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소림사의 깊숙한 곳에 숨겨진 듯 자리를 차지한 방장실(方丈室).
태사명진은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망자와 얼굴을 마주했다.
“모든 사람을 물렀네. 이 방에는 우리뿐이니 어찌 된 사정인지 말을 해 주게나.”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누군가는 태사명진께서 무림맹의 맹주가 되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것일 뿐이지.”
“하고 싶지도 않은 무림맹의 맹주 자리에 목줄이 덜렁거리게 된 거였나. 아까 나를 향해서 달려오던 무인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들은 분명 무림 삼 대 세력이 가진 기와 달랐네.”
“혈천회.”
천일영은 모든 일을 태사명진에게 말했다.
곁에 있는 남궁무애가 지천번회의 주인이라는 것만 빼고.
반 시진에 걸친 설명이 끝나자 태사명진이 한숨을 내리쉬었다.
“천마가 살아 있었다니.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술 생각이 간절해지는구먼. 그나저나 왜 나를 구한 것인가. 모른 척하고 있었으면 자네의 정체를 드러낼 일도 없고, 사천당문의 당강용이 맹주가 되는 것이 가장 상책이 되었을 텐데.”
“첫 번째는 아직 혼란이 계속되어야 한다. 모세룡이 혈천회와 손을 잡은 상태가 아닌가. 그를 제거하기는 할 것이지만, 그렇게 되면 또 다른 사람을 꼬여서 맹주로 만들겠지. 소림사의 방장과 당강용의 양강 구도가 자리를 잡으면 혈천회에서 더는 끼어들지 못한다.”
“일리 있는 말이구먼.”
“두 번째는 당강용이 맹주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가 맹주가 되는 것은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의 최후책이다.”
“그것은 당강용의 뜻인가?”
“그는 원래부터 맹주를 선출하는 것 자체에 관심이 없던 사람이다. 솔직한 속내를 이야기하자면 사천당문이 무림 문파에서 해독 비용을 받는 것으로 빈민 구제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맹주가 되면 수입이 줄어들어 더는 빈민 구제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원하지 않는 것이다.”
“푸하하하핫. 이게 뭔 지랄인가. 악독하다는 천마신교의 천마가 빈민을 걱정하고, 정파라는 모세룡은 악독한 무리와 손을 잡고 맹주가 되려 한다니!”
호쾌한 웃음소리가 방장실을 울렸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느끼고 있었다.
태사명진의 웃음소리에 숨겨진 허망함을.
“헌데, 나에게 이 이야기를 모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정파의 사람. 게다가 맹주의 자리에 가까운 사람일세. 내가 맹주가 되면 자네를 죽이려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하는가. 맹주의 힘이란 그 정도는 되는 것을!”
“그것이 세 번째 이유다. 너를 구한 것은 유화의 뜻이기도 했다.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너를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고 한 것이 유화의 말이었고, 너는 믿어도 된다고 유화가 강하게 밀어붙였다. 나는 유화를 절대적으로 믿고, 또한 그 말에는 나도 동의하는 바다.”
“허허……. 저 망할 녀석이 나를 걱정하고 믿는다니…….”
“이야기는 이제 끝내지. 내가 모든 것을 말한 이유는 한 명이라도 같은 편이 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무림맹이 방해만 하지 않아 줘도 큰 도움이 된다.”
“악독한 무리가 세상을 삼키려는데 무림맹은 이득만 챙기고, 심지어 남궁천이 혈천회의 앞잡이였다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구먼. 잘 알겠네. 이 일은 나만 알고 있겠네.”
“곧 다시 만나게 될 거다. 그럼.”
천일영과 남궁무애, 그리고 백유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사명진은 그들을 소림사의 입구까지 직접 배웅했다.
세 사람의 신형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제자리에 서 있던 태사명진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천마가 세상을 구하려고 한다니. 아무리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 해도 악이 선이 되고, 선은 악이 되는 데 망설임이 없는가. 게다가 사악한 사혈련이라는 백유화가 나를 걱정해서 뛰어오다니. 정파라는 것이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구나. 아미타불.”
술맛을 알게 된 이래, 지금처럼 술이 마시고 싶은 날이 있었던가.
태사명진은 정말로 미치도록 한 잔 마시고 싶었다
* * *
보국장군 주장학과 부상단주 양호제, 그리고 노병천은 천마신교에 여전히 있었다.
사 일 안에 화약을 거래할 것인지 알려 달라고 말했을 때는 불과 삼 일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답변이 왔다.
‘거래한다고 했지. 그것도 많은 양을.’
하지만 말만 있었을 뿐, 계약서를 쓰지 않은 채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는 신세였다.
물론 대우는 귀빈급으로 해 주고 있었다.
최고급의 식사는 물론, 술도 귀한 것으로 내어 줬고, 밤마다 기루의 미인들을 불러 붙여 줬다.
