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어둠.
감탄을 자아낼 만큼 아름답게 흐르던 폭포는 불길한 기운에 삼켜졌다.
주변을 감싸던 절경도 마찬가지였다.
하은월의 몸에서 뿜어지는 탁한 기운과 어용지천참대검이 피를 빨아들이며 만들어 낸 불길한 예기가 주변으로 뻗어 갔다.
순간.
툭. 투두두둑!
허공에 떠 있던 머리 팔십일 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모두 피가 빨린 채 해골에 가죽만 들러붙은 끔찍한 모습이었다.
스르릉.
천일영은 무극지검을 도현에게 건네주고, 그 자신은 설화여월과 화하여월을 뽑았다.
“남궁천이 가지고 있던 어용지천참대검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네가 혈천회의 주인인가 보구나.”
“오랜 시간 찾아왔다. 그리고 반갑다고 해야 하나? 이제야 너를 죽일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 딱히 악감정이 있지는 않을 텐데.”
하은월이 대답 대신 얼어붙을 듯한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그와 동시에 어둠도 더욱 짙어졌다.
하은월이 어용지천참대검의 검 끝을 들어 올려 싸움의 시작을 알리자, 천일영의 눈동자에서도 혈광이 터져 나왔다.
“네가 천마신교의 마왕들에게 소초련과 도현을 죽이라고 시켰는가.”
“미끼로 쓰라고 했다. 패범휘가 탈마에 올랐는데 저 두 연놈을 놓치겠느냐. 네놈이 나타날 때까지 써먹은 것뿐이지.”
“그렇군. 네가 내린 명령이었군.”
파앙!
순간 하은월의 눈에서 천일영의 신형이 사라졌다.
극살태마신공 칠 초식 천하강천(天下强踐).
두 개의 검이 허공을 가르며 하은월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검을 사선으로 겹쳐 단번에 목을 자르는 공격이다.
하은월이 든 어용지천참대검도 그와 동시에 허공으로 떠올랐다.
카앙!
하은월은 천일영의 쌍검을 어용지천참대검 한 자루만으로 막았다.
그와 함께 천일영의 검을 뿌리치고, 지금까지의 어둠보다도 더 짙은 암흑을 몸에 휘감으며 천일영을 향해 검을 날렸다.
쿠우우웅. 콰아아아아앙!
천일영이 설화여월과 화하여월 두 자루의 검으로 하은월의 검을 막았다.
더는 철과 철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기운이 부딪히며 터져 나가는 충격에 지축이 울렸다.
하은월의 고함이 터졌다.
“남궁천과 단 한 번 싸워 본 것만으로 쌍검을 생각해 낸 것이냐. 네놈은 항상 이래서 문제다!”
“쌍검의 사용법이 그뿐이라고 생각하느냐. 네놈은 도현과 소초련을 건드린 이상 반드시 죽인다.”
“겨우 수하들의 목숨에 함정으로 기어들어 오다니. 어리석은 것도 정도가 있지.”
“내게는 내 사람이 가장 소중하다.”
설화여월과 화하여월이 허공을 갈랐다.
극살태마신공 십일 초식 추혼도지(墜魂到持).
눈 한 번 깜박할 짧은 시간 동안.
하은월에게 구십칠 번의 검날이 날아들었다.
두 개의 검이 하은월의 살을 찢고 근육을 도려냈다.
촤아아아악!
순식간에 온몸을 베인 하은월이 너덜너덜해진 자신의 옷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천마라는 이름값 정도는 하는군. 막는 것뿐만 아니라 쌍검술도 완벽하다는 말인가. 천마신교에 쌍검술이 있는지는 몰랐는데.”
“극살태마신공의 초식을 변형한 것뿐이다. 네놈이 뿌린 극도태마신공의 원형이지.”
“내가 아는 무공으로 공격을 한 것이니 얼마나 잘 막아 내는지 본 것인가. 뭐 됐다. 이제 슬슬 서로 탐색은 끝내기로 하지.”
