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혈천회로 돌아온 조상백은 좀처럼 가지기 힘든 하은월과 독대의 시간을 가졌다.
중원에서 감히 찾아보기도 힘들 만큼 귀한 금존청을 조상백과 나누던 하은월이 항주에서 알아낸 이야기를 전해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천일영은 항주에 없었고 대신 천량도사와 개방의 방주 도철용이 우리를 방해했다는 것이구나. 류규강도 도망간 것이 확실해 보이고.”
“그렇사옵니다. 헌데 천자님, 조금 이상한 것이 있었사옵니다.”
“무엇이냐.”
“천량도사와 도철용의 경지가 중원 십육 대 고수로 알려져 있으나, 기감으로 느끼기에는 화경의 경지가 멀지 않은 듯했사옵니다.”
“화경? 그놈들 제법이구나.”
혈천회에서 해 왔던 백 년간의 기억이 하은월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미리 싹을 제거하는 것.
그간 혈천회에서는 무인들이 화경이나 현경의 경지에 오르지 못하도록 뒤에서 조작을 해 왔다.
‘빠르게 초절정 고수가 되는 방법을 체계화시켜서 널리 알렸지만, 그 방법은 반대로 초절정 고수가 된 무인들이 화경에 들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지금은 절정 고수와 초절정 고수가 넘치는 세상이 되었으되, 반대로 화경이나 현경의 경지에 오른 무인은 없는 기이한 무림이 되었다.
천일영처럼 혼자서 경지의 길을 찾아낸 자를 제외하면 말이다.
“아마도 천량도사와 도철용은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수련을 하는 모양이었사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도착한 항주에서 우리를 방해한 것이 아닐까 하옵니다.”
“뭐 됐다. 이제는 화경에 오른 무인이 한두 명 나타난다고 해서 대업이 잘못될 일은 없다. 놈들은 우리를 막기에 너무 늦었구나.”
지금에 와서야 화경에 도달한 무인 한둘 생긴들, 걱정거리 축에도 못 든다.
하은월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수고가 많았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중원에서 류규강을 찾아서 죽여라. 배신자이니만큼 고통스럽게 처리하고 그 목을 혈천회의 누구나 볼 수 있게 걸어 두어라.”
“모든 것은 천자님의 뜻대로 하겠사옵니다.”
조상백이 나가고 난 후, 하은월은 마음속에 걸리던 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남궁무애는 이대로 둬도 될 것 같군. 항주에 있는 천량도사와 도철용도 괜히 손대서 소란을 피울 필요는 없겠지.’
잠시 미뤘던 두 번째 계획을 실행해도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한 하은월의 생각이 깊어졌다.
아직 공석인 무림맹 맹주 자리가 문제다.
‘남궁천이 죽어 버려서 일이 꼬였다. 누가 남궁천을 죽인 것인가. 아무리 찾아도 꼬리조차 보이질 않는다.’
혈천회가 대업을 일으킬 때 무림맹은 가만히 있어 줘야만 했다.
천마신교와 사혈련도 같은 약속을 했다.
그런데 지천번회라는 이름으로 남궁천이 죽어 나가는 바람에 대업을 이룰 때 무림맹과 싸우게 될 상황에 놓였다.
하은월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세룡이 넘어오길 다행이군.’
모용세가는 과거 연나라의 왕족.
당연히 지금의 황실과는 사이가 나쁘고 모용세룡은 성을 고치게 되어 지금에 와서는 모세룡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그 때문에 모세룡은 황실이 건드리지 못하고, 또한 자신이 무시당하지 않을 자리를 탐냈다.
‘거기에다가 금화 만 냥을 눈앞에 쌓아 준 것만으로도 그는 눈이 돌아갔다. 금화 만 냥이면 그가 나중에 반란이라는 딴생각을 품을 만큼의 금액이지.’
하지만 모세룡이 무림맹의 맹주가 되기까지는 커다란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소림사의 방장 태사명진.
그를 지지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무림 맹주의 자리가 멀지 않았다.
‘일단 그를 제거한다. 그만 제거되면 모세룡이 맹주가 되도록 만들기는 쉽다.’
이후에 모세룡이 정말로 반란을 일으켜 주기라도 한다면 대업은 더더욱이나 쉬워질 테고.
