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열흘 뒤.
이 대 제자부터 사 대 제자가 아침에 수련하는 소리가 정적을 깬 지도 벌써 한 시진이 지났다.
청강은 열흘이나 지났지만, 하루도 심기가 편할 날이 없었다.
마땅히 모범이 되어야 할 무진이 매일같이 고기만 먹어 대는 것에도 화가 났지만, 무엇보다도 객잔에서 공자가 한 말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뭐? 자기가 종남파를 지원했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게다가 열흘 뒤에 보자고? 오늘이 열흘째 되는 날이니 어디 한번 보자.’
중원에 단 한 명도 없는 화경의 경지에 들어선 여인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 짜증 났다.
자신을 따돌리고 무진과 이야기하는 게 속상했다.
그런데 하물며 정말 돈까지 많이 지원까지 하면 그걸 어찌 두 눈 뜨고 볼까.
청강은 속으로 씩씩거리며 온종일 장문인의 업무를 하다가 문득 기울어 가는 해가 만드는 나무 그림자를 보았다.
시간이 어느덧 오후를 한참 넘어섰다.
기지개를 켜다 청강은 생각했다.
‘역시 그렇지. 지원이고 뭐고 올 리가. 하나의 문파를 지원하는 일이 금화 한두 푼으로 되는 것이 아닌데 허풍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청강은 서류를 집어서 옆으로 밀었다.
이제 슬슬 무진에게 고기 좀 그만 먹으라고 압력을 넣을 생각으로 몸을 일으키고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이 대 제자 한 명이 뛰어 들어왔다.
“장문인! 지금 급히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웬 소란이냐. 종남파의 이 대 제자나 되는 사람이 그렇게 호들갑을 떨다니!”
진중한 청강의 목소리가 나무라듯 울려 퍼졌다.
이 대 제자는 매일같이 진중하기만 한 청강에게 다가와서 더 큰 소리를 질렀다.
“빨리 나와 보셔야 합니다. 어서요.”
“이놈아! 귀청 떨어진다. 별일 아닌 거로 소란을 떤 것이라면 가만두지 않겠다.”
이 대 제자라면 나이가 제법 많고 무공의 경지도 예사롭지 않을 때인데 체통을 지키지 못하고 유난을 떠는 것이 못마땅했던 청강은 인상을 쓴 채 밖으로 나섰다.
휘이이이잉.
그러나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에 날리는 흙먼지를 빼고는.
“아무것도 없지 않으냐! 왜 소란을 떤 것이냐.”
“여기가 아니라 저 앞을 보십시오.”
“앞?”
청강이 이 대 제자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긴 곳에는 우차가 끝이 보이지 않도록 들어서고 있었다.
“헉! 저것이 무엇이냐!”
“조금 전 지원품이 도착했으니 받아들일 공간을 준비하라는 전갈이 왔었습니다.”
“지원품? 저것이 전부 다?”
입을 쩍 벌리고 청강이 얼어붙어 있는 동안 첫 번째 우차가 들어섰다.
하지만 청강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우차에 실린 물건이 아니었다.
첫 번째 우차와 함께 도착한 사람들.
황금색 철릭(帖裏)을 입었는데 용이 수놓아져 있었다.
중원에서 이런 옷을 입는 곳은 단 한 곳뿐이다.
‘그…… 금의위가 아닌가! 이들이 왜 여기에…….’
한두 명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사람만 해도 오십 명 정도.
가장 높아 보이는 사람이 청강의 앞으로 걸어 나오며 입을 열었다.
“저는 금의위에서 나온 표진봉이라고 합니다. 열흘 전에 이곳에 오셨던 공자님의 요청으로 종남파를 보호하기 위하여 왔습니다.”
“에? 공자의 요청?”
얼빠진 목소리로 청강이 대답하자 표진봉은 딱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금의위의 고수 백 명. 지원금으로 금화 삼천 냥. 무기가 이천 냥. 또한 종남파의 방비를 위한 공사 비용으로 이천 냥입니다.”
