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처음 듣는 이름이다. 혈천회라니? 지어낸 이름으로 속이려는 모양이군.”
“잠깐!”
검날이 왼쪽에서 다시 오른쪽 목의 남은 살 안을 파고 들어가자 심라경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토했다.
“속이려면 더 그럴싸한 이름을 댔을 것이다.”
“잠시 속아 주지. 계속 말해 봐라.”
“혈천회는 이십 년 전, 내가 주지의 자리에 올랐을 때 찾아왔다. 금화 천 냥을 주고 아이들을 찾아 달라고 했었다. 극양과 극음의 기운을 가지거나 양과 음의 기운 두 가지를 동시에 갖는 아이를 찾아서 키우라는 것이었지. 그때는 아미파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내가 희생양으로 주지의 자리에 오른 것이라 잘못된 일인 것을 알았지만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주지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돈을 받은 것인가.”
“그게 아니다. 그때는 아미파가 무너지려고 했을 때다. 어차피 무너질 아미파의 마지막을 나에게 떠넘긴 것이다. 정작 책임을 졌어야 할 사람들은 전부 빠져나갔고! 그런 상태에서 나더러 어찌하란 것이냐.”
“좋다. 조금 더 속아 주지. 아이들이 극양과 극음의 기운을 가지게 한 방법은?”
“환단이었다. 혈천회에서 환단을 보냈다. 그것을 오 세에서 십 세 사이의 아이들에게 먹이고 반응을 보는 것이었다. 당시 혈천회에서는 금화 천 냥 이외에 아이들을 무작정 거두라고 별도로 돈을 더 줬었다. 나는 그 돈으로 속가제자를 늘려서 아미파의 부활을 노렸었다.”
“환단을 먹은 아이들은 어찌 되었는가.”
“대부분의 아이는 반응이 없었다. 드물게 양기나 음기가 모이는 아이가 있기도 했지만, 극양이나 극음의 기운이 스며드는 아이는 셋뿐이었다. 그중에서도 채홍이가 가장 양기가 많이 스며드는 아이였고!”
“그 환단을 나에게 줘야겠군.”
짙게 깔린 어둠과도 같은 스산한 목소리가 천일영에게서 나오자 심라경은 몸을 떨었다.
환단을 주지 못하면 어찌 될까.
‘죽을지도 모르겠구나. 이 위기를 어찌 탈출한단 말이냐!’
떨리는 눈가를 숨기지 못하는 심라경의 마음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화…… 환단은 이제 없다. 혈천회는 이미 속가제자들을 상대로 양기와 음기를 가진 아이를 찾는 것을 포기했다.”
“포기한 이유를 말해라.”
“효율이 낮았기 때문이다. 속가제자를 아무리 많이 들인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혈천회는 다른 방법을 찾았는지 몇 년 전부터 더는 환단을 보내고 있지 않다.”
“환단으로 몸이 변한 아이들은 어찌 되었느냐.”
“그…… 일 년에 한 번씩 혈천회에서 사람이 나왔는데 그들에게 아이들을 같이 보냈다. 이후는 나도 모른다.”
“그 아이들이 죽을지 살게 될지 상관도 안 하고 보낸 것이냐. 죽을 때까지 양기와 음기를 빨리다가 이미 죽었을 터다.”
“어, 어쩔 수 없었다. 아미파가 위험할 때 도움을 받고 상황이 나아졌다고 해서 모른 척할 수는 없었으니까.”
“환단을 먹고 죽은 아이는 없는가.”
“…….”
심라경은 침묵했다.
침묵은 이미 그렇다는 대답과 마찬가지.
약과 결합된다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차라리 절맥증을 앓고 있는 아이라도 찾을 것이지.’
아니, 어쩌면 절맥증을 앓는 아이조차 모조리 찾아서 기운을 빨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채홍이를 혈천회에 보내지 않은 이유는?”
“특별 관리였다. 채홍이가 가진 극양의 기운은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다. 말 그대로 완벽한 기운이었다. 그 때문에 혈천회에서 더욱 강한 기운이 모일 때까지 둔다고 했다. 무공이 강해질수록 극양의 기운도 강해진다고 해서 계속 수련을 시키라고도 했다. 그런데…….”
“채홍이가 가족들이 위험한 것을 알고는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었군. 사라졌던 채홍이가 편지로 지금 있는 곳을 알려 주자 주지가 직접 찾아온 것이었고.”
“…….”
개 같은 일이었다.
혹시라도 지천번회의 이야기가 나올까 했는데.
‘느닷없이 혈천회라니.’
하나로 이어질 줄 알았던 줄기가 두 개로 갈라졌다.
이대로라면 지천번회의 정체를 알기도 전에 새로운 세력에 대해서 또 다른 조사를 벌여야만 하지 않나.