하은월은 두 번째 계획인 태사명진을 제거하는 일을 허가하기로 마음을 먹고는 남아 있는 금존청을 입에 털어 넣었다.
* * *
그동안 무림맹의 맹주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싸움의 행방을 제갈현이 정리해서 전서구로 보내왔었다.
푸드덕.
그런데 급한 일이 생긴 것인지 어제 전서구가 왔었는데 오늘 또다시 제갈현의 전서구가 날아들었다.
천일영은 편지를 펼쳤다.
[소림의 방장 태사명진이 무림 맹주가 될 모양새였는데 급작스럽게 모용세가의 문주 모세룡이 끼어들었습니다. 어젯밤부터 모세룡이 무림 문파의 문주들과 구파일방의 장문인을 데리고 목천월향에 오기 시작했고, 거액의 돈을 뿌리는 중입니다.]
다 읽은 천일영의 얼굴이 구겨 버린 편지만큼이나 일그러졌다.
무림맹의 맹주 자리를 두고 그동안 격한 싸움이 벌어져서 지금까지도 맹주가 추대되지 못했다.
여기까지는 예상한 대로다.
서로 맹주가 되려고 했던 자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고 오히려 맹주 자리에 관심이 없던 소림의 방장 태사명진이 마지막까지 남았다.
내가 맹주가 못 된다면, 싸웠던 놈들도 맹주가 못 되도록 차라리 태사명진을 밀어주겠다는 형국이 된 것이다.
‘여기까지도 예상했던 대로다. 그런데 갑자기 모세룡? 무림 맹주는 이쪽에서 준비하고 있었건만.’
도철용이 화경의 경지에 들어서면 맹주로 만들 생각이었다.
맹주 자리를 탐탁지 않아 하는 태사명진이 도철용에게 양보하게 만들려고 생각했었는데.
천일영은 붓을 꺼내서 편지를 써 내려갔다.
[맹주가 추대되는 것을 계속 방해하고, 사천당문의 당강용을 새로운 무림맹의 맹주 후보로 만들어라.]
천일영은 편지를 제갈현에게 보냈다.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지만, 사천당문의 당강용도 무림맹의 맹주가 될 자격이 있었다.
그에게는 약재를 독점해서 벌어들이는 막대한 재력과 탁월한 해독 능력이 있었다.
이것은 그 어떤 무림 문파도 가지지 못한 큰 무기였다.
‘둘 중 하나. 도철용이 화경의 경지에 들어서는 게 늦어진다면 당강용을 맹주로 만든다.’
천일영의 눈이 가늘어지고, 눈꺼풀 속에 숨은 눈동자가 빛났다.
‘남궁천이 지천번회, 그러니까 혈천회와 손을 잡고 있었지. 그렇다면 모세룡이 급작스럽게 맹주 후보로 나섰다는 건 역시…….’
불길한 마음이 어둠처럼 마음 한구석을 갉아먹는 느낌이 들었다.
모세룡과 혈천회가 손을 잡았다면 그들이 다음에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소림의 방장 태사명진의 암살.
그보다 쉬운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천일영은 당강용을 맹주 후보로 만든 것이 태사명진의 명줄을 늘려 주기만 바랄 수밖에 없었다.
아직 맹주 자리를 두고 혼란은 계속되어야 했다.
* * *
천일영은 깊은 생각에 잠길 때마다 무릎 위에 예서란은 앉혀 놓고 머리를 쓰다듬었었다.
그리고 오늘 예서란은 천일영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오늘도 생각이 길어지실 모양입니다.”
“그럴 것 같구나”
“그럼 머리를 내어 드릴게요.”
“고맙다.”
행여 예서란이 불편해할까 봐 느린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천일영은 생각에 잠겼다.
‘모용세가의 모세룡이 거액을 뿌린다는 이야기는 혈천회에서 지원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할 터다.’
혈천회의 꼬리를 잡기 위한 계획을 서둘러야만 했다.
상단의 완성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재적소에 인원을 새롭게 넣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깊은 고심의 이유다.
노병천을 새로 만든 상단으로 끌어들였다.
상단을 경영하려면 경쟁 상대와 책략으로 싸울 때가 많았는데 이런 부분은 노병천이 제격이었다.
그가 괜히 흑도 조직 미흑천의 책사였던 게 아니다.
‘다음 인선은 역시 단옥이겠지.’
