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열이 뻗쳐오른 황태자가 밖으로 나간 이후에도 남아 있던 유의선이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천일영을 바라보았다.
항주에서 워낙에 많은 일이 벌어진 터라 요즘은 지나가던 아낙을 붙잡고라도 일을 부탁하고 싶을 정도로 바빴다.
쓸 만한 인재가 부족해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유의선은 며칠 동안 고민한 끝에 하나의 생각을 떠올린 참이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기발한 생각임에는 분명했지만.
‘문제는 공자가 그것을 허락하느냐다.’
큼큼.
헛기침하는 척하며 유의선은 천일영의 시선을 돌렸다.
밑져야 본전.
되면 좋은 일이고, 안되면 그만이다.
벌레를 바라보는 듯한 공자의 싸늘한 시선이 뒤끝으로 남겠지만.
‘그건 그때고.’
유의선의 헛기침 소리에 천일영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아직도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을 보니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군.”
“공자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빨리 말하거라. 뜸을 들이는 것을 보니 꽤 장대한 헛소리를 준비한 것 같다만.”
큭.
정곡을 찔렸다.
아무래도 공자는 정말로 사람의 마음을 읽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었다.
늘 한발 앞서 상대의 생각을 알고 있어서 껄끄럽기는 했지만, 유의선은 결국 입을 열었다.
“아까운 인재가 눈에 밟혀서 말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예서란을 내어 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서란이를?”
탁.
천일영은 불쾌하다는 듯 보고 있던 책을 소리 나게 덮었다.
그 모습이 상당히 거칠어 보였기에 유의선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이유를 말해라.”
“서란이를 문관으로 키워 볼까 합니다. 총명하여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아이가 아닙니까. 이런 인재를 썩히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제가 책임지고 키우겠습니다. 또한 황태자님께서도 서란이를 끌어 주실 것입니다.”
“누가 이유를 말할 때 진심을 빼고 말하라더냐. 속내를 말하거라.”
젠장.
‘역시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일인가. 꿀 항아리를 던졌는데, 받아 보지도 않고 항아리 안에 꿀이 없는 것을 바로 눈치채는군.’
유의선은 항복한다는 의사 표시로 크게 한숨을 내뿜었다.
“실은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진 탓에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쁩니다. 그래서 서란이의 총명함을 빌리고 싶습니다. 물론! 바로 전에 말씀드린 대로 서란이가 문관이 되게 하는 데 소홀함이 없을 것입니다. 향시를 거치지 않고도 관직을 보장하겠습니다. 맹세하지요.”
“여인이 문관이 되는 경우는 드물어서 나쁜 제안은 아닌 것 같구나. 너무 부려 먹지만 않는다면 내가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서란이는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군.”
제법 좋은 제안이다.
천일영은 유의선의 생각과는 달리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향시를 보고 거인이 된다 해도, 여인이라는 이유로 백이면 백 명이 관직을 못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여자가 출세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물며 싫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유의선이 이끌어 주고 황태자가 뒤를 봐준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이었다.
천일영은 앞으로 황태자를 조금은 잘 대해 줘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은 빠를수록 좋겠지. 따라오거라.”
“감사합니다.”
유의선은 천일영을 따라 객잔 뒤에 있는 장원으로 갔다.
당연히 장원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설 줄 알았던 유의선은 느닷없이 산 중턱을 향해 걷는 천일영의 뒤를 헉헉거리며 따라갔다.
잠시 후, 장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만들어진 연무장.
그곳에 도착한 유의선은 순간 코를 막았다.
‘극도태마신공을 익히다 죽은 춘삼이라는 남자의 몸에서 악취가 난다더니 어째서 같은 냄새가? 설마 이곳에서도?’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유의선의 눈앞에서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미친놈 대신에 넝마 조각 같은 사람들이 굴러다니고 있었을 뿐.
“헉헉. 사람 살려.”
“아이고. 오늘로 겨우 나흘째인가. 닷새를 채워야 하루를 쉬는데.”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아. 이제는 몸도 안 움직이네.”
눈앞의 광경을 보니 왜 냄새가 나는지 납득이 갔다.
연무장에 있는 사람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어찌 구르면 저 지경이 된다는 말인가. 이런 냄새가 날 정도라면!’
짐승 같은 꼴을 하고 비무며 수련을 하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던 예서란이 천일영을 보자 몸을 일으켰다.
냄새 때문에 콧구멍에 한지를 말아서 끼운 채였다.
