몰하고.
배가 터지며 허공으로 치솟았던 물줄기가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가운데를.
흉악한 기운을 뿜어내는 남자가 유유히 걸어 나오는 것을 본 해적들은 침을 삼켰다.
그 모습이 마치 수라(修羅).
해적들의 눈에 수라로 보이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죽이지는 않는다. 다만 전부 껍데기를 벗겨서 바닷가에 매달아 주마. 그것을 보고 다시는 해적들이 이곳에 올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네…… 네놈은 뭐냐! 어떻게 사람이 배를 부수는…….”
“이름이라도 알려 주랴? 차경철이다.”
“차…… 경철? 으힉!”
무공을 모르고, 무림맹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라도 차경철은 안다.
그 무섭다는 천마신교의 총관.
잔학한 정도가 아니라 그의 손에 걸리면 갈기갈기 찢긴 시신을 수습하는 데만 하루가 걸린다고 할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다.
오죽하면 요즘에는 우는 아이들에게 천마도 잘 먹히지만.
차경철이 잡으러 온다고 하면 울음을 뚝 그친다고 하니.
자식을 둔 부모가 제일 잘 써먹는 이름 두 개 중 하나를 가진 자였다.
그 무서운 차경철이 흉악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결정해라. 얌전히 붙잡혀서 껍데기가 벗겨지든가. 아니면 반항하다가 붙잡혀서 껍데기가 벗겨지든가.”
“제…… 젠장, 다들 일제히 공격해라. 아무리 놈이 강하다 해도 이 많은 숫자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배가 부서지는 것을 보았던 해적이 공포에 질린 채 큰소리를 쳤다.
그때 차경철이 고개를 한 번 기웃거리다가.
이내 씨익 웃음을 짓고는 이를 드러냈다.
“아니, 생각이 바뀌었다. 껍데기를 벗기는 것도 일이니 그냥 찢어 버리도록 하지.”
“히익!”
콰아아앙!
차경철의 검이 허공에서 벼락을 치듯 땅으로 내리꽂혔다.
단 한 번의 일검에.
차경철의 악명대로 열 명이 넘는 수가 사지가 분해되어 찢겨 날아갔다.
“크아아악!”
“커헉!”
차경철은 직선 위주의 검로를 그리던 것에서.
후우우웅. 후웅!
교묘하게 곡선을 그리는 검로로 바꿨다.
그 변화가 얼마나 빠른지 해적들은 알아볼 수 없었다.
그것이 자신들의 목을 효과적으로 베기 위한 것이라는 것도 전혀 알지 못했다.
촤아아악. 촤악. 촤아아아악!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는 검로에.
차경철이 서 있는 자리로 수없는 해적의 목이 떨어져 굴렀다.
그의 발아래가 피로 적셔지고.
살점이 사방으로 튀어 날아갔다.
검을 쥐고 있던 해적들의 손가락 수백 개가 뒹굴었다.
피 냄새가 사방으로 퍼지자.
차경철의 눈에 서서히 광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뭐냐. 이 몸에 검을 스치는 놈조차 없는 것이냐. 그런 주제에 감히 도지휘사에게 손을 대려고 해!”
“크아아악!”
“너무 빨라! 보이질 않…… 까으으윽!”
사방으로 검날이 번쩍이고 피가 뿜어졌다.
금채홍과 건청은 피가 튀기는 등 뒤로 척계광을 일으켜 세웠다.
“여기는 저분에게 맡기면 됩니다. 그보다 도지휘사님은 움직이실 수 있겠어요?”
“크윽, 움직이지 못해도 이곳에서 무너질 수는 없다. 미안하지만 나를 군항의 지휘소로 데려가 주지 않겠나. 그곳에서 부관과 지휘를 하겠다.”
“알겠어요. 다만 빨리 가려면 조금 거칠게 움직일 테니 아프시더라도 참아 주세요.”
“바라던 바다.”
금채홍이 건청과 옆을 돌아보니.
그곳에서는 이미 수백의 해적들과 싸우는 금군이 보였다.
부관이라는 사람이 지휘를 하는 듯한데.
‘이미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군. 수세에 몰리는 모양이네.’
금군이 아무리 훈련이 잘되어 있다고 해도 해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금채홍은 지휘소의 높은 건물을 바라보았다.
북이 있고 사방이 뚫려 있는 곳이다.
문제는 그곳이 군항의 끝에 있다는 것.
‘저곳까지 가려면 수백의 해적들을 뚫어야 하네.’
스르릉.
금룡참월하검이 이제 막 떠오르려는 해의 빛무리를 반사하며 예기를 드러냈다.
“건청 오라버니.”
“알았다.”
타다다닥!
건청이 척계광을 옆구리에 끼고 달리기 시작했다.
금채홍은 예랑과 건청의 앞을 달렸다.
쿠웅. 쿠웅. 쿠웅. 쿠웅.
콰아아앙!
달리는 옆으로 포탄이 날아들었다.
포격은 금군의 군함과 해적들의 배에서 모두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직도 바다에서는 함포가 불을 뿜어 대며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콰아아아앙!
