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신귀환기-230화 (231/270)

230화

절강성 항주에서 멀지 않은 해녕(海寧)의 산 중턱.

동굴 앞의 커다란 철문 앞에서 천일영의 고심은 깊어져만 갔다.

어제 건청과 대화를 나눈 간자가 오늘 아침 일찍부터 항주를 빠져나가서 뒤를 쫓았다.

간자의 무공이 화경을 한참 뛰어넘는 경지이니만큼 기척을 무(無)에 가깝게 숨기고, 사십 리가 넘을 정도로 거리를 벌린 채 따라왔는데.

갑자기 어느 순간 간자의 기운이 사라졌다.

천일영은 간자가 사라진 곳으로 급히 가서 반 시진이 넘도록 흔적을 찾다가 진법으로 교묘하게 숨겨진 지형을 찾았다.

초고수가 바로 곁을 지나간다 해도 절대 들키지 않을 만큼 진법의 달인이 설치한 것이었다.

급한 마음에 힘으로 뒤틀어서 진법을 깨 버리고 싶었지만, 안에서 눈치챌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직은 이 진법이 혈천회의 본문인지, 지회인지도 불분명했기에 천일영은 틈새를 찾았다.

이미 눈에 보인 진법이어도 달인이 설치한 진법의 틈새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 각이 지난 후.

천일영은 틈새를 발견하고 기를 밀어 넣어 기운을 중화시키고 몰래 진법의 안으로 들어섰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동굴로 보이는 곳을 철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간자의 기운이 사라진 이유는 진법뿐만이 아니라 철문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인가. 다만 이곳은 지회나 본문이 아닌 모양이군.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고 문도 오랜만에 열린 것 같다.’

독천마왕 서가흔에게 배운 추적술 덕분에 인위적으로 흔적을 지운 것과 오랜 풍화로 인해 흔적이 지워진 것 정도는 구별할 수 있었다.

아마도 간자가 다시 이 문을 사용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일 듯했다.

이제 문만 열면 되는데.

문제는 이 철문이 특정 열쇠를 넣어야만 열리는 구조라는 것이었다.

“단순한 문 열쇠가 아니라 기관 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것인가. 강제로 문을 열면 동굴이 무너지는 장치인 것 같은데.”

손으로 문을 두들길 때 나는 소리가 복합적이었다.

안쪽이 텅 비어 철판이 떨리는 곳과 반대로 둔탁하게 울리는 소리로 나뉘어 있었다.

복잡한 기관 장치가 달린 문에서 나는 특징적인 소리였다.

“젠장.”

함부로 문을 열었다가는 혈천회로 가는 유일한 흔적을 망가트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 천일영은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기관 장치를 잘 다루는 사람이 누가 있었더라.’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노병천이 떠올랐다.

기관 장치를 만드는 게 취미인 사람이었으니까.

적어도 지금 당장 데리고 올 사람 중에서 노병천의 능력을 뛰어넘는 사람은 없었다.

천일영은 노병천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잊고 있던 것 하나가 떠올랐다.

“기억났다. 허리!”

전에 벌을 준다고 허리를 손봤었는데 때가 되면 고쳐 준다고 하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 노병천은 기어 다니고 있을 것 같았다.

훅.

오랜만에 강서성의 별유천지 분점으로 신형을 날리는 천일영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동안 노병천에 대한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 입을 다물게 하려면 그럴듯한 상이라도 쥐여 줘야 할 것 같았다.

* * *

노병천은 앓아누운 채 천장을 바라봤다.

주인인 공자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여전히 허리를 고쳐 주지 않고 있은 지가 몇 개월이나 되었다.

주인을 모시는 자로서, 언제나 공자의 안위를 걱정하며 살았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모진 벌을 주시는 것인지.

아니다.

잘못은 자신에게 있었다.

감히 주인에게 묻지도 않고 일을 벌인 죄다.

묵직한 죄악감이 가슴을 짓누르자 마음속에 깊이 담긴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런 염병.”

물 한 잔 마시고 싶어도 쉽사리 일으켜지지 않는 몸에 원망 가득한 표정이 절로 지어졌다.

그때 갑자기 손 하나가 불쑥 눈앞으로 들이밀어졌다.

노병천은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끄악. 갑자기 웬 손이! 이런 염병!”

“목이 마른 것 같아서 물을 주려고 했을 뿐이다.”

“헉! 공자님? 언제 방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까?”

물잔을 건네는 천일영이 ‘이런 염병’ 소리에도 인자한 표정을 지었다.

“벌을 오래 줘서 미안하구나.”

“아, 아닙니다, 공자님. 제가 잘못한 것을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자신도 모르게 진심이 튀어나와 버린 노병천이 눈치를 보며 움찔거리다가, 허리가 나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눈물이 글썽거렸다.

이러는 동안에도 간자는 도망가고 있는데 울기는 왜 울어.

‘일단 빨리 허리부터.’

노병천의 몸을 뒤집고 천일영은 일부러 어긋나게 만든 척추를 교정했다.