“공자님 오셨습니까. 생각보다 오래 걸리셨습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구나. 서란아, 유의선 승선포정사사가 너에게 제의할 것이 있다고 한다. 들어 보고 결정을 내리거라.”
“네? 저에게 제안이라니요?”
앞으로 나선 유의선이 예서란과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자리를 피해 준 천일영의 배려를 알았는지 유의선은 강한 어조로 예서란을 설득했고, 예서란의 얼굴은 점차 알 수 없는 표정이 되어 갔다.
그것은 기쁘기도 하고 싫은 듯도 하여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힘들게 만드는 표정이었다.
한동안 이야기를 듣던 예서란이 천일영 앞으로 다가와서 솔직한 속내를 털어놨다.
“공자님, 저는 승선포정사사님의 일을 돕고 싶습니다. 허나 그리하면 별유천지의 일을 소홀히 하게 될까 해서 걱정이 됩니다.”
“별유천지의 일은 하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 네 앞길을 생각해야지.”
“하지만…….”
그러면 공자님과 같이 있는 시간이 줄어들잖아요.
‘가뜩이나 지금도 공자님이 바쁘셔서 같이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되는데.’
항상 무공의 경지가 높은 백유화나 금채홍을 공자님이 데리고 다녔기에 책밖에 모르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공자님과 함께할 시간을 늘리지 못하는 무력함에 항상 속이 상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네 앞길을 생각하라니. 나는 언제까지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 공자님과 함께하고 싶은데.’
사실은 말려 주길 바랐다.
예서란은 입술을 꾹 깨물고 서 있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제가 승선포정사사님의 일을 도울 정도가 되는지 훈장님께 여쭤보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훈장님께서 일해도 좋다 해도 저는 별유천지의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또한 항주를 벗어나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별유천지가 집이니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이 조건이라도 괜찮다면 일을 하겠습니다.”
“알았다. 먼저 훈장님께 이야기해 보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겠구나.”
“네.”
좋은 머리로 예서란은 자신이 별유천지에 있을 자리를 위해 미리 포석을 깔았다.
승선포정사사의 일도 돕고 싶고 공자님의 곁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더 많은 체력이 필요해!’
예서란은 빨리 커야겠다는 일념으로 밥양을 더 늘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 *
다음 날.
훈장과 함께 자리한 곳에는 유의선도 와 있었다.
반가운 손님이 기뻤던지 훈장은 손수 차를 내와 천일영과 예서란 앞에 놓았다.
왜인지 유의선에게 준 차는 덤이라는 느낌이 강했지만.
“허허. 이야기를 들어 보니 서란이를 승선포정사사가 탐을 내는 모양이군. 하지만 나는 서란이가 중도에 공부를 소홀히 하는 것이 마땅치 않구나.”
“훈장님!”
의외로 반대하는 훈장의 말에 유의선은 펄쩍 뛸 듯 몸을 들썩였다.
다 된 밥에 코를 빠트려도 유분수지.
물론 과거 정1품의 태사까지 지냈던 훈장인지라 유의선은 애써 좋은 말로 에둘러 말을 이었다.
“공부를 포기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먼저 훈장님께 글공부를 배우고 오후부터 일을 돕게 하는 것은 어떠신가요.”
“나쁘지는 않네. 허나 나는 유의선 포정사(布政使) 밑에서 일하는 게 마땅치 않군.”
훈장이 유의선을 포정사라고 정확히 짚어서 말했다.
본래는 좌(左) 포정사, 우(右) 포정사 이렇게 두 명이 승선포정사사라는 기관을 담당한다.
그런데 유의선은 좌나 우가 아니라 두 가지를 모두 합쳐서 일하고 있었다.
“본디 승선포정사사(丞宣布正使司)라는 것은 하나의 성을 담당하는 기관의 이름일세. 헌데 자네는 좌와 우의 관직을 모두 가지고 있으니 딱히 명칭이 없어 기관의 이름인 승선포정사사로 그냥 불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쯧.”
훈장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것이 못마땅한 것일세. 황실의 높은 곳에 줄을 대고 있는 자네가 그 막강한 힘을 통해 있지도 않은 관직을 만든 것이지 않나. 그런 자네가 서란이를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겠는가. 순진한 아이가 권력 맛에 빠질까 걱정이 되는군.”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결코 제가 사사로운 이득을 위해 좌우 포정사를 합쳐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관직에서 물러섰지만, 과거 정1품의 태사 앞에서 유의선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가 관직의 정점인 태사에서 물러난 이유도 끊이지는 않는 정치 싸움과 혀가 닳도록 입을 놀리는 간사한 자들이 싫어서였다는 것을 유의선은 잘 알고 있었다.
