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천일영의 머릿속에서 그와 과거에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일곱 명의 친구가 있었고, 그중에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죽었다고 했었던가. 그리고 남은 한 명의 친구는 몸이 아파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했었고.’
과거에 만났을 때 그의 몸에서 풍기던 기묘한 느낌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는 팔선의 신분으로 하은월이 지천번회를 앞세워 공격했을 때 지상으로 내려왔고, 무진과 그를 제외한 모든 팔선이 죽음을 맞이했다.
무진과 함께 금제에 걸린 그는 선계로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무진보다 금제가 약하게 걸린 것일까.
강한 금제로 인해서 쇠약해지고 빠르게 생명을 잃어 가는 무진을 살리기 위해서 그는 객잔을 팔았다.
그랬다.
또 한 명의 신선은 바로 천일영에게 항주의 객잔과 산을 판 사람.
바로 전 객잔 주인이었다.
“설마! 어르신께서 또 한 명의 신선이셨을 줄이야. 그때 뵈었을 때도 무공이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금제가 걸렸는데도 그 정도의 경지셨다는 말입니까.”
“허허, 나야말로 깜짝 놀랐네. 공자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무진이 말한 천마가 바로 자네라는 게 아닌가!”
신기한 인연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처음부터 둘을 만나게 하려고 인연을 만든 것 같기도 했다.
“천마이시니 이름은 천일영이겠구먼. 나는 팔선 중의 한 명인 현기천이라고 한다네.”
“다시 한번 인사 올립니다, 어르신.”
서로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누던 두 사람이 웃음을 짓는 동안에도 아직 술을 마시고 있던 무진이 말했다.
“기천아, 천마께서 네 금제를 풀어 준단다.”
“금제를 말인가? 그리 쉽게 풀 수 있는 게 아닐 터인데.”
“쉽게 풀 수 있는 게 아니니 당연히 조건이 있지.”
“흠, 그도 그렇구먼. 맨입으로 금제를 풀어 달라고 하기에는 미안한 일이지.”
무진이 은근히 분위기를 몰아가자, 현기천도 알겠다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천마님께서 이 노부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혈천회의 하은월을 상대할 만큼의 강함이 필요합니다.”
“허허, 이미 무공이 천하에서 제일이라 하는 천마께서 더 높은 곳을 바라는가. 허나 하은월은 인간이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니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을. 이거 생각보다 어려운 조건을 내걸었구먼.”
현기천의 얼굴에 수십 개의 주름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사실은 무진과 자신이 하은월을 상대하는 것이 마땅하다.
신선으로서의 꼭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영약으로 영기를 섭취하지도 못했고, 무엇보다 금제의 영향으로 과거의 힘에 일 할 정도밖에 못 미친다. 무진이 쉴 새 없이 고기를 먹어 대는 것도 빠르게 힘을 되찾기 위해서지.’
어찌해야 할까.
선택해야 했다.
‘무진의 말로는 천마가 탈마라 했던가. 그가 과연 한 단계 더 높은 새로운 경지를 이룰 수 있을까. 만약에 그렇지 못한다면…….’
어찌할 수 없이 세상이 뒤집히고 수십만 명이 혈천회의 손에 죽는다.
현기천이 고민하는 이유는 천마를 가르칠 시간에 금제가 풀린 몸으로 힘을 되찾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신선이었을 때의 힘을 전부 되찾지는 못한다 해도, 경지의 벽을 넘지 못한 천마보다는 강해질지도 모른다.
이것은 수많은 목숨이 걸린 일이니, 만큼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결론이 난 듯 그의 입에서 신중한 한마디가 나왔다.
“무공의 상승이 가능할지 아닐지를 딱 부러지게 답하지 못하겠군.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애매한 답밖에는 못 하겠네. 그런데도 천마께서는 이 노부의 금제를 풀어 줄 텐가.”
“제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신다 해도 처음부터 금제는 풀어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허허, 자네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네. 천마께서 무공의 상승을 이루지 못하면 혈천회를 막을 모든 수단이 없어진다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모든 것을 걸어 볼 생각입니다.”
“흐음, 어쩔 수 없구먼. 무진과 내 금제를 풀어 주니 거절할 방도가 없는 것인가. 나도 자네에게 모든 것을 걸어 보겠네.”
금제를 풀어 줘서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서로가 목숨을 걸고 내린 결정이다.
“헌데 나는 무공을 가르칠 때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네. 죽을 때까지 몰아붙이는데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하하하. 어디에서 많이 듣던 말입니다.”
남궁무애가 별유천지의 식구들을 굴리는 장면이, 문득 자신의 모습에 겹쳐 보였다.
그때 무진이 현기천의 말을 듣고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천마는 이번에 혈천회의 천자와 싸우면서, 자기 몸에 번개를 들이붓고 양과 음의 기운을 강제로 섞으며 상단전을 열어젖혔다고 한다. 천마보다 네가 더 빨리 지쳐서 떨어져 나갈 테니 그런 소리는 하지 말아라.”
