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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귀환기-253화 (254/270)

253화

이십 일 뒤.

쿠웅! 쿠웅! 쿠와와왕!

섬 하나가 땅은 물론이고 깊은 바닥의 지축까지 흔들렸다.

천일영이 화하여월을 허공부터 땅으로 내리쳤다.

그것을 현기천이 받아쳤다.

쿠우우우웅!

단지 검과 검이 맞부딪혔을 뿐인데 곁에 서 있던 거목들이 뿌리째 뽑혀 나갔다.

“백화뇌우(白化雷雨).”

“크윽!”

번쩍!

콰과과과광!

현기천의 주위로 백 개의 번개가 내리쳤다.

그 힘에 떠밀려 현기천의 신형이 튕겨 나가자 천일영이 바로 따라붙었다.

그 속도가 이미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현기천의 눈에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니.

콰아아앙!

천일영이 날린 검을 현기천이 힘들게 막아 내기는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현기천의 신형이 날아가 바위에 박혔다.

콰아아앙!

“쿨럭! 그만!”

“괜찮으십니까? 제가 힘이 과했습니다.”

“아니, 괜찮네. 팔선의 체면이 있으니 그런 말은 말게나.”

아직 힘이 돌아오지 않은 현기천은 몸을 추스르며 팔을 내저었다.

‘이래서는 몸이 나아지기도 전에 죽게 생겼군. 무림의 역사에 가르치다가 죽은 사람이 있던가?’

벌써 이십칠 일째 잠도 못 자고 천일영을 가르치며 상대까지 하는 중이다.

그런데 그것뿐이라면 이렇게나 허탈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을 터다.

쉬지 못한 것도 힘든데 방금 천일영의 일검은 가진 힘의 일 할도 안 되는 것이었다.

내공심법을 다루는 게 익숙해질수록 생각보다 더 강한 힘을 내고 있었다.

‘망할, 검술을 가르치는 게 아니었다. 더 쉬지 못하고 있잖은가. 더욱이나 천마는 요 스무날 동안 신선의 검법을 거의 다 배워 버렸다.’

짜증이 치솟았다.

자신은 무려 팔 년에 걸쳐 묘리를 깨달은 검법이지 않은가.

현기천은 숨을 몰아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긋지긋한 섬이라는 생각과 제발 좀 쉬고 싶다는 마음이 교차할 때.

자신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만드는 새를 보았다.

끼이이익!

편지를 가지고 날아든 참매가 허공에서 소리를 질렀다.

천일영이 왼팔을 올리자 참매가 날아들었다.

‘황실에서 편지를? 설마 무슨 일이 또 있었나?’

편지를 읽던 천일영의 표정에서 걱정이 사라졌다.

다행히도 사람의 생사가 오갈 만큼 큰일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대신 다른 근심이 얼굴에 퍼졌다.

“어르신, 죄송하지만 수련은 잠시 중지해야겠습니다.”

“헉, 헉. 그게 정말인가?”

“급히 섬을 나갈 일이 생겼습니다.”

오호라. 이제 웬 횡재냐!

드디어 쉴 수 있다는 생각에 현기천의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가르치는 스승의 처지에서 기쁘다는 것을 들키면 안 되는 법.

근엄한 목소리로 현기천이 말했다.

“허허, 나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수련을 중지한다니. 내 앞으로도 가르쳐야 할 것이 많건만 이래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밖으로 나갈 일을 취소하고 계속 수련을 하도록 하지요. 꼭 가야 할 일도 아니니.”

천일영이 등을 돌리고 검을 다시 잡으려 하자, 현기천은 급히 천일영의 어깨를 잡았다.

“내 명망 높고 그 이름도 유명한 별유천지의 음식을 꼭 먹어 보고 싶었네. 손수 항주로 가는 배도 준비시키도록 하지. 내공으로 돛에 순풍이 닿게 할 테니 빠르게 돌아가세.”

천일영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표정이 영 악당 같은 게 아닌가.

‘이런! 속았네. 이 여우 같은 녀석!’

현기천은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이다가 붉어진 얼굴을 보여 주기 싫어서 획 고개를 돌렸다.

“잠시 수련은 중지다. 별유천지로 돌아가니 다들 준비하거라.”

“후아! 이제야 쉬는 건가.”

황태자도 자신의 너덜너덜한 몰골을 내려다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태어나서 하루 입었던 옷을 또 입어 본 적이 없는데.

‘꼬박 이 옷을 이십칠 일이나 입고 있었다니.’

곁을 지나던 백유화가 한껏 찡그린 황태자의 표정을 보고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말했다.

