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떠나는 것이냐.”
“응.”
미친년 함성이 계속되는 곳에서 금채홍을 바라보며 남궁무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 며칠에 불과했지만, 천일영과의 사이를 궁금해하던 금채홍은 남궁무애의 계략에 계속 넘어갔었다.
그 시간이 무척이나 좋았다.
아니, 행복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끝까지 공자와 내가 무슨 관계인지 알려 주지 않고 가서 미안.’
동질감을 느낀다는 말을 어찌 전달할 수 있을까.
‘수많은 사람을 죽여서 마음이 죽은 사람이 서로를 알아본 거다.’
멍하게 금채홍을 바라보던 남궁무애가 몸을 돌려 천일영의 눈동자에 자신의 눈을 맞추자.
남궁무애의 흐린 눈동자에 그제야 생기가 돌았다.
“재미있었어. 오랜만에.”
“그러냐. 이건 고맙다는 뜻으로 별유천지의 가족들이 마련한 것이다.”
“이게 뭐야?”
천일영이 내미는 봇짐의 부피가 제법 컸다.
남궁무애가 주섬주섬 풀어서 열어 보니.
“비단옷? 그것도 다섯 벌이나?”
“처음에 만났을 때부터 계속 같은 차림이길래 나처럼 옷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말을 별유천지의 가족들에게 이야기하니 옷을 선물로 주자고 하더구나.”
“상당히 비쌌을 텐데.”
고급스럽고 예쁜 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남궁무애는 이리저리 옷을 돌려 가며 보았다.
“어울릴까?”
“그 얼굴에 뭐를 입어도 어울리지 않을까.”
“입에 발린 말이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네.”
소중하게 느껴졌는지 남궁무애가 옷을 곱게 접어 봇짐 안에 넣었다.
“고맙다고 전해 줘. 갈게.”
“검을 찾으러 갈 때 만나러 가마.”
“응.”
남궁무애가 웃음 하나 짓지 않은 채로 짧은 대답만을 남긴 채 등을 돌리자.
천일영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자신도 모르게 남궁무애의 옷깃을 잡았다.
“잠깐.”
“왜?”
천일영은 말없이 손을 뻗었다.
그 손끝에는 화극여월이 있었고.
남궁무애는 깜짝 놀란 얼굴로 다시 천일영과 눈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공자, 이걸 왜 나에게 주는 거야? 금화가 천 냥이 넘는 검이야. 역사책에 기록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명검인데?”
“전에 객잔에서 네가 천금상단 상단주에게 말했었지. 나는 쓸 줄 아는 검이라고.”
“분명 그런 말을 하기는 했지만…….”
“내가 백강천에게 주문한 검도 이것과 같은 형태이다. 무림에서 이것과 같은 형태의 검을 쓰는 사람은 너와 나 단둘뿐일 테니, 혹시라도 연락이 끊어지면 바람결을 타고 떠도는 소문이 같은 검을 쓰는 네가 있을 곳을 알려 줄 것 같구나.”
“네 소문도 바람이 나에게 알려 줄 테고.”
남궁무애가 애지중지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화극여월을 껴안았다.
“고마워. 나 이런 선물 받는 거 처음이야.”
“사라지지 말아라. 너는 내 친구이니. 소문으로 네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는 얼굴을 마주하고 언제까지나 술을 마시고 싶구나.”
“응, 흑룡강성에서 기다릴게. 나도 공자에게 뭔가 선물을 주고 싶은데.”
“괜찮다. 노숙하지 않으려면 지금 떠나야겠구나. 어서 가거라.”
남궁무애가 고개를 끄덕이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걸은 지 조금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자신을 바라보는 천일영의 눈길이 느껴지자.
‘좀 더 빨리 걸어야 해.’
입술을 꾹 깨물고 남궁무애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 경공을 사용하여 항주를 벗어났다.
한적한 숲속의 작은 길.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남궁무애는 그 자리에 주저앉듯 무너져 내렸다.
후두두둑.
이제는 말라서 나오지 않을 거로 생각했던 눈물이 남궁무애의 얼굴을 가득 덮고 땅으로 떨어졌다.
“공자는 왜 자꾸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거야. 왜 이런 귀한 것을 선물로 주는 거냐고. 연락이 끊기면 소문으로라도 이어지고 싶다니!”
사실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공자와의 인연을 정리하려고 했다.
객잔의 사람들이 자꾸만 마음속 깊이 숨겨 둔 마음을 건드렸으니까.
이미 텅 빈 마음이 뭔가로 채워져 갔다.
따스함.
견딜 수 없을 만큼이나 지독한 그 감정 앞에서 그동안 애써 비우고 죽였던 마음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것이 너무도 무서웠다.
‘나는 지천번회의 주인이야. 공자가 찾는 그 지천번회가 바로 내가 만든 거라고!’