포탄이 금채홍의 바로 옆에서 터지는 순간.
휘이이잉.
신형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해적을 향해 날아갔다.
휘이이이잉! 휘리리릭.
금정검(金頂劍)의 초식을 타고 사방으로 퍼져 나가자.
촤아아악. 촤악. 촤아아악!
일 초식과 오 초식을 섞은 악랄한 검법은 인정사정없이 해적의 목을 떨궜다.
금룡참월하검 특유의 얇은 검날이 몸에 닿을 때면.
슈아아악!
뼈까지 깨끗하게 도려져 나가며 해적의 몸이 통째로 잘렸다.
하지만 금채홍은 다급했다.
‘지휘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금군은 무너진다. 이미 지휘 체계가 무너져서 그 많던 금군의 반도 안 보이는 것을 보면 다들 어딘가에 뿔뿔이 흩어져 해적을 상대한다는 말이다.’
즉, 이 싸움은 얼마나 빨리 금군의 지휘 체계를 되살리느냐가 관건.
척계광을 지휘소까지 데려가지 못하면 진다는 말이다.
평소엔 바보요, 오늘은 천재인 금채홍이 이를 악물었다.
‘젠장, 하필 공자님도 안 계실 때에.’
금채홍은 더욱 속도를 높이며 선두를 달렸다.
슈르르르륵.
왼쪽 소매에서 강선이 흘러나왔다.
촤라라라락.
금채홍은 강선을 눈앞에 보이는 해적들에게 날렸다.
그리고 해적들의 목에 가는 선이 감기는 것을 보자.
거침없이 내공을 흘려 잡아당겼다.
촤아아아악.
수십 개의 목이 잘려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시간이 없으니 되는대로 있는 방법을 다 끌어모으며 금채홍은 또 달렸다.
난피풍검(亂披風劍).
순식간에 해적들의 몸통이 심장을 기점으로 반으로 잘려 나갔다.
“컹. 컹.”
혹시라도 금채홍의 검날을 피한 해적이 있다면 예랑이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었다.
그때 척계광이 건청에게 매달려 있으면서도 큰 소리를 질렀다.
“부관은 빨리 병력을 수습하여 군항 앞의 지휘소로 이동하라. 늦으면 안 된다.”
“네!”
간절한 외침에 부관의 대답이 돌아왔다.
“쿨럭. 쿨럭.”
척계광은 수없이 다친 상처 때문에 속에서 피를 토해 냈다.
건청이 다가오는 해적을 상대로 검을 휘두르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나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계속 가라.”
하지만 척계광의 목소리가 해적들에게도 들렸다는 것이 문제.
부관이 척계광과 합류하려고 하자 해적들이 막아섰다.
해적들도 지휘소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기에.
“건청 오라버니, 저는 앞을 뚫을 테니까 뒤를 부탁해요. 부관이라는 사람이 금군과 지휘소로 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줘요.”
“알았다.”
촤라라라락! 휘이이이잉!
강선과 검이 동시에 사방으로 날아들고.
금채홍의 뺨을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뺨에는 땀보다 훨씬 많은 피가 묻어 있었다.
그만큼 많은 수의 해적들을 죽이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이미 거의 이백이 넘는 해적을 도륙하고 있을 때.
금채홍은 지휘소 앞까지 거의 길을 뚫었음에도 더욱 이를 악물었다.
‘젠장, 저 해적 놈들도 지휘소를 노리고 있는 것인가.’
난전이 계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해적들에게도 지휘소는 필수.
높은 곳에서 전체의 전황을 파악하고 북소리로 이끌어 준다면 필시 이긴다.
서로 누가 먼저 지휘소를 차지할지가 싸움의 행방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금채홍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
“건청 오라버니! 제가 떠맡던 놈들까지 부탁해요. 저는 지휘소로 갈 테니!”
“이쪽도 해적의 목을 많이 날려서 수가 줄었다. 금군들이 지휘소로 들어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네!”
파앙!
금채홍의 신형이 튀어 나갔다.
예랑도 같이 튀어 나갔다.
타다다다닷.
번뜩이는 검날을 사방으로 뻗으며 금채홍이 지휘소로 가는 동안.
지휘소를 노리는 열 명 정도의 해적 말고도.
느닷없는 한 무리의 해적들이 뒤에서 나타났다.
아무래도 두 개로 조를 나누어 해적들이 지휘소를 노리는 듯했다.
그중에서 나중에 나타난 무리는 해적 중에서도 정예인 듯 뭔가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부족한데 놈들의 수가 이십 정도나 되다니. 그런데 저놈들!’
분명 해적인데 무공의 기운이 흐른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아니다. 도대체 어디지? 처음 느끼는 기운이야.’
그 순간.
무공을 익힌 해적들과 금채홍의 눈이 마주쳤다.
씨익.
해적들은 금채홍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보라는 듯.
타타타탓.
게다가 이미 그 뒤로 먼저 도착한 해적들이 지휘소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십일 층에 이르는 지휘소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북이 해적의 손에 울리는 순간.
항주는 불바다가 될 것이었기에 금채홍은 금룡참월하검을 들어 올리며 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