“헉! 도대체 그 공자가 누구길래 금의위에서 움직인다는 말입니까!”
청강이 기겁하며 소리를 지르자 표진봉은 더욱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비밀입니다. 공자의 정체에 대해서는 앞으로 다시 묻지 마시지요. 공자에 대해서 아시려고 하면 황실에서 직접 종남파를 상대할 것입니다.”
“헙!”
청강은 입을 다물고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분명 엄청난 사람에게 실례했다는 것을 깨달은 표정이었다.
표진봉은 업무 외에는 말을 걸지 말라는 표정으로 굳어 있는 청강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그도 그럴 것이.
‘나도 공자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으니 물어봐도 곤란하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 두면 다시는 귀찮게 굴지 않겠지.’
다만 공자의 정체는 몰라도, 공자의 편지가 황제에게 도착하고 난 이후 황실이 발칵 뒤집힌 것만큼은 안다.
황제는 새파랗게 질리고 정1품 태사는 거품을 물었으니까.
자신이 왜 종남파로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만큼 중요할 일일 것이다.
표진봉은 청강의 얼빠진 얼굴을 뒤로하고 신속히 무인들의 배치를 서둘렀다.
* * *
천마신교 총본산.
흑뇌마왕 마염지는 빠르게 손님이 있는 방으로 걸었다.
오랫동안 기다렸고, 그 누구보다 반가운 손님이었다.
드르르륵.
마염지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눈앞에는 흰 피부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동안 별고 없으셨지요?”
“흑뇌마왕께서 걱정해 주신 탓인지 무탈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계. 그러니까 지금은 하은월로 사는 남자가 대답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마염지는 인사치레가 끝나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영약을 구할 수 없어서 환단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지가 벌써 일 년입니다. 이제 거의 다 왔는데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군요.”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곧 극양의 기운과 극음의 기운을 가진 자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수를 써 놨으니 이제 금방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현재 극음의 기운을 가진 자가 열다섯. 극양의 기운을 가진 자가 열일곱입니다. 극음과 극양의 기운을 모두 가진 자는 한 명이고요. 모두 철저하게 관리하여 잘 숨겨 두고 있습니다.”
“그동안 환단을 뿌리고 특이한 기운을 가진 자를 모으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슬슬 새로운 천마를 추대할 때가 되었군요.”
“크크큭. 그렇습니다.”
야비한 입가의 웃음이 마염지의 심정을 대변했다.
개 같은 천마 놈이 전쟁을 일으켜 줘야 했다.
그것이 하은월과의 약속이었다.
거대한 전쟁을 일으켜서 세상에 혼란을 일으키고 무림맹을 집어삼킬 것.
마염지와 마왕들은 그것을 해내는 대가로 하은월에게 엄청난 것을 받기로 했다.
“어차피 말을 듣지 않는 천마라서 쓸 데라야 전쟁에 이용하는 정도였습니다. 허나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말처럼 하필 전쟁 전에 도망을 가다니.”
“됐습니다. 이제 새로운 천마가 정마대전을 일으키면 됩니다. 시기적으로도 오히려 잘됐습니다.”
“알겠습니다. 극양의 기운과 극음의 기운을 가진 자가 필요한 만큼 모이면 바로 시작하도록 하지요.”
하은월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 잊은 게 있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독천마왕 서하린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총관 차경철도 행방이 묘연하다던가요.”
“크음. 이거 천마신교의 치부를 보였습니다. 차경철은 파천마왕 패범휘의 조카이기 때문에 제멋대로 한다 쳐도 서하린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영약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길래 천마를 찾으라고 내보낸 것인데 가끔 전서구를 보내기는 합니다만 거의 일 년째 돌아오지를 않고 있습니다.”
