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천일영은 예서란과 단옥에게 다짐을 받았다.
몇 번이고 끊임없이 계속 다짐을 받아 내는 천일영이 끈질기게 느껴질 법도 했지만, 예서란과 단옥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닷새 동안 밥과 물은 물론이고 잠조차 재우면 안 된다. 네가 잠이 드는 시간에는 단옥에게 감시를 하라고 하여라.”
“네, 공자님은 걱정하지 마시고 다녀오세요.”
“맡기마.”
천일영은 길을 떠나려던 참이었다.
그동안 악귀같이 시켜 왔던 수련을 중지할 수는 없어서 예서란과 단옥에게 감시를 맡기고, 직접 종남파에 가서 숨겨진 것을 찾기 위함이다.
동정호에서 생길 일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제 남은 시간은 겨우 팔 개월.
‘아마도 종남파에 숨겨진 것이 지천번회와 혈천회하고 관련이 있을 터다.’
청해성 어딘가에 있다는 삼천 개의 무덤도 찾을 생각이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무덤이 있는 곳에 단서도 있을 것 같았다.
“제대로 수련하지 않는 사람은 내가 돌아오면 이야기해 다오. 특히 천량도사라든가. 몇 번 쉬었는지까지 모조리 적어서 나중에 건네 다오.”
“알겠습니다.”
눈웃음을 짓는 예서란과.
수련 때문에 다 죽어 가는 건청을 바라보는 단옥의 걱정스러운 시선 속에서 천일영은 종남파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 * *
다음 날.
천일영은 당강용과 함께 종남파의 장문인 청강 앞에 앉았다.
과거 천일영이 귀주성 전투에서 종남파의 장문인이었던 청진을 죽였을 때 청강도 있었다.
하지만 청강은 천일영을 알아보지 못했다.
환골탈태(換骨奪胎)를 거친 눈앞의 사람이 천일영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청강이 말했다.
“전에도 당문주와 함께 종남파 구석구석을 찾았으나 아무런 소득도 없었소. 다시 찾는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소만.”
“종남파를 멸문시켜서라도 이곳에 숨겨져 있는 것을 탐내는 사람이 있다. 지금은 조용하다고 해도 언젠가는 다시 노리려고 할 터. 미리 찾는 편이 종남파를 위해서도 좋다고 생각한다.”
차를 마시며 느른하게 입을 떼는 천일영의 모습이 한가롭게 보이기는 했어도 청강은 긴장을 풀지 않고 의심의 눈길도 지우지 않았다.
난데없이 ‘천무탁’이라는 이름으로 당강용이 데려온 사람이 신뢰가 갈 리가.
“우리도 찾고 있으니 오늘은 돌아가시는 게 어떠시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종남파의 모든 것을 보이는 것은 무리요.”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다. 다만 돌아는 가되, 그 전에 청자 배 돌림 윗분을 만나고 싶군. 내가 알기로는 딱 한 분이 살아 계실 텐데.”
“……!”
청강의 눈길이 의심을 넘어 경계의 빛을 발했다.
과거 종남파에서도 그 이름을 널리 알렸던 무진.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은 종남파의 비밀이었다.
‘다들 죽었을 거로 생각하는 무진의 생사를 어째서 알고 있는 것이지?’ 비밀이 많은 분이라 종남에서도 일부러 숨기고 있었는데.’
그가 언제부터 종남파에 있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나이도 불명.
심지어 그의 무공이 고강하였다는 것을 제외하면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도 불명이다.
청강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무진께서 손님을 뵐지 여쭤보기는 하겠소. 다만 우리도 십 년 이상 그분의 얼굴을 뵙지 못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하오. 병세가 깊으셔서 종자 하나를 제외하면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있소.”
“지천번회와 혈천회. 이 이름을 듣고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면 돌아가겠다.”
“지천번회? 남궁세가를 멸했다는 그 지천번회 말이오?”
“오십 년 전의 지천번회라고 여쭸으면 좋겠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전하기는 하겠소이다. 내일 다시 오시오. 이 시각 정도면 괜찮을 것 같으니.”
“그러지.”
천일영은 당강용과 함께 몸을 일으켜 종남파를 나섰다.
내려오는 산길이 제법 지루했는지 당강용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무진이라는 이름은 처음 듣습니다. 그런 분이 종남파에 계셨습니까.”
“과거가 남긴 혼령 같은 사람이다. 천마로 있을 때 과거를 조사하다가 그 이름을 알게 되었지. 유명하지 않은 이유는 그냥 어느 날 갑자기 등장했고, 그가 활약했던 시기는 단 이 년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쓰러져 가는 종남파에 터를 잡고 부활시켰었다.”
“터를 잡았다? 종남파의 무인이 아닌데 종남파에 터를 잡았다는 말입니까?”
“종남파가 아닌데 종남의 무공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고 하더군.”