“보통의 백성들은 다 그렇게 산다. 한 달에 한 번 옷을 빨아 입는 정도면 잘사는 집에 속하지. 대부분은 일 년에 두어 번 옷을 빨아 입으면 다행이다.”

“그렇게나 옷을 빨아 입지 못한다고? 아니, 갈아입으면 될 일인데 백성들은 게으른 거냐.”

“백성 대부분은 옷 한 벌이나 잘해야 두 벌로 평생을 산다. 처음부터 갈아입을 옷이 없지. 그나마도 먹고살기 바빠서 그 옷을 빨아 입을 시간조차 없는 것이고. 나이 든 노인들이 왜 누더기처럼 기운 옷을 입고 다니는지 이제는 알겠냐.”

“젊어서부터 그 옷만 입고 살아서 해진 것을 기우다 보니 누더기가 된다는 것이구나.”

“그게 평범한 백성들의 삶이다.”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장통이나 뒷골목에서 나는 냄새는 바로 백성의 삶이 밴 것이었다.

그 냄새가 싫다고 사향을 뿌리고 다녔으니 공자에게 혼이 나도 마땅하다.

황태자가 백유화에게 말했다.

“고맙구나. 좋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흐음? 생각보다 쓸 만한 황태자인지도 모르겠네. 섬을 나가면 몸에 좋은 차를 줄 테니 그걸 마시고 몸의 독기를 배출해라. 다음 수련부터는 몸이 조금 편해질 거다.”

백유화가 고개를 까딱하고는 앞장서서 길을 나섰다.

황태자는 백유화가 작은 체구로 너털거리며 걷는 것을 잠시 보다가 기억 속에서 잊었던 것을 떠올리고는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혜령이가 놀아 달라고 했는데 이번 기회에 어울려 줘야겠구나. 황실에 있는 여동생들은 전부 나에게 잘 보이려고 인형 같은 행동만 해서 정이 안 갔는데 잘되었다.’

기분 좋게 웃음을 지으며 황태자가 배가 있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순간 천일영은 왜인지 모르게 소름이 오소소 돋아 올랐다.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천일영은 이내 고개를 가로젓고 배로 향했다.

와락.

그때, 기회는 이때다 싶은 듯한 몸놀림으로 금채홍이 천일영의 팔짱을 끼었다.

몸에서 나는 땀 냄새가 창피했지만, 섬에 있는 동안 공자님을 보기만 하고 만지지 못해서 애가 달아 있는 금채홍으로서는 본능이 먼저인 행동이었다.

“이 녀석, 느닷없이 달려드는 버릇이 점점 심해지는구나.”

“헤헤, 공자님하고 같이 배로 가고 싶었어요.”

“조금 천천히 걸어도 괜찮겠지. 그동안 밀린 이야기나 하면서 갈까.”

“네, 좋아요. 헤헤.”

천일영과 금채홍이 느린 걸음으로 배가 있는 곳을 향했다.

‘사이 좋네.’

천일영과 금채홍의 뒤를 따라 걷던 서하린이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지친 얼굴 사이로 슬픈 표정을 지었다.

‘채홍이가 공자님을 좋아하는 모양이네. 공자님도 채홍이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고.’

서하린은 축 처진 어깨로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의 신형이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서 있었다.

그동안 계속 마음을 전해 왔는데 들은 척도 하지 않던 공자님이다.

‘어째서 나는 공자님의 마음에 들지 못하는 걸까. 내가 채홍이와 다른 게 무엇이지?’

어쩌면 더 적극적으로 마음을 전해야 했을까.

아니면 채홍이처럼 마구 안겨야 했었던 걸까.

그동안 말로만 좋아한다고 말해 왔다.

천마신교에서 명문 중에서 명문의 자녀로 태어나 몸가짐에 대하여 철저히 교육을 받고 살아왔다 보니 안아서 마음을 끄는 것에는 저항감이 있었다.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 그럼 채홍이가 마치 몸이 헤픈 나쁜 여자 같잖아. 채홍이는 좋은 아이야.’

마음이 복잡했다.

공자님을 좋아하지만, 채홍이도 좋아하니까.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한다면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네. 아직 나에게도 기회가 있을 거야. 여기에서 포기하면 안 돼.’

서하린은 우울한 얼굴을 펴고 씩씩하게 걷기 시작했다.

울상을 짓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보면 공자님이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걱정을 끼쳐서 관심을 받는 짓거리는 하고 싶지 않았다.

천한 생각으로 가득 찬 못된 여자나 할 만한 짓이니까.

최소한 질 때는 질더라도 금채홍과는 당당하게 승부를 내고 싶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천마신교의 명가라고 불리는 독천 가문의 마왕 서하린이니까.

