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칠 일 후.
살문도(殺刎島).
이곳에 갇힌 지도 벌써 이틀째였다.
황태자는 죽도록 구르고 굴렀으며 굴렀다.
하루에 잠을 두 시진 재우는 것을 제외하면 온종일 내공심법의 수련과 외공을 위한 체력 단련을 했다.
검술과 보법, 그리고 신법의 수련도 무자비할 정도로 했다.
무공을 가르쳐 주는 여인은 예쁘고 매력적이기는 했지만, 악귀이자 귀신 그 자체였다.
사람도 아니었다.
그뿐인가.
밥도 일각 안에 다 먹어야 했다.
정신없이 입에 퍼 넣어야 했다.
그나마 밥이 맛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 뿐.
하지만 이런 고생의 나날도 이제 곧 끝이었다.
며칠 전에 황제 폐하에게 편지를 보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것이었다.
아마도 오늘쯤 답장이 올 터였다.
끼이이익!
때마침 허공에서 참매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황태자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남궁무애가 고개를 끄덕이자 급히 편지를 받았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금박이 입혀진 용문장이었다.
아바마마가 보내신 것이 분명하다.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뜯어서 읽었다.
[황태자이자 내 아들은 보아라. 심히 고생이 많겠구나. 그러나 공자가 편지를 보냈기를, 네가 목숨이 위험한 상태이니 무공을 가르치며 보호한다고 했다. 내 친히 허락했으니, 공자가 가르치는 대로 열심히 수련에 매진하거라. 하나 덧붙이자면 황궁은 지금 혼란 상태다. 앞으로 쓸데없는 말이 적힌 편지에는 답장하지 않을 것이니 잔말 말고 조용히 있거라.]
뚝. 뚝.
눈물이 떨어졌다.
저 공자가 이미 아바마마에게 전서구를 보내서 나를 데리고 있겠다고 말했구나.
죽도록 고생을 시키는 것도 모자라 선수를 빼앗고 아버님의 신뢰까지 얻었다.
울분이 치솟아 올랐다.
망할 놈 같으니.
“감히 황태자인 나를 농락하다니! 내 당장 저놈을 죽여 버리…….”
“만뇌멸화(萬雷滅花).”
번쩍. 쩌저저저정.
콰아아아아아앙!
아니, 취소다. 죽이지 못하겠다.
번개?
죽이기는커녕 눈 한 번 깜박하기도 전에 살해당할 수도 있겠다.
‘아버님, 말씀하신 대로 공자님께 반항하지 않고 잘 따르겠습니다.’
황태자는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입을 벌린 채 눈도 깜박이지 못했다.
그것은 황태자뿐만 아니라 살문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였다.
언뜻 수천 개, 만 개는 족히 될 법한 번개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섬 일부가 박살 나고 나무가 터져 나갔다.
바위가 산산조각이 나고 흐르던 물이 증발했다.
이게 사람이 할 수 있는 무공인가.
입을 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팔선인 현기천도 매한가지다.
‘하은월과 싸울 때 몸에 번개를 들이부었다고 해서 뭔가 하고 보여 달라 했더니만 이게 무슨! 진짜 탈마의 경지 맞는가?!’
생사경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경지다.
초절정 고수라고 해서 다 같은 초절정 고수가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경지의 초입을 지나 원숙의 단계에 들어서고, 이내 모든 이치를 통달하여 끝자락에 도달하면 다음 경지의 초입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그러니 초절정 고수 초입의 무인이 절정 고수 끝자락인 자에게 죽는 일도 벌어지지.’
탈마가 경지의 끝이니 천마는 극성까지 수련하고도 한 단계 더 끌어올린 게 분명했다.
“후우.”
내공을 갈무리하는 동안 천일영에게서 깊은 한숨이 나왔다.
다름 아닌 신선오계청금법을 깨우치고 새로운 기운을 받아들인 지 칠 일.
그런데 새로운 기운이 너무도 잘 맞았다.
‘천마심법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 종으로 횡으로 각 혈도와 기도를 막힘없이 통하며 한 단계씩 기운을 더 끌어올리는 원리도 같다.’
한 번만 보고 신선오계청금법을 깨우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지금 만뇌멸화를 뿌리면서 느끼기를, 내공의 질이 달라지니 위력이 전과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 강해졌다.
‘가진 힘의 삼 할만 사용했다. 전에는 모든 힘을 전부 끌어내야 가능했던 것을.’
하지만 이 정도로는 하은월을 상대로 이기지 못한다.
그의 경지는 이보다 훨씬 높다.
천일영이 이를 악물고 서늘한 표정을 짓자, 현기천이 속마음을 눈치채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음이 급한 것은 알겠네. 허나 자네는 아직 수련 중이 아닌가. 초조함을 버려야 보이는 것도 있는 법이라네.”
“초조한 마음은 없습니다. 과거 살수로 살았을 때는 매일같이 다음 날의 목숨을 걱정하며 살았던 몸. 이 정도로 흐트러지지는 않으니 다음 무공을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무공을 가르친 이래로 일각도 쉬지 않았네. 벌써 칠 일째인데 쉬어야 하지 않겠나.”