천일영을 바라봤을 때는 또렷했던 남궁무애의 동공이 다시금 텅 비어 갔다.
‘차라리 만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어째서 만나게 되었을까.’
남궁무애는 흑룡강성으로 떠나는 길의 초입에서.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쏟아지는 눈물을 반 시진이 넘도록 떨치지 못했다.
* * *
오 일 후.
항주는 빠르게 정상을 되찾았다.
이미 무너진 집과 상점을 세우는 곳은.
전투로 인해 폐허가 된 게 아니라, 항주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상징이 되었고.
어느새 별유천지 앞에 세워진 천막을 가득 메웠던 환자들과 피난민들도 각자 자기가 돌아갈 곳으로 떠났다.
덕분에 다시 개점하기 위해서 분주한 별유천지는 내일까지 모든 청소와 준비를 끝낼 생각에 다들 눈이 돌아갈 만큼이나 정신없이 뛰었다.
천이영도 워낙에 바쁘게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으니 일부러 말을 하지 않고 혼자 시장을 돌아다닌 지 벌써 반 시진.
“오늘 안에 별유천지로 이 재료들을 보내 주세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밑에 놈들을 시켜서 빨리 가져다드립죠.”
“여기 돈 여기 있어요.”
“허허! 별유천지라면 외상 거래를 해도 되는데 항상 꼭 대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이영이 시장에서 식자재를 사며 은자 삼십 냥을 건넸다.
워낙에 대량으로 사다 보니 가게 주인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지게 올라갔다.
‘다음은 생선인가.’
잠시 길에 서서 생각해 보니, 가뜩이나 시간도 없던 참에 지름길이 떠올랐다.
‘내가 늦게 돌아가면 말도 하지 않고 시장에 혼자 나온 것을 알아채고 건청이나 오라버니가 걱정하겠지. 빨리 일을 보고 가야겠다.’
급히 뒷골목이라고 할 만큼이나 어둡고 좁은 길로 들어서서 잠시 걷던 천이영은 발걸음을 멈췄다.
뺨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입가를 스쳐 지나가고.
등 뒤에서 들리는 서늘한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였다.
“가진 거 다 내놔라.”
“여…… 여기 있어요.”
눈 밑 아래로 보이는 서늘한 단도의 날.
목을 누르고 있는 감촉이 예리하다는 것을 알고는 바로 돈을 건넸다.
“제법 묵직하군. 역시 항주로 오길 잘한 것인가.”
“케케케. 형님, 이 여자 돈도 많이 가지고 있지만 보통 미인이 아닙니다. 태어나서 이렇게나 예쁜 상판은 처음 보네요. 복건성에서 항주로 오자마자 바로 한 건 올릴 줄 몰랐습니다.”
되는대로 말을 씨부렁거리는 남자의 손길이 천이영의 허벅지를 타고 올랐다.
“몸매도 엄청난데요? 형님, 이 여자는 정말로 아깝습니다. 한 달쯤 가지고 놀다가 팔아도 금화 다섯 냥쯤 받을 만큼의 미모입니다.”
“크크크. 아주 좋군. 그런데 일단 여기에서 재미 한번 보고 데리고 가야겠다. 못 참겠으니까. 하하핫.”
“그러지 마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돈은 되찾으려 하지 않을 테니 그냥 가 주세요. 현청에도 신고하지 않겠습니다.”
“으하하하학. 아이고 배야. 현청에 신고하지 않겠단다. 있는 집 여자라서 그런지 말도 예쁘게 하네.”
단도를 든 남자가 천이영의 몸을 돌려 목에 겨눴던 단도를 심장으로 옮겨 대고.
후릅.
더러운 입을 벌려 혀로 천이영의 목을 핥았다.
‘아앗! 실수다. 혼자 나왔을 때 하필 외지에서 들어온 놈들의 눈에 띄다니!’
끔찍하게 목을 핥는 기분 나쁜 느낌에 과거 아버지가 겹쳐 보여서 천이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한 놈이라면 몸을 밀치고서라도 뛰어나갈 텐데.
다섯 놈이나 되는 남자들이 이미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다.
‘오라버니!’
간절하게 천일영을 생각하는 순간.
휘이이잉! 콰직!
서늘한 바람을 일으키는 소리와 함께 목을 핥던 혀의 기분 나쁜 느낌이 사라졌다.
천이영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분명 오라버니가 온 것으로 생각했으니까.
감았던 눈을 뜨고 천이영은 바로 반가운 목소리를 내었다.
“오라버니!”
“네?”
“……가 아니네요?”
“괜찮으십니까?”
“괜찮기는 한데……요…….”
천이영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심장에 칼을 겨누고 목을 핥던 기분 나쁜 무뢰배의 손목이 잘린 채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런데 얼굴을 찡그린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라,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차경철이기 때문이었다.
“아까 멀리에서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혹시 해서 따라오길 잘했네요.”
