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남궁무애는 꿈을 꾸었다.
잊으려고 애썼던 과거의 기억이다.
백 년도 훨씬 전의 아버지가 꿈속에서 생생하게 호통을 쳤다.
“겨우 이따위로 밖에 못 하느냐! 몇 번을 가르쳐야 알아먹어! 너는 현경에 들어서야 한다. 천하제일 검술 명가 남궁세가다. 창천 아래 남궁만이 지고할진대 이따위로 수련을 해서 남궁의 이름을 짊어질 수 있느냐! 벌로 오늘 밥은 없다.”
망할 놈의 창천 타령.
아버지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게 아마 다섯 살 때였던 것 같다.
말했던 대로 그날은 저녁밥을 못 먹었다.
강제로 갇힌 광에서 밤새 울었던 것도 같다.
잠시 꿈이 물 흐르듯이 지나가더니 남궁무애가 일곱 살 때 어깨를 잡고 소리치던 오라버니가 나타났다.
“어째서 네가 벌써 천풍검법(天風劍法)의 묘리를 깨우친 것이냐. 어찌하여 나조차도 초식의 연결이 힘든 검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는지 솔직하게 말하거라. 아버지가 몰래 가르쳤느냐? 아니면 기연이라도 얻었느냐!”
질투에 눈이 멀어 여린 어깨를 마구잡이로 흔드는 오라버니의 손길이 무척이나 아팠다.
밤에 옷을 벗어 보니 오라버니의 손 모양대로 어깨에 온통 피멍이 들어 있었다.
한참을 울었었다.
꿈은 몇 년을 뒤로 흘러갔다.
그때부터 오라버니들과 언니들이 밥에 독을 탔다.
무공의 천재였던 남궁무애가 열 살에 일류 고수의 길로 들어서고부터다.
죽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는데 그것이 더욱 기분을 상하게 했던 모양이다.
무공 수련이 끝나고 저녁을 먹고 나면 언니들이 망을 보고 다섯의 오라버니 중 하나가 번갈아 가며 자신을 광에 가두었다.
눈이 내리고 입김이 하얗게 나오던 겨울.
밤마다 광에서 추위를 견뎠다.
아버지가 벌을 줄 때마다 가두던 그 광이었다.
손이 하얗게 트고, 피부도 갈라졌다.
견디다 못해 오라버니와 언니들이 더는 괴롭히지 못하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울면서 사정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약한 자식놈은 필요 없다. 독이 무섭다면 초절정 고수가 되어라. 천독불침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그래도 무섭다면 현경의 경지에 오르거라. 그리하면 만독불침의 몸이 된다. 그것도 못 하겠다면 오라버니와 언니들의 밥에 독을 타서 당하기 전에 죽여라. 무림은 언제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렇게 마음이 여리고 약해 빠져서야 무림에서 살아남겠느냐!”
아버지는 가족 모두를 경쟁시켰다.
서로 밟고 올라서 그 누구든지 현경의 경지에 오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 외의 자식은 필요 없었다.
외롭고 힘든 나날이었지만 그나마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덕분이었다.
독이 든 밥을 먹고 사경을 헤맨 날은 온종일 어머니가 돌봐 주었다.
힘들고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날에는 어김없이 안아 주며 괜찮다고 말해 줬다.
어머니가 안아 줄 때면 여린 마음에 생긴 상처가 조금은 낫는 듯했다.
그것만이 유일한 위안이 되어 갔다.
이후로는 죽지 않기 위해서 무공의 수련을 했다.
독하게 무공을 습득했고, 깨달음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했다.
하루빨리 천독불침이라도 되어야 했으니까.
식사 때마다, 하다못해 마시는 물까지도 언제나 독이 들어 있었다.
무공의 성취를 이룰수록 독은 더욱 강해지고, 냄새와 색조차 없는 맹독까지 등장했다.
그 지경까지 갔지만, 그래도 어찌해서든 견딜 수 있었다.
어머니가 안아 주었으니까.
남궁무애는 꿈에서 스무 살이 된 자신을 보았다.
초절정 고수.
살아남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무공을 습득했는데 웃기게도 남궁세가 역사상 가장 빠르게 초절정 고수가 되었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태도가 달라졌다.
갑자기 자신을 아끼기 시작했고, 행여나 밥에 독이라도 들어갈까 노심초사했다.
신줏단지 모시듯 남궁무애를 대했다.
그것은 자식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현경의 가능성을 본 것뿐이었다.
오라버니들과 언니들은 자신이 초절정 고수가 되었을 때 일류 고수이거나 절정 고수에 머물러 있었다.