당강용은 눈알을 돌리며 생각에 잠기다가 천일영에게 말을 건넸다.
“근데 종남파는 어째서인지 매번 다 쓰러져 가고 있습니다? 제대로 돌아가는 경우가 없군요.”
“속가제자를 많이 들이고 세속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공이 느리게 쌓이는 내공심법을 가르치는 이유도 있지. 덕분에 같은 섬서성에 있는 화산파에게 매번 눌리는 형국이다.”
“다 쓰러져 가는 문파에 중요한 것을 숨긴다. 제법 그럴듯하군요.”
시원한 바람이 불고 해가 저물어 가는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서 객잔에 들어선 당강용과 천일영은 음식을 주문했다.
종남산의 입구에 만들어진 객잔은 종남파의 쓰러져 가던 과거와 닮은 듯 낡고 오래된 곳이었고, 손님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빨리 나온 음식은 제법 먹음직해 보였지만.
드르르륵.
종남의 도복을 입은 젊은 무인이 땀을 흘리며 소리쳤다.
“이곳에 혹시 사천당문의 문주님께서 계십니까?”
“나일세. 무슨 일인가?”
“여기에 계셨군요. 장문인께서 지금 당장 급히 오시라고 합니다.”
천일영이 입꼬리를 올리며 젓가락을 내려놓고 동전 스무 개를 탁자에 올렸다.
“오십 년 전의 망령이 무진을 깨운 모양이군.”
“허허. 오십 년 전이라는 말 한마디에 이렇게나 빨리 반응이 올 줄이야. 공자님이 오시니 하루 만에 해결이라니, 난 여태 무엇을 한 것인지.”
천일영은 종남산에서 내려올 때와는 달리 빠르게 종남파를 향했다.
당강용도 자신의 능력을 한탄하며 구겨진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 * *
종남파 안에서도 한참 동안 좁은 길을 굽이굽이 타고 올라 끝에 이르자.
그곳에는 놀랍게도 상당히 큰 장원이 숨어 있었다.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는 절묘한 위치에 숨겨진 그곳에서 청강은 목소리를 다듬고 입을 열었다.
“불러오시라던 손님을 데리고 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물리고 손님 혼자서 들어오시라 하여라. 청강, 너도 물러가고.”
“알겠습니다.”
열리지 않은 문 건너편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따라서 청강은 천일영을 혼자 두고 당강용과 함께 좁은 길을 타고 내려갔다.
천일영이 문을 열자.
훅.
나이 들고 병이 난 몸에서 나는 냄새가 방 안에서 공기를 따라 밖으로 흘러나왔다.
흡사 죽음의 냄새와 비슷했다.
“들어가겠습니다.”
“어서 오시오.”
천일영은 문을 닫고 예를 갖춰 그의 앞에 앉았다.
명이 다하여 곧 세상을 떠날 사람.
무진의 모습은 노쇠하여 마른 팔과 얼굴에는 가죽만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안광만은 날카로운 채 천일영의 얼굴을 노려보듯 바라봤다.
“누워서 손님을 받는 것을 용서해 주게. 손님께서는 이름이 어찌 되는가.”
“천일영이라고 합니다.”
“허허. 천마나 되시는 분께서 어찌 이 노인을 찾았는가. 죽이려고 찾아온 것은 아닐 테고. 오십 년 전의 지천번회와 혈천회가 그대의 발걸음을 여기까지 이끈 것인가.”
“그들의 정체와 종남파에 숨겨진 것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마는 그만둔 지 일 년이 넘었습니다.”
“예전부터 천마께서는 머리가 남달리 좋다고 들었네. 과거 종남의 장문인을 죽인 것도 모자라 무인들을 수없이 도륙하여 멸문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그대가 천마를 그만둔 채 지금 이곳에 찾아왔다? 이것도 참으로 신기한 인연이군.”
“과거에는 천마신교의 검날의 역할만을 했을 뿐 제 뜻과는 무관한 일이었습니다.”
무진의 주름진 얼굴이 꿈틀거리며 마른 손이 천일영의 팔을 잡았다.
잠시 눈을 감고 천일영의 팔을 통해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듯했던 무진의 입이 열렸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극마가 아니라 탈마의 경지까지 올랐군. 무재가 넘치고 그 재능이 끝을 모를 정도지만 마공의 한계인 탈마에서 무공이 정체된 것인가. 생사경으로 들지 못해 참으로 안쓰럽군.”
“만지는 것만으로도 아시는 것입니까.”
“지금은 이 정도를 알아보는 것이 한계인 몸일세. 내 몸은 망가지고 금제가 걸려 이제 죽음이 코앞이니.”
“금제? 그런 것이 몸에 걸려 있다는 말입니까.”
“혈천회. 그들이 내 몸을 이렇게 만들었네.”
“……!”
또렷하게 혈천회라는 이름이 천일영의 귀에 박혀 들었다.
