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백유화와 금채홍.
건청과 월영이 죽어가는 차경철, 서하린과 함께 물을 찾았다.
“목말라…….”
“사람 살……려.”
“운이 좋지 않으면 쫓기면서 온종일 싸우게 되는 때도 있다. 그때마다 목이 마르면 물을 찾아 마실 것이냐.”
“그렇기는 한데……. 공자님은 사람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지금은 그저 귀신으로 보여요.”
백유화가 혀를 내밀고 바닥에서 늘어졌다.
벌써 이틀째 잠도 안 재우는 공자님의 말에 따라 무공의 연마만 했다.
‘전에도 죽도록 굴리기는 했는데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지경이다.’
하늘이 노랗다 못해 거메진다.
의식이 끊기고 눈꺼풀이 내려앉아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었다.
천일영이 무덤덤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운이 좋지 않으면 쫓기면서 온종일 싸우게 되는 때도 있다. 그때마다 졸리면 잠을 청할 것이냐.”
“아아아악. 공자님!”
억지로 눈을 뜨고 바닥에서 바둥거리던 백유화가 갈라진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는데.
꼬르르르륵.
배에서 소리가 울렸다.
이틀 동안 먹은 것도 없었다.
하물며 물도 안 주는데 밥을 줄까.
“운이 좋지 않으면 쫓기면서 온종일 싸우게 되는 때도 있다. 그때마다 배가 고프면…….”
“그만 하세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전에 한 말에서 물과 잠, 그리고 밥으로 글자만 바꿔 이야기하는 천일영의 악귀 같은 면모에 다들 치를 떨며 몸을 일으켰다.
그중에서 유독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사람 둘이 있었으니.
“아니! 우리는 왜 같이 수련을 하는 거냐!”
“노인을 공경해라. 노인을 이리도 굴리다니, 네가 사람이냐!”
천량도사와 도철용도 영문을 알지 못한 채 이틀 동안 같이 구르고 있었다.
천일영은 그들에게 지금에서야 목적을 이야기했다.
“너희도 화경에 들어서야겠다.”
“엉? 화경? 그게 되고 싶다 해서 되는 경지인가.”
“나는 가능하게 할 수 있되, 너희는 불가능하지. 그러니까 굴리는 거다. 죽음 직전까지 몰리고 또 몰리면 깨닫는 게 있을 테니 잔말 말고 따라와라. 앞으로 삼 일만 더 구르면 물과 밥을 주마. 인심 써서 잠도 자게 해 주겠다.”
“삼 일 뒤에나? 그것도 인심을 써서?”
후우우웅. 빠악!
월영에게 빌린 동전 삼십 냥짜리 검면이 천량도사의 엉덩이를 파고들었다.
천량도사는 닳고 닳은 무인의 반응대로 순간 호신강기를 몸에 둘렀지만.
아무 소용도 없이 충격은 고스란히 뼈마디를 타고 올라왔다.
“끄악, 아프다! 이놈아, 사람을 죽일 생각이냐.”
“겨우 이 정도에 호신강기를 둘렀는데도 아프면 평생 해 온 수련은 헛거다. 죽기 싫으면 피해라. 제대로 못 피하면 남은 사흘 동안 엉덩이가 걸레짝이 되겠지.”
“차라리 죽여라! 더는 못 움직인다.”
“죽이지는 않는다. 다만 깨달음을 얻으려면 죽도록 구르고 목숨의 위기가 수십 번은 왔다 갔다 해야 겨우 실마리를 얻을 터.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는 매일 이렇게 굴린다. 그리고 불만은 듣지 않기로 하지.”
후우우우웅. 쩌억!
천량도사가 입을 벌려 항의하려고 하자.
천일영은 다시 한번 천량도사의 엉덩이를 검면으로 죽을 만큼 때렸다.
“아아아악. 사람 살려! 천마가 사람 죽인다. 아아악.”
“거참, 안 죽인다니까.”
천량도사와 도철용도 중원에서 이름을 날리는 초고수지만, 악질적으로 굴리는 천일영 앞에서는 방도가 없었다.
다만 타진표만은 천일영이 시키는 대로 묵묵히 따랐다.
경지를 끌어올리고 싶어 하는 뚝심 있는 무인의 얼굴.
그는 천일영을 기연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저놈의 천량도사하고 도철용에겐 타진표의 목욕물이라도 달여서 먹이고 싶구나. 지금 무림맹은 아직도 맹주를 추대하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거늘, 화경의 경지에 올라서 얼른 무림맹의 맹주가 될 생각은 하지 않고.’
이 정도로 굴렸으면 평소와 다른 위화감 때문에 천일영의 의도를 파악했어야 한다.
‘도철용은 조금 눈치를 챈 것 같기는 한데, 천량도사는 그저 억울하기만 한가 보군. 저런데 어찌 백 살이 넘도록 저렇게 정정한지. 그동안 살아오면서 속아 넘어가 독을 열 번도 더 삼켰어야 하지 않나? 도대체 어떻게 저 나이까지 살아 있는 거야.’