그리고 내친김에 진기를 밀어 넣고, 금빛 진기의 실을 온몸의 혈도에 묶었다.

혈색이 확연하게 좋아진 노병천이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이럴 수가! 언제 아팠냐는 듯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수명도 한 삼십 년쯤 늘었을 거다. 그간 벌을 오래 준 것이 미안해서 내가 주는 것이다.”

“수명까지요? 공자님……. 어찌 이런 늙은이에게 그런 상을 주십니까.”

아니, 이제부터 힘을 써야 하거든. 상으로 포장은 했지만.

이번에는 희망이 아닌 진심으로 감동했는지 또 울먹거리는 노병천이, 눈물부터 쏟아내기 전에 멱살부터 잡아챈 천일영이 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모습에 노병천은 멱살이 잡힌 채 비명부터 내질렀다.

“끄아아악! 공자님! 살려 주십시오. 이건 새로운 벌입니까?”

“아니다. 수명을 삼십 년쯤 늘려 줬으니까 놀라서 십 년이 깎여 나간다 해도 이십 년이 이득 아니냐.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라.”

“으헉. 끄아아아악!”

정강산 아래로 노병천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비명에 놀란 새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멀리에서 이 모습을 보는 무림인이 있다면 감탄할 만한 광경이었지만, 노병천에게는 지옥이었다.

차라리 허리가 아픈 게 수백 배는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상으로 수명을 늘려 줬지만, 노병천에게는 벌이나 다름없었다.

* * *

노병천은 기관 장치를 자세히 살폈다.

노안이 와서 매일같이 눈에 힘을 주고 봐야 했는데, 공자가 진기를 밀어 넣어 주고 나서는 깨끗하게 보였다.

좋아진 눈으로 상세히 분석하던 노병천이 반 시진 후에 입을 열었다.

“이렇게나 복잡하고 비싼 기관 장치는 오랜만에 봅니다.”

“동굴에 손상을 주지 않고 문을 여는 것은 불가능하겠는가.”

“가능은 합니다.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렇지요. 그런데…….”

보면 볼수록 기괴한 기관 장치였다.

언뜻 보기에도 만들어진 지 수백 년은 되었을 법한 것인데, 요즘에 만들어지는 기관 장치보다도 훨씬 진보된 방식이었다.

노병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자님, 아무리 빨리 열어도 꼬박 하루는 걸립니다.”

“지금 바로 여는 방법은 없느냐.”

“전설로 내려오는 진나라의 진시황제 무덤에나 있을 법한 기관 장치입니다. 게다가 이 문은 진동을 감지하는 장치가 되어 있습니다.”

“진동을 감지하다니?”

“문 이외에 다른 곳을 파고 들어가면 동굴이 무너진다는 말입니다.”

거기까지 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인가.

급한 마음에 동굴의 입구 옆을 파고 들어갈까 생각했던 차에 노병천이 먼저 말하기를 다행이었다.

“최대한 빨리 열어 보아라.”

“인력과 장비를 보충해 주십시오. 그리했을 때 하루입니다.”

“그러도록 하지.”

노병천을 안아 들고 항주로 향하는 천일영의 표정은 누가 봤다면 뒤로 자빠질 만큼이나 험악했다.

딱히 인상을 찡그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풍기는 기운이 그러했다.

‘놈들이 중원을 돌아다니는 방식을 알겠군. 기관 장치 사이로 다니니 그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문제는 중원에서 혈천회가 사용하는 문이 몇 개나 되는지다.’

존재를 지우는 문이 수백 개나 된다면 그들의 정체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이해된다.

천일영은 기관 장치로 예상하건대, 혈천회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대략 알 것 같았다.

분명 자신과 비슷할 정도로 신중하고 치밀한 성격이었다.

다만 비슷하면서도 서로 상극인 것이 느껴졌다.

천일영 그 자신이 모든 것을 품으려는 사람이었다면.

혈천회의 주인 계는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이었다.

세상이든, 혹은 그것이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것이라 해도.

천하의 모든 것을 가지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는 데 거리낌이 없는 성품인 듯했다.

그 극명한 차이가 서로의 목을 베는 갈림길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천일영의 표정은 계속 굳어져만 갔다.

* * *

인부들이 진동을 제거하기 위해서 수십 개의 기둥을 세워 문을 지탱하고, 잠도 줄인 채 기관 장치의 해체를 하던 노병천은 한숨을 쉬었다.

해체하는 동안 수많은 고비를 넘겼지만 이제야 입가에 웃음이 걸린다.

노병천은 해체를 시작한 지 하루가 지난 지금, 하나의 장치를 손으로 꾹 눌렀다.

딸깍. 드르르르륵.

문이 열렸다.

진시황제의 무덤에나 있을 법한 기관 장치를 하루 만에 풀다니 역시 노병천은 노병천이었다.

하지만 지금 바로 들어가는 것은 금물이었다.

각종 함정과 또 다른 기관 장치가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또 다른 기관 장치와 연결이 되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거기까지 해체하고 난 후에 들어가시지요.”