그나마도 무재가 있다고 했던 큰 오라버니가 절정 고수였을 뿐 나머지는 전부 일류 고수였다.
자신만을 바라는 아버지의 태도 때문에 남궁무애는 더욱 입지가 좁아졌다.
오라버니와 언니들이 이제는 돈을 거둬 살수까지 고용했던 것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남궁무애를 끌어내리려고 했다.
높은 자리는 자신들이 차지해야 했으니까.
스무 살부터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 일 년 동안 총 네 번을 죽을 뻔했다.
살수는 끊임없이 계속 찾아왔고, 죽을 뻔한 날은 어김없이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안아 줬다.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힘없는 어머니는 안아 주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그래도 행복했다.
그 마음만 있으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듯했다.
스물두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첩실을 통해 낳은 아이 하나를 데려왔다.
남자아이.
귀엽고 예쁜 아이였다.
남궁무애는 그 아이조차 오라버니와 언니들의 표적이 될 거로 생각해서 더욱 무공의 수련에 매진했다.
아이를 지켜야만 했다.
다행히도 남동생을 향한 필사적인 마음 때문인지 스물여덟에 화경의 경지까지 이뤘다.
스물두 살부터 스물여덟이 될 때까지 자객에게 죽을 뻔한 것은 총 스물아홉 번.
화경에 들어섰을 때부터는 집요하게 목숨을 노리던 오라버니와 언니들의 태도가 변했다.
갑자기 아양을 떨기 시작한 것이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차라리 남궁무애가 무림맹의 맹주가 되면 떨어지는 콩고물이라도 받아먹을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남궁무애는 오직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 더욱 무공을 수련했다.
어머니는 첩실의 자식이지만 남동생을 귀하게 키웠다.
반듯하고 올바르게 자라는 아이를 보면서 남궁무애는 겨우 웃음을 짓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화경의 경지에 오르기 전까지 웃어 본 기억이 없었다.
매일같이 죽음과 싸워야 했으니까.
꿈속에서 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
서른다섯.
현경의 경지에 오른 나이다.
남궁세가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아버지는 광기 섞인 얼굴로 온종일 웃었고, 오라버니와 언니들은 똥 씹은 얼굴로 축하해 줬다.
아마도 오라버니와 언니들은 남궁무애가 자신들에게 복수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으리라.
어머니는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웃음 지으며 안아 주기만 했지만, 남궁무애는 비싼 음식과 술보다도 그 손길이 가장 행복했다.
그리고 서른여섯.
아버지가 꿈에서도 그리던 무림 맹주의 자리에 올랐다.
한평생 단 한 번도 원해 본 적 없던 자리였다.
그래도 맹주가 되었다.
그 자리에 오르면 어머니도 기뻐하실 거로 생각했고, 힘을 갖게 되면 지킬 수 있는 것도 늘어나리라 생각했다.
무림의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무른 생각이었다.
맹주가 된 이후, 천마신교를 무너트리고 종속시키자는 이야기를 매일같이 들었다.
과격하게 주장하는 이들부터, 보이지 않게 압력을 넣는 사람들까지.
사악하고 악독한 천마신교에 속고 있는 교도들을 해방하고 무림의 정의를 바로잡자는 이야기가 영원히 이어질 듯 계속됐다.
그것은 무림맹에 속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하다못해 지방의 작은 무림 문파까지 똑같이 주장하는 말이었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현경의 무인이 나오면 천마신교를 종속시켰고, 반대로 탈마의 무인이 나오면 무림맹에 종속당했다.
남궁무애는 그들의 속내가 무림맹에 종속당했을 때의 원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그렇다면.
매일같이 원한으로 인한 싸움이 계속되느니 천마신교를 종속시켜 싸움을 멈추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검을 들고 앞장서기 전에 한 가지 약조를 받았다.
천마신교를 종속시킬지라도 그들을 죽이지 않고 약탈도 하지 않는다는 것.
모든 사람이 남궁무애를 보며 알겠다고 했다.
정파의 도리대로 천마신교를 악하게 대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들은 선한 눈빛으로 거짓말을 했다.
그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남궁무애가 서른일곱이 되던 해.
봄이 아직 되지 못한 겨울의 끝자락에 천마신교가 무너졌다.
무림맹이 천마신교를 종속시키는 순간, 무림 삼 대 세력 중 두 개를 차지하게 되니 사혈련은 알아서 조용히 있을 것이었다.
그것이 남궁무애의 생각이었고, 천마신교를 종속시키자고 주장했던 사람들의 논리이기도 했다.
진정한 평화라고 생각했고, 모두가 그렇다고 했다.
