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다음 날.
오랜만에 일상으로 돌아온 별유천지의 아침은 시끌벅적했다.
늘어난 식구들이 밥을 먹고 이야기하는 떠들썩함이 천일영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조금 있으면 다시 살문도로 떠나기에 맛있는 별유천지의 음식은 모두의 배 속으로 빨려 들 듯 사라졌다.
당분간은 이 음식이 마지막 만찬이었다.
서하린도 볼이 터지라고 음식을 입에 넣었다.
다만 그녀는 평소 앉던 자리에 앉지 않고 천일영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금채홍이 그 광경을 안절부절못하고 바라보고 있어도 개의치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천일영의 곁에 붙어만 있고 딱히 말은 하지 않는 게 이상했던지, 혜령이 아이답게 눈치를 보지 않고 해맑게 물었다.
“하린 언니는 오늘 삼촌한테 혼례를 올리자는 말을 하지 않네요?”
“응? 오늘은 하지 않을 건데?”
“어째서요? 삼촌이랑 혼례를 올리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 거예요?”
“그건 아니고, 나중에 말할 거야.”
“헤에?”
혜령은 서하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꺄우뚱거렸다.
평소에 아는 하린 언니와는 뭔가가 달랐다.
표정도 언제나처럼 긴장이 풀린 것이 아닌 비장한 각오 같은 것이 보였다.
물론 아직 나이 어린 혜령에게는 그저 굳은 얼굴 정도로만 보였지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혜령을 두고 먼저 식사를 마친 천일영이 말했다.
“한 시진 후에 살문도로 간다. 그 전에 급한 볼일이 있으면 봐 두도록 하여라.”
“네.”
모든 사람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서하린만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는 천일영의 팔을 꼭 껴안았다.
천일영의 눈이 커졌다.
혜령의 눈은 더 커졌다.
“언니! 삼촌은 나하고 혼례를 올리기로 했는데 그렇게 껴안으면 안 돼요!”
“어머, 그런가? 미안해, 혜령아.”
서하린이 안았던 천일영의 팔에서 떨어져 나왔다.
혜령은 그 모습을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이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서하린의 행동은 천일영에게 마음먹고 다가가겠다는 선전 포고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폭풍 전야와 같은 분위기가 객잔에 감돌았다.
* * *
방으로 돌아온 서하린은 숨을 몰아쉬며 붉어진 얼굴을 어쩔 줄 몰라 했다.
‘후하, 후하. 심장 떨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
눈 딱 감고 천마님의 팔에 매달려 봤다.
그 순간 벼락이 머리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에 잡고 있던 정신 줄을 놓을 것만 같았다.
왜 그리 좋던지.
백유화가 ‘하악’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천마님에게 좋아한다고 매일같이 이야기했지만 안겨 본 것은 처음이다.
지금도 안았던 팔에 찌릿한 느낌이 남아 있었다.
서하린은 한동안 앉아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는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오늘은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일을 위해 붓을 꺼내 들었다.
원래는 좀 더 일찍 천마신교에 연락하려고 했는데 수련으로 인해서 본의 아니게 늦어졌다.
살문도로 가기 전에 이번만큼은 연락해야 했다.
‘패범휘가 천마가 되었으니 조만간에 한 번은 천마신교로 들어가야겠지.’
도현과 명천마왕 소초련을 죽이려고 했던 패범휘다.
그를 만나는 일은 위험을 동반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서하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최소한 혈천회와의 일이 해결된 후에 돌아가도록 해야겠지. 내 사정으로 공자님께 부담을 안겨 드릴 수는 없으니까.’
서하린은 지금 당장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를 만들어서 편지에 상세히 적었다.
천일영에게 근접하고 있다는 거짓말도 덧붙이고, 추적하는 장소는 항주에서 멀리 떨어진 섬서성(陝西省) 산속으로 꾸몄다.
이것으로 반년 정도는 천마신교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서하린은 천마신교를 향해 날아가는 전서구를 바라보며 한숨을 지었다.
독천마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만큼 언제까지고 밖에서 살 수는 없었다.
가문에 딸린 식구들을 생각하면 언젠가는 완전히 돌아가야 한다.
‘앞으로 반년 동안이 천마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일지도 모르겠네.’
초조한 마음이 가슴을 가득 메우고, 어쩌면 천마님과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괴로움에 몸서리를 치고 있을 때.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기에 서하린은 고개를 돌렸다.
“하린아, 이제 섬으로 갈 시간이구나.”
“네, 천마님.”
서하린은 밝은 표정으로 천일영의 곁에 섰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와락.