그 누구도 모르는 혈천회와 직접 상대했던 사람을 만난 탓에 천일영은 목울대를 일렁이며 단침을 삼켰다.
“어르신, 부디 그들의 정체를 알려 주십시오.”
“알아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그들과 검이라도 댈 것인가?”
“그렇습니다.”
한 치도 무르지 않을 듯 단호하게 말하는 천일영의 대답에 무진은 눈을 흘기며 말했다.
“하지 말게. 자네의 무공으로는 이 초식도 버티지 못하고 죽네. 탈마의 무공은 혈천회에게 그 정도일 뿐이네.”
“어르신! 그 말씀은 혈천회의 무인 중에서 생사경의 경지에 오른 자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 이상은 알려고 하지 말게. 그들을 피해서 오래 살 생각만 하는 게 좋을걸세. 지천번회도 찾지 말게. 지천번회는 혈천회와 뜻을 같이했다가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니.”
무진의 눈이 반쯤 감겼다.
겨우 몇 마디 말을 했을 뿐인데 벌써 무진의 얼굴에 피곤함이 배어들었다.
이제는 대화조차 오래 버티지 못하는 몸.
그의 손이 천일영의 뺨을 쓰다듬었다.
갈라진 피부가 안쓰러울 정도였지만 걱정 어린 손길이었기에 천일영은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들의 뜻대로 될 날이 머지않았네. 중원을 떠나 북해빙궁으로 가거나 발걸음이 닿는 대로 멀리 떠나게.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이 그곳에 오거든 그들을 이끌고 조용히 숨어 살게. 이것이 한 명이라도 더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세.”
그 말을 남긴 채 무진의 팔이 이불 위로 툭 하고 떨어졌다.
기력이 다해 잠이 든 것이었다.
미약하게 뛰는 심장이 며칠 안에 다시 눈을 뜨기는 힘들 것 같았다.
어쩌면 이대로 죽을지도 몰랐다.
‘무진의 무공이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거늘. 이런 사람조차 도망가라고 하는 것이냐. 도대체 혈천회의 정체가 무엇이지?’
대답할 리 없는 무진의 가슴 위로 천일영은 손을 뻗어 올렸다.
기를 모아 몸 안을 들여다보니 기괴하게 뒤틀린 혈도와 기도가 몸을 갉아 먹고 있었다.
혈도에서 억지로 단전을 향해 기운을 보내고 있었고, 단전은 혈도의 기운을 받아 기도를 틀어막고 힘을 역류시켰다.
도무지 사람이라면 이런 상태로 살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고통이 있을 터인데.’
아마도 무진은 고통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통각을 끊어 버린 듯했다.
무진이 했던 말에서 금제라는 것이 신경 쓰여 천일영은 더욱 자세히 무진의 몸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금제라고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혈도와 기도가 뒤틀려 몸을 망치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정상이라 할 만하다고 생각하던 천일영이 기도의 방향을 틀려고 기운을 넣으려 하는 순간.
기묘한 느낌과 함께 무진의 몸에서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잠깐! 금제가 뭔지 알겠군. 이상하게 돌아가는 기운의 방향이 바뀌면!’
역으로 흐르는 기운이 단전을 통해 뻗어 나가 심장으로 고여 터트리게 되어 있었다.
‘게다가 무진은 원래 중단전이 열려 있었군.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강제로 중단전이 닫힌 것이고, 기운을 넣어서 활성화하는 것도 불가능인가.’
천일영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기운을 넣으려던 손을 무진의 가슴에서 떼었다.
방법이 없었다.
이제는 무진이 죽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눈을 뜨길 바라는 수밖에.
‘젠장, 중단전이라도 어떻게든 열어서 기도를 다른 방향으로 틀 수만 있다면.’
이대로 무진을 잃으면 지천번회와 혈천회의 실마리를 또다시 잃는다.
그때 천일영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환단! 유화가 그것으로 중단전을 열 수 있다고 했었지.’
극음의 기운이라면 천일영이 탈마의 경지에 오르면서 오랜 시간 수련을 해 왔던 것이었다.
명천마왕 소초련의 가르침대로 음의 기운을 가진 여자가 수련하는 소수마공을 배우면서 더욱 강한 무공을 완성하기 위해 극음의 기운까지 다뤘었다.
‘혈천회의 환단을 먹고 몸에 변화를 일으킨 사람들이 가진 기운보다는 한참 떨어지겠지만, 중단전을 아주 조금이라도 열 수만 있다면!’
환단으로 중단전이 열리면 그곳에 극음의 기운을 때려 넣어 활성화할 수 있을 터.
그렇게만 된다면 혈도와 기도를 거치지 않고 즉시 중단전을 통해 뒤틀린 몸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훅.
그 생각을 끝으로 무진이 누워 있는 방에서 천일영의 신형이 사라졌다.
잠든 무진의 코끝을 괴롭히는 잔바람만을 남기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