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백유화와 당강용.
그리고 안과 혜가 천일영과 함께 천 위에 놓인 물건 하나를 바라봤다.
‘백유화를 데리고 급히 오라는 전서구가 왔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은박처럼 반짝이는 환단이 천일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을 어찌 구했느냐.”
“구한 게 아니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과거 귀천명에서 서후량이 천마신교의 배신자 추자룡을 빼내려 했을 때.
당시 안과 혜는 무명암살대와 그것을 지켜보다가 서후량에게 당하고, 천일영과 떨어져 산서성의 현무산으로 들어가 잠적했었다.
도현이 서후량의 검에 죽을 뻔한 것을 천일영이 살렸고, 천일영도 모든 상황을 정리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천마의 자리에 올랐던 그때의 일을 안이 말했다.
“혜와 함께 전각의 꼭대기에서 서후량과 추자룡을 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전각의 바로 옆 골목에서 어떤 남자가 아이를 납치해서 들어가는 것을 보았지요.”
“남자가 아이를? 그 아이가 오 세에서 십 세 사이 정도였고?”
“그렇습니다. 제가 아이에게 강제로 환단을 먹이려는 남자의 팔을 잘라 버리고……. 그 남자가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위치가 탄로 나서 혜가 죽을 뻔했고, 무명암살대 7번 대 조장이신 창희문 님과 8번 대 조장이신 금태석 님이 죽었습니다. 서후량은 도현 님을 쓰러트리고 추자룡과 도망갔고요. 그때 제가 무슨 정신이었는지는 몰라도 남자가 들고 있던 환단을 가지고 왔었습니다.”
“십 년 전에 있었던 일인데 아직도 이것을 가지고 있었다니. 잘했구나, 안.”
그때의 실수로 수백의 귀천명 사람들과 무명암살대의 사람들이 죽었는데.
‘잘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게 도움이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때는 마비시키는 약 정도로만 생각했지. 아이를 납치하는 줄 알았으니까.’
안이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 내쉬는 한숨 소리가 방에서 조용히 퍼질 때쯤.
백유화는 환단의 형태를 살피며 냄새를 맡고 있었다.
“킁. 킁. 십 년이 지나도 멀쩡한 환단이라. 이건 분명 영약이 들어간 모양이군. 냄새도 그렇고. 이게 하나에 얼마짜리야. 엄청난 고가인데 이런 걸 마구 뿌리다니. 혈천회 놈들, 돈도 많네.”
“유화야, 영약이 들어갔다는 것을 확신하는 듯하구나.”
“아무리 잘 말린 약재를 사용했다 해도 십 년 동안 이렇게 멀쩡할 수는 없습니다. 영약의 기운이 약재를 오래도록 보존하게 만든 겁니다.”
“안에 들어 있는 성분을 분석하고 사람의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내는 것이 가능하겠느냐.”
“꺄하하하학! 이런 건 제가 전문이지요. 다만 시간은 조금 걸릴 것입니다.”
사냥감을 노려보듯 싸늘한 기운이 백유화의 얼굴에 드러났다.
“가능하다면 약을 복제까지 해 보지요. 혈도와 기도를 뒤틀고 극양의 기운과 극음의 기운을 만들어 낸다니, 보통의 원리는 아닐 겁니다. 이걸 복제해서 성분을 조금씩 바꾸는 것으로 극독도 만들 수 있고, 반대로 극상의 약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돈 걱정은 하지 말고 마음껏 만들어 보아라.”
“…….”
이미 대답하는 것도 잊은 채 백유화는 환단에 정신을 빼앗겼다.
살벌한 웃음을 지으며 혀를 내밀고 ‘하악’거리는 모습을 보니 영락없이 광기에 미친 의원 그 자체다.
‘항주로 돌아가면 나쁜 놈을 잡아다가 껍데기를 벗겨 놓고 복제한 환단을 먹인 다음 신체가 어떻게 변하는지 알아보겠지.’
환단을 시험하는 데 한 이백 명쯤 죽을 거 같다.
상상해 보자 한기가 온몸으로 몰려들어서 천일영은 몸을 부르르 떨며 당강용을 향해 말을 꺼냈다.
“종남파에 숨겨진 것이 무엇인지 찾는 데 꽤 애를 먹는 모양이구나.”
“종남파의 장문인인 청강이 협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청강과 함께 종남파를 샅샅이 찾아보기까지 했는데도 도무지 꼬리조차 보이질 않으니 여러모로 고생 중입니다.”
“찾기 쉬운 데 숨긴 거라면 그것은 숨긴 게 아니라 그냥 둔 것이겠지. 그러니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을 찾는다는 발상으로 찾아보아라. 혹은 네가 숨긴다면 어디에 숨길까 하는 생각으로 찾아보는 것도 좋겠지.”
