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꺄아아아악!”
“유화야!”
쿠우웅.
천일영의 신형이 거칠게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쓰러진 백유화의 신형을 들어 올린 천일영의 얼굴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백유화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 말이다.
“후하. 후하. 큰일 날 뻔했네. 화경의 경지에 들지 못했으면 꼼짝없이 죽었겠어요.”
“이 망할 녀석. 놀라게 하다니.”
“저야말로 심장이 벌렁거리네요.”
앞가슴으로 검날이 튀어나와 보인 것은 백유화의 잔상이었다.
백유화가 천일영을 바라봤을 때 등 뒤에서 간자가 날린 검날에 공기가 움직이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순간 위험을 알아차리고 몸을 피해서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정말로 무서운 것은 화경의 경지에 이르렀는데도 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이 땅강아지 같은 놈이 뒤에서 몰래 검을 날려?”
“의외군. 피할 줄 몰랐는데.”
간자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날린 검은 초절정 고수의 수준을 한참 넘어선 것이었다.
‘혈천회의 간부인 나와 무공을 겨룰 수 있을 정도인가.’
간자의 이름은 류규강.
그는 혈천회의 주인 하은월이 항주에서 벌어진 일을 알아보라고 명령을 내렸기에, 직접 항주까지 찾아왔다.
하은월에게서 받은 시간은 육십 일.
‘그 안에 왜구와 해적들이 공격했을 때 항주의 피해가 적었던 이유를 알아 가지 못하면 나는 죽는다.’
류규강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자세를 취했다.
“여인은 화경이었나. 옆에 있는 공자도 비슷한 경지인 것 같군.”
“화경의 경지인 것을 알고도 도망가지 않는 것이냐. 그만큼 자신이 있는 모양이구나.”
천일영은 싸구려 검을 들어 올렸다.
상대가 검을 들고 있는 자세가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한번 무공을 보면 대부분을 기억하는 천일영의 몸에 긴장이 흘렀다.
‘혈천회의 무공인가.’
파앙.
이럴 때는 직접 검을 나누어 보고 판단을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을 잘 아는 천일영의 신형이 먼저 날아갔다.
카앙! 카앙. 카아아앙!
천마삼검 제일식 천마현신 섬의 초식으로 상대의 몸 안을 파고들자, 간자는 단순명료할 만큼이나 간결한 움직임으로 천일영의 검을 튕겨 냈다.
두 수쯤 접어 두고 공격하기는 하지만 초식이 이어지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
눈 열 번 깜박일 시간 동안 초식을 나누던 천일영은 검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은 잘 봤다. 이제 그만하도록 하지.”
“내가 할 말을 하는군. 이 무공을 보고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가.”
순간 간자의 몸에서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슈아아아악.
간자는 다시 한번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네놈들이 희한하길래 주인께 실력을 보고할 생각으로 검을 나눠 본 것뿐이다. 아무래도 전에 있었던 공격에서 항주가 멀쩡했던 이유가 네놈들 때문인 모양이군. 이제 볼일 다 봤으니 죽거라.”
“네놈의 검에 죽는 것은 곤란하구나. 너에게서는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을 테니 말이다.”
파아아앙.
이번에는 간자가 먼저 공격해 왔다.
천일영은 날아오는 검로를 확인하는 순간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휘리리릭.
일직선으로 날아오던 검의 궤적이 바뀌었다.
흔들리는 듯 검이 두 개, 세 개로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고 사라졌다.
‘검의 존재가 지워졌어?’
바람 소리도, 예상되는 검로도 보이지 않았다.
깨끗한 무(無).
천일영은 검을 내렸다.
‘바람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검속이 소리보다 빠르기 때문이고, 검로가 보이지 않는 것은 검의 길에서 벗어났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카아아아아앙!
천일영은 자신의 앞으로 날아오던 단도를 받아쳤다.
그리고 연속으로 날아오는 간자의 검을 흘려 넘겼다.
후우우웅.
흘려 넘겨진 검날의 바람 소리가 들릴 때.
천일영은 갈라진 바람 사이로 자신의 검날을 집어넣었다.
흐르는 듯 보이지만 갈라진 바람의 가운데는 진정한 무(無)의 상태.
공기가 없는 상태다.
그곳에서는 검날이 거슬릴 것이 없어 더욱 빠르게 날아간다는 것을 잘 알기에 천일영은 천마삼검 이식 천마앙복 변의 초식으로 검을 날렸다.
촤아아아악!
진공 상태의 갈라진 바람 틈에 검날을 날린 덕분에 무음(無音)의 검날이 류규강의 어깨를 도려냈다.
“크아아아악! 이 망할 새끼! 도대체 무슨 짓을!”
