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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귀환기-254화 (255/270)

254화

황제가 고개를 조아린 제백산에게 한 치도 무를 수 없다는 듯한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황실을 뒤집고 중원을 장악하려는 자가 판을 치는 때이다. 그러한데 그대는 자신의 평안함만을 구하려는 것인가. 또 한 번 거절하면 강제로 끌고 갈 것이네.”

“황제 폐하, 어찌 이 늙은이에게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하시는 것입니까. 황실에는 젊고 능력 있는 자가 많사옵니다.”

“내 살아오면서 그대만큼 출중한 인재를 본 적이 없다. 또한 믿을 수 있는 자가 필요하다. 그대가 모든 인선을 맡아서 적재적소에 사람들을 배치하기를 바라고, 또한 그러기 위한 모든 전권도 주겠다. 대명국이 위기이니 자네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제가 맡아서 가르치던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을 버리고 어찌 떠나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황실에서 새로운 훈장을 알아봐 주도록 하지. 자네만은 못하겠지만 최대한 인품이 좋고 학식도 뛰어난 사람으로 보낼 것을 약속하겠네.”

“그리 말씀하신다면 저도 더는 거절할 방도가 없는 일. 부족하지만 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제백산이 포기하고 따르기로 하자, 그제야 황제의 굳은 얼굴이 풀렸다.

“내일 떠날 것이네. 그동안 가르치던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고 모든 준비를 끝마치게.”

“명하신 대로.”

제백산은 고개를 들고 학당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터를 잡은 지도 벌써 십 년이 다 되어 간다.

아련한 눈이 학당의 구석구석을 향할 때마다 그의 입에서 한탄이 흘러나왔다.

그 눈물이 차오르는 제백산의 심경을 황제라고 모를까.

하지만 황제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개인의 감정보다는 심각한 타격을 입은 황궁의 안정이 먼저다.

황제는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정리한 후 천일영에게 말했다.

“시간을 비워 두라고 편지를 보냈으니 오늘 하루 자네는 나와 함께 있어야겠네.”

“알겠습니다.”

천일영이 몸을 일으켜서 황제를 이끌자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무인 다섯이 동시에 따라붙었다.

황제가 그들에게 멈추라는 손짓을 보냈다.

“자네들은 제백산이 짐을 싸는 것을 돕고, 우차와 표국을 수배하여 북경까지 옮기도록 하게.”

“폐하! 호위도 없이 다니시는 것은 아니 될 말씀입니다.”

“걱정할 것 없다. 중원에 이 공자보다 무공의 신위가 뛰어난 사람이 있는가.”

“하오나! 믿을 수 있는 자인지 아직 모릅니다.”

걱정이 가득한 호위의 말에 황제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 사람이 해하려고 마음먹었다면, 우리는 이미 삼도천을 건너고 있겠지.”

“……!”

호위 무인 다섯은 황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고개만 숙이고 있는데도 도무지 이 사람에게는 검 끝 하나 댈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결국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황제는 황태자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

“너도 따라오지 말아라. 단둘이 할 말이 있구나.”

“아바마마! 제가 아직 미숙하나 도움이 될 일이 있을 것입니다.”

“너는 공자에게 있다는 조카와 놀아 주기라도 하여라.”

“앗!”

천일영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가 고개를 돌렸다.

조카가 있다는 것을 그동안 황제에게 말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유의선이 말을 한 모양이다.

‘이렇게 되면 황태자는 어쩔 수 없어도 황제에게만큼은 절대로 혜령이를 보이지 말아야겠군.’

황실과 가까워질수록 조용한 삶은 사라지는 법.

내일 황제가 길을 떠나고 나면 혜령이와 놀아 준 황태자의 기억을 물리적으로 지워 줄 결심을 하면서 천일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 * *

천일영과 황제는 바다가 보이는 별유천지의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눈에 띄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황제는 평안한 얼굴로 객잔의 손님들과 함께 섞여 있었다.

위광이 뿜어지는 얼굴을 제외하면 언뜻 보아서는 그가 황제인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의 모습이었다.

뜻밖의 털털함에 천일영이 물었다.

“따로 자리를 잡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괜찮다. 백성들과 한자리에 섞여서 밥을 먹어 보고 싶었으니.”

황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술잔을 기울인 후, 느른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천일영을 바라봤다.