슈아아아악.
하은월의 몸에 난 상처가 흰 연기와 함께 아물었다.
애써 낸 상처가 아무는 것을 본 천일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사람의 영혼을 혈도에 묶는 무공은 네가 만든 것인가.”
“탈제명부음 말인가? 이것은 원래 무공이 아니다. 내가 과거 신선과 싸우다가 잃은 게 있는데 그것을 대신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그런데 다들 눈이 뒤집혀서 탈제명부음을 알려 달라고 하더군.”
애써 심장이라는 말을 피해 말한 하은월이 살아 있는 이유.
탈제명부음의 특징이 급격하게 상처가 낫는 것과 강제로 내공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무공이 아니라 빼앗긴 심장을 대신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었나. 다른 사람의 영혼으로 심장을 대신하는 것이었군.’
모든 것을 이해한 천일영이 검을 들어 올렸다.
“다른 사람의 생명으로 자신의 삶을 연장하고 있는 것인가. 여기에서 너를 죽여 그 개 같은 짓을 끊어 내도록 하지. 전력으로 간다.”
“실망하게 하지 마라, 천일영.”
쿠웅!
폭발하듯 거대한 기운이 천일영의 몸에서 터져 나오고, 주위를 감싸는 하은월의 어둠을 몰아내기 위한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쳤다.
바람은 나무를 뿌리째 뽑아 날리며 어둠과 부딪혔다.
어둠은 하은월이 사용하는 공간 장악이었고, 조금씩 공간을 좁혀 오며 다가왔다.
천일영은 물론 소초련과 도현이 어둠에 닿는 순간 영혼이 빨려서 죽을 터.
수백 개의 회오리바람으로 어둠을 조금씩 밀어내자.
슈아아아악.
하은월의 몸에서는 천일영보다 몇 배가 강한 어둠과 힘이 흘러나왔다.
씨익.
상대가 절망할 것을 떠올린 하은월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집어삼킨다.
그대로 혼을 빨아낸다.
하지만 그 전에 천일영의 목을 베어 버리고 싶었던 하은월이 다시금 어용지천참대검으로 무형의 자세를 취했다.
콰아앙!
하은월이 디디는 땅이 움푹 파이고 신형이 튀어 나갔다.
카앙! 카앙. 까아아앙. 콰아아아아앙!
수백 번의 검이 부딪혔다.
쿠와와와와왕!
수천 번의 불꽃이 튀겼다.
초식에 얽매이지 않고 두 사람은 무형의 무공을 나눴다.
순간마다 새로운 초식이 만들어지는가 하면 어느새 익숙한 무공의 이름이 무(無)가 되어 가는 공간을 채웠다.
피비비빗. 피빗. 피비비빗!
하지만 상처는 오직 천일영의 몸에서만 생겼다.
경지의 차이 때문이다.
하은월이 천일영의 몸을 집요하게 파고들고, 천일영은 하은월의 검날을 흘리고 넘기며 기회를 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주변은 어둠과 회오리바람이 서로를 집어삼키기 위해서 서로 엉켜 들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검과 기운으로 따로 싸웠다.
콰아아아앙!
촤아아아악!
수십 개의 상처가 생기던 천일영의 몸에 사선으로 기다란 검 자국이 생겼다.
살이 벌어지고 피가 뿜어져 나오자, 천일영은 한 걸음을 뒤로 물렀다.
스으으윽.
몸에서 흐르는 피가 허공으로 뜨더니 이내 어용지천참대검으로 빨려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하은월이 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피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뭐 탈마 정도의 경지가 이 정도겠지. 슬슬 끝내 볼까. 아직 숨겨 둔 한 수가 있으면 빨리 꺼내야 할 것이다. 다음 초식에서 네놈은 죽을 테니까.”