서하린이 두 눈 딱 감고 다시 한번 천일영의 팔에 안겼다.
“요즘 다들 왜 이렇게 안기는 것이냐.”
“글쎄요? 남가은이 너무 수련을 엄하게 시켜서 다리가 후들거리니까 공자님의 팔에 안겨 가려는 것이 아닐까요?”
“희한한 녀석들.”
딱 달라붙어도 딱히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기에 천일영은 서하린과 나란히 걸었다.
어려서부터 보아 온 서하린이기도 했지만, 그의 아버지인 독천마왕 서가흔을 지키지 못하여 자책하는 마음이 항상 크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정과 함께 과거의 후회가 마음을 휘저었다.
‘언제 이렇게 컸는지. 서가흔과 함께 행복하게 지냈던 예전 생각이 나는구나.’
서하린은 언제나 변함없이 친우의 딸일 뿐이었고, 천일영은 항상 서하린에게 죄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서하린에게는 그간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린아, 다음 휴일에는 같이 바람이나 쐬러 나가는 것이 어떠하냐.”
“정말이신가요?”
“여태 너에게는 무엇 하나 해 준 게 없구나. 같이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가자.”
“예, 좋아요. 천마님”
서하린이 화사한 웃음을 지었다.
천마신교의 마왕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맑고 해맑은 웃음이었다.
천일영을 껴안는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가고.
서하린은 이내 붉어진 얼굴로 다음 휴일이 빨리 오기만을 고대하기 시작했다.
* * *
호남성 회화(懷化).
행복한 마음이 서하린의 가슴속으로 스며들고 있을 무렵.
소초련과 도현은 인제야 관 뚜껑을 열고 나올 수 있었다.
“후아. 살았다.”
도현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천마신교로부터 무사히 탈출한 탓도 있었지만 오랜만에 보는 햇살에 마음의 평온이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코를 마비시킬 정도로 풍기던 시체 썩는 냄새를 맡지 않으니 정말로 살 것 같네.’
도현과 소초련은 관 속에 들어 있는 시신을 향해서 합장하며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기를. 신세 많이 졌습니다.”
비록 뼈대가 드러날 정도로 흉측하게 썩어들어 가고 있는 시신이었지만, 진심으로 고마웠기에 합장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도현과 소초련이 팔을 내리고 거의 한 달에 걸쳐 같이 있었던 시신과 작별을 끝내자 우차를 몰고 온 이판석이 관뚜껑을 덮으며 말했다.
“저는 이 부부의 시신을 매장해 주러 가겠습니다. 부디 항주까지 몸조심해서 잘 가시길 바랍니다.”
“큰 신세를 졌군.”
이판석이 우차를 몰고 수녕(綏寧)에 있는 절 낙안사로 향했다.
처음 와 보는 회화에 덩그러니 남겨진 두 사람은 주변을 둘러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를 데리러 온다는 사람을 어찌 만나야 할지 모르겠구나.”
“곤란하네요. 그냥 무작정 데리러 온다고만 했으니.”
잠시 고민을 하며 서 있는 두 사람의 등 뒤로, 낮은 저음이지만 여인의 것이 분명한 목소리가 도현과 소초련을 향했다.
“왜 이렇게 늦은 거냐.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다.”
“당신이 요소령?”
“맞다. 장강수로채의 주인이다.”
제법 오래 기다렸다는 듯 한껏 인상이 찌푸려진 요소령이 등 뒤의 남자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는 도현이라는 남자를 안아 들어라. 나는 소초련이라는 여인을 안아 들지. 말과 경공을 병행해서 삼 일 안에는 악양에 도착한다.”
“알겠습니다.”
몸이 다 낫지 않은 도현과 소초련을 배려해서인지 요소령은 고수의 남자까지 데리고 왔다.
도현은 남자의 팔에 들리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기운이 황실의 무공을 배운 사람? 그것도 초고수다!’
장강수로채의 주인 밑에 왜 황실의 초고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은 도현과 소초련으로서는 다행이었다.
그들은 악양으로 빠르게 향했다.
우차로 이십구 일이나 걸린 길만큼의 거리를 단 사흘 만에 가는 것이었다.
* * *
삼 일 후.
동정호의 깊숙한 곳에 만들어진 수채에서 제법 큰 배에 오른 도현과 소초련은 먼저 타고 있던 사람들이 인사를 해 오자 잠시 당황했다.
“도현 님과 소초련 님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저는 천룡상단의 노병천이라 하고 옆에 계신 분은 양호제와 보국장군 주장학이라고 하시는 분입니다.”