“지천번회가 영혼을 사로잡아 내공을 늘리는 방법을 사용하길래 분명 채홍이와 서란이도 연관이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지천번회? 남궁세가를 멸문시켰다는 뜬소문의 지천번회 말고 영혼을 사로잡아 내공을 늘리는 지천번회?”
낯설지 않은 울림이었는지 지천번회라는 말에 심라경이 반응했다.
“혹 지천번회를 아는가?”
“공자가 지천번회를 아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남궁세가 때문에 지천번회의 이야기가 한창 떠돌고 있지만, 원래의 지천번회는 따로 있으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
당황한 것이 한눈에 보일 정도로 심라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왜 지천번회를 이 공자가 알고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원래 지천번회는 오십 년 전에 사라진 조직이다. 그때에도 아는 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지만, 지금에 와서야 그 이름을 입에 담는 사람이 있다니.”
혹시라도 지천번회의 실마리를 주면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라경의 혀가 빠르게 돌아갔다.
“내 나이 팔십, 그러니까 오십 년 전 내가 서른 살에 일류 고수였을 때다. 그때 삼천 명에 가까운 무인을 거느린 지천번회라는 조직이 있었다.”
“그것을 주지가 알고 있는 이유는?”
“나에게 지천번회에 들어오라는 제의가 있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이나 내공을 높이 상승시키고 천하제일의 검법을 알려 준다고 했었지.”
“재미있군.”
천일영이 심라경에 목에서 살을 잘라 내던 검을 거두자.
심라경의 신형이 무너지듯 바닥으로 쓰러졌다.
“큭. 헉. 헉.”
“목에서 쏟아지는 피가 네 명을 끊기 전에 이야기하거라. 내가 믿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한다면 살려 줄지도 모르니.”
“야, 약속은 지켜라. 당시 지천번회는 아무도 모를 정도로 조용히 움직이는 곳이었다. 얼마나 은밀했는지 개방이나 하오문에서도 몰랐고 무림맹은 더 말할 것도 없었지. 황실에서도 모르는 조직이었으니까.”
“그들의 목적은?”
“거기까지는 모른다. 다만 실력이 있는 무인을 모으는 과정에서 이야기를 나눈 무인들은 뭔가에 홀린 듯 지천번회에 들어갔다.”
“당시에 그들이 너에게 뭐라 했는가. 지천번회와 뜻을 같이하겠다는 무인들이 그만큼이나 많았다면 그만한 대의와 명분이 있었을 터다.”
심라경의 눈이 과거의 기억을 더듬듯 아련한 빛을 띠었다.
손가락이 떨리고.
목에서 흐르는 피에 얼굴이 창백해지는 와중에도 심라경의 눈빛은 여전히 그대로인 채 입이 열렸다.
“신선에게 빼앗긴 것을 되찾는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고 했지. 무림맹도 없고 천마신교도 존재하지 않으며 사혈련이 무너진 세상. 황제도 없고 황실의 존재도 지워진 세상 말이다.”
“신선에게 빼앗긴 것? 설명해라.”
“거기까지는 나도 모른다. 내가 지천번회와 함께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들은 말을 아꼈지.”
“이후 지천번회는 어찌 되었지?”
“몇 개월 후였다. 지천번회의 주인을 제외한 모두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사실 이건 내 추측이다. 청해성의 어딘가에 삼천 개의 무덤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때마침 지천번회의 무인도 삼천 명이었으니까. 다만 어떤 여인이 그곳에서 슬피 울고 있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다. 혈천회와 지천번회는 관련이 있나? 그리고 혈천회의 주인은?”
“그, 그것은 나도 모른다. 내가 혈천회의 이름을 아는 것도 우연히 나를 찾아온 사람이 종이를 잘못 꺼내어 혈천회라 적힌 전장의 전표를 보았을 뿐이다. 그들은 절대로 자신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지금부터 잘 들어라. 이곳에서 다섯 리쯤 떨어진 곳에 밤늦게까지 문을 여는 의원이 있다. 그곳에서 치료하고 내일 채홍이에게 작별 인사를 하여라. 내가 너를 죽이지 않는 것은 언젠가 채홍이가 너를 찾았을 때 죽어 있으면 슬퍼할까 해서 살려 두는 것뿐이다. 또한 나중에 때가 되면 너에게 전서구를 보낼 것이다.”
“저, 전서구 말이냐.”
“그렇다. 혈천회에는 채홍이를 못 만났다고 하고, 나중에 내가 연락을 하면 채홍이를 찾았다고 전하거라. 그때 내가 직접 혈천회에서 나온 사람을 만나겠다.”
“아, 알았다.”
심라경이 고개를 끄덕이자 천일영은 허공으로 물방울 같은 것을 띄워 올렸다.
둥실 떠오른 한 방울의 물방울은 이내 수십 개로 갈라져 심라경의 주변을 떠돌았다.