“흑뇌마왕님, 이렇게 하시지요. 다음번에 서하린에게 전서구가 오면 천리미향을 뿌려서 새를 돌려보내십시오. 그것으로 위치를 파악하면 될 것입니다. 아무래도 서하린이 이렇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천마와 만났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겠지요. 서하린의 아버지 서가흔이 환단의 정체를 알아내고 천마에게 이야기하겠다고 했을 때 우리가 그를 죽였지요. 그 일로 인해서 서하린은 여러모로 골치 아픈 존재입니다. 계속 우리를 의심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이번 참에 명천마왕 소초련과 도현, 그리고 서하린을 한 번에 처리해야겠습니다.”
“모든 것은 흑뇌마왕께 맡기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지요.”
하은월이 몸을 일으키자 마염지가 황급히 말렸다.
“벌써 가십니까. 술과 여자를 준비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이곳에 오래 있으면…….”
너희 같은 병X 놈들을 어떻게 참을까.
‘전부 다 죽여 버리고 싶어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할 것을.’
천마였던 천일영 머리의 반만이라도 따라가는 놈들이었다면 이렇게 살기가 피어오를 일도 없었을 터다.
하지만 하은월은 속마음을 숨기고 웃었다.
마염지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는 눈들이 있어 마음이 편치 못하시겠습니다.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군요.”
“……흑뇌마왕님의 마음만은 잘 받아 가겠습니다.”
보는 눈?
그럴 리가.
하은월은 밖으로 나와 허공으로 몸을 날리면서 생각했다.
‘너희는 천일영 덕분에 오래 사는 것이다. 정말로 네놈들하고는 눈도 마주치기 싫구나.’
하은월은 이를 갈았다.
귀주성 전투 때 종남파가 멸문했어야 했다.
전쟁을 부추긴 것이 다름 아닌 하은월 자신이었으니까.
그런데 천일영 때문에 일이 틀어졌다.
종남파의 장문인을 죽인 것까지는 좋았지만, 너무 많은 무인을 살려서 종남산으로 돌려보냈다.
그래서 천마신교를 무너트렸다.
전 천마가 극살태마신공의 부작용으로 천마신교가 위험했을 때는, 무너지는 천마신교가 극심한 외압에 견디지 못하고 전쟁을 일으킬 줄 알았다.
천마가 더욱 살심에 미치도록 약을 지어서 마왕을 통해 먹였고, 서후량을 시켜서 천마신교의 핵심 인물인 추자룡을 빼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천일영이 방해했다.
무명암살대로 모든 것을 막았고, 한계에 이르자 자신이 천마가 되어 가면서까지 말이다.
‘천마의 자리에 오른 이후에는 천일영의 경계가 너무 심해서 우리가 오히려 아무것도 못 했지.’
천일영은 천마가 되고 나서 불과 반년 만에 천마신교를 정상으로 돌려놨다.
게다가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눈앞에서 당근을 흔들고 별의별 유혹을 해도 넘어오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더 의심하고 철저히 방비했지. 입맛에 맞는 것은 몸에 안 좋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맛없는 것만 골라 먹었다. 그러면서도 천마신교는 계속 발전했고.’
천일영이 걸어 놓은 덫에 걸리지 않자, 마염지와 패범휘를 통해 전쟁을 일으키고자 했다.
전쟁으로 중원과 황실의 눈이 어지러울 때 동정호에서 일을 벌이려고 했다.
‘하지만 천마의 자리를 때려치우고 도망갔지. 우리가 벌인 일을 알고 도망간 것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때 천일영은 분명 뭔가 이상하다는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러니까 도망가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결국 하고자 하는 일을 전부 천일영이 망쳐 놓고, 그것은 천마신교에 있는 버러지 같은 마왕들의 목숨만 연장하는 결과만 낳고 있었다.
‘천일영이 천마가 되기 전부터 마왕들과 손을 잡고 있었는데, 그것을 이렇게 무참하게 파훼시키다니.’
새삼 천일영이라는 사람의 머리에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무래도 서하린을 통해 천일영을 제거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이번에도 놈이 또 무슨 방해를 할지 모른다. 비록 천마신교를 떠나 야인(野人)이 된 몸이지만, 그라면 언제든 천마신교로 돌아올 수 있다. 그것이 무서운 것이다.’