“속임수에 가까운 검이 네놈의 한 수더냐. 검로를 바꾸는 척하면서 뒤로 빼내고 단도를 먼저 던진 다음 공격하다니. 그럭저럭하기는 했다만 내 명줄을 끊기에는 조금 부족했구나.”
“우라질 새끼. 천룡파식(天龍波飾)을 눈치채고 파훼하다니.”
뼈가 드러나는 어깨를 감쌌던 피 묻은 왼손에 검이 옮겨졌다.
류규강이 이죽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다시 시작해 보지.”
“아직도 남은 한 수가 있는 모양이군.”
쿠우우웅.
류규강의 내공이 급작스럽게 오르기 시작했다.
탈제명부음(敓躋命扶淫).
영혼을 혈도에 묶어 강제로 힘을 쥐어짜는 무공을 사용한 류규강이 서늘한 웃음을 지었다.
“일 초식 안에 끝내겠다.”
“이거 곤란하구나.”
천일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류규강의 기운은 같은 탈제명부음을 사용했던 남궁천보다도 강했기에 동전 이십 냥짜리 검이 멀쩡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휘이이이잉!
류규강의 검이 또다시 사라졌다.
이번에는 속임수가 아닌 순수한 검속.
천일영도 기운을 끌어올렸다.
카아아아앙!
검과 검이 부딪히고, 기운과 기운이 충돌하며 번개가 내리쳤다.
번쩍. 콰르르르릉.
수십 가닥의 번개가 동전 이십 냥짜리 검날을 통과했다.
파캉! 파스스스스.
예상한 대로 천일영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가루가 되어 날아갔다.
류규강이 의기양양하게 웃음을 지었다.
“후하하하. 일 초식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 말하지 않았느냐.”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휘이잉! 파앙!
천마장법 파천혈옥지(破天血玉指)가 류규강의 심장을 향해 날아갔다.
콰아아앙!
가슴에 박힌 장권은 심장을 터트릴 만큼 강렬한 충격을 주었는지 류규강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끄아아악.”
잠시 류규강이 심장을 움켜쥐며 한 걸음을 무르자, 천일영도 장권을 때린 손을 들어 올렸다.
팔목이 절반 정도 잘려서 드러난 뼈 틈새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장권을 때릴 때 류규강이 억지로 몸을 돌리며 베어 낸 것.
천일영의 가슴이 울렁거리며 빠르게 뛰기 시작하고, 이내 눈동자에는 붉은색 테두리가 생기며 혈광이 떠올랐다.
천일영이 백유화에게 조용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너는 절대로 끼지 말아라.”
“공자님! 이미 강선을 천 가닥 깔아 두었습니다.”
“안 된다. 휘말리면 네가 죽을지도 모른다. 너는 내가 지키기로 한 사람이니 뒤로 물러나거라. 이건 명령이다.”
“큭!”
류규강의 경지는 분명 화경과 현경 사이.
그 어딘가쯤이다.
거기에 탈제명부음의 무공까지 사용하고 있으니.
‘살려서 정보를 캐는 것은 무리겠군. 빠르게 죽인다.’
천일영의 신형이 튀어 나갔다.
천마장법 혈세천하 무의 장권이 류규강의 몸에 박혀 들었다.
너무도 빠르게 장권을 날리는 천일영의 신위에 류규강은 두 눈을 뻔히 뜨고도 보지 못했다.
반면 류규강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검에 천일영의 몸에서도 피가 튀었다.
피비비비빗. 촤아아악. 콰아아앙!
서로 격렬하게 부딪히는 동안 기운이 폭발하며 돌풍과도 같은 바람이 생겼다.
콰아아앙.
백유화조차 밀어내는 거센 바람.
그 바람이 천일영의 몸에서 흐르는 핏물을 실어 와 백유화의 얼굴에까지 튀겼다.
‘젠장, 검만 있었으면!’
백유화가 이를 악물었다.
분명 공자님이 상대보다 훨씬 강한 게 보인다.
그런데도 호각인 것은 순전히 검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니, 솔직히 검이 없는데도 호각인 것이 더 놀랍기는 하지만.
천일영은 류규강의 혈도를 하나씩 부숴 갔다.
그러나 눈 한 번 깜박이는 사이에 수백 번씩 허공을 가르는 검날을 전부 피해서 공격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가 있는 일이었다.
촤아아악!
천일영의 어깨에서 피가 터지고 이후 온몸에서 상처가 벌어졌다.
백유화는 위태로운 천일영의 모습에 이를 악물다 못해 눈을 감아 버렸다.
‘망할! 공자님, 명을 어긴 저를 용서하세요.’
다시 눈을 뜬 백유화가 강선을 손에 휘감았다.
공자님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이 한목숨 아까울 것도 없었기에 몸을 일으키는 순간.
“공자! 이거 받아!”
천일영을 향해서 검 한 자루가 날아들었다.
류규강도 눈앞의 남자가 검을 받아 들면 위험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신형을 날렸다.
