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중단전의 선기와 하단전의 기운이 기도를 타고 움직였다.
아직은 섞이지 않고 따로 움직이던 기운이 기도를 가득 메웠다.
천일영은 혈도를 열었다.
온몸에 있는 365개의 혈도가 깨어났다.
어떠한 기운도 없이 비어 있는 혈도는 완전한 무(無)의 상태였다.
여기까지는 천일영의 뜻대로 되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더욱 힘들고 중요한 과정이 남아 있었다.
꿀꺽.
대부분의 무공에 통달하고 원리에 밝은 천일영이라 할지라도, 이 순간만큼은 자신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선기를 옮겨 각각의 혈도에 반씩을 채웠다.
365개의 혈도에 선기가 채워지면서 온몸으로 거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이것만으로도 같이 무공을 수련하는 사람들에게 천일영이 생사경에 올랐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쿠우우웅.
천일영이 있는 자리로 삼십 장 넓이에 있는 땅이 울렸다.
작은 돌멩이는 강한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갈라지며 부서졌다.
“후우.”
천일영은 천천히 본래의 기운을 혈도로 옮겼다.
탈마에 올랐을 때부터 마공이 사라진 깨끗한 기운.
거기에 더해 오랜 시간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강하면서도 청명한 기가 꼭 절반이 비어 있는 혈도를 채웠다.
쿠구구구구궁.
본디 섞일 수 없는 두 개의 상반되는 기운이 서로를 잡아먹으려고 혈도 안에서 싸움을 시작했다.
기운이 충돌하는 힘으로 다시 한번 땅이 바닥 깊숙한 곳까지 울렸다.
천일영은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모든 것을 비웠다.
몸은 여러 가지로 구성된 복잡한 것이지만, 이것을 무(無)의 상태로 되돌리며 하나로 만들어 갔다.
순간.
천일영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깨달음이 떠올랐다.
마음의 번뇌는 일백팔 개나, 하나의 몸으로 짊어져야 하니 마음과 육신이 일백팔 개로 갈라질 수 없음이요.
기운은 둘로 나뉘어 있지만, 이것 또한 두 개의 몸이 아닌 하나의 몸 안에서 나뉜 것일지니.
일백팔 개의 번뇌도 처음에는 하나로부터 시작이고.
두 개의 기운도 태고에는 하나였을 뿐.
모든 것은 다르지만 근본은 하나일지니라.
쿠우우우웅.
느닷없이 깊고 어두운 곳에 홀로 남아 있는 듯한 느낌에 천일영은 눈을 뜨고 자신이 있는 곳을 살폈다.
‘분명 섬에서 깨달음을 얻었는데?! 여기는 어디인가.’
아무것도 없는 공간.
빛도 어둠도 모두 집어삼켜진 곳이다.
이곳은 태고의 원점으로, 아직 세상이 태어나지도 않은 곳.
모든 번뇌와 생물이 하나였을 때였다.
천일영은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하얀색의 신형을 보았다.
그는 형체가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하며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듯도 했다.
일렁이는 모습의 신형이 천일영을 향해 다가왔다.
“드디어 내 경지까지 도달한 자가 생겼구나.”
“설마?! 태고의 신선이십니까?”
“그런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지.”
일렁이는 신형은 천일영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내가 붙인 이름은 아니지만, 불교에서는 이곳을 무아(無我)라고 부른다. 만물에는 모든 것이 형체와 자아가 불변하지 않는다고 하나 실제로는 실체가 없고 하나다. 이것을 알게 됨으로써 너는 만물의 이치를 깨달았구나.”
“그것은 만물에 해당하는 것이지 무공과는 상관없는 것이 아닙니까.”
“무공도 만물의 일부. 근원을 보면 모두 하나니라. 기운도 원래는 하나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니 네가 얻은 깨달음은 모든 깨달음의 근원이다.”
“그렇다면 저는 지금 상단전이 열린 것입니까.”
“상단전이 대수겠느냐. 네 몸이 하나의 우주가 된 것을.”
