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한껏 입에 문 음식이 목을 메우자.
남궁무애는 다정하게 물잔을 금채홍에게로 건넸다.
“급하게 먹으면 안 돼. 빨리 먹는 건 중요한 게 아니야. 전부 다 먹어야지. 그런 약속이었던 것을 잊은 것은 아니지?”
“꿀꺽. 꿀꺽. 크읍, 아…… 안 잊었어요.”
잊었던 것 같은데.
‘바보 같아서 귀여워. 공자가 이 아이를 예뻐하는 것도 이해가 가네.’
남궁무애에게 건네받은 물을 금채홍이 시원스럽게 마시고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풉.”
“키킥.”
갑자기 백유화와 천일영이 웃는 소리가 들리자.
금채홍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왜 웃으세요?”
“아니, 그냥 네가 밥을 먹는 게 좋아서 웃음이 나왔다.”
“흐뭇해서 웃었어. 빨리 마저 먹기나 해라.”
흐음, 뭔가 비웃음 같았는데.
금채홍은 고개를 꺄우뚱거린 이후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반드시 다 먹어서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일념이 백유화와 천일영에게까지 전해졌다.
하지만 백유화는 웃기면서도 서늘함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남궁무애를 바라봤다.
‘방금 저 소저, 물을 주는 동안 자신 앞에 있는 음식 중 상당수를 채홍이의 접시에 옮겼지? 그런데 내가 보기에도 잔상밖에 안 보일 정도였다. 대체 무공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 거지?’
게다가 웃음소리에 채홍이가 반응하는 동안에도 음식을 또 옮겼다.
적당히 눈치채지 못하도록 적절하게 옮기는 게 속도뿐만 아니라 눈썰미도 대단했다.
심지어 금채홍이 밥을 먹다가 탕초리척의 접시를 바라볼 때.
사사사삭.
때를 맞춰 경장육사 접시에 음식을 옮기는 식이었다.
너무 빨라서 금채홍은 눈을 뜨고도 음식이 조금씩 채워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이 각이 지난 후.
남궁무애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나는 다 먹었네.”
“허억! 천천히 먹는 것 같았는데 벌써 식사를 끝냈다고요?”
“응, 채홍이는 아직도 한참 남았구나? 이래서는 다 먹지 못할 것 같은데. 내가 음식을 남기면 공자와의 관계를 알려 주겠다는 약속은 이미 물 건너갔고.”
남궁무애가 대략 육 할 정도의 음식을 금채홍의 접시로 옮겼으니.
“어째서 음식이 줄지 않는 것 같지? 분명 엄청 많이 먹은 거 같은데?”
아직도 절반이나 남아 있는 음식에 금채홍이 울상을 지었다.
“아니에요! 저 다 먹을 수 있어요.”
“응, 많이 먹어. 여태 먹은 음식만큼만 더 먹으면 되네.”
“큭!”
지금까지 먹은 음식만으로도 배가 터져 나갈 것 같은데.
‘그만큼을 더 먹어야 한다고?’
교묘하게 심리를 뒤흔드는 남궁무애의 말에 금채홍은 두세 번의 젓가락질을 더 한 이후.
“졌어요.”
깨끗하게 포기하고 의자에 늘어지듯 기댔다.
이제는 단 한 번의 젓가락질도 더는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천일영과 백유화가 다가와 금채홍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먹었구나. 장하다.”
“이 배 좀 봐. 완전 올챙이네.”
“우…… 움직이지를 못하겠어요.”
금채홍이 의자에 앉는 것도 힘들다는 듯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켜 방으로 향하자.
“조금 있다가 차 가지고 방으로 갈게.”
“네, 언니. 저는 좀 누워 있을게요. 오늘은 너무 피곤하네요.”
백유화가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문밖을 향하는 금채홍의 등을 바라봤다.
드르르륵. 탁.
문이 닫히자 백유화가 남궁무애를 향해 씨익 웃음을 지었다.
“너 제법이네. 어떻게 채홍이가 토하지 않도록 밥을 먹인 거야?”
“처음에는 당과부터 시작했는데.”
남궁무애는 오늘 있었던 일을 덤덤하게 말했다.
“대단하네. 강제로 먹이지 않고 스스로 먹게 만들다니.”
“그냥 귀여운 아이라서 나도 모르게 장난치고 싶었을 뿐이야.”
겸손하게 남궁무애는 말하지만.
‘마음의 병이 난 무인에게 밥을 먹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그것도 하루 만에.’
백유화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백유화. 아직은 너를 믿지도 않고 꼴 보기 싫은 것도 여전하지만 채홍이가 밥을 먹게 해 준 것만은 감사하게 생각한다.”
“별일도 아닌데.”
여자 둘이 마치 사내들처럼 악수하고.
백유화는 감사의 표현인지 금채홍과 같이 마실 차 한 잔을 나누어 남궁무애 앞에 놓았다.