아무리 마왕들이 날고 긴다고 해도 천일영 한 명을 당해 내지 못한다.
마왕을 제외한 나머지 천마신교 교도들의 천일영에 대한 충성심이 깊기 때문이었다.
‘또한 무명암살대였던 천 명도 아직 있지.’
하은월은 혈천회의 본문으로 향하기 전 사혈련에 들를 생각이었다.
당근은 천마신교의 마왕들만 문 것이 아니었다.
사혈련의 천주도 물었다.
이제 당근을 주며 살을 찌웠으니 슬슬 피둥피둥 오른 살을 도려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즉 수확의 때인 것이었다.
* * *
싸구려 화장품으로 떡칠을 한 여인이 있는 싸구려 주루에서 남자들은 은근한 표정으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젊은 나이의 남자들이었지만, 크게 가진 것도 없고 인물도 변변치 않았던 터라 나이 사십이 넘어 한물간 주루의 주인에게 연정을 품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늙은 주루의 여주인은 남자들을 하찮게 보고는 팩 돌아섰다.
“딴생각 말고 술이나 마시다 가.”
“앉아서 이야기 좀 하지! 너무 비싸게 구는 거 아니요.”
“동전 열 냥어치라도 술을 시키면 앉지. 철전 삼십 냥어치 시켰는데 내가 퍽이나 웃으면서 니들이랑 이야기하겠다.”
“어흑, 없는 것도 서러운데.”
네 명의 남자 중에서 한 명이 눈물을 글썽였다.
“젠장, 더러운 세상.”
“괜찮아. 나중에 꼭 좋은 날이 올 거다. 춘삼이가 요즘에 무공을 열심히 수련하고 있잖아. 표국에 취직해서 우리한테도 자리를 내주겠지. 안 그러냐, 춘삼아.”
“…….”
춘삼은 멍한 눈으로 대답 없이 세 명의 남자를 바라봤다.
그러기를 한참.
입에서 침을 흘리며 춘삼이 몸을 일으키더니 주루의 여주인에게 다가갔다.
어기적거리는 걸음이 불안해 보였지만, 친구들은 술에 취해 그랬거니 하며 춘삼을 내버려 두었다.
“뭔데. 뭐가 필요해? 등 뒤에서 침이나 흘리고 있고. 그렇게 내가 좋아?”
“…….”
느닷없이 등 뒤에 서 있던 춘삼에게 놀란 여주인이 투덜거림과 이죽거리는 말을 동시에 했다.
그때.
휘이이잉. 콰직.
어느새 검을 빼든 춘삼의 손에 여주인의 목이 날아갔다.
여주인이 피를 뿜으며 쓰러지자 친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춘삼아! 너…… 너 뭘 하는 거야!”
“야! 이 미친놈아! 너 술도 얼마 안 마셨는데 왜 그래!”
“…….”
춘삼은 말없이 등을 돌려 친구들에게로 다가갔다.
꿀꺽.
검을 든 친구의 모습에 말도 못 하고 침을 삼키는 순간.
검날이 주루의 어두운 불빛을 반사하며 허공을 갈랐다.
콰직.
툭.
또 한 명의 목이 떨어져 내렸다.
“끄아아악! 춘삼아! 너 왜 우리를 죽이려는 거냐! 이게 도대체 무슨…….”
“이…… 일단 도망가자. 저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빨리 현청에 신고해야 해!”
두 명의 남자는 멍하게 서 있는 춘삼을 피해서 뛰었다.
도망가는 친구의 눈에 문득 춘삼이 들고 있는 책의 제목이 보였다.
[극도태마신공(劇道台魔新功)]
바로 하은월이 남궁무애를 통해 필사한 책이자 천마신교의 극살태마신공을 변형한 무공 책.
수천 권이 항주에 뿌려진 바로 그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