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책은 빠르게 팔려 나갔다.
상세하게 적힌 내용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일 년 안에 삼류 무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먼저 책을 샀던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내공! 말로만 듣던 내공이 몸 안에 쌓이는 게 느껴져!”
“정말인가?”
“아니, 이 사람이 속고만 살았나. 정말이라니까. 게다가 검법이 얼마나 실용적인지 벌써 저잣거리에서 산 동전 삼십 냥짜리 검이 내 손에 딱 들러붙는 게! 그냥 확 산적들 모가지를 날려 버릴 수 있을 정도야.”
“허허, 그렇게나 좋은 책이라면 나도 한번 사 봐야겠구먼. 그런데 그렇게나 훌륭한 무공 책이라면 가격도 비싸겠군.”
“그게 또 놀라운 것인데 가격이 불과 동전 열 냥밖에 안 하네.”
“에엥? 그렇게 싸다고?”
소문이 소문을 불러일으켰다.
천 권의 책은 불티나게 팔려 나갔고, 보름이 지나기 전 또다시 천 권의 책이 풀렸다.
그것도 들어온 당일 모두 팔렸으니.
사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은 사정해서 먼저 책을 산 사람의 것을 필사했다.
필사본이 나돌자.
약삭빠른 장사꾼들은 그것이 돈이 된다는 것을 즉시 눈치채고 또 한 번 필사하여 동전 오십 냥 정도를 받고 또 팔았다.
그렇게 불과 한 달 보름 사이에 수천 권 분량의 책이 퍼져 나갔다.
“형님! 이것 좀 보시오.”
“뭔데 시끄럽게 구는 것이냐.”
“이게 요즘 화제가 되는 책이 아니겠소. 내 형님한테 보여 주려고 힘들게 구했는데, 빨리 보시오.”
고자가 된 산적 두목 송여악에게 부하인 화문식이 책을 내밀었다.
설려온에게 깨진 알 두 개 때문에 나날이 목소리가 고와지는 송여악은 책을 펼치며 눈썹을 치켜들었다.
“건청에게 무공을 배웠는데 이것이 무슨 소용이더냐.”
“형님! 그 무슨 시대에 뒤떨어진 말씀을 하는 것이오. 이 책 때문에 지금 난리인데. 배우는 순간부터 확! 하고 내공이 쌓이고 무공의 실력이 일취월장한다고 하여 다들 이 책을 구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이 말이오.”
“우리가 건청에게 배운 무공도 보통은 아니다. 다른 산적들과 붙어서 깨진 적이 한 번이라도 있냐. 전부 상대편을 개떡으로 만들어 놨는데. 게다가 내공이라니, 그게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것이냐.”
“아이고 답답해! 그러니까 하는 말이 아니오! 형님이 이 무공을 배워서 무공의 경지가 높아지면 공자가 다시 볼 게 아니겠소. 그러면 형님이 별유천지에서 공자님의 오른팔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요. 신분이 높아지면 받는 돈도 많아지고! 여자도…… 아니, 이건 말고. 암튼! 한번 속는 셈 치고 배워 보시오.”
“쓰읍, 이놈이 여자 이야기를 나한테 하다니!”
쿵!
솥뚜껑 같은 송여악의 손이 화문식의 머리로 내리꽂혔다.
“아아악, 왜 때리시오.”
“몰라서 묻냐? 장가도 못 가고 있는 나한테 여자? 암튼, 기왕 가져온 것이니까 한번 보마.”
“잘 생각하셨소. 그리고 그…… 잘되어서 공자의 오른팔이 되면 우리를 잊지 마시오.”
“녀석, 내가 너희를 버리기야 하겠냐.”
송여악은 무공 책을 보며 내공심법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건청은 검술은 가르쳐 주었어도 내공심법만은 배우는 것을 막았었기에 그렇지 않아도 불만이 많았다.
‘혈도가 이미 막히고, 기도도 뚫릴 가능성이 없어서 나이가 들어 내공심법을 배우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라고 했던가. 쳇, 웃기는 소리. 우리가 강해지면 별유천지의 공자가 아끼게 될 것이 뻔하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속이려 한 것이겠지.’
내공심법이 적혀 있는 무공 책은 가문의 비급 책이 아닌 이상 없기에 송여악은 속는 셈 치고 수련을 시작했다.
‘물론 효과가 없으면 책을 가져온 화문식도 고자로 만들 거지만.’
서럽게 혼자 고자인 것보다는 한 명이라도 동지가 생기면 마음이 평안할 것 같았기에 송여악은 날이 선 검을 흘끔 바라보고는 내공을 쌓기 위해 책에 집중했다.
* * *
보름 뒤.
천일영은 아침에 일어나서 객잔으로 들어서다가.
툭.
뭔가 발치에 차이는 것을 느끼고는 깜짝 놀랐다.
“유화하고 애영이와 화영이?”
백유화는 혀를 내밀고 눈을 까뒤집은 채 흰자만 보였고.