“앞으로 한 달 정도는 쉬지 않아도 됩니다. 잠도 괜찮습니다.”
“아니…….”
내가 쉬고 싶은데.
‘금제가 풀렸다고는 해도 아직은 쇠약한 몸. 내가 못 견디겠는데 열심히 배우려는 사람한테 안 된다고 할 수도 없고.’
보통은 배우는 사람이 제발 쉬게 해 달라고 하는 법인데 거꾸로 되었다.
자존심이 상해서 가르치고 있는 자신이 쉬고 싶다는 말은 입이 찢어져도 할 수 없고.
“하아, 알겠네. 그렇다면 신선오계청금법의 내공을 이용해서 호신강기를 두 겹으로 몸에 두르는 것을 해 보지. 이것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아주 강하면서도 아주 얇은 강기를 몸 전체에 둘러야 하네.”
“호신강기를 두 겹으로 사용한다니 다른 무공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경지입니다.”
“이것도 태고의 신선이 만든 것이지. 이제부터 시범을 보이겠네.”
스으으윽.
아직은 힘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현기천이었지만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얇은 호신강기가 투명한 막처럼 몸을 감쌌다.
그리고 이내 그 위로 또 하나의 호신강기가 뒤덮이는 것을 본 천일영은 속으로 제법 놀랐다.
이것은 남궁무애가 백유화에게 연습시키는 호신강기의 원리와 비슷했다.
조금도 과한 부분과 부족한 부분이 없이 완벽하게 하나의 기운으로 뒤덮이는 것이다.
“호신강기가 깨져도 한 번 더 몸을 보호해 줄 수 있는 팔선의 비술(秘術)일세. 이름은 금강강기(金剛罡氣). 이것을 깨닫는 것은 다른 호신강기와는 달리 선기로만 이루어진 순수한 강기를 만들어 내는 것부터 시작하네. 내가 이것을 깨달은 것은 이 년……이 아니라 두 주일 만에 깨달은 것으로…… 저기? 공자?”
“왜 그러십니까?”
왜?
그게 멀뚱한 표정으로 물어볼 말인가?
사람이 말을 하는 도중에 따라 해 버리면 어쩌라는 것인지.
‘다음부터는 이틀 만에 깨우쳤다고 하든가 해야지!’
순간 현기천은 결심했다.
이제부터 검법을 가르치겠노라고.
가르치는 대로 속속 깨우쳐 버리니 이제는 몸을 죽도록 움직이게 만들어서 빨리 지치게 만드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래야 자신도 하루라도 쉴 수 있을 테니 굳게 마음먹은 현기천이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신선의 검법은 제아무리 천재라 할지라도 결코 우습게 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사심이 가득한 가운데 천일영의 혹독한 검술 수련이 시작되었다.
* * *
혈천회 본문.
노송하가 깊은 고심으로 양미간을 찡그린 채 앉아 있었다.
마찬가지로 좋지 못한 얼굴로 앞자리에 앉아 있는 총관 방태륜.
서로 말없이 어두운 얼굴로 앉아만 있기를 이 각.
먼저 입을 뗀 것은 방태륜이었다.
“황궁을 공격했고, 성공했다.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더 큰 피해도 입혔다. 그런데 놈들은 종남파에 파견한 황실의 무인 중에서 한 명도 철수시키지 않았군.”
“그뿐이겠습니까. 무림맹에 속한 무림 문파에서 총 이백 명의 무인을 고용했습니다. 그러한데 종남파에서는 단 한 명의 고수도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황실에서 종남파에 있는 천자님의 심장에 대해서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는 방증이다.”
“이렇게 만든 것도 결국은 천일영이겠군요. 죽일 놈의 새끼!”
독한 말을 내뱉은 노송하였지만, 내용과는 달리 몸에는 기운이 없었다.
천자를 살리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모두 소용없기 때문이었다.
똑. 똑.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잠시의 침묵을 깨졌다.
“들어오거라.”
“네.”
남자 한 명과 기분 나쁠 정도로 허리를 숙인 창백한 여인 한 명이 방으로 들어섰다.
노송하는 의외의 인물이 자신의 앞에 나선 것에 눈을 가늘게 떴다.
“의원 임단엽과 진법사 마단예? 너희들이 무슨 볼일이 있어 찾아왔느냐. 임단엽은 하루라도 빨리 천자님을 치료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무엇을 하는 것이냐!”
“그러한 게 아니오라 우연히 마단예와 이야기를 하던 중에 천자님을 되살릴 실마리가 찾아져서 찾아온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냐?!”
날카로운 노송하의 질문에 마단예가 한 걸음 나섰다.
평소 말도 없고 구석에 박혀서 진법의 연구만 하는 여자다.
말도 거의 섞어 본 적 없었지만, 노송하는 그녀가 말하는 것을 허락했다.