광채가 서린 듯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동안 바라보던 황제가 입을 뗀 것은 반 각이 조금 안 되어서다.

“자네의 이름이 무엇인가. 유의선도 그렇고, 황태자라는 아들놈도 마찬가지고 자네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네. 이름을 알리지 않는 이유가 있는 것인가.”

“미천한 이름이기에 알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 생각인가.”

조금 전 제백산을 대할 때보다 훨씬 단호하게 말하는 황제다.

천일영은 고개를 들고 황제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했다.

“제 이름은 천일영입니다.”

“호오? 공교롭게도 죽었다고 하는 천마신교의 천마와 같은 이름이 아닌가.”

“죽었다고는 하지만 공교롭게도 아직 살아 있습니다.”

“본인이란 말인가! 하하하핫. 이미 천마신교에서 나온 지 오래였던 모양이군. 재미있구나. 하하하.”

황제는 한참을 호탕하게 웃었다.

객잔에 있던 손님들은 그 모습을 조금 이상하게 보고 흘끔거리기도 했지만, 이내 별일 아니라는 듯 평소와 같은 모습이 되어 갔다.

스윽.

웃음을 멈춘 황제가 천일영을 향해 금빛으로 빛나는 패를 들이밀었다.

“이것을 받게. 신룡강패(神龍强牌)일세.”

“이것은 저에게 주실 만한 물건이 아닙니다. 신룡강패가 가진 의미를 아시지 않습니까.”

“이 패를 아는가? 역시 천마라는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군.”

신룡강패.

정1품의 태사나 금의위의 수장이나 가질 만한 물건이었다.

이 패를 가진 사람은 원하는 물건을 모두 지원받을 수 있었다.

말이 필요할 때 패를 보여 주면 즉시 받을 수 있고, 집이 필요할 때 패를 꺼내기만 하면 99칸짜리의 거대한 장원이라 할지라도 손에 떨어진다.

그뿐인가.

전장에 가면 자금을 마음껏 받을 수도 있고, 심지어 금군이 필요할 때 보이면 수천, 수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얻을 수도 있다.

절대적으로 신뢰는 물론이고, 나라의 가장 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면 내어 주지 않는 패.

아마도 대명국에서 신룡강패를 가진 사람은 세 명도 안 될 터였다.

“내 그대에게 진 빚을 어찌 갚을까 고민하다가 이것을 주기로 했네. 필요한 만큼 사용하게나.”

“속내는 이것을 이용해서 혈천회를 치라는 말씀이 아닌지요.”

“하하하. 꼭 틀린 말은 아니지. 허나 자네가 사사로이 이용해도 괜찮네. 아무리 봐도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천일영은 탁자 위에 있는 신룡강패를 품 안에 넣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이 패를 짚는 순간 정1품의 직위를 하사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만큼 황실과의 연도 깊어지고.

황제는 패를 앞에 두고 만지려고조차 들지 않는 천일영을 보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음을 지었다.

“마침 정1품의 좌, 우 도독(都督) 자리가 있는데 이번 참에 둘을 합쳐서 대도독(大都督)으로 만들까 한다. 신룡강패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신 그 자리를 자네에게 줄까 하는…….”

덥석.

천일영이 빠르게 신룡강패를 들어 품에 넣었다.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나는 대도독이 되어 주는 게 더 좋은데 말일세.”

“절대로 사양하겠습니다.”

이 여우 같은 황제가 이미 거절할 때를 대비해서 계략까지 짜 왔다.

그것도 천일영이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방법으로.

대도독이라도 되는 날에는 다른 황실의 관리들이 천이영에게 몰려들고, 혜령을 시집오게 만들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들이밀 게 뻔했다.

‘머리가 아프군.’

황제는 이름값에 걸맞게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이만한 사람이니 제백산을 관직에 올리기 위해 항주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찾아왔을 것이다.

역대 중원을 지배했던 황제 중에서 이런 사람이 있었던가.

적어도 천일영이 아는 한 떠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천일영은 황제의 인품이 제법 마음에 들어 꽤 많은 술을 함께 마셨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황제와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평생에 황제를 만나는 것은 딱 한 번이면 된다.

여우 굴이 싫어서 밖으로 나왔는데 일부러 구렁이 굴에 뛰어드는 우를 범하고 싶지는 않은 천일영이었다.