그녀는 머리가 좋고 돈에 대한 감각이 좋아서 별유천지에서도 상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특히 귀신같이 돈 냄새를 맡는 데는 최고라고 할 만했다.
홀아버지를 모시고 동생을 돌보며 어렵게 살아온 세월이 길어서 그런 감각이 생긴 듯했다.
또 한 명은 예서란이었다.
천일영은 예서란에게 상단 일까지 맡기는 것을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그녀는 학당에 다니고 유의선의 일까지 돕고 있었다.
하지만 유의선과 같이 있다 보니 황실과의 소통은 예서란이 제격이었다.
게다가 능구렁이가 만 마리쯤 살고 있을 것 같은 황실과 상대하려면 그만큼 좋은 머리가 필요하기도 했다.
천일영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애정이 가득한 손길로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예서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느닷없이 예서란의 입에서 기묘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야…… 야옹.”
“응? 야옹?”
천일영이 피식 웃음을 짓자 예서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동안 천일영이 고민할 일이 있을 때마다 쓰다듬으며 고양이의 역할에 길들어 있던 터라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였다.
“빨리 잊으세요! 실수로 나온 말이에요!”
“아니, 무척 귀엽구나. 앞으로도 그 소리는 계속 내어라.”
“크윽.”
또 아이 취급을 하는 공자님의 표정에 이를 악문 예서란이 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천일영은 바둥거리는 예서란을 못 일어나게 하고는 계속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직은 생각할 것이 남아 있구나. 조금만 더 고양이가 되어 주겠느냐.”
“큭! 알겠어요.”
“대답은 야옹으로 해 다오.”
“끄으으윽! 야…… 야옹.”
새빨개진 얼굴이 터져 나갈 정도로 달아오른 예서란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는 천일영은 또 한 명의 얼굴을 떠올렸다.
금채홍.
사실 상단의 일을 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녀를 숨겨야 했다.
태고의 신선이 피를 나눠 준 사람.
혈천회가 죽이려고 노리는 사람이다.
비교적 가까운 곳을 상단의 호위 무인으로 위장하고 다니는 것이 정체를 숨기기에는 차라리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상행에는 위험이 따르는 법. 일단은 절정 고수로도 충분하지만 초절정 고수 정도는 되어 줘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구나.’
잠시 수련을 멈췄었지만, 내일부터 다시 굴릴 생각인 천일영이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간 천일영 그 스스로가 무공의 길을 걸으며 배우고 느낀 것들을 모두 전해 주는 것이니만큼, 수련의 내용도 전부 초절정 고수와 화경에 오르기 위한 것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니만큼 힘든 것은 당연하다.
여태까지 굴린 것만으로도 죽겠다고 별유천지의 식구들은 아우성을 쳤으니까.
하지만 내일부터는 그 두 배로 굴릴 생각을 한 천일영은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예서란과 발걸음을 옮기며 웃음을 지었다.
듣는 사람도 너무 기뻐서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 * *
오 일 후.
유의선은 황실에서 보낸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서 천일영과 함께 상단에서 기다리던 중에 은근히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다.
천일영이 무서우니까 큰 목소리는 내지 못했지만, 내용만큼은 원망으로 가득했다.
“공자님의 황당한 요구에 하마터면 황실에서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죽지는 않았으니 된 것 아니냐.”
“금화 이만 냥의 재력을 가진 상단이라는 게 뉘 집 개 이름입니까.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만금상단도 이 정도의 돈은 겨우 굴릴 만큼 큰 금액이란 말입니다.”
“하하하. 어쨌든 황제께서 허락해 줬으니 그만 투덜대거라.”
조금 심했다는 것은 잘 안다.
아니, 많이 심했기는 했다.
아마도 혈천회를 찾기 위한 계략이 아니었으면 황실에서는 허가를 내리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때.
상단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한 명씩 들어서기 시작했다.
황실에서 자체적인 호위를 위해 무인을 내린 것이었다.
천일영은 조금 놀랐다.
삼류 무인이나 이류 무인이 주를 이룰 것으로 생각했는데, 일류 고수들이 하나씩 들어서고.
그 뒤를 따라서 들어오는 지휘관 격의 사람이 안광을 번득거리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황실에서도 아끼고 그 이름이 드높은 초고수이자, 종2품의 보국장군(輔國將軍)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주장학.
바로 유의선이 직접 마중을 나와서 기다린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