“상단을 하시는 분들이 어째서 장강수로채에? 아니, 그보다 저희를 어찌 아십니까?”
“천룡상단의 주인이 천무탁이시니까요.”
“아!”
무슨 말인지 한 번에 알아들었다.
천마신교에서 나간 지 일 년 반쯤 된 천마님은 조용하게 살겠다고 큰소리를 쳤었지만, 실상은 무척이나 바쁘게 움직인 모양이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라도 있을까.
도현과 소초련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요소령이 배를 출발시키며 말했다.
“미안한데 항주로 가는 길에 볼일이 하나 있다.”
“바로 항주로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도현의 질문에 요소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놈들이 너무 늦게 오는 바람에 장강수로채를 장악하는 게 늦어졌다. 그래서 가는 길에 몇 놈 죽여야 한다.”
“사정은 잘 모르지만,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돕겠습니다.”
“감사.”
요소령이 장강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장강수로채의 본문이 있는 악양이었다.
기습에 가까운 요소령의 공격으로 술과 여자에 절어 있던 장강수로채의 이인자 변윤천은 죽을 뻔한 위기를 간신히 넘기고 배를 몰아 파양호로 도망쳤다.
요소령은 동정호의 수채를 다시 장악하고 황실에서 무인을 지원받았다.
천일영의 도움으로 공동파에 피신해 있던 무림맹의 무인 중에서 녹림십팔채를 중심으로 활동 중인 사람들도 지원받았다.
‘이곳이 안정되고 파양호로 가려 했는데, 때마침 그때 도현과 소초련을 항주로 보내 달라는 요청을 받았지.’
회화에 요소령이 와 있는 동안에 동정호의 장강수로채도 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꾸준히 파양호에 있는 변윤천 패거리의 힘을 조금씩 깎아 왔다.
그리고 지금.
요소령이 돌아와서 그들의 마지막 숨통을 끊으려 하는 것이었다.
길이가 다섯 장에 이르는 배에는 수적 이십 명이 경계의 눈빛을 띠며 주변을 살폈다.
배는 빠르게 강줄기를 타고 파양호가 있는 곳을 향했다.
꼬박 하루가 걸려 파양호에 도착한 배에서 수적들이 변윤천의 본거지를 찾으려고 할 때.
요소령이 정면을 응시하며 말했다.
“힘들게 흔적을 찾을 필요는 없다. 알아서 마중을 나온 것 같으니까.”
“역시 아직은 동정호의 장강수로채에 변윤천을 따르는 간자들이 남아 있는 모양이군요.”
수평선의 끝에서 가물거리듯 일곱 척의 배가 나타났다.
그 가운데에는 길이가 무려 열한 장에 이르는 거대한 배가 선두에 있었다.
옆에는 길이 일곱 장에 이르는 여섯 척의 배에 수적들이 백여 명씩 타고 있는 것을 보아서는 요소령을 죽이기에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빠르게 물살을 가르고 온 배가 삼십 장 거리를 두고 서로 대치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변윤천이 선수에서 요소령을 보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길이 오 장의 배에 삼십 명? 푸하하하핫. 천하의 요소령이 고작 이 정도의 숫자로 찾아왔나. 죽으려고 알아서 발악해 주니 이거 고마워서 어쩌나.”
“수가 전부라고 믿다니 그래서 네가 영원한 이인자라는 거다. 이 새끼 무공을 못 했으면 뭐가 됐을까. 이렇게 대가리가 나빠서야.”
“뭐라고? 이 미친년이!”
요소령의 옆으로 보국장군 주장학과 황실에서 나온 초절정 고수 전이재가 나란히 섰다.
그 뒤에 도현과 소초련도 섰다.
보국장군 주장학이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놈들을 처리하는 일을 돕다니 뱃삯치고는 너무 비싼데.”
“아까부터 계속 투덜거리네. 그렇게 불만이면 몸이라도 덤으로 얹어 주지. 나름 아직 쓸 만할지도 모르는 몸인데 어떤가? 오호홍.”
“이제부터 입 다물고 있으마. 진지하게 전력을 다해서 전투에 임하겠다. 어떤 놈부터 죽이면 되냐.”
“아쉽네. 딱 내 취향이었는데.”
“나를 위한 게 아니라 너를 위한 거였냐. 거참 시커먼 속마음일세.”
“수적이 다 그렇지 뭐.”
요소령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한 번 다시고는 변윤천을 향해 ‘쩌억’ 소리가 나도록 입을 벌렸다.
식인의 요소령이라는 이름대로 서늘한 이빨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