“으응? 번개? 음과 양을 섞어? 상단전을 강제로 열고? 그게 사실인가?”
“상단전은 강제로 열었던 만큼 다시 닫혔고, 혈도와 기도도 전부 다 타 버렸다고 하니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그나마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산송장이 될 뻔한 사람이다.”
무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현기천이 멍한 표정으로 천일영을 바라봤다.
머릿속에서 모든 상황이 그려진 이후에도 입술이 달싹이기를 한참.
기어이 그의 입이 열렸다.
“이런 미친놈!”
경악에 찬 외마디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 * *
이틀 동안 백유화와 금제를 풀기 위한 예행 연습을 했었던 천일영이 현기천의 가슴에 올린 손을 거두었다.
금제가 풀렸다.
무진보다 금제가 약하게 걸려 있던 탓에 생각보다 쉽게 몸을 고칠 수 있었다.
현기천은 자신의 몸에 걸려 있던 금제가 풀어지는 것과 동시에 힘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아직은 오십 년 전의 일 할 정도밖에 안 되는 힘이기는 하지만 이게 어디인가.’
금제를 풀지 못했다면 무진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고, 현기천 그 자신은 앞으로 이삼십 년 안에 소멸해서 사라질 운명이었다.
현기천은 천일영과 백유화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특히 작은 체구의 여인은 여러 가지로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 요량이었던 현기천은 백유화의 얼굴을 보고는 이내 들어 올렸던 손을 내렸다.
죽을상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당장 죽을 것 같았다.
백유화는 수련을 하다가 끌려와서 이틀 동안 환단을 만들고, 거기에 더해서 금제까지 풀고 나니 바닥에 주저앉을 것 같았다.
그나마 요 이틀 동안 금제를 푸는 일에만 몰두해서 그나마 수련보다 몸은 편했는데.
‘대신 잠을 하나도 못 잤네. 거기에 금제를 푸는 일은 정확한 시간과 섬세한 침술이 필요해서 신경을 곤두세웠더니 너무 피곤해.’
눈 밑에 검은 그림자가 짙다 못해 턱까지 내려올 것 같다.
오랜 시간 동안 긴장을 해 온 탓인지 입 안도 바짝 말랐다.
그때.
드르르륵.
의실이 문이 열렸다.
“금제는 다 푼 거지?”
“끄악! 남가은!”
“할 일 다 했으니까 이제 수련해야지.”
“잠깐! 나 하나도 못 쉬었어. 제발 반 시진만이라도 편하게 다리 좀 뻗게 해 줘!”
“농담도 잘하네. 그거 새로 만든 우스갯소리?”
남궁무애가 백유화의 뒷덜미를 잡아 올렸다.
“이것 좀 다시 가져갈게.”
“유화가 많이 지쳤는데 조금만이라도 쉬게 해 주는 것은 어떠하냐.”
“공자는 너무 물러. 사람들에게 공자가 시킨 수련의 내용을 들어 봤는데 진짜 착하게 굴렸더라.”
“어…… 그런가?”
아니? 나도 죽기 직전까지 굴렸는데.
‘도대체 얼마나 더 굴리고 있는 거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는 천일영을 향해 남궁무애는 눈이 휘도록 웃음을 지었다.
사악한 마음은 단 하나도 없이 정말로 순수하게 수련을 시키는 사람의 눈이었다.
“걱정하지 마. 죽으면 다시 살릴게.”
“진짜 죽일 생각이었구나.”
“응.”
살벌한 이야기를 해맑게 대답으로 내놓고 백유화를 끌고 나가던 남궁무애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녀는 현기천을 보고는 고개를 잠깐 까딱 숙였다.
“오랜만에 뵙네요. 오십 년 만인가요?”
“나…… 남궁무애? 정말로 남궁무애인가? 네가 어찌 여기에!”
“지천번회는 폐업했거든요. 지금은 공자 등에 달라붙어서 뜯어먹는 중이고요. 밥값 하느라 수련을 시키는 중이니까 나중에 술이나 한잔해요.”
“허?!”
낙담한 끝에 눈물을 줄줄 흘리는 백유화를 들고 남궁무애가 나간 이후 현기천이 당황스러운 눈으로 천일영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어찌하여 남궁무애가?”
“이야기가 꽤 깁니다.”
천일영은 남궁무애가 자신의 몸을 고친 경위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을 설명했다.
반 시진에 걸쳐 이야기를 듣고 난 현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략 어찌 된 일인지 알겠네. 저 남궁무애가 공자와 함께 있는 것을 선택하다니, 사람 일은 참으로 알 수가 없구먼. 나는 처음에 남궁무애인지 알아보지도 못했다네.”