* * *

현기천이 배에 순풍을 계속 불어 넣어 준 덕분에 본래는 세 시진이 걸리는 뱃길이 불과 한 시진 반도 안 걸렸다.

배는 날듯이 수면을 헤치며 왔고, 그것은 빨리 쉬고 싶은 현기천의 마음 그대로였다.

오랜만에 항주의 땅을 밟자 모두의 얼굴에 피곤이 감돌았다.

각자 빠르게 휴식을 취하러 뿔뿔이 흩어지는 가운데 천일영과 황태자만이 깨끗하게 몸을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밖으로 나섰다.

황태자는 자신을 끌고 다니는 천일영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아 물었다.

“왜 이렇게 서두르는 것이냐. 나도 쉬고 싶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걷기도 힘든데!”

“잔소리 말고 따라오거라.”

“끄응.”

무시무시한 무공의 신위를 계속 봐 왔으니 반항하지도 못하겠고.

황태자는 억지로 다리에 힘을 주고 천일영을 따라갔다.

천일영이 가는 곳은 별유천지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

담벼락과 나무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공간이 펼쳐지자 현판 하나가 눈에 보였다.

용선심형학당(容善心泂學堂).

혜령과 예서란이 다니는 학당이다.

커다란 꽃나무가 꽃잎을 휘날리는 그곳에는 훈장이 나와서 누군가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황태자는 훈장 앞에 서 있는 신형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바마마?”

어째서 이곳에 계신다는 말인가.

반가운 발걸음이 빨라지고, 황제의 앞에 무릎 꿇은 황태자가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의 용안을 뵙습니다.”

“오랜만이구나. 그간 잘 지내었느냐.”

“폐하의 하해(河海)와 같은 은혜를 입어 무탈하게 지냈습니다.”

너무도 반가운 마음에 정신없이 인사를 올렸다.

아마도 자신이 보낸 편지에 매정한 답장을 하셨지만, 걱정되어서 직접 들르신 것으로 생각한 황태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잠깐? 아바마마께서 저 안하무인인 공자의 성격에 노하시게 되는 건 아닌가? 황태자인 내게도 막말을 일삼는 사람이다. 게다가 예법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듯하고. 이거 말실수라도 하면 큰일인데.’

고개 숙인 황태자의 얼굴에 근심이 떠올랐다.

아무리 자신을 굴리고 있는 천하의 나쁜 놈이지만 생명의 은인인데 나쁜 상황에 부닥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고개를 돌려 상황을 살피는데 공자가 무릎을 꿇는 것이 보였다.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리옵니다. 먼 길 오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는지요.”

“편지로만 대화를 나누다 직접 만나니 참으로 반갑구나. 내 그대 덕분에 큰 화를 모면했고, 또한 대명국을 위해 힘써 주니 고맙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백성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폐하의 옥체가 무탈하시기만 한다면 대명국의 장래는 영원히 탄탄대로일 것입니다.”

뭐지?

황제 폐하와 황태자인 나에 대한 이 대우의 차이는?

‘야! 무슨 말을 이렇게 잘해! 게다가 예법은 왜 이렇게 잘 아는 거고?’

빈틈없는 예법과 화법에 괜히 걱정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무명암살대에서 간자이자 살수로서 온갖 교육을 받아 온 천일영이었음을 모르는 황태자가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을 때, 황제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대와는 잠시 후에 이야기를 나눠야겠구나.”

“폐하의 뜻대로 하소서. 저는 황태자님을 모시고 자리를 무르겠습니다.”

“괜찮다. 그대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니 잠시 여기에서 기다리거라.”

황태자님? 모셔? 네가 언제 나를 모셨다고. 막 대하고 굴렸지!

태도 돌변인 공자에게 억울함이 들어 화가 났지만 황태자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황제 폐하의 앞이니까.

황제는 훈장을 향해 몸을 돌렸다.

“과거 정1품 태사 제백산은 들어라. 내 그대에게 황실로 돌아오라고 세 번이나 말했건만, 내 청을 모두 거절하여 직접 찾아왔노라.”

“저는 이미 황실을 떠난 몸입니다. 또한 지금의 삶이 제게는 마음의 평안을 주고 있으니 부디 마음을 접어 주십시오.”

황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백산의 능력이 워낙에 출중하여 전부터 돌아오라는 편지를 보냈는데.

‘고위 관리들이 전부 죽어 버리는 바람에 황궁은 혼란 그 자체다. 지금은 이 사람이 꼭 필요하다.’

위험을 무릅쓰고 호위 무인 다섯만 데리고 빠르게 북경에서 왔다.

평소 황제의 행차에 길이가 4리에서 5리에 이르는 행렬이 따라붙는 것을 생각하면 체면도 접고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면전에서 거절이라니.

황제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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