처음에는 제법 기분 좋게 즐겼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실상 천마신교 안에 갇혀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노병천이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 때문에 따끔거리는 엉덩이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무래도 시간 끌기에 걸려든 것 같습니다.”
“화약 거래에 대한 사실 여부를 알아볼 만큼의 시간은 지났으니 노 대인의 말이 맞겠지요.”
“문제는 여기가 천마신교라는 것이지요. 다른 방책이 없이 끌려가게 생겼습니다.”
원래 시간 끌기는 상단을 상대할 때 자주 써먹는 방법이다.
상대를 지치게 만들어서 원하는 것을 빼앗는 방법으로, 거대한 금액이 오갈 때에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노병천과 주장학, 그리고 양호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혈천회의 대업 날짜가 정해져 있는 이상, 상대가 먼저 다가올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곳이 바늘방석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혈천회가 꼬리를 잡지 못하도록 대업 직전에 화약을 거래하는 영악한 수를 둘까 하는 것 때문이었다.
세 명의 사람이 답답함에 온몸을 비틀고 있을 때.
똑. 똑.
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오랜만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단을 담당하는 가희승입니다. 들어가도 될는지요.”
세 사람은 즉시 눈빛을 교환했다.
‘왔다! 걸려들었구나.’
노병천이 대답했다.
“들어오시오.”
“허허, 오늘 천마신교 본문의 높은 분께서 세 분을 뵈러 나오셨습니다.”
“그렇소? 나는 일 년 후쯤에야 만날 줄 알았는데.”
“저희 천마신교는 정파 놈들처럼 치사하게 시간 끌기 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가희승이 의미심장한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세 사람을 이끌었다.
그런데 가는 길이 이상했다.
처음 왔을 때부터 계속 이용해 오던 방이 아니라 전각의 가장 위층으로 이동했다.
뭔가 이상한데?
‘설마 이대로 끌고 가서 반역자라고 황실에 넘기려고? 아니지. 그런 짓을 해 봤자 이득 될 게 없는데.’
가희승이 이끌고 간 곳은 문조차 거대한 별실.
그곳의 문이 열리자.
“어서 오시오.”
“……!”
거대한 풍채의 남자가 위압감을 풍기며 앉아 있었다.
그의 주위에서 아름다운 여인 다섯이 시중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보통의 사람이 아닌 듯했다.
마왕 중의 한 명인가?
‘설마 그런 거물이 나오려고.’
노병천이 고개를 가로젓는 사이 거대한 풍채의 남자가 말했다.
“앉으시오.”
“그리하겠습니다.”
“오래 기다리게 했다. 이제 거래를 시작할까 하는데.”
“알겠습니다. 원하시는 조건을 들어 보도록 하지요.”
“화약을 거래할 수 있다고 들었다. 일단 가격부터 들어 보지.”
“저희도 위험을 무릅쓰고 가져오는 것이니만큼 한 관에 금화 열다섯 냥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싸군.”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무래도 내 소개가 늦은 모양이군. 내 이름은 패범휘. 천마신교의 천마다.”
“……!”
거대한 기운이 패범휘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무려 천마나 되는 인물이 직접 나왔다는 것은 이 거래가 천마신교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주장학과 양호제는 패범휘의 기운에 눌려서 머리가 마비된 듯 굳었다.
탈마가 뿜어내는 기운은 초절정 고수인 주장학조차 움직이지 못할 만큼 몸을 옥죄었다.
하지만 노병천만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자의 위압감에 비하면 애들 장난도 안 되는군.’
천일영과 함께 있으면서 하도 단련이 된 탓인지 노병천은 심지어 웃음까지 지으며 말했다.
“얼마를 원하십니까.”
“한 관에 금화 일곱 냥. 그 이상은 못 준다.”
“그렇다면 거래는 끝이군요.”
노병천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주장학과 양호제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엉거주춤 일어섰다.
“천마신교를 나가겠습니다. 정문의 통행을 허가해 주십시오.”
“통행의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면? 주장학은 황실에 쫓기는 범죄자지. 남은 둘도 죽여 버린다 한들 아무도 모른다. 여기는 천마신교의 안이니까. 그래도 한 관에 금화 일곱 냥에 거래하지 않을 것이냐.”
“죽을 각오 정도는 하고 왔습니다. 천마신교입니다. 이곳에 올 때 아무 생각 없이 왔겠습니까? 죽이려면 죽이시고 문을 열 것이면 문을 열어 주십시오. 거래할 생각이시면 제대로 된 금액을 말씀하시고요.”
아니, 죽을 각오라니? 그런 거 안 했는데?
주장학과 양호제가 식은땀을 흘리며 노병천을 바라봤다.
알고 보니 미친놈이 아닌가.
그때였다.
“으하하하하핫. 이것 참 걸물이 왔군. 압력에 굴하는 놈이라면 처음부터 거래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 놈이라면 무림맹이나 사혈련에서 협박하면 금방 넘어갈 것이 아닌가!”