“그렇다면 이것이 생사경…….”
천일영의 나직한 말에 일렁이는 하얀 신형의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생사경과는 엄밀하게 다르고, 또한 비할 바가 아니다. 너는 근원의 깨달음을 얻었고, 세상의 모든 기운을 사용하며 섞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가 갈라져 수억 개로 나뉘어 조화를 이루는 것이고, 그 모든 것을 뜻대로 다룰 수 있음이니, 네 경지는 조화경(造化境)이라는 이름이 어울리겠구나.”
“조화경? 세상에는 없는 이름입니다.”
“네가 최초이니라. 또 다른 이름으로는 초월경(超越境)이라고도 하지.”
천일영의 눈이 커졌다.
초월경.
천마신교에 있는 책에서 읽어 본 적이 있었다.
무공의 극에 달하여 경지의 끝에 도달한 자.
모든 것을 초월한 자다.
그러나 이 경지는 그 누구도 이루어 내지 못한 상상 속의 경지였다.
초월경의 경지가 아니라 생사경에 든 자조차 수천 년의 역사에서 여덟 명뿐.
팔선의 존재가 바로 그들이었다.
태고의 신선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형체가 일정하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천일영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나는 네가 깨달은 세상 속에 잠시 들어온 것. 오래 있지는 못한다.”
“아쉽습니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일영아,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구나.”
태고의 신선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우와 하계를 너에게 맡기마. 그들은 욕심으로 눈이 어두워 초월경의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나, 다른 방법으로 강해졌다. 그들의 어둠이 세상을 뒤덮지 못하도록 하여라.”
“최선을 다해서 막겠습니다.”
“다시 만날 날이 올 것이다. 남궁무애와 채홍이를 잘 부탁하마.”
“잠시만요.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스으으윽.
태고의 신선이 사라지고, 이내 눈을 뜨지도 못할 만큼 강하고 밝은 빛이 천일영을 덮쳤다.
쓰아아아아악!
갑자기 천일영은 다른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한순간.
천일영은 섬으로 돌아온 것을 느끼며 눈을 끔뻑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그때부터였다.
천일영의 위로 용이 상승하는 것 같은 거대한 기운이 솟아올랐다.
기운은 구름을 뚫으며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날아갔고, 그 충격으로 거대한 섬 전체가 떨리고 울렸다.
금채홍과 서하린은 물론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울리는 지축에 균형을 잡기도 힘들 정도였으니.
“이게 깨달음? 생사경에 오르면 이 정도의 기운이 퍼지는 거야?”
“아니다! 이건!”
현기천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침을 삼켰다.
이 기운의 느낌은 그가 잘 아는 것이었다.
“어째서 천마가 태고의 신선이 가진 기운을! 이것은 초월경이 아닌가!”
“네에? 초월경이요? 생사경이 아니라?”
“말도 안 돼! 천마는 도대체 무슨 깨달음을 얻은 것인가. 팔선이 수천 년의 시간 동안 수련해도 오르지 못한 경지이거늘!”
현기천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경탄 어린 시선으로 천일영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
쩌저저저저정! 쩌정!
십만 개의 번개가 마른하늘로부터 떨어져 내렸다.
번개는 섬뿐만이 아니라 인근의 바다를 새하얗게 빛무리로 뒤덮었다.
콰아아아아앙!
“꺄악! 누가 나 좀 잡아 줘!”
“채홍아!”
서하린이 폭발하는 기운에 날아가는 금채홍을 겨우 붙잡았다.
하지만 애써 붙잡기는 했으나, 날아가는 것은 서하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강한 바람이었다.
피이이잉!
백유화가 서둘러 강선을 날려서 금채홍과 서하린을 겨우 붙잡았다.
“끄으으으윽!”
백유화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이미 강선으로 잡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화경의 경지에 오른 백유화였지만, 천량도사와 도철용, 그리고 건청과 차경철에 황태자와 금채홍을 비롯하여 서하린과 타진표까지 붙잡고 있는 것은 무리였다.
