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하은월은 남궁무애로부터 멀어지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남궁무애가 배신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떠난 것만은 확실했다.
문득 처음 남궁무애를 만난 날이 떠올랐다.
그녀를 만난 것은 백 년이 조금 안 되는 구십몇 년 전의 어느 날.
다 낡은 허름한 옷에 온통 해져서 발가락이 보이는 신발을 신고 있는 여인을 시장가에서 보았다.
더러운 길목의 담벼락에 기대고 앉아 있던 여인의 입은 벌어져 있었고 눈은 풀어진 채였다.
며칠.
아니, 몇 달이나 그곳에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검을 차고 있는 것이 이상해 보일 텐데,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은 그녀가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지나쳐 갔다.
거지인 줄 알았는지 여인의 발치에는 누군가가 던져 놓은 철전 몇 개도 있었다.
전 무림 맹주 남궁무애.
하은월은 그녀를 즉시 알아봤다.
새카만 때가 얼굴에 덮여 있고 손톱 밑에도 더러운 것이 잔뜩 끼어 있었지만, 혈천회에서 주요 인물로 지켜보던 사람인지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다가서는 발걸음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그녀에게 흥미가 생겨서 말을 걸었다.
“무림 맹주나 되는 사람이 여기에서 무엇을 하는 것인가?”
“……언제 죽나 해서 기다리는 중이야.”
의외로 돌아오는 대답에 하은월은 남궁무애의 곁에 앉았다.
“현경의 무인이 쉽게 죽을 리가 있겠느냐. 이미 환골탈태까지 이룬 경지다. 몇십 년 동안 먹지 않아도 죽을 리가 없지 않으냐.”
“그럼 그때까지 이렇게 있으면 돼. 아니면 네가 나를 죽여 주든가.”
남궁무애는 죽여 주는 대가라는 듯 누군가가 던져 놓은 철전을 하은월 앞으로 밀었다.
“이걸로 죽여 줘. 가진 돈이 이것뿐이네. 모자라면 내가 죽은 이후 이 검을 가져가든가.”
“명검이다. 죽여 주는 대가로는 너무 많이 주는구나. 철전이면 된다.”
하은월은 철전을 집어 들었다.
“어떻게 죽여 주면 좋겠느냐.”
“최대한 고통스럽게.”
뜻밖의 대답에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죽고 싶다면서 자살을 하지 않은 이유는 고통스럽게 죽기 힘들기 때문인가. 그래서 굶어 죽으려고 한 것이군. 굶주림만큼 심한 고통도 드물기는 하지.’
말 몇 마디만으로도 알아차렸다.
이 여인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는 것을.
그것도 되돌릴 수 없을 만큼이나 심하게 부서져 있었다.
하은월은 눈을 반짝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미안하군. 나는 고통스럽게 죽이는 것은 못 한다. 다만 원한다면 고통스럽게 죽을 수 있는 장소 정도는 제공해 줄 수 있지.”
“그게 어딘데?”
“중원이다. 이 중원만큼이나 끔찍하고 고통에 가득 찬 곳이 있겠느냐. 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 적어도 지금의 중원보다는 행복한 곳을 만들려고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 검을 휘두르다 죽는 것은 어떠냐. 너도 중원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이러고 있는 것 같다만.”
철전을 다시 남궁무애의 앞으로 밀어 놓은 하은월의 몸이 일으켜졌다.
“생각해 보아라.”
“싫어. 지금 당장 죽일 게 아니라면 됐어.”
“그래.”
그 말을 끝으로 남궁무애에게서 떠났다.
현경의 무인이니만큼 죽을 정도로 탐났지만 빠르게 포기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눠 본 느낌으로는 분명 아이와 같을 만큼이나 착하고 순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니 저렇게 고통 속에서 살아가겠지.
‘정작 나 같은 사람은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살아가는데.’
떠나는 발걸음에 흥미는 남아 있어도 아쉬움은 없었다.
저런 사람은 다루기가 힘들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신념대로 움직이는 사람은 관심이 없었다.
저대로 죽어 버리면 딱 좋았다.
구역질 나는 인간이었으니까.
이후.
세월이 조금 흘렀다.
남궁무애의 기억도 머리에서 사라졌을 때쯤.
아무 생각 없이 같은 자리를 찾았던 하은월은 아직도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남궁무애를 보았다.
개방의 거지가 남궁무애 앞에 쌓인 철전을 가져가도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는 모습에 왠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전에 만나고 나서 일 년쯤 지났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그렇다 쳐도 왜 개방 놈들이 돈을 가져가는데도 가만히 있는 건가.’
멱살을 잡고 목을 베어서라도 가져가지 못하게 해야 할 것 아닌가.
현경의 경지나 되는데, 기껏 삼류 무인도 못 되는 개방 놈들이 알짱거리는 게 못마땅했다.
하은월은 남궁무애의 옆에 털썩 앉았다.