“시험입니까.”
“화약의 거래다. 그냥 덥석 믿는 게 오히려 말이 안 되지 않나. 뭐 그래도 비싼 건 비싼 거지만.”
“가격 조정에 들어가 보지요.”
노병천이 털썩 자리에 앉았다.
“양은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이천 관.”
“엄청난 양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를 거래할 것이라면 한 관에 금화 열두 냥까지는 맞출 수 있을 것입니다.”
“금화 열 냥이다. 그리 금액을 정해도 금화 이만 냥의 거래다.”
노병천은 잠시 고민하는 척했다.
황실에 이야기만 하면 바로 오는 화약이지만 그럴싸해 보일 필요가 있었다.
“좋습니다. 화약 한 관에 열 냥. 이천 관 거래하지요.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양은 저희가 한꺼번에 구하지 못합니다. 황실의 화약 창고에서 그만한 양을 빼돌리면 금방 탄로가 날 것이니 여러 지역에서 조금씩 빼 와야 합니다. 그러니 기간이 넉 달은 걸리겠습니다.”
“두 달.”
“두 달이라면 웃돈을 줘야 관리들도 움직일 테니 처음에 말씀드린 금액으로 한 관에 열두 냥입니다.”
“한 관에 열한 냥으로 하지.”
“허허, 천마님의 수완이 보통이 아니십니다. 이래서야 꼼짝없이 열한 냥에 거래해야겠군요.”
“계약 성립이다. 술과 여자를 준비했으니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천마신교를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통행패를 발급해 주지. 선금은 금화 오천 냥. 이것으로 되겠는가.”
“천마님의 깊은 배려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패범휘가 자신의 시중을 들고 있는 여인 다섯에게 눈짓했다.
오늘은 이 세 사람을 모시라는 의미다.
노병천과 주장학, 그리고 양호제는 밖으로 나오면서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딱 좋을 시간에 맞춰서 거래가 성사되었다. 거래 내용도 의심받을 만한 여지는 없고.’
급하게 움직였다는 것은, 혈천회가 예정된 날짜에 대업을 시작하겠다고 말한 것과 다름없다.
이대로 그들의 꼬리를 잡을 방도가 마련되자, 세 명은 임무를 완수했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는 가희승의 안내로 같은 층에 있는 화려한 연회실로 들어서서 아름다운 여인들과 술만 마시면 될 일.
한편.
혼자 남은 패범휘도 창밖을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혈천회가 급하기는 했군. 화약 한 관에 금화 이십 냥이라는 말을 믿고 그대로 돈을 보내다니. 열다섯 냥까지 깎았다고 해서 혈천회를 배려하는 척하고, 내가 네 냥씩 남기면.’
금화 팔천 냥이 떨어진다.
만약 하은월이 혼수상태가 아니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일.
노송하는 대업을 앞두고 천자가 쓰러졌기에 그냥 달라는 대로 준 것이었다.
일단 선금으로 준 돈은 금화로 일만 냥.
천자의 몸을 고치는 것만으로도 온 힘을 다하고 있는 그녀였다.
화약의 금액 따위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하은월이 쓰러진 것을 모르는 패범휘는 마치 자신이 잘났다는 듯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천마의 자리를 때려치우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천일영은 제정신이 아니다. 혈천회의 천자 하은월이 그를 처리한다고 했으니 지금쯤 명부시왕(冥府十王)과 만나고 있겠군.”
아마 도현과 명천마왕 소초련을 잡는 것도 시간문제일 터.
천일영과 하은월이 싸우는 동안 도망친 듯했고, 어쩌다 귀천명까지 흘러들어 온 모양이기는 한데.
‘어째서 연임우와 자소필이 불탄 시체로 발견된 것일까.’
자연스럽게 패범휘의 머릿속에 서하린이 떠올랐다.
독천마왕의 독이라면 초절정 고수인 연임우와 자소필의 움직임을 막았을 터다.
거기에 더해, 아무리 심하게 다쳤다 해도 도현과 소초련이라면 움직이지 못하는 연임우와 자소필을 베는 것은 쉬운 일.
‘그렇군. 다음은 서하린인가. 그년을 찾으면 도현과 소초련도 같이 찾게 되겠구나. 아직은 우리가 의심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 다음 전서구가 오면 흑뇌마왕 마염지의 말대로 추적향을 발라서 보내면 되겠군.’
원래대로라면 패범휘 자신이 천마의 자리에 올랐기에 서하린은 축하 인사를 하기 위해서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가장 최우선으로 전 천마를 찾으라고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이참에 전 천마의 싹을 모조리 잘라야겠군. 무명암살대의 천 명은 탈제명부음으로 영혼을 먹어 치울까.’
패범휘는 서하린을 먼저 찾아서 죽이고, 다음으로 무명암살대를 먹어 치우기로 마음먹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맛있는 식사는 언제나 즐거운 법이고, 서늘한 혈향은 감칠맛을 돌게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