“알겠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괜찮다. 나는 이걸 데리고 돌아갈 테니 나머지도 부탁하마.”
환단을 들여다보고 있는 백유화의 뒷덜미를 잡아 드니.
대롱대롱.
천일영의 손길에 매달린 것도 모르는 채 백유화는 환단에만 집중해 있었다.
“전서구로 보냈던 나머지 것들도 하루빨리 찾아보아라.”
“알겠습니다.”
훅.
천일영이 백유화를 손에 든 채로 사라졌다.
안과 혜는 당강용과 함께 입을 벌리고 멍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환단 하나 찾았다고 끝난 게 아니었지.”
“맞아. 다른 정보를 찾는 건 난이도가 더 높아. 혈천회란 거 어디에서 굴러먹던 당나귀 같은 놈들인 거야.”
“나는 이제부터 종남파에서 살아야 할 지경이다. 도대체 종남파에 숨긴 게 뭔지 조금이라도 정보가 있으면 찾기도 수월할 텐데. 하아…….”
세 명은 잠시 침묵을 이어 가다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하아, 살려 주세요. 공자님.”
끔찍할 정도로 어려운 것을 요구했지만, 천일영의 말은 절대적이었기에.
오늘도 안과 혜, 그리고 당강용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방 안을 굴러다녔다.
* * *
삼 일 후.
자유의 몸이 된 요소령과 유의선이 천일영과 마주 앉았다.
“어째서 나를 부른 것이지? 금화도 오십 냥이나 받아서 주머니도 두둑하겠다, 슬슬 은둔해서 조용히 남은 삶을 보내려고 했는데.”
“부탁이 있어서 불렀다.”
귀찮은 일이라도 시키는 것이 아닐까 경계하는 요소령에게 유의선이 대답했다.
요소령은 미간을 찡그리고 말을 맞받아쳤다.
“부탁할 일이라니? 그냥 안 듣고 가면 안 될까? 항주에 바다가 보이는 집을 알아봤다. 적당한 게 있어서 그 집을 사기로 했는데 빨리 계약하러 가고 싶구나.”
“항주에서 바다가 보이는 집 말고, 동정호의 물가가 보이는 전각은 어떠한가?”
“동정호?”
요소령이 괜히 들었다 싶은 표정으로 유의선을 노려봤다.
은퇴하려는 수적에게 난데없는 바다가 아닌 강과 연결된 담수호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야 뻔했으니까.
“동정호에서 장강수로채의 감시라도 시키려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유의선이 대답해야 할 말이 천일영의 입에서 나왔다.
“원래 이 계획은 내가 짠 것이다. 동정호가 장강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감시를 시키려는 것은 아니고 다시 수적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은퇴한다니까. 부하도 없고.”
“동정호의 옆에서 파양호(鄱阳湖)가 있다. 둘 다 장강과 연결이 되어 있는 거대한 호수지. 이 두 지역에 새로운 수적 단체를 만들어 채주가 되어 주었으면 한다. 물론 들어가는 자금과 무인들도 이쪽에서 준비할 거다. 황실에서도 일류 고수의 무인들을 보낼 거고.”
“관심 없다.”
“배도 원하는 만큼의 숫자를 최신의 것으로 준비하마. 동정호와 파양호에 수채도 지어 주지. 또한 물길을 다니는 배에서 통행비를 걷는 것을 황실에서 공식적으로 눈감아 줄 것이다.”
“됐다. 은퇴하는 마당에 통행비는 무슨. 지금 가진 금화 오십 냥도 죽을 때까지 다 못 쓰고 갈 텐데. 게다가 그런 것을 공짜로 줄 리도 없고.”
심드렁한 요소령의 말에 천일영이 오른쪽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장강과 동정호, 그리고 파양호를 잇는 새로운 수적을 만들면, 요소령 네가 빼앗긴 장강수로채와 싸우는 것을 도와주마. 박살을 내고 전부 다 죽인다 해도 눈을 감아 주지. 원한다면 내가 너와 같이 검을 들고 싸우기까지 해 주마.”
“그건 좀 땡긴다.”
요소령 자신이 상대해 봤기에 안다.
손끝 하나 댈 수 없는 신위다.
생기가 도는 눈으로 요소령이 흉악한 이빨을 드러냈다.
“그 망할 새끼들, 내가 잡혔다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내 자리를 빼앗았지. 그것까지도 상관은 없었는데 이놈들 요즘 소문에 듣자 하니, 여자와 아이들을 납치하고 통행비도 과하게 받는다더군. 완전 쓰레기가 되었더라.”
“쓰레기는 치우라고 있는 것이다. 청소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해 주지.”
탕!
요소령이 탁자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좋다. 그 정도라면 못 들어줄 것도 없지. 대신 내가 네놈들에게 치러야 할 대가는 무엇이냐.”