* * *

집으로 돌아온 천일영은 술에 취한 황제를 침상에 눕혔다.

황제라는 사람이 이렇게나 취해서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한테 들려 오다니 긴장감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드르르륵.

손님방의 문을 닫고 천일영도 피곤한 몸을 눕히러 가는 길.

기감에 기묘한 것이 느껴져서 또 하나의 손님방을 열었다.

‘이것 참.’

손님방에는 황태자가 곤히 자고 있었다.

문제는 그 옆에 혜령이가 같이 자고 있다는 것이다.

황태자의 팔을 베고 잠들어 있는 모습은 영락없이 사이좋은 남매처럼 보였다.

피곤함에 절어 있던 황태자의 눈 밑에 짙은 그림자까지 더해진 것을 보니 오늘은 온종일 혜령과 열심히 놀아 준 모양이다.

‘어쩔 수 없나. 혜령이 내일은 종일 울 테니 그냥 내버려 두기로 하지.’

조용히 방문을 닫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천일영도 눕자마자 금세 잠이 들었다.

이십칠 일 만에 잠을 청했으니, 삽시간에 깊은 잠에 빠졌다.

* * *

“엉엉엉. 훈장님 가지 마세요. 으흐흑.”

“이런, 발길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이렇게나 슬퍼할 줄 몰랐구나.”

천일영의 생각대로 혜령은 훈장 제백산의 품에 안겨 하염없이 울었다.

그토록 좋아하는 훈장님이 떠난다니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는 예서란도 이날만큼은 눈물을 흘렸다.

제백산이 예서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가면 공부를 등한시하고 승선포정사사에서 일만 할까 걱정이구나. 아직 배워야 할 것이 산더미인데.”

“오전 시간은 혼자서라도 공부하겠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어서 빨리 크렴. 내 너를 부를 날이 있을 테니 그때는 내 일을 도와줬으면 좋겠구나.”

“흑흑. 일을 돕는 것보다 이곳에서 훈장님과 같이 공부하는 게 더 좋은데…….”

잇고 싶던 말의 끝맺음조차 눈물에 삼켜진 예서란은 뒷말을 잇지 못한 채 눈물만 흘렸다.

훈장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

아이들이 서로 제백산을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동안 감사했어요. 으아아앙.”

“언젠가 다시 뵈어요. ‘꼭’이요.”

“그래, 다들 울음을 그치고 새로 오시는 훈장님의 말씀 잘 들어야 한다.”

“네, 흐흑.”

계속 참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일제히 울음을 터트리자 제백산도 끝내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지금도 학당의 앞마당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그 즐거워하는 모습과 웃음을 다시는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점점 거세게 떨어져 내리고, 입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제백산은 목이 잠겨 떨리는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전했다.

“다들 잘 있거라. 아프지 말고.”

“네, 으엉엉.”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제백산이 우차에 올라타는 순간 소는 매정하게도 북경을 향해 느린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우차가 멀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제백산과 아이들은 손을 흔들었다.

훌륭한 인격자이자 아이들의 좋은 스승이었던 제백산은 그렇게 항주를 떠났다.

그가 떠나는 것을 확인한 황제는 말 위에 올라 황태자를 향해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어제는 미처 말하지 못했다만, 그동안 사내다워졌구나. 게다가 성숙해졌고. 당분간은 공자를 따라라.”

“알겠사옵니다.”

황제가 북경을 향해 떠나자 황태자는 고개를 숙였다.

당분간은 황태자의 신분을 숨긴 채 고생길을 걸어야 했기에 표정이 좋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혜령부터 챙겼다.

“우리 혜령이 너무 많이 우네. 오빠랑 같이 놀까?”

“흑흑, 조금만 있다가요. 눈물 좀 멈추고요, 엉엉.”

“그래, 그래.”

조용히 혜령의 등을 토닥거리는 황태자를 보니 천일영은 결심대로 기억을 지우는 것도, 황태자를 강제로 끌고 가서 혜령이 더 울게 되는 것도 싫었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까지만이다.’

결국 천일영은 포기했다.

세상 그 어떤 삼촌이 조카를 이길 수 있고.

또 어떤 삼촌이 조카를 울리겠는가.

결국 천일영은 조카 혜령 앞에서 언제까지고 약자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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