애영과 화영은 정신을 잃고 백유화의 위에 포개져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기운이 너무 흐려서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게다가 침을 흘리고 눈이 뒤집힌 것을 보면 독에 당한 것 같기도 하고!’
급하게 백유화의 혈을 짚어 보려고 했던 천일영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아니지. 중원 제일의 독 전문가인 유화가 그리 쉽게 당했을 리가.’
천일영은 혈을 짚기 위해 들었던 손가락으로 백유화의 뺨을 푹 찔렀다.
손가락이 말캉한 볼살을 타고 들어가자, 순간 백유화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바아아아압!”
“역시 배가 고파서 쓰러진 것이었군.”
매번 하는 것처럼 천일영은 뒷덜미를 잡아서 대롱거리는 백유화를 의자에 앉혔다.
“끄으으윽. 배고파서 미치겠어요. 며칠을 굶었는지 기억도 안 나네요. 환단의 분석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서 정신없이 매달렸더니…….”
“환단의 분석은 끝난 것이냐.”
백유화가 객잔을 둘러봤다.
아직은 아무도 없는 객잔.
‘화영이와 애영이는 배고파서 기절했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
이때가 기회다 싶었던 백유화가 양팔을 활짝 벌렸다.
“공자님이 안아 주시면 당장 환단의 분석이 끝날 것 같아요.”
“계속 굶고 싶은 모양이구나. 죽을 때까지 굶어 보고 싶으냐.”
“쳇, 안 넘어가시네.”
비쭉거리는 입술을 내밀고 백유화가 투덜거리는 사이에 주방으로 들어갔던 천일영이 음식을 내놨다.
“먹어라.”
“엥? 공자님께서 직접 만드신 음식인가요? 음식을 할 줄 아신다는 건 처음 알게 된 사실이네요.”
“무명암살대 시절에 산속에서 한 달씩 잠복하기도 했었으니까, 그때 죽지 않으려고 조금 배웠던 것들이다. 아직 불을 지피지 않아서 있는 재료로 대충 만든 것이니 제대로 된 음식은 이영이가 나오면 달라고 하여라.”
“우으으, 공자님이 만드신 음식이라니! 애영, 화영! 빨리 일어나라.”
백유화가 애영과 화영의 엉덩이를 걷어차자 눈을 비비고 일어난 두 여자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밥이다! 밥이야! 이게 현실인가!”
“살아생전에 밥을 다시 보게 되다니! 이거 설마 꿈은 아니겠지?”
세 명의 여인은 꾀죄죄한 몰골로 우걱우걱 음식을 퍼먹었다.
그러고 보니 세 여인의 뺨이 홀쭉하고 눈 밑에 그림자가 짙었다.
“환단의 분석도 중요하지만, 건강도 챙기거라. 몰골이 말이 아니다. 머리에서 흐르는 기름 때문에 광이 날 지경이구나.”
“사실은 환단의 분석은 끝났습니다. 어젯밤에요.”
“끝나고 나니 갑자기 배고픔이 몰려들었고, 별유천지의 주방에 잠입하려다가 쓰러진 건가.”
“꺄하하학. 재료라도 집어 먹으려고 했죠.”
입가에 음식을 한가득 묻힌 백유화가 연이어 말했다.
“환단은 분석할수록 무서운 물건이었습니다. 아마 화타가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저런 환단은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원리는 이해가 되더냐.”
“원리도 전부 파악했습니다. 영약에 들어 있는 만년하수오가 기도와 혈도를 깨우고 만년삼이 그 안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열린 기도와 혈도가 닫히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요. 여기까지는 소림대환단과 비슷합니다. 다만 소림의 대환단이 내공의 증진을 위한 작용을 한다면, 계심, 계혈등, 고삼, 곡정초, 골쇄보, 구맥, 괴각, 마황근, 귀전우, 백굴채 등의 약재를 섞어 만든 것이 단전에 든 기운과 기도에 흐르는 기를 뒤틉니다. 거기에서 몸에 변화가 생기고 혈도와 기도의 자리가 바뀝니다.”
“대단하군. 영약을 제외하고는 흔한 약재만 가지고 그 정도의 작용을 일으키다니.”
백유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그 부분에서 많이 놀랐었으니까.
“다음은 천년하수오가 음의 기운에, 천년삼이 양의 기운에 반응합니다. 환단을 먹는 사람이 양에 적합한지 음에 적합한지를 파악하는 것인데, 일단 파악이 되면 당귀, 단삼, 대극, 마편초, 금은화, 사간, 비해 등의 재료가 섞인 성분이 음이나 양의 기운을 활성화하고 가속시킵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극단적으로 기운을 활성화하다 보니 많은 사람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몇 명이나 죽었느냐.”
“잡아 온 나쁜 놈들의 껍데기를 벗기고 관찰하는 동안 오십 명이 죽었습니다. 총 130명 중에서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백유화는 삼백 명쯤 껍데기를 벗겨 실험을 거듭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겠지만.
‘과거 귀천명이나 아미파에서 죽은 아이들의 수가 생각보다 많겠구나.’