그 달콤했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무림맹에 속해 있던 자들이 천마신교를 갈취하며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아버지와 오라버니, 그리고 언니들도 마찬가지였다.
한자리를 꿰차고 호의호식할 기회를 차 버릴 만큼 그들이 바보는 아니었다.
급히 천마신교를 찾아갔고, 눈에 보이는 광경을 처참했다.
악독한 천마신교로부터 해방하겠다는 교도들은 모두 노예가 되어 있었다.
피골이 상접하고 배를 곯으면서도 일을 하고 있었다.
등에는 채찍 자국이 가득했고, 나이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조차 예외가 없었다.
해방된 자들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천마신교의 간부들은 현경의 경지에 올라선 남궁무애를 감당하지 못했기에 무림맹이 시키는 대로 따르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원망과 분노로 가득했다.
남궁무애는 머릿속에서 무엇인가가 ‘툭’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무림의 평화가 아니었다.
아이들이 울고 있었다.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다시 찾아간 아버지와 오라버니, 그리고 언니들은 뻔뻔했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과거 천마신교에 종속당했을 때 무림맹도 같은 세월을 겪었다고 했다.
남궁무애의 얼굴에 비웃음이 걸렸다.
정작 아버지, 그리고 오라버니와 언니들은 무공의 수련조차 그만둔 채 배만 불리고 있었다.
자신이 어렸을 때는 죽이려고 했고, 이제는 악귀처럼 등에 들러붙어 몸통까지 뜯어 먹고 있었다.
허망했다.
미칠 것만 같았다.
그동안 무엇을 위해 살아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에서야 알게 된 사실.
오직 무공만 수련하면서 살아온 자신은 너무도 순진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살아온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형편과 입맛에 맞게 이용하기 딱 좋은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버지의 허리춤에는 당대 최고의 대장장이가 만든 검이 있었다.
그 검도 천마신교에서 착취한 돈으로 산 것이었다.
그 검을 빠르게 뽑은 남궁무애는 아버지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그리고 오라버니와 언니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죽어도 싼 인간들이었지만, 남궁무애는 자리에 주저앉은 채 하루를 꼬박 절규하며 울었다.
눈물이 말라서 나오지도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쯤.
어머니의 품이 너무도 그리웠다.
안아 주며 등을 쓰다듬어 주는 따스한 손이 너무도 간절했다.
정신없이 피 묻은 검을 들고 어머니를 찾아갔다.
하지만 간절하게 바랐던 어머니의 손은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안아 주지 않았다.
남편과 아들, 딸들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이미 미쳐 있었다.
남궁무애를 보자 비명을 지르며 눈이 뒤집혔다.
광인이 된 어머니의 눈엔 원망만이 남아 있었다.
따스했던 손길은 자신을 가리키며 ‘살인자’라는 비명과 함께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남궁무애가 서른아홉.
낙엽이 지는 가을에 있었던 일이었다.
* * *
긴 잠에 빠져 있던 남궁무애가 눈을 떴다.
오래전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눈가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젠장.”
나직이 꺼낸 말에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다름 아닌 어머니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 그리고 언니들의 얼굴은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데도 또렷이 기억났다.
그런데 너무도 사랑했던 어머니의 얼굴만큼은 기억나지 않았다.
‘꿈에서라도 만난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꿈에서 깬 지금은 다시 한번 보고 싶었던 얼굴이 지워지고 생각나지 않았다.
후우.
잠시 긴 한숨이 입에서 흘러나오고, 떨리는 손은 허리춤에 있는 검으로 옮겨졌다.
가족을 죽인 검.
명검이니만큼 배다른 동생에게 줄까도 생각했었지만, 자신이 지은 죄를 잊지 않기 위해서 계속 지니기로 했다.
남동생은 유일하게 자신을 지지해 줬다.
남궁무애가 지키기는 했어도 그 역시 몇 번이고 언니들과 오라버니의 손에 죽을 뻔했다고 했다.
광인이 된 어머니와 함께 남은 동생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여 초절정 고수가 되었을 때.
그날을 마지막으로 남궁세가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조용히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떠났다.
이미 천마신교는 종속시켰던 것을 원래대로 되돌렸고, 무림맹의 맹주도 때려치운 지 오래였다.
자신이 있어 봐야 돈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이 이용하려 했으니까 남아 있을 미련도 없었다.
남동생에게 알리지도 않고 무림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마흔다섯이 되던 해.
이후로 무림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 없이 조용히 살아가기만 했다.
망가지고 부서진 자신이 있을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고.
현경이라는 경지는 그 어떠한 해독제도 존재하지 않는 맹독이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