“제가 생각하기를 천자님을 의술로 살리는 것이 불가합니다. 그래서 제안하고자 합니다. 진법으로 천자님을 부활시키는 것이 어떠할지요.”
“진법으로 부활?”
“저희에게는 이미 천자님의 아버지이신 하우님을 부활시키기 위한 진법이 있습니다. 그것을 응용하여 천자님을 살릴 수 있는 진법의 개발을 오늘 끝마쳤습니다.”
“그것이 정말이더냐! 아니, 그보다 부활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 말은…….”
“맞습니다. 천자님을 한번 죽이고 혼이 떠난 다음 완전히 새로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마단예! 지금 그 말을 제정신으로 하는 것이냐!”
“성공하면 심장을 찾기 위해서 고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활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육체가 만들어집니다. 심장까지도.”
“……!”
노송하는 멍한 눈길로 마단예를 바라봤다.
화를 내야 할지, 이야기를 더 들어야 할지 망설임 사이에서 혼란이 느껴졌다.
애써 마음을 가다듬은 노송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은?”
“처음에는 일 할. 나중에는 구 할이 될 것입니다.”
“알아듣게 설명하거라.”
마단예는 노송하가 설명을 요구하자 파리한 잇몸을 드러내며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처음에는 봉호조라는 작은 새로 진법을 실험할 것입니다. 성공하면 토끼를 사용하고, 이후 개와 소를 사용할 것이며 모두 성공하면 마지막으로 인간으로 실험합니다.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진법을 계속 수정하여 최종적으로는 구 할의 확률로 성공해 낼 것입니다.”
“말은 그럴싸하구나. 진법의 실험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봉호조를 살리는 데 사람의 목숨 한 명분, 토끼는 열 명이 필요합니다. 개는 백 명이 필요하고, 소는 천 명이 필요하며 인간은 만 명이 필요합니다.”
노송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설명을 들어 봐야 소용없으니.
“지금 당장 봉호조를 죽였다가 살려보아라.”
“그리 말씀하실 줄 알고 새는 준비해 놓았습니다. 대신 인간 한 명을 내려 주시지요.”
노송하가 총관 방태륜을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죽여도 되는 인간쯤이야 얼마든지 있다는 표정.
그들은 마단예를 따라 진법이 그려져 있는 방으로 빠른 발걸음을 옮겼다.
* * *
원의 중심으로부터 테두리가 십 치 정도에 이르는 진법의 가운데에 새장이 하나 있었다.
마단예는 그곳에 손을 넣어 봉호조를 꺼냈다.
“직접 죽이시겠습니까?”
“확실히 하는 편이 좋을 테니 그러도록 하지.”
삑삑거리며 우는 작은 새가 노송하의 손으로 건네지는 순간.
뚜두둑.
목이 부러져 죽었다.
노송하는 바스러진 목 때문에 축 처진 봉호조를 마단예의 말대로 진법의 가운데에 놓았다.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깃털의 일부를 훼손하고 봉호조의 작은 심장까지 날카로운 손톱으로 파 버렸다.
진법의 옆에는 온몸이 묶인 채 떨고 있는 젊은 여인 한 명이 두려운 눈길로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푸욱.
묶여 있는 여인이 알아차릴 틈도 없이 목이 꿰뚫렸다.
마단예는 여인의 등을 걷어차 진법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꿀렁. 꿀렁.
피가 진법의 모양대로 파인 틈새로 타고 들어가고.
이내 모든 진법이 피로 가득 메워지자 마단예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웅얼거리는 소리가 서늘하기 짝이 없는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반 각 후.
부우우웅.
이상한 어둠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방 안에 울렸다.
화르르르륵.
죽은 봉호조가 깃털부터 타들어 갔다.
형체가 지옥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일어나고, 죽지 못한 채 뚫린 목에서 피를 쏟아 내고 있던 여인의 눈이 뒤집히는 순간.
쿠웅.
방 전체가 울리며 진법에서 어둠이 쏟아져 나왔다.
형체가 있는.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어둠이었다.
스스스스스슥.
기묘한 어둠은 일렁임을 멈추지 않고 재가 되어 버린 새가 있던 자리에 스며들었다.
한차례 일렁거리던 어둠의 떨림이 점점 심해졌다.
그 순간.
콰직!
마단예가 죽어 가던 여인의 목을 잘랐다.
쿠르르륵.
피가 쏟아져 나왔다.
어둠은 그 피를 남김없이 빨아먹었다.
스르르륵.
그리고 이내 어둠이 사라졌다.
그 광경을 본 노송하와 방태륜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다름 아닌 어둠이 있던 자리에 다시 봉호조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특이한 문양으로 인해 같은 모양의 새는 단 한 마리도 없는 봉호조가 그대로인 채.
훼손된 깃털과 심장까지 죽기 전과 같았다.
말 그대로 부활이었다.
노송하의 눈이 빛났다.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느냐.”
“저는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사람만 준비해 주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길어야 두 달이면 천자님이 부활하시겠구나.”
노송하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음을 지었다.
천자를 살리는 데 죽어야 하는 목숨 이만 명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