백유화가 이를 악문 채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천량도사와 도철용을 바라봤다.
“생각해 보니 우리 친하지도 않잖아.”
“잠깐! 그 줄을 놓지 마라!”
“미안해. 잘 가.”
“끄아아아아악!”
피이이잉!
천량도사와 도철용이 원망 가득한 얼굴을 남기고 날아가 버렸다.
지이이이익!
두 사람을 지탱하던 강선을 끊어 버렸는데도 백유화의 신형이 끌려가기 시작했는데.
덥석.
남궁무애와 현기천이 달려와서 백유화의 신형을 잡았다.
심지어 남궁무애는 줄에 매달려 이리저리 허공에서 부딪히고 있는 금채홍과 서하린, 그리고 황태자와 차경철의 신형을 땅으로 내리기까지 했다.
현경은 현경이었다.
“꺄아아아악! 초월경 두 번 됐다가는 다 죽겠네.”
“크윽! 아무리 공자님이 무공의 천재라고는 해도 초월경은 너무한 거 아냐?”
콰아아아아앙!
다시 한번 천일영의 몸속 깊은 곳에서 기운이 터졌다.
조금 전 십만 개의 번개가 만드는 것보다 두세 배는 더 강한 기운이 날아들자, 땅바닥에 달라붙은 백유화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머리를 들었다가는 날아갈 것만 같은 강풍이 계속되었다.
번개도 계속 떨어져 내렸다.
반 각 동안 거대한 섬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는데.
후우우우우욱!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하늘과 사방으로 수백 장에 걸쳐 퍼지던 기운은 한순간에 천일영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마지막으로 몸 주변을 떠돌던 희미한 빛까지 모두 빨려 들어가자, 천일영은 매미처럼 지면을 부여잡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몸을 일으켰다.
서하린과 금채홍, 그리고 백유화가 몸을 일으키며 비틀거렸다.
“공자님!”
“미안하구나. 깨달음을 얻었는데 이 지경이 될 줄 몰랐다.”
흙먼지에 뒤덮이고 초췌한 사람들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섬에는 나무는커녕 풀 한 포기조차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자칫 큰 상처를 입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천일영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다들 어찌 된 것인지 궁금해하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천일영은 애써 입을 열었다.
“이제 혈천회와 싸워서 지지는 않을 정도는 된 것 같다.”
“정말인가요? 생사경? 초월경? 둘 중에 어떤 경지에 오르신 건가요?”
“초월경이다.”
“……!”
현기천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조금 수상쩍다고 생각했다.
번개가 내리치고 몸이 떠밀려 가는 바람이 불었을 때는 혹시 진짜일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하지만 정작 천일영의 입으로 이야기를 들어 보니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금채홍이 백유화를 밀어내며 몸을 앞으로 빼냈다.
“공자님! 초월경에 이르면 어떤 무공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아직은 나도 잘 모르겠구나. 사실 나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태고의 신선이 세상의 모든 기운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한 말이 문득 떠오른 천일영이 오른손에 마공의 기운을 눈에 보이도록 형상화시켰다.
스으으윽.
그냥 생각만 했는데 정말로 기운이 모였다.
짙은 회색의 기운이 일렁이며 하나의 구를 형성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왼손에는 사혈련의 사기를 떠올려 원을 만들어 봤다.
이것도 뜻대로 그냥 됐다.
그리고 그것을 한곳에 뭉치니.
파지지지직!
짙은 푸른색의 새로운 내공의 덩어리가 생겼다.
그 기운에 어찌나 강한 내공이 담겨 있는지, 근처에 가는 것만으로 살가죽이 찢겨 나갈 것만 같은 예기를 뿜어냈다.
만약 이것으로 검강을 만들어 검에 두른다면.
‘검이 살갗을 스치기만 해도 몸통이 전부 잘려 나가겠군.’
백유화는 그 서늘한 느낌에 침을 삼켰다.