스으으윽.
작은 물방울 수십 개는 천일영의 손길에 따라 얇은 막 같은 것이 덮여 심라경의 몸속으로 녹아들 듯 스며들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독이다. 각각 혈도에 자리를 잡고 네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살려 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죽이지 않는다. 내가 기막을 거두면 그때는 온몸에서 피가 뿜어지고 사지가 터져 죽겠지만, 배신하지 않고 조용히 있는다면 네가 명대로 살다가 죽을 때까지 기막을 그대로 둔다고 약속하지.”
“그…… 그런!”
“조금이라도 딴생각하면 죽는다. 그것만 머릿속에서 잊지 않고 있으면 된다. 해독되지도 않는 독이거니와 딴마음을 품고 독을 제거하려 한다면 기막이 사라지니 잊지 말아라.”
“크윽! 아, 알겠다.”
지금 당장 죽지 않는 것만이라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심라경은 쏟아지는 피를 옷으로 동여매고 비틀거리며 천일영이 말한 의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잘하면 가는 길에 출혈이 심해서 죽을지도 모르지만.
‘길에서 쓰러져 죽는다면 아미파의 주지라는 이름이 아깝겠지. 겨우 그 정도의 사람이 무공을 가르쳤다면 채홍이에게도 수치다.’
빠캉!
천일영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아미파 주지의 검을 산산조각으로 부숴서 던져 버렸다.
* * *
다음 날 천일영이 시킨 대로 금채홍에게 데려가지 않겠다는 약조를 한 심라경이 아미파로 돌아갔다.
천으로 감겨 있는 목을 걱정한 금채홍이 괜찮냐고 물었지만.
“괜찮다. 어제 길을 잘못 들어 심하게 굴러서 목을 다친 것뿐이다.”
아미파의 주지가 심하게 굴러서 다쳤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만 심라경의 머리는 그 정도의 핑계가 한계였던 것 같았다.
천일영은 심라경이 돌아간 후 여러 장의 전서구를 날렸다.
‘심라경의 말이 맞는다면 오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지천번회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 이미 활동을 멈춘 곳이라면 지금 아무리 찾아도 보일 리가 없는 것이 당연한 일.’
혈천회와 환단, 극양과 극음의 기운에 관한 내용도 적었다.
또한 사천당문의 당강용에게는 아들이 양과 음의 기운이 뒤얽히게 된 일의 계기를 찾으라는 전서구도 보냈다.
이것은 하오문의 세하월과 안과 혜, 그리고 귀주성 지회의 윤의강에게 날아갔다.
빠르게 일을 처리한 천일영이 차를 한잔 마시고 있을 때 금채홍은 여전히 객잔에 자신을 보기 위해 몰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역시 채홍이가 있을 곳은 여기구나. 이곳 말고 다른 곳에 있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군.’
따스하고 향기로운 차를 입 안 가득 머금고.
천일영은 금채홍을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 * *
천일영에게서 도착한 전서구를 보며 안과 혜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꺄악! 오십 년 전의 일을 캐라니! 이걸 어떻게 찾아내. 사정을 아는 사람도 대부분은 죽었을 텐데. 게다가 청해성에서 무덤 삼천 개를 찾으라는 것은 또 무슨 말인지. 공자님! 살려 주세요!”
“지천번회도 해결이 안 돼서 머리가 썩는데, 혈천회라니! 난생처음 들어 보는 놈들인데, 전장 위주로 찾다 보면 건지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니. 중원에 전장이 몇 개인지 잘 아시면서 이런 주문을 하신다니요. 공자님! 살려 주세요!”
곁에 있던 사천당문 문주 당강용도 전서구를 받고 머리를 쥐어뜯기는 마찬가지였다.
“종남파에 숨겨진 것을 찾는 것도 애를 먹고 있는데 아들이 아팠던 이유를 찾으시라니. 그냥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인데 그것을 어찌 찾는단 말이냐. 심지어 그때 집에서 일했던 하인 중에서 그만둔 사람들도 태반인데. 공자님! 살려 주세요!”
번갈아 가며 머리카락이 죄다 뽑힐 정도로 쥐어뜯고 비명을 지르는 동안 안은 다음 편지를 펼치며 순간 얼어붙었다.
“몇 년 전 오 세에서 십 세 아이에게 먹였던 환단을 찾아라?”
“몇 년 전의 환단? 어떻게 생긴 환단인지도 모르고 이름도 못 들어 본 혈천회가 뿌린 것을 찾으라는 말씀이야?”
혜가 다시 한번 머리를 쥐어뜯는 가운데.
안의 눈이 전에 없이 반짝였다.
“나 가지고 있어. 환단.”
“뭐?!”
순간 방 안에 있던 혜와 당강용이 쥐어뜯던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고 안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