“그렇군. 네 실력은 잘 봤다. 역시 바람은 하수가 쓰는 것이라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네놈에게 쓰는 것은 안 될 일이었나 보군.”
손바닥으로 몸에서 흐르는 피를 대충 문질러 지워 낸 후.
천일영은 설화여월과 화하여월의 손잡이를 꽉 쥐며 기운을 터트렸다.
쿠우우웅.
끌어올리는 기운에 색이 있다면 불길한 붉은색일 거라는 생각이 싸움을 지켜보는 도현과 소초련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만큼이나 하은월이 뿜어내는 어둠에 뒤지지 않을 만큼 불길한 기운이었다.
스으으으…….
하은월의 어둠을 찢으려 했던 회오리바람이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번쩍!
콰르르르릉!
회오리바람이 있던 자리에 번개가 내리쳤다.
번개는 한 번만 빛을 뿜은 것이 아니라 이후로도 계속 내리쳤다.
한 번 번쩍일 때마다 백 개의 번개.
“백화뇌우(白化雷雨)다.”
“기묘한 무공을 쓰는군. 별건 아니지만.”
신경 쓸 것도 못 된다는 듯이 하은월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조금씩 눈에 보였다.
회오리바람이었을 때는 어둠이 밀리지 않았지만.
지금은 조금씩 어둠이 찢겨 나가는 것이.
어용지천참대검을 꽉 쥔 목소리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탈마로는 대단한 무공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라면 네놈은 죽겠군. 피를 흘리고 있는 네놈의 꼴이 재미있기는 하지만, 빨리 끝내도록 하지.”
“너야말로 제 실력을 보여라.”
설화여월이 목으로.
화하여월이 냉혹한 웃음을 짓는 하은월의 얼굴로 날아갔다.
분명 아까보다 훨씬 빨라진 검속.
‘역시 네놈이 문제다, 천일영!’
하은월의 이가 악다물어졌다.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다.
휘이이잉. 콰아아아앙!
하은월의 검이 천일영의 설화여월을 내리쳤다.
두껍게 제련된 만년한철 덕에 검이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대신 천일영의 팔이 꺾여 들어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콰아아앙!
하은월이 가진 힘 대부분을 가득 담은 장권을 천일영의 가슴으로 처박자, 신형이 땅에 긴 자국을 남기며 밀려났다.
“크윽!”
“더는 보일 것이 없는 모양이군. 탈마라는 한심한 경지의 한계다.”
그때였다.
하은월은 어용지천참대검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검면에 섬뜩하게 남은 하얀색의 흔적.
하은월은 자신이 천일영의 가슴에 장권을 때리는 사이, 몇 줄기의 번개가 어용지천참대검에 내리꽂힌 자국을 발견했다.
힘에서 밀린 천일영이, 피와 기운을 빨아들여 점점 검게 변해 가는 검을 부러트리기 위해서 어둠을 찢고 있던 번개 중 일부를 끌어온 것이었다.
‘검 일부가 색이 변하고 어둠이 벗겨져 나갔군. 당하는 순간까지 이런 짓을 할 생각을 했나.’
서늘한 느낌이 심장이 있던 곳을 관통하듯 스쳐 지나갔다.
수만 명분의 영혼이 일렁거리는 느낌과 함께 가슴을 쥐어짜는 불쾌감을 느끼게 했다.
‘이 망할 새끼가!’
후우우우웅.
하은월은 천일영의 목을 노리며 검을 날렸다.
카앙! 카아아앙. 카아아아앙.
집요하게 따라가는 검로가 점차 천일영의 온몸에 상처를 새겨 넣었다.
수십 개의 상처가 생기며 피가 튀었다.
간신히 급소만은 피하며 버티는 천일영은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크윽! 분명 하은월은 심장이 없다고 했는데도 이 정도인가. 생사경의 경지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상상을 한참이나 뛰어넘는군.’
쿠웅. 쿠웅. 쿠우우웅.