“뭐 하는 거냐. 놈들이 돈을 가져가고 있지 않으냐. 이 돈을 모아서 나한테 한 번 더 죽여 달라고 부탁하면 될 것을.”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아.”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겠다.”
“이곳에 앉아 있는 지도 이 년이 지났어. 그런데도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언제나 들려와. 개방의 거지가 내 앞에 쌓인 돈을 가져가서 그나마 거지가 된 아이들에게 밥을 줘. 구걸이 잘 안 되는 날에는 그걸로 연명하고 있어.”
“아무리 거지들이 돈을 가져가도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던가.”
“응. 항상 매일같이 들려와.”
하은월은 고개를 툭 떨구며 무거운 웃음을 지었다.
비웃음에 가까운 그 웃음의 뜻은, 다름 아닌 개방의 거지 놈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조금 전 이곳으로 걸어오기 전에 다리 아래에서 삶은 고기를 펼쳐 놓고 술을 마시는 거지 놈들을 봤다.
남궁무애가 기꺼이 내놓은 돈은 놈들의 술값으로 탕진되고 있었다.
악인인 자신이 봐도 참으로 더러운 세상이었다.
이러니 인간이라는 것들에게 애정이 생길 리가.
쓰디쓴 웃음을 짓는 하은월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남궁무애가 말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고 했지?”
“그래, 만들 거다.”
“아이들이 울지 않는 세상이야?”
“당연한 말이다.”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입술에 망설임은 없었다.
아무래도 남궁무애는 자신의 쓴웃음이 아이들이 울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서 짓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뭐 어떤가.
악인답게 여기에서 손을 내밀기만 하면 되는 것을.
“같이 만들자. 너와 내가 만드는 거다.”
“좋아. 죽는 것은 조금 미루도록 할게. 다만 한 가지만 약속해.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으면 나는 너를 떠날 거야.”
“약속하지.”
비가 내리던 그날.
빗물에 구정물이 씻긴 남궁무애의 깨끗한 얼굴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때 서로 손을 맞잡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연결이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이후, 남궁무애는 혼자서 혈천회의 검으로서 활동을 했었다.
현경의 경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증명이라도 하듯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을 꾸준히 해냈다.
남궁무애가 없었다면 혈천회는 대업을 백 년 후에나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큰 공을 세운 만큼 혈천회가 소유한 전장에 돈을 꾸준히 넣어 주었다.
오랜 세월 동안 금화가 만 냥이 넘도록 쌓였지만, 남궁무애는 거의 돈을 찾아 쓰지 않았다.
새로운 세상이 오면 그때 아이들에게 나눠 주기 위해서 모으는 중이라고 했다.
바보 같은 계집 같으니.
‘속은 줄도 모르고 신선과 싸움까지 했지. 덕분에 나는 지금 신선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쉽게 대업을 도모하고 있다.’
그냥 속은 채로 계속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은월은 손에 들린 옷을 바라봤다.
백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남궁무애로부터 처음으로 받은 물건이다.
그것을 미련 없이 길가에 집어 던진 하은월의 입술이 꽉 다물어졌다.
“설마 지금도 백 년 전에 했던 말을 할 줄이야.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들어 버렸다니.”
완강한 거절의 표시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원망의 말이다.
남궁무애는 죽으려고 시장 바닥에 앉아 있을 때로부터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 그대로였다.
순간 그 여리고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에 토악질이 올라올 것 같아서 죽일까도 생각했지만.
‘남궁무애 본인은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이미 경지가 생사경에 가까워지고 있다. 쓸데없이 자극해서 깨달음이라도 얻어 버리면 골치 아프지.’
이기기야 하겠지만, 생사경에 오른 사람과 싸우면 자신도 타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심장만 멀쩡히 그대로 있었다면.
하은월은 그동안 돈과 권력에도 흔들리지 않는 남궁무애에게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오십 년 전 지천번회의 무인 삼천 명이 죽었을 때부터 남궁무애는 은둔을 시작했다.
지천번회의 이름을 혈천회를 숨기기 위해서 마구잡이로 사용했어도 딱히 말이 없었고, 이용할 만큼 이용하기도 했다.
그보다는 이제 슬슬 심장을 찾을 때가 되었기에 그는 남궁무애가 준 옷 위를 흙발로 짓밟아 걸으며 혈천회를 향했다.
* * *
이틀 후.
천일영과 마주 앉은 유의선의 표정은 어두웠다.
검은 피를 흩뿌린 채 죽은 사람은 항주에서만도 사천 명에 달했다.
극도태마신공으로 수련했던 사람 이천 명을 모아서 서로 죽이게 했건만.
그 외에도 이천 명이나 더 되는 사람들이 수련을 해 왔다는 사실에 유의선은 머리를 싸맸다.
이번의 일로 극도태마신공을 수련했다가 미친 자의 손에 죽은 사람들은 육백 명.