“못 알아보다니요? 오십 년 전의 모습은 지금과 다를 게 없을 텐데 말입니다.”
“표정이 완전히 바뀌었네. 그때의 남궁무애는 말을 건넬 수도 없을 만큼이나 날이 서 있었고 온몸에서는 흉악한 살기가 흘렀지. 생사경의 경지에 오른 팔선도 현경인 남궁무애를 보고 한 걸음을 뒤로 물렀을 정도라네.”
“저 남궁무애가 말입니까?”
현기천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는 듯, 잠시 멈춘 그의 입술이 다시 열리기 시작한 것은 반 각이나 지난 후다.
“몸 전체가 하나의 검과 같았지. 텅 빈 동공에서 흐르는 악의에 가득 찬 눈빛은 그녀가 얼마나 많이 망가져 있는지 알게 해 주었네. 말 그대로 악귀 그 자체였지. 그랬던 남궁무애가 저렇게 웃기도 하고 농담까지 한다니, 상상에서조차 그려 본 적이 없는 모습일세.”
“그런가요. 다행입니다. 남궁무애가 웃을 수 있어서.”
진정으로 남궁무애가 행복한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표정을 짓자, 현기천이 못마땅하다는 듯 천일영을 바라봤다.
“진짜로 자네는 너무 무르구먼. 만약에 남궁무애가 나쁜 마음을 먹고 자네 곁에 있는 것이라면 어찌할 텐가.”
“그렇지는 않을 거로 생각합니다. 이상하게도 남궁무애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익숙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남궁무애를 철석같이 믿는구먼.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무엇이 말입니까?”
의심을 지우지 못하는 눈빛으로 현기천이 말했다.
“남궁무애가 현경에 오른 지 백 년이 넘은 것으로 알고 있네. 그런데 생사경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럴…… 수도 있군요. 무공의 천재라고 불렸고 무림의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현경에 오른 사람이기는 한데…….”
흐려지는 천일영의 말끝이 맺음을 짓지 못하고 입가를 맴돌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천일영 그 자신도 탈마의 경지에 오른 지 십 년이 안 되었는데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서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남궁무애에게는 그런 기색도, 또한 의지도 엿볼 수 없었다.
현기천은 무엇인가를 알아차린 듯 기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내 생각에는 생사경에 오를 수 있는데 일부러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네. 아까 잠시 봤을 때만 해도 생사경과 다름없는 경지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네.”
“우화등선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군요. 저 남궁무애라면 그럴 법도 합니다.”
“글쎄, 그건 아무도 모르지. 본인만 아는 일일 테니.”
현기천은 과거 심하게 부딪혔고, 팔선이 아닌 신선들이 금제의 함정에 빠져 남궁무애의 손에 무수히 죽은 것을 기억하고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이내 현기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궁무애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자네가 먼저일세. 눈앞에 있는 경지의 벽을 무너트리려면 해야 할 일이 많네.”
“저도 생각해 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들을 필요 없네.”
천일영이 생각해 둔 것을 들어 보지도 않고 현기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것은 일단 제쳐 두고 탈마(脫魔)라는 것부터 시작하세. 탈마라는 것은 말 그대로 벗을 탈(脫)에 마귀 마(魔)를 쓰네. 마공이란 것은 귀신같이 강한 힘이 마치 마귀처럼 보여서 붙여진 이름이지. 그러나 마공은 사람을 잡아먹는 힘이기도 하네. 빠르게 경지에 오를 수는 있으나, 최후에는 사용자의 목숨까지 잡아먹어 버리고 말지. 하지만 탈마의 경지에 오르면 모든 마공에서 벗어나게 되네.”
“어르신, 그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설마?”
“머리 좋은 천마라면 이미 눈치챘겠지. 마공을 벗어난 탈마의 경지에 들어섰기에 자네는 텅 빈 그릇과 같은 상태가 된 거로 생각할 수 있네. 그 말은 다른 무공을 덧씌워서 배워도 된다는 것이지. 그래서 생각했는데 내 자네에게 신선의 무공을 가르치려 하네.”
“어르신, 그것은 선계에서 허락하지 않을 일입니다.”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네. 이미 무공의 모든 기초를 전부 가지고 있는 자네라면 혈천회가 대업을 이루기 전까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네. 나는 그것에 모든 것을 전부 걸었네.”
“저도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깨가 무겁습니다.”
“목숨의 무게를 아는 자네라면 괜찮을 거네. 게다가 무림 역사상 첫 번째로 인간이 신선의 무공을 배우게 되는 걸세. 그것도 시시한 잡스러운 신선이 아니라 팔선 중에 서열 첫 번째인 내가 가르치는 거네.”
“……!”
천일영의 눈동자가 떨렸다.
탈마에서 더 높은 경지로 들어서는 길을 찾는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완전히 새로운 길로 들어서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