어용지천참대검이 한 번씩 내리꽂힐 때마다 다리가 꺾이고 발아래 땅이 꺼져 들었다.
설화여월과 화하여월로 어용지천참대검을 막을 때마다 팔이 꺾였다.
퍼어어어억!
또한 어김없이 날아드는 장권에 온몸이 파여 들어갔다.
팔은 이미 덜렁거리기 시작한 지 오래고, 다리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내공은 이미 어둠을 찢느라 계속 백화뇌우를 내리꽂고 있어서 더는 여유가 없었다.
촤아아아악!
설화여월을 들고 있는 오른팔이 깊숙이 베여 나갔다.
후우우웅. 콰직!
왼쪽 다리도 허벅지부터 종아리까지 살점이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비명이 터졌다.
“크윽!”
“너와 내 무공의 높낮이가 이토록 선명하게 차이가 나는데도 아직까지 버티고 있다는 것만큼은 칭찬해 주마.”
후우우웅. 카앙!
지친 기색조차 없는 하은월이 더욱 강하게 공격을 해 왔다.
하은월은 자신의 힘을 모두 보인 것이 아니라는 듯 땀 한 방울조차 흘리고 있지 않았다.
생사경과 탈마의 경지는 메울 수 없는 깊고 넓은 강만큼이나 차이가 있었다.
카앙!
천일영이 두 자루의 검으로 이어지는 하은월의 공격을 겨우 막은 순간.
콰아아아앙! 콰직!
하은월의 장권이 천일영의 심장으로 내리꽂혔다.
뚜두두두둑!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하은월이 펼친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울렸다.
“쿨럭! 우웩!”
핏덩어리가 천일영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연이어 하은월의 검격이 몰아쳐 들어왔다.
보이지도 않을 만큼이나 빠른 검속이지만, 천일영은 감각에 몸을 맡기고 막아 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푸우우우우욱!
어용지천참대검이 천일영의 폐를 꿰뚫었다.
“크으으으윽!”
“여기까지다, 천일영!”
깊숙이 박힌 검이 좌우로 움직이며 폐부를 도려냈다.
천일영은 급히 설화여월과 화하여월을 겹쳐서 하은월의 팔로 날렸다.
콰지지직!
그러나 하은월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검을 폐부에서 빼내고 여유 있게 한 걸음을 뒤로 무르며 장권을 얼굴에 처박았다.
콰아아아앙! 콰직!
정면으로 맞은 장권에 천일영의 동공이 찢겨 나가고 얼굴의 일부가 함몰됐다.
“커헉. 쿨럭. 쿨럭.”
천일영은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하고 쓰러졌다.
아직은 남은 기운을 쥐어짜서 백화뇌우를 뿌리고 있고, 힘겹게 떨리는 팔로 땅을 짚고 있기는 했어도 명백한 힘의 차이로 무너져 내렸다.
천일영은 토혈을 하며 도현과 소초련을 바라봤다.
아주 잠시의 시간이기는 했지만.
소초련과 도현은 무너진 천마의 모습에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찢긴 동공 안에 보이는 혈광을 보면서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 눈빛이 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살기가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천일영이 입 안에 가득 고인 피를 뱉었다.
“퉤. 수하들이 보는 앞에서 추태를 보인 모양이군.”
“그것이 네 본모습이다. 네 무공은 딱 바닥을 기는 것에 어울리는 정도일 뿐이지!”
하은월이 틈을 주지 않고 천일영에게 검을 날렸다.
카아아앙!
급히 몸을 일으키며 검을 막은 천일영의 눈동자를 감싸던 불길한 붉은 테두리가 돌아가기 시작하고, 조금 전보다 훨씬 빨라진 신형은 하은월의 검을 막아 냈다.
그리고 그 순간.
천일영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만뇌멸화(萬雷滅花).”
순간 하늘에서 만개의 번개가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