수련자까지 해서 총 사천육백 명이라는 사람이 희생되었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일이었다.
“땅이 꺼지겠구나. 지난 일로 한숨을 내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보다는 혈천회에서 다음 수를 어찌 둘지 그것을 걱정하여라.”
“이번 일에서도 항주는 피해가 적었습니다. 다른 곳은 일만 명 이상이 죽었고, 복건성은 사만 명이나 희생당했지요. 그 때문에 지금 항주로 피난 인파가 줄을 잇고 있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차를 가운데 두고 천일영과 대화를 나누는 유의선의 고심은 깊어져만 갔다.
해적과 왜구들이 일으킨 사건만으로 외부에서 항주로 유입된 사람이 대략 오만 명.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것 같은데 이번에는 십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 속에 간자들이 섞여서 들어올 것을 생각하면 그냥 앓아눕고 싶었다.
천일영은 찻잔을 들어 올리면서 빙긋 웃음을 지었다.
“꼭 그들을 항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바로 옆에는 소흥(紹興)이 있지 않으냐. 소흥은 시내의 일 할이 운하다. 그곳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물길에서 배로 감시하면 적은 인원으로도 무뢰배들을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오! 그것 정말로 좋은 방법입니다.”
“소흥은 부패가 심한 곳이다. 덕분에 발전도 늦어지고 있지. 그곳을 발전시키는 사람들로 십만 명이면 제법 좋은 숫자가 아니더냐. 몰려온 사람들은 일자리도 필요할 터. 부패한 관리도 처리할 겸 딱 좋은 기회다.”
유의선의 얼굴이 주름이 펴진 듯 확연히 밝아졌다.
생각도 못 한 상책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위기가 기회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까. 공자님의 뜻대로 항주의 문을 걸어 잠그고, 또한 이미 이주한 오만 명도 소흥으로 같이 보내지요.”
유의선은 천일영의 다음 생각도 알 것 같았다.
이주한 모든 사람을 소흥으로 옮기는 것이라면 다음에 할 일은 하나다.
“항주에 있는 사람들의 호적을 새로 만들고,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패를 만들도록 하지요. 패를 가지지 않은 자는 무조건 형벌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칠 일이다. 칠 일 만에 패를 가진 사람들로 항주를 채워라. 그렇지 않으면 가짜 패가 나돌 것이다. 복제하기 힘들게 만들고 빠르게 처리해야 된다.”
“모든 인력을 동원하겠습니다. 나무로 만든 패가 아니라 철로 만든 것을 찍어 내지요. 시간도 적게 걸리고 복제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제야 승선포정사사가 쓸 만한 사람이 되어 가는군. 거기까지 알았다면 이제 됐다. 나는 가 보도록 하지.”
애써 강권하여 시간을 내달라고 했던 유의선은 공자를 만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방금 해 준 이야기만으로도 앓던 이가 쏙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지만, 가야 할 방향만이라도 알게 된 것이 어디인가.
이미 열 사람분의 일을 해내고 있는 예서란까지 있으니 앞으로는 일사천리도 일이 진행될 것이었다.
하지만 공자를 만난 진짜 목적은 지금부터였다.
“공자님, 황제께서 전갈을 보내셨습니다.”
“듣고 싶지 않다.”
“헉! 들으셔야 합니다. 황제의 명입니다.”
“그럼 들었다고 치고, 황제에게는 무조건 안 한다고 해라.”
“안 됩니다!”
오래도록 겪다 보니 유의선도 천일영을 취급하는 방법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무공도 수련하지 않은 몸을 날렵하게 날려서 천일영의 허리를 껴안은 유의선이 재빨리 용건을 내뱉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시면 말씀하라고 하십니다. 그동안 해남도 때부터 수없이 많은 공을 세우지 않으셨겠습니까. 그 보답입니다.”
“상을 준다는 말이었나.”
잠시 고민에 잠기던 천일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마침 필요한 것이 있었다.
혈천회가 천마신교와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혈천회를 궁지로 몰아넣을 방법.
지나칠 정도로 자금이 많이 드는 일이어서 망설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천일영은 오른쪽 입꼬리만 올린 채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그 상이라는 것이 무엇이든 가능한 것이냐.”
“황실에서 한 약속입니다. 가능하다면 그 무엇이든지 황제께서 직접 내리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고맙게 받도록 하지.”
“정말이십니까? 한숨이 놓입니다. 이번에도 거절하셨으면 제가 무척이나 곤란했을 것입니다.”
등 뒤에서 유의선의 한숨이 느껴질 정도로 뜨거운 입김이 불어왔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바로 전서구를 날리겠습니다.”
“자금이 금화 이만 냥에 달하는 거대한 상단. 그것을 원한다.”
“네에? 자금이 금화 이만 냥?”
순간 유의선은 괜히 몸을 날려 천일영을 잡았다고 후회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부터 황제에게 맞아 죽게 생겼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