훈장은 예서란이 그런 환경에 놓이는 것이 싫은 것이었다.
“아무튼 나는 반대일세. 서란이는 앞으로도 배워야 할 것이 많네.”
“하지만 아무리 배워도 여인이 관직에 오르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제가 서란이를 이끌어 어엿한 관직에 오르게 할 것이니 허락해 주시지요.”
“흐음. 참으로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들이미는구먼.”
훈장이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눈썹을 움찔거리기도 하고 가끔 차를 마시면서 입을 다물고 있던 훈장이 다시 말을 꺼낸 것은 이 각이나 지난 후였다.
“조건이 있네. 서란이가 할 일은 현재의 공무 이외에는 안 되네. 그것도 승선포정사사께서 보는 업무를 나누어야 하는 정도로만 일을 맡긴다면 나도 괜찮다고 생각하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할 것을 약조하겠습니다.”
“서란이에게 쓸데없이 서류 정리나 과거에 공적을 분류하는 일 따위를 시켜 시간을 빼앗지만 않는다면 학당을 그만두지 않고도 충분히 일을 할 수 있을 걸세.”
“그리하겠습니다.”
유의선은 훈장이 말한 조건이 까다롭지 않은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훈장이 말한 대로 유의선 역시 잡일을 시킬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천재인 아이에게 그런 일은 시간 낭비였으니까.
“이 정도면 된 것 같군. 그럼 남은 차라도 마저 마실까. 마침 좋은 차가 들어왔네.”
“지금 마시는 차도 좋습니다만.”
천일영의 말에 훈장은 고개를 저었다.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간 훈장은 제법 공들여 차를 끓였기 때문인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탁.
훈장이 차를 올리자 방 안으로 차향이 향긋하게 피어올랐다.
다만.
내 차는?
‘설마 서란이를 데려간다고 훈장께서?’
예서란과 천일영 앞에 차가 놓인 것과는 다르게 유의선은 맹물이 담긴 잔을 바라봤다.
아끼는 제자를 빼앗아 간다고 생각한 것일까.
심지어 끊이지도 않은 차가운 물을 대충 찻잔에 담아 건넨 훈장을 보며 유의선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과거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황제에게도 막말했다는 그의 대쪽 같은 성격은 훈장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였기에.
유의선은 시원하게 맹물을 들이켰다.
* * *
월영과 현령 태문탁은 아침부터 죽을 지경으로 뛰었다.
자경단과 포졸들도 마찬가지였다.
극도태마신공.
그 발칙한 무공 책을 수거하고, 책으로 무공을 연마한 사람들을 격리하기 위해서 그들은 항주에 있는 집을 하나씩 전부 뒤졌다.
“말을 듣지 않고, 순순히 집 안으로 포졸과 자경단을 들이지 않는 집은 강제로 뒤지거라. 온 집 안을 흙발로 더럽혀도 모두 내가 책임지겠다.”
“네!”
일의 심각성을 깨달은 현령도 그의 평소 성품과는 다르게 강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그런데.
이 일이 오히려 무공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 모양이었다.
그들은 무공의 상승이 강해지면 반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강제로 책을 빼앗는다고 생각했다.
무림 문파가 자신들의 세를 잃을까 두려워서 현령에게 뇌물을 준 것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
평소 현청에 불만이 많았던지라 어쨌든 따를 생각이 없었다.
사람들은 어찌해서든 책을 숨기려 했다.
땅에 파묻든, 집 천장을 뚫고 숨기든.
그리고 그것은 고자인 전 산적 두목 송여악도 마찬가지였다.
“킁! 건청하고 똑같은 놈들이군. 무공이 강해지면 딴생각을 할까 봐 걱정이나 하는 놈들이. 하긴, 백련교도들이 난을 일으킨 것을 생각하면 이해는 한다만.”
이해는 해도 책은 안 줄 생각이었다.
송여악은 오늘도 밤늦게까지 내공 수련을 하다가 극도태마신공을 빼앗길까 봐 몸 안에 책을 품고 잠이 들었다.
강해진 내공으로 인해 검을 휘두르며 하늘을 나는 꿈을 꾸기까지 했다.
그런데 다음 날 그런 일이 생길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