“스물여덟 개의 약재를 섞어 만든 차다. 몸에 좋으니 꼭 마셔라.”
“잘 마실게.”
백유화가 금채홍의 방으로 향했다.
호로로록.
남궁무애가 백유화가 나누어 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눈살을 찌푸렸다.
“맛없어.”
“그래도 몸에 좋은 것은 확실하니 마셔 둬라. 은근히 내공 증진에도 도움이 된다.”
“응, 확실히 귀한 약재가 들어간 것은 알겠네.”
“다 마시면 비장의 술을 주지.”
“한 번에 다 마실게.”
호로로로로로로록.
한순간에 차를 다 마신 남궁무애가 눈을 반짝였다.
“술. 술. 술.”
“하하하. 여기 있다.”
천일영이 매빙화홍주를 따자 백매화와 박하의 향기가 퍼졌다.
쪼르르륵.
한 잔을 가득 채운 맑은 술을 남궁무애가 단숨에 들이켰다.
“캬아. 이건 정말로 좋은 술이네. 며칠 전에 금존청을 마셨는데 그것보다도 훨씬 좋은데?”
“제법 비싼 술을 마셨구나.”
“응. 조카가 죽었는데, 위로주랍시고 아는 사람이 들고 왔었어.”
“조카가 죽었었나. 그건 정말로 안된 일이구나.”
사실은 천일영이 죽였지만.
“괜찮아. 조카라고는 해도 친하지는 않았어. 자신의 야심을 위해 살았던 아이거든.”
야심을 따라 천일영을 많이도 괴롭혔던 남궁천이었다.
“고맙다.”
“뭐가?”
“채홍이를 돌봐 줘서.”
“…….”
뜻밖의 말이었는지.
남궁무애의 멍했던 얼굴이 툭 떨어지듯 바닥을 향했다.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고맙다는 말을 들어 본 지가 언제인가.
‘오십 년 전의 그날 이후 처음인가.’
삼천 개의 무덤을 만들고 그 앞에서 일 년을 울고 난 이후.
온통 어둠으로만 보였던 세상에서 웅크리고 혼자 살아왔다.
하물며 누군가를 돌봐 준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돌봐 줘서 고맙다니.
가슴속을 차게 파고드는 이상한 느낌에 남궁무애는 몸서리를 쳤다.
‘손에 묻은 피가 얼마인데 여기에서 나는 무엇을 하는 걸까? 여기는 내가 있을 자격이 없는 곳일 텐데. 게다가…….’
공자가 지천번회를 알고 있었다.
더 나은 세상을 약속했기에 혈천회와 손을 잡은 지천번회다.
‘하지만 그것은 내 야심이 아니라 하은월의 야망이다. 나는 그것을 잘 알면서도 모든 것을 포기했었기에…….’
그래서 하은월을 도왔다고?
단지 포기했었다는 이유로?
항주에 와서 금채홍을 만나고 견딜 수 없을 만큼이나 불편한 기분이 가슴을 메웠었다.
‘다름 아닌 채홍이가 살육의 한복판에 놓이고, 밥도 못 먹을 정도로 망가진 게 누구 탓인가. 나 때문이다. 직접 하지 않은 일이라 할지라도 내가 혈천회를 도왔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적하게 술이나 마신다고?
남궁무애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흘렀다.
‘공자는 왜 나한테 고맙다는 말을 한 거야. 그 말을 듣지 않았다면 애써 외면하고 모른 척하면서 이곳에 있었을 것을…….’
고맙다는 소리를.
돌봐 줬다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느닷없이 현실로 끌려 나온 기분을 느낀 남궁무애는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외면한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의 가족이 무사한 것을 알았으니까 나는 이제 흑룡강성으로 돌아갈게.”
“벌써 말이냐. 나는 네가 더 오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만.”
“그곳에 가족이 있잖아. 가족은 방치하면 안 돼.”
“조개…… 말이구나.”
“응, 내일쯤 떠날까 해.”
“걱정되는 게 있다면 가야겠지. 하지만 채홍이가 황실에서 상을 받을 때까지만이라도 있어 주면 안 되겠느냐.”
“상?”
“항주의 지휘소를 회복해서 수만의 사람을 살린 데다가 해적들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했다. 채홍이의 빠른 판단이 없었다면 항주가 비교적 피해가 적었다고 해도 일만 명 정도의 백성이 죽고 납치당했을 거다.”
“그 아이가 해낸 일이었구나.”
“그런데도 저 녀석은 자신이 그 많은 사람을 살렸다는 생각은 못 하고 있구나. 아마 상을 받으면 자신이 해낸 일이 얼마큼이나 대단한 것인지 깨닫겠지. 그리하면 마음의 병도 떨칠 수 있을 테고.”
“알았어. 그때까지는 저 아이가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할게.”
“고맙다. 말도 안 되는 내 억지를 들어줘서.”
억지라고 하지 마.
내가 그런 거야.
내가 저 아이를 망쳤어.