“정보다. 앞으로 대략 구 개월에서 십 개월 사이에 동정호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한다. 그것이 일어날 조짐을 알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막아 낼 수 있다면 그것까지 부탁하지.”
“못 막아 낸다면?”
“상관없다. 무슨 일이 생기는지만 알아내도 된다.”
“내가 얻는 것에 비해서 돌려줄 것은 얼마 안 되는군. 그렇다는 말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거겠지. 선수금은?”
“금화 삼천 냥. 저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계신 분이 줄 거다.”
“응?”
요소령이 고개를 돌리자.
유의선의 뒤편에 앉아 있던 수수한 옷차림의 황태자가 움찔거리며 어깨를 떨었다.
전에 천일영에게 한 소리 들었다고 화려한 옷을 버리고 시장에서 산 옷을 걸치고 있었다.
요소령은 문득 금화를 삼천 냥이나 줄 정도의 사람이 누군가 싶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천일영에게 작은 목소리를 건넸다.
“누구?”
“황실의 높은 사람이다.”
“봉 잡았네. 죽을 때까지 우려먹어라.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빨아먹어.”
“하하하. 충고는 참고하마. 자세한 일은 세부적으로 조율하기로 하고, 당장 착수해 줬으면 좋겠군.”
“알았다.”
요소령은 일어서서 수수한 옷을 입은 황태자의 등에 대고 인사를 했다.
“감사.”
뒤돌아서 객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 요소령의 등은.
여인이지만 한때 악명을 떨쳤던 장강수로채의 주인에 어울리게 거친 기세가 넘쳐흐르는 모습이었다.
* * *
한 달 후.
백유화는 여전히 애영과 화영을 데리고 환단을 분석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고.
안과 혜, 그리고 당강용도 각기 맡은 일 때문에 머리가 깨지도록 고생하고 있었다.
천이영은 별유천지로 몰려드는 손님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뛰어다녔고.
금채홍도 지금까지 매일같이 줄을 서 만나 달라는 사람들 때문에 온종일 바빴다.
혜령과 예서란도 학당에서 공부하느라 힘든 하루를 보내는 중이었고, 차경철과 건청도 객잔의 일로 정신이 없었다.
월영도 자경단의 일로 바쁜 것은 매한가지.
그 외에는 무탈하고 아무 일도 없이 평화로운 나날이다.
즉, 천일영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바쁘다는 말이었다.
“결과가 나오려면 다들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 공교롭게도 나만 한가하군. 뭐, 이참에 좀 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구나. 이제야 내가 원하는 백수 같은 느낌이군.”
바닷가에서 지는 노을을 바라보는 천일영의 눈에 오랜만에 평온한 빛이 찾아왔다.
그때 주변을 지나던 청년 둘이 크게 떠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샀네. 무공 책. 이걸 사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책이 없어서 한참을 기다렸다니까.”
“아무리 삼재검법의 책이라 할지라도 동전이 오십 냥이나 하다니, 너무 비싸지 않나?”
“원래는 동전 이십오 냥이나 비싸도 삼십 냥을 넘지 않았는데, 지금 무공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랐어.”
“그 정도인가?”
무공 책을 들고 있는 청년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난리야. 해적들과 왜구들이 강소성과 절강성, 그리고 복건성의 바닷가를 침입했을 때 별유천지의 소저가 큰 공을 세워서 항주는 피해가 적었잖아. 그 때문에 무공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어. 다른 지역은 피해가 컸기에 심지어 무공을 배우려는 사람들도 많고.”
“허허, 너 나 할 것 없이 무공을 배우려고 이 난리라니.”
소중하게 책을 들고 걸어가는 청년을 보니.
천일영도 요즘에 무공 광풍이 불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각 무림 문파에 사람들이 줄을 섰다고 하더니 삼재검법이나 태극권 같은 저잣거리에서 파는 책까지 가격이 오른 것인가.’
삼류 무인도 되기 힘들기는 하지만 책을 본 사람과 안 본 사람의 차이는 확연히 난다.
꾸준하게 수련하면 삼류 무인이 될 수도 있다.
‘단 책에 적힌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한다면.’
무공 책들의 경우 대부분이 불친절하다.
뜬구름을 잡는 듯이 쓰여 있는 말을 보고 무공을 수련하는 것 자체가 힘들기도 하고.
또한 자신의 몸에 맞게 조금씩 수정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책만 보고 무공을 익히는 사람이 가능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책을 읽다가 금방 포기하는 것이지. 삼재검법이라 할지라도 그 묘리를 알면 극강의 천하제일 무공이 되는 것을.’
천일영은 바다가 해를 집어삼키는 것까지 보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밤.
거대한 우차에 가득 실린 책 일천 권이 항주에 도착했다.
바로 혈천회가 남궁무애에게 부탁했던 무공 책.
그것이 열 명의 혈천회 간자와 함께 중원에서 가장 먼저 항주로 들어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