손을 들어 천일영이 검을 받아 들려고 하자, 류규강은 검을 향해 펼쳐진 손목을 향해 검을 날렸다.
휘이이이잉. 촤아아아악!
순간 류규강은 멈추어 선 채 눈을 끔벅였다.
분명 자신이 상대의 손목을 자르려고 했는데.
‘어째서 내 손목이 절반이나 잘려 나간 것이지?’
상대가 이렇게나 빨랐다는 말인가?
그러고 보니 상대는 검을 들지도 않았었는데 몸에 생긴 상처는 자신이 훨씬 많았다.
“놈!”
“이제야 제대로 싸울 수 있겠구나.”
천일영은 화극여월을 들어 류규강의 혈도를 순식간에 찔러 들어갔다.
눈 한 번 깜빡일 시간 동안 수십 개의 혈도를 찔러 박살 내 버리자, 류규강은 악에 받쳐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크아아아아악.”
하지만 이미 사라진 혈도 때문에 제대로 기운을 끌어올리지 못하는 류규강의 검날이 천일영에게 닿을 리는 만무.
촤아아아악!
류규강의 두 팔이 날아갔다.
“끄아아아아악!”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하나 했지만, 이제는 대화를 할 수 있겠구나.”
후우우웅. 콰두두두둑.
혹시라도 자살용 독극물을 숨겨 두었을까 하여 검면으로 이빨까지 모두 날려 버린 천일영이 화극여월로 류규강의 남은 혈도를 모조리 부쉈다.
이미 잘린 팔이 다시 생기려고 했으니까.
“끄흐흐흐흐. 네넘, 나애게성 저보를 캐내랴거 하느구나. 하즈마 소영읍느 지시다.”
부서져 덜렁거리는 턱과 모조리 빠진 이빨 때문에 발음이 새는 류규강이 눈을 크게 떴다.
스아아아악.
순간 눈동자가 검게 물들고.
온몸에서 썩은 냄새가 뿜어져 나오는 류규강이 입을 크게 벌렸다.
“네노믄 혀천회애서 가만두지 아늘 거시다. 크하하하하!”
퍼억!
긴 웃음을 남긴 채 류규강의 몸이 터져 나갔다.
그가 남긴 잔재는 극도태마신공을 수련하다가 미친 자와 똑같이 검은색의 피만을 바닥에 남긴 채였다.
마치 혈천회의 무공에도 금제가 걸려 있었던 듯.
‘젠장, 이놈에게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했는데.’
천일영은 고개를 가로젓고 화극여월을 던져 준 남궁무애를 바라봤다.
어째서인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게 희한해 보이기도 했지만, 천일영은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화극여월을 건넸다.
“가은아, 네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구나. 고맙다.”
“네? 가은이요? 저는 가은이가 아닙니다.”
화극여월을 받은 남궁무애가 시침을 뚝 떼자 천일영의 고개가 기울었다.
왜 부정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에게 준 검이 화극여월이 아니더냐.”
“아닙니다. 뭔가 비슷한 검과 착각하신 것 같네요.”
급히 검집에 화극여월을 집어넣은 남궁무애가 고개를 붕붕 가로저으며 다시 한번 부정했다.
아니, 검에 화극여월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천일영의 고개가 또 한 번 기울었다.
반면 남궁무애는 속이 바짝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저 망할 놈이 다른 놈 아홉을 던지고 도망가는 바람에.’
순식간에 아홉의 간자를 도륙하기는 했는데 워낙에 놈이 빨랐다.
그래도 추적하는 데 지장은 없었지만, 하필이면 놈이 급작스럽게 미친 자들이 사람들을 덮치는 곳으로만 도망갔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래저래 검은 피를 가진 자들을 오는 길에 이백이나 죽이고 도망가는 사람들을 살리기는 했는데.’
간자 놈을 놓치지만 않았으면 공자가 위험에 처할 리도 없었다.
게다가 자신에게 검을 준 바람에 공자는 맨손으로 싸우지 않았던가.
처음부터 몰래 왔다가 갈 생각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검을 던져 주고 말았다.
‘아무튼 도망가야 해. 내가 사람들이 미치는 날을 알고서 찾아왔다는 걸 공자가 눈치채면 안 돼. 내가 지천번회의 주인이라는 걸 공자가 알아 버리기라도 하면…….’
남궁무애는 정신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등을 돌렸다.
“아무튼 저는 공자가 말하는 남가은이라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이만!”
훅.
남궁무애가 사라진 자리에서 천일영은 멍한 표정으로 귀밑머리를 긁었다.
“아니…… 나는 가은이라고 불렀지, 남가은이라고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는데…….”
잔바람만이 남은 자리.
반가운 친구가 왜 모른 척하고 가 버렸는지 천일영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바람이 남긴 향기가 남궁무애였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