“아니, 그보다는 빨리 도망가요! 한 놈의 손목을 잘랐다고는 해도 네 명이나 더 있잖아요! 가서 월영이나 건청을 불러오시는 게…….”
“네 명이 있는데 그게 어쨌다는 거죠?”
“네에?”
차경철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천이영이 눈을 끔뻑이자.
순간 곁에 서 있던 무뢰배들의 파랗게 질린 얼굴에서 비명이 터지며 일제히 쓰러졌다.
“크아아악! 네놈, 어딜 자른 것이냐!”
“아아아악. 내 거시기!”
“난 아직 태어나서 한 번도 못 해 봤는데!”
“내 소중한 둘째 아들이! 이럴 수가!”
무뢰배들이 바닥을 뒹굴며 사타구니를 붙잡았다.
게다가 잘린 손목을 부여잡고 바닥을 기던 남자도 느닷없이 두 번째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난 손목만 잘린 줄 알았는데! 네놈 어느새!”
“더러운 물건 휘두르고 다니는 놈들은 다시는 같은 짓을 못 하게 해야지. 죽이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이 망할 새끼들아.”
“차라리 죽일 것이지. 아아아악. 고자가 된 것도 서러운데 그것도 없어졌으니!”
차경철은 이런 더러운 비명 같은 것은 듣지 말라는 듯이 천이영의 귀를 막았다.
“잠시 눈 좀 감고 있어요.”
“네? 귀를 막고 있어서 안 들려요.”
차경철이 막았던 오른쪽 귀를 살짝 열고 얼굴을 들이민 채 말했다.
“내가 손을 떼는 사이에 귀를 막고 잠시만 눈도 감아요.”
“네? 네!”
귓속말을 하기 위해 차경철이 얼굴을 가까이하자, 천이영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갑자기 기습이라도 당한 것처럼 심장이 마구 뛰기도 했고.
‘평소에는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보니까 왜 이렇게 잘생긴 거야!’
새삼 사람이 달라 보였다.
‘그냥 얼빠진 바보인 줄 알았는데.’
듬직했다.
시키는 대로 귀를 막고 눈을 감으니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행여 부서질세라 곱게 자신의 손을 잡고 골목을 떠나 큰길가로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어서 들리는 저음으로 울리는 듣기 좋은 목소리.
“이제 눈 떠도 돼요. 저런 거 보고 들어 봐야 좋은 거 없으니까요.”
“고…… 고마워요.”
새빨개진 얼굴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천이영이 간신히 대답했다.
차경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가던 자경단을 불렀다.
“여기! 이 골목 안에 외부에서 온 무뢰배들이 있다.”
“헉! 지금 빨리 처리하겠습니다.”
자경단의 조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열 명의 사람을 끌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차경철이 천이영을 보며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아마도 생선을 사러 가는 길이었던 것 같은데 같이 가시죠. 외지인들이 워낙에 항주로 몰려들어서 위험합니다.”
“그래 주시면 든든할 것 같아요.”
천이영의 얼굴에 안도감과.
조금 전에 큰일을 당할 뻔했던 기억 때문에 무서움이 동시에 퍼졌다.
‘그래도 이 사람이 같이 있어 주니까 그나마 낫네. 방금은 정말로 큰일 날 뻔했어.’
천이영의 몰려나오는 한숨 소리가 차경철의 귓가에도 들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고 생각한 차경철은.
“뿅!”
손에서 꽃을 피워 올리며 천이영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이걸로 긴장이 좀 풀리셨나요.”
“아…….”
천이영의 긴장이 풀렸다.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화가 나서.
‘내가 이것 때문에 당신을 싫어하는데 이 짓을 또 하네. 게다가 이번에는 입으로 뿅 소리까지 직접 냈어?’
가벼워 보이고 바보같이 보이는 것이 이 엉뚱한 짓 때문인데 아직도 눈치를 못 채는 차경철의 해맑은 얼굴 앞에서.
차마 뭐라고 하지 못하는 천이영은 다시 한번 한숨을 몰아쉬었다.
‘뭐, 그래도 나를 살려 준 은인인걸.’
천이영은 손을 뻗어 활짝 펼쳤다.
“손잡아 줘요.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리네요.”
“아! 알겠습니다.”
여전히 부서질세라 곱게 손을 잡는 차경철의 큰 손에 천이영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꽃은 저리 치워요. 한 번만 더 내 앞에 꽃을 들이밀면 말도 안 섞을 거예요.”
“헉! 앞으로는 하지 않겠습니다.”
일일이 가르쳐 줘야 하는 바보 같은 남자.
하지만 천이영은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야 하는 귀찮기만 한 이 남자가 이제는 싫지는 않다는 듯.
마주 잡은 손을 생선 가게까지 놓지 않았다.
잔뜩 긴장했는지.
차경철의 손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지만.
천이영은 그것도 모른 척해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