“한 시진 안에 끝내거라.”

환하게 밝힌 횃불을 들고 노병천이 안으로 들어섰다가 다시 밖으로 나온 것은 한 시진하고도 반 시진이 지나서였다.

횃불의 그을음에 시커메진 얼굴로 노병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몇 개의 함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해체했습니다만, 여전히 충격을 주면 안 됩니다. 동굴 안쪽으로 십 리가 넘도록 진동을 받으면 무너지는 장치가 있습니다.”

“수고 많았구나.”

천일영은 동굴 안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습하고 퀴퀴한 공기가 느껴졌다.

천지일축공으로 발아래에 기운을 펼쳤다.

이것으로 빠르게 경공을 펼친다고 해도 진동이 감지될 일은 없을 것이었다.

파앙.

튀어 나간 신형으로 빠르게 동굴을 가로질렀다.

눈으로 기를 모아서 보고 있었기에 딱히 횃불이 없어도 밝게 보였다.

한참을 물기로 가득한 동굴을 달리는데 둥근 벽면에 남아 있는 자국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이 동굴이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혈천회에서 파낸 것이라는 흔적으로 가득했다.

틈틈이 동굴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지대도 설치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것은 동굴의 길이였다.

벌써 천지일축공으로 반 각이 넘도록 달리고 있었다.

아마도 수백 리 정도는 될 법한 거리.

생각할수록 놀라운 길이였다.

반 각 정도를 더 달린 천일영은 순간 앞이 막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경공을 멈췄다.

경공으로 총 일각.

또 다른 철문이 나타났다.

밖에서 약간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으로 보자면 이 뒤로는 동굴이 아니라 출입문의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그 앞은 역시 진법으로 가려져 있어서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천일영은 잠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철문 역시 기관 장치로 가득했다.

문을 박살 내고 나가는 것은 상관없었다.

동굴이 무너져 내려도 피하는 것 또한 문제없었다.

‘다만 항주로 통하는 통로가 망가진 것을 혈천회에서 알면.’

또다시 항주는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미치겠군. 또 하루를 꼬박 들여서 문을 해체해야 하는가.’

잠시 생각에 잠기기를 일각.

천일영은 철문을 부수는 대신 몸을 돌리고, 천지일축공으로 왔던 길을 다시 나아갔다.

다만 이번에는 막힌 철문이 있는 곳으로 갈 때처럼 빠르게 가지 않았다.

속도를 줄이고 동굴이 꺾이는 것을 유심히 봤다.

하나씩 휘어지는 부분을 모두 기억했다.

반 시진 동안 동굴을 달리면서 머릿속에 지도를 완성한 천일영이 밖으로 나오자 노병천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공자님? 왜 돌아오셨습니까?”

“앞에도 기관 장치가 있다.”

“다시 해체해야 합니까?”

“아니다. 지금부터 너는 문을 다시 닫고 처음 있던 상태로 되돌리거라. 그리고 모든 흔적 또한 지우고.”

“알겠습니다.”

노병천은 애써 하루 동안 고생한 것이 허사가 되었지만, 군소리 없이 기관 장치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그사이에 천일영은 동굴이 있는 산 위로 올라갔다.

산 정상에서 넓은 땅덩어리가 눈앞에 펼쳐졌다.

눈을 감고 머리에서 그린 지도를 기감과 합치고, 눈앞에 보이는 풍경과 또 한 번 합쳤다.

그리고 아까 펼쳤던 천지일축공과 똑같은 속도로 달렸다.

기감과 머릿속의 지도가 오른쪽으로 가라면 그대로 갔고, 왼쪽으로 조금만 몸을 돌리라고 하면 길을 틀어서 따라갔다.

나무와 바위가 앞을 막으면 뛰어넘고 물길과 폭포가 나오면 하늘을 날았다.

그렇게 반 시진 동안 달려서 도달한 곳.

천일영은 눈을 뜨고 눈앞의 광경을 보았다.

“빌어먹을. 도착한 곳이 하필이면 여기인가.”

펼쳐진 광경이 눈 안에 담기자 천일영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곳.

커다란 파도가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모래사장으로 밀려들었다.

바다.

도착한 곳은 예상과 전혀 다른 곳이었다.

혹시 잘못 왔을까 싶어서 철문을 찾았다.

진법에 숨겨져 있는 철문의 존재까지 확인한 천일영은 이를 악물었다.

분명 이곳은 다른 철문으로 이어지는 중간 지점에 불과했다.

게다가 모래사장에 찍혀 있는 발자국도 없었다.

분명 간자 놈은 파도가 치는 곳을 일부러 걸었을 것이었다.

발자국과 흔적은 모두 파도가 집어삼킬 테니까.

“젠장, 놓쳤군. 해안선을 따라서 진법으로 숨겨진 또 다른 문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몇 리, 몇십 리를 걸어서 갔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으니.”

아마도 이곳은 해녕 옆에 있는 해염(海鹽).

수천 리가 이어지는 해안선에 천일영은 허망한 표정으로 애꿎은 바다만 노려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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