그러니까…….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조개가 걱정된다면 내가 내일 가서 보고 오마.”
“……고마워.”
“별거 아닌 일이다.”
다시 한번 술잔에 채워지는 맑은 술에 남궁무애의 눈이 비쳤다.
너무도 슬퍼 보여서.
자신이 울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여 눈가를 만졌지만.
‘눈물은 흐르지 않았나.’
착각할 만큼이나 엉망인 표정을 짓고 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눈물이 말라서 없어졌거나.’
백 년 전.
아버지와 언니, 그리고 오빠를 죽이면서도 느끼지 않았던 죄책감이 가슴을 찌르는 것에.
남궁무애는 잔 속에서 찰랑거리는 술을 말없이 목으로 넘겼다.
* * *
수만 명의 백성이 모였다.
오늘은 항주를 지키기 위해서 애를 쓴 사람들에게 포상하는 자리다.
이날만큼은 가족을 잃은 사람들조차 애써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지켰다.
항주에서는 대대적으로 행사를 벌였고.
이것은 유의선이 의도적으로 판을 크게 벌인 것이기도 했다.
피해가 다른 지역에 비해서 유독 적은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이 중요하고, 돈이 돌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런 행사가 크게 벌어지면 시장부터 노점까지 제법 돈을 벌어들일 수 있으니까.’
유의선은 시장 옆의 커다란 광장에서 높은 단상에 올랐다.
차경철이나 서하린, 백유화나 타진표, 도철용이나 천량도사 등은 자신의 존재를 숨겨야 하기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의선은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항주를 지킨 자들에게 포상하겠다. 먼저 월영과 건청에게는 금화 오십 냥, 그리고 많은 도움을 준 전 장강수로채의 채주 요소령에게도 모든 죄를 사해 주는 것과 동시에 금화 오십 냥을 하사하노라.”
요소령은 이 자리가 의외라는 듯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고.
창피한지 새빨개진 그녀의 귀를 보며 웃음을 짓던 유의선이 말을 이어 갔다.
“또한 항주의 외곽에서 살던 자들의 공이 크다. 그들은 해적들로부터 도망친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여 여자와 아이를 보호했다. 게다가 해적들이 숨어든 백성을 해치지 못하도록 검을 들고 지키기까지 했다. 이 또한 항주의 자랑일지니! 이들에게 각각 금화 두 냥씩을 내리고 현청에서 자경단으로 고용하여 매년 은자 열 냥씩을 지급할 것이다.”
“와아아아아!”
무뢰배들이 모두 똑같은 옷으로 맞춰 입고 단상에 올랐다.
그들은 모두 헤벌쭉 찢어지라 입을 벌리고 웃고 있었다.
평생을 배우지 못하고 밑바닥 인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못된 짓만 저질렀는데.
속된 말로 인생이 뒤집힐 만큼의 출세를 했다.
유의선은 이들이 마음껏 함성을 느끼도록 잠시 기다린 후.
표정을 가다듬었다.
진정으로 항주를 구해 낸 사람을 소개해야 하니까.
“다음은 해적들의 침입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자다. 지휘소를 해적들로부터 지켜 수만 명이 죽을 뻔한 것을 막았다. 그뿐인가. 도지휘사의 목숨을 해적들로부터 지키고, 그를 지휘소까지 옮겼다. 이후에도 자기 몸을 보살피지 않고 오직 사람들을 지키기만 했으니, 그 공이 일일이 나열할 수도 없을 정도다. 이 사람이 없었다면 항주는 불바다가 되었을 터. 수많은 백성을 살린 금채홍에게 금화 백 냥, 또한 황제의 친필 감사 편지를 전하노라.”
황제가 내린 휘황찬란한 두루마리와 금화가 담긴 상자를 받고 등을 돌려 수만 명의 사람을 바라보니.
금채홍은 이들을 살렸다는 생각에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콧가를 괴롭히던 피 냄새도 어느새 사라지고, 평온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을 때.
느닷없이 단상 앞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터지자 금채홍은 움찔거리며 한 걸음을 뒤로 물렸다.
“와아아아아아! 미친년! 미친년! 미친년! 미친년!”
하지 마.
“미친년! 여기 좀 봐 주세요!”
고만하라고.
“사랑해요! 미친년!”
아니, 사랑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만…….
“미친년 만세! 만세!”
만세는 황제한테만 쓰는 거야. 그러니 제발 그만…….
하지만 금채홍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사람들의 함성이 점점 더 커지고.
또한 넓게 퍼져 나갔다.
처음에는 단상 앞에서 울리던 미친년의 함성은 점차 수천 명, 그리고 이내 수만 명에게까지 퍼져 나갔다.
금채홍은 너무 창피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제 다시는 혀로 검날을 핥지 않을 거야! 으헝헝!’
금채홍은 식욕을 얻고 명성을 잃었다.
그리고 황제가 유일하게 감사를 표한 항주 공식 미친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