무림에서 일컬어지는 가장 신기한 수수께끼 중에는 천량도사가 늙을수록 정정해지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천일영도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새삼 신기하기는 했다.
* * *
팔 일 후.
그동안 오 일 간격으로 하루를 쉬게 하고 굴린 끝에.
오늘의 수련만 끝나면 내일은 쉬는 날이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몰려든 지 한참이 지났을 때 천일영이 도철용과 천량도사, 그리고 타진표와 백유화를 두고 말을 꺼냈다.
“하늘에 별이 보이느냐. 은하수를 타고 흐르는 별 무리 중에서 유독 반짝이는 별들이 있다.”
“헉. 헉. 죽을 것 같은데 별이고 은하수고 웬 말이냐. 빨리 쉬게 해 줘라.”
투덜거리는 천량도사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개소리는 개한테 하라는.
천일영은 천량도사가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이어 갔다.
“별은 언제나 같은 속도로 같은 자리를 돈다. 하지만 계절에 따라 서서히 서쪽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다음 해가 되면 별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고 이것이 영원히 반복된다.”
“그런 개소리는 말고 제발 물 좀…….”
천량도사의 외침이 천일영에게 간절함으로 다가왔지만 역시 무시하고 이야기는 계속됐다.
“기운은 혈도와 기도를 따라서 움직인다. 일류 고수에서 절정 고수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혈도에 기운을 담고 폭발적인 기운을 내는 법에 대해서는 모두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운이 움직이는 방향이 별처럼 언제나 같은 방향을 타고 흐르지 않느냐. 삼류 무인은 검을 내가 원하는 곳으로 날아가게 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이류 무인은 초식의 막힘이 없고 위아래, 좌와 우로 모든 검이 닿게 하는 것으로 경지에 이른다. 일류 고수는 단전에 모인 기를 꺼내서 검에 기를 흐르게 할 정도로 기운을 다스리는 것이고, 절정 고수는 단전의 기를 혈도로 고이게 하여 기운을 꺼내 쓴다. 그리고 초절정 고수는 온몸의 기운을 돌리고 혈도와 기도를 자유롭게 이용하며, 원하는 곳에만 기운을 집중시켜 사용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단전의 기운을 피부에 닿는 면으로 꺼낼 수도 있으니 호신강기도 사용할 수 있고, 물질로도 형상화할 수 있으니 그것이 검강이다. 그러면 화경은 기운을 어찌 움직이겠느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물 좀!”
파바바밧.
천일영은 혈도를 짚어 천량도사의 입을 틀어막았다.
귀만 열리고 눈도 안 보이게 된 천량도사는 강제로 천일영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은하수 안에서 도는 별을 생각해 보아라.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 년 후에는 제자리로 돌아온다. 항상 움직이는데 어찌하여 일 년 후에는 같은 자리에 있겠느냐. 그것은 돌아오는 다른 길이 있는 것 같지 않으냐. 기도와 혈도가 움직이지 않고 언제나 제자리에 있는데 기운을 다르게 돌리려면 어찌해야겠느냐. 커다란 은하수가 사람의 몸이라고 생각하면 별은 혈도라고 생각해 보아라. 그리고 유난히 반짝이는 별들을 유심히 관찰해 보는 것도 좋겠지.”
“그 말은…….”
“다른 길은 하나가 아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분명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파바바밧.
이야기가 끝난 천일영은 천량도사의 혈도를 풀었다.
“으하. 아니, 그러니까 뭔 이야기냐! 그보다는 물 좀 다오.”
눈이 뜨이고 입이 열리자 소리를 지르는 천량도사와는 달리.
타진표와 도철용, 그리고 백유화는 뭔가를 집중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 천일영이 한 말은.
‘화경의 경지에 들어서는 깨달음을 숟가락으로 떠서 먹여 준 것과 마찬가지다. 온몸에 기운이 도는 것은 별자리처럼 서쪽으로 도는 것. 즉 왼쪽으로 도는 것이다. 일 년이 지나서 별자리가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은 왼쪽으로 도는 길 말고 다른 길을 찾으라는 것. 그리되면 방향과 상관없이 기운을 온 방향으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된다. 방향의 제한이 없어진 기는 충돌하지 않고 형상화해 몸 밖으로 빼내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기어검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원리가 바로 그것인가. 반짝이는 별을 유심히 보라는 것은 혈도 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있고, 그것이 중단전을 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여 형편 좋게 중단전이 열리는 게 아니란 말인가.’
천량도사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생각에 잠기는 사이.
백유화는 유독 눈매를 찡그렸다.
바로 극양의 기운과 극음의 기운을 통해 환단으로 중단전을 강제 활성화하는 원리가 천일영이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망할, 저 환단을 만든 놈은 최소한 현경의 경지 정도는 됐겠군.’
새삼 환단의 역할에 무서움을 느낄 정도였다.