수많은 아이가 죽었을 텐데 아무도 모를 정도로 은밀했다는 게 새삼 놀랍다.
백유화가 이어서 말했다.
“환단의 영향을 받아서 극양과 극음의 기운을 가지게 된 자들이 또 문제인데요. 이들의 극양과 극음의 기운은 보통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합니다. 그야말로 조금의 다른 기운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극양과 극음의 기운입니다.”
“만약에 그 기운을 채기법이나 그와 비슷한 방법으로 빨아들인다면?”
“무공의 상승이 엄청나겠지요. 게다가 이 환단의 무서운 점은 그게 아닙니다. 환단의 성분을 조금만 바꾸면 중단전을 열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극양이나 극음의 기운을 섭취한다고 가정했을 때요. 한두 명 가지고는 안 되겠지만 수십 명의 기운을 빨아들인다면 가능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냐!”
끄덕이는 백유화의 고갯짓에 천일영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극양이나 극음의 기운을 갖는 사람의 숫자가 비록 적다고는 하지만.
‘강제로 중단전을 열어 경지에 오른다고? 이런 방법을 누가 생각했단 말이냐.’
천일영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그간에 있었던 일들이 정리되며 하나로 모이는 느낌이 들었다.
‘어용지천참대검이 철을 다루지 못하는 시대에 태어나 청동으로 만들어졌었다. 남궁천이 사천당문을 통해 해남도를 집어삼키려 한 계획은 십 년 정도가 걸렸다. 항주에 조선소를 짓게 만든 계략도 오랜 세월 동안 공을 들였다. 아미파의 주지에게는 이십 년 전부터 속가제자들을 상대로 음양의 기운을 얻으려 했고, 지천번회의 역사도 오십 년이 넘는다.’
또렷하게 정신이 맑아지는 가운데, 천일영은 혈천회에 대해서 하나의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환단을 만들고 강제로 중단전을 열게 하는 것이 수십 년 정도의 시간을 들인다고 하여 알아낼 수 있는 것인가. 적어도 백 년, 혹은 수백 년의 시간을 들여야 가능한 것을…….’
몇천 년 전에 만들어진 검의 주인은 언제나 신중하고 오랜 시간을 들여 중원을 공략해 왔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놈들은 시간이 많다는 의미다. 실패할 확률을 줄이는 게 시간이 흐르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건.’
수명의 제한이 없다는 것.
혹은 제한이 있더라도 보통의 사람보다는 훨씬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있는 단체이거나 사람일 것이다.
사라진 어용지천참대검은 아마도 남궁천의 검이 아니었을 터다.
‘지금쯤 진짜 주인이 가지고 있겠지. 지천번회가 모든 일을 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혈천회라. 어쩌면 진짜 적은 지천번회가 아니라 혈천회일지도 모르겠군.’
천일영은 여전히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 백유화를 바라보았다.
“소림대환단에 대해서 잘 아느냐. 조금 전에 안이 가지고 있던 환단이 소림대환단과 구조가 비슷하다고 했었지?”
“조금 아는 정도입니다. 워낙에 유명한 환단이라 기본 구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거든요. 내용물은 거의 모르지만요.”
“유화야, 너는 환단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알아내거라. 소림대환단과 구조가 비슷하다면 비슷한 것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갑자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지요?”
천일영이 잠시 눈을 감았다.
적이 지천번회인지, 혈천회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분명 둘 다겠지.’
정체라도 알면 분명 서로 싸움을 하도록 계략을 짰을 것이다.
그것이 최상의 한 수였을 테니까.
눈을 뜨고.
숨을 고른 천일영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렀다.
“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하다. 이대로라면 싸움의 끝에서 뒹구는 것은 분명 우리들의 시신이다.”
“공자님!”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전부 쓴다. 더럽고 치사하고 악독한 짓이라고 해도 그것이 이기는 길이라면 외면하지 않는다.”
“아니…… 그건 제 전문인데. 치사한 쪽으로 지혜를 빌려 드릴까요? 무한정으로 제공 가능한데요.”
백유화의 말에 천일영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너는 환단을 연구하면서 화경에 들어서야겠다. 그것도 다음 달 안에. 채홍이와 건청, 그리고 월영도 초절정 고수가 되어 줘야겠고.”
“네에? 저 벌써 입에서 살려 달라는 말이 나올 것 같은데요.”
환단 분석의 끝이 왜 화경이지?
‘죽일 생각이다. 분명 공자님은 내 뼈가 가루가 될 때까지 굴릴 생각이다.’
모처럼 맛있게 먹은 밥이 속에서 울렁거리는 것을 느낀 백유화가 침을 꿀꺽 삼키자 천일영이 말했다.
“죽이지는 않는다. 한 시진마다 죽기 직전까지는 가겠지만.”
“살려 달라고 해도 분명…….”
“아니, 죽이지는 않는다니까.”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천일영은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의 백유화를 바라보며.
벌벌 떨고 있는 토끼를 바라보는 호랑이같이 입맛을 다셨다.
딱 한 입 거리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