스르르륵.
두 개의 기운이 모여 여태 느껴 보지 못한 새로운 기운이 된 둥근 구는 천일영이 마음먹자 이내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다들 그 광경을 눈이 빠지도록 지켜봤다.
두 개의 기운을 섞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것이 자유자재로 몸속에 스며들어 간다는 것은 그 어떠한 기운이라도 받아들인다는 말.
즉, 내공으로 공격을 하는 것은 이제 천일영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기운을 전부 빨아들여서 흡수해 버릴 테니.
“이보게! 자네, 어째서 여기에 있는 것인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번에는 현기천이 금채홍을 밀어내고 몸을 내밀었다.
“우화등선을 어째서 하지 않았냐는 말일세. 초월경이면 이미 선계로 갔어야 하는 것을!”
“깨달음을 얻었을 때 태고의 신선께서 말을 걸어 주셨습니다. 하우와 하계를 맡긴다고 하시더군요.”
“뭐라? 태고의 신선을 만났다고? 여보게, 그분께서 우리에게 전한 말 같은 것은 없었는가. 이 현기천과 무진에게 말이네.”
“아…….”
아무 말도 없었다.
남궁무애와 금채홍을 잘 부탁한다고는 했어도.
수천 년 동안 술이나 마시고 노느라 수련을 게을리했던 것인지, 아니면 초월경의 경지는 오를 수 없다고 생각하여 반쯤 포기를 하고 있었던 것인지는 모른다.
‘어쨌든 태고의 신선에게 꽤 신용 받지 못하는 모양인지도.’
천일영은 한껏 꾸민 웃음을 지었다.
“잘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저에게 무공을 가르치느라 고생이 많았고, 또한 하우와 하계의 심장을 지키는 일을 잘하고 있다고요.”
“태고의 신선께서 그런 말씀을! 전해 줘서 고맙네. 정말로 고마워.”
손을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는 현기천에게 거짓말을 한 천일영이지만, 찔리지는 않았다.
아무 말도 없었다고 하면 정말로 상처받을 것 같았으니까.
천일영은 모두에게 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다들 돌아가자. 내일까지 푹 쉬고 다시 수련을 시작해야지.”
“네!”
수백 년이 된 나무까지 전부 뽑혀 날아가 버렸을 정도니, 별유천지에서 가져온 식량까지 전부 사라졌다.
밥도, 물도 없으니 돌아가야 하는 수밖에 없었던 터라 모두는 배에 올라타서 항주를 향했다.
* * *
세 시진이 지난 후.
두 명의 신형이 살문도에 나타났다.
그들은 살기가 어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이를 갈았다.
“어디에 있냐. 이 망할 년, 죽여 버리겠다.”
“살아오면서 이런 배신감은 처음일세.”
천량도사와 도철용은 수십 리를 날아가 버리는 바람에 여태 헤엄쳐서 살문도로 돌아왔다.
강선을 놓아 버린 백유화를 찾는 대로 따지려고 했는데.
“아무도 없구먼.”
“아니…… 나무하고 바위, 그리고 풀과 함께 날아가서 섬에 아무것도 없을 줄은 알았는데 사람까지 없을 줄이야.”
“설마 우리를 잊고 항주로 돌아간 것인가.”
“끄응.”
세 시진이나 수영을 하면서 왔으니 지칠 대로 지친 천량도사와 도철용은 땅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서러운 감정이 밀려왔다.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은 지경이었는데.
꼬르르르르륵.
배에서 소리까지 울렸다.
천량도사가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상어나 잡아먹을까…….”
“그럴까요…….”
끙차.
두 명의 노인은 몸을 일으켜 다시 바다로 뛰어들었다.
너무 열받고 서러워서 그들은 상어를 두 마리나 잡아 버렸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나무가 없구먼. 내공으로 불을 터트린다고는 해도 나무가 없으면 옮겨 붙이지 못하는데…….”
“생으로 먹을 수도 없고.”
두 노인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맑고 푸른 하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