“이제 쉬어라. 내일은 잘 먹고 푹 자야 할 것이다. 그래야 모레부터 또 힘을 낼 수 있을 테니까.”
“드디어 쉬는구나.”
천량도사는 목이 마르면서도 벌렁 드러누웠다.
그 모습을 보면서 순간 천일영도 깨달음을 얻었다.
문득 찾아온 깨달음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천량도사가 백 살이 넘도록 정정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바보다! 천량도사는 뼛속까지 바보였군. 바보는 감기에도 걸리지 않는다고 하더니, 이게 오래 사는 비결이었구나.’
그동안 어쩐지 조금 알 것 같기는 했었다.
천량도사가 변태로 몰렸을 때도 그랬다.
자신이 천마인 것을 제일 늦게까지도 눈치채지 못하다가 도철용이 알려 줘서야 알게 된 것도 그랬다.
지금 깨달음을 떠먹여 주는 이 순간도 그랬다.
‘뇌가 거의 고양이 정도의 크기일지도.’
이것으로 천량도사가 백 살이 넘도록 쇠약해지기는커녕 점점 정정해지는 무림의 수수께끼가 풀렸다.
다만.
‘근데 고양이만 한 뇌로 어떻게 초절정 고수가 된 것이지?’
수수께끼는 풀렸지만.
새로운 수수께끼가 생겨 버려서 천일영은 머리를 털고 천량도사에 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리고 결심했다.
‘바보는 옮는다니까 채홍이 곁에는 얼씬도 못 하게 해야겠다. 아무래도 채홍이 역시 바보 같은 부분이 있으니까 동질감을 느껴서 친해진 것일지도. 채홍이는 여기에서 더 바보가 되면 안 된다.’
혈광을 눈동자 안에서 터트리며.
굳은 결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천일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 * *
흑룡강성.
남궁무애는 여전히 항상 찾아오던 바닷가에 있었지만, 예전처럼 물속으로 들어가서 조개와 놀지는 않았다.
죽은 듯 백사장에 누워서 바다만 바라보고 있을 뿐.
친구.
혹은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조개들은 이미 있던 자리에서 떠난 지 오래였다.
금채홍이 밥을 먹을 수 있게 하는 동안 두 번 정도 공자가 와서 흩어진 조개들을 다시 모아 주기는 했지만.
지금은 독특한 무늬 때문에 가장 예뻐했던 조개도 어디론가 가버린 지 오래였다.
그래도 상관은 없는 듯 남궁무애는 더는 조개를 찾지 않았다.
가짜 가족이라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며칠 동안.
해가 지고 다시 떠도 썩은 생선 같은 눈으로 바다만 바라보던 남궁무애가 입을 열었다.
“여기는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 왜 왔어?”
“너를 찾았었는데 집에 없길래. 게다가 제법 오래 집을 비웠던 모양이군.”
“어딜 다녀왔는지는 알 거 없어.”
혈천회의 천자 하은월이 백사장에 누워 있는 남궁무애의 곁에 앉았다.
“걱정했다. 네가 말도 없이 사라져서.”
“내가 아니라 지천번회의 이름이 걱정된 것이겠지. 네가 준 무공 책도 중원에 잘 퍼지는 중이고, 지천번회의 이름으로 했던 일은 모두 마무리되었으니까 찾아오지 않아도 돼.”
“일의 여부를 따지려고 찾아온 것은 아니다만.”
누워 있던 남궁무애가 며칠 만에 몸을 일으켰다.
그동안 마음을 굳히고.
결심했던 것을 말하려는 남궁무애의 입술이 떨렸다.
“지천번회는 네가 가져. 나는 이제 모든 것에서 손을 뗄래. 서후량도 내 부하인 척하지만 사실은 네가 데리고 있는 사람이잖아. 나를 감시할 겸. 혈천회의 일이 틀어지지 않도록 심어 놓은 사람이라는 정도는 예전부터 눈치채고 있었어. 서후량도 다시 데리고 가.”
“손을 떼겠다고? 여기까지 와서? 일이 거의 다 끝나고 이제 얼마 후면 염원했던 일이 이루어지는데?”
“네가 염원했던 일이지, 나는 아냐. 여기까지 도왔으니 이제 됐잖아?”
하은월은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남궁무애가 결정한 일에 자신은 관여하지 않겠다는 듯했다.
“알았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응. 이제 볼일 다 봤으니까 가 봐. 다시는 만날 일 없을 거야.”
“그동안 즐거웠다. 신세를 많이 졌군. 네가 거래하는 전장에 돈을 좀 넣어 두마. 내 성의다.”
“괜찮아. 안 그래도 돼.”
남궁무애는 다시 모래사장으로 몸을 눕혔다.
귀찮다는 듯.
더는 할 말도 없다는 듯.
하은월은 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눈 속에는 살기가 꿈틀거렸지만.
그는 남궁무애가 그것을 알지 못하도록 숨기며 그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