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별유천지에서 실컷 저녁을 먹은 금채홍은 평소처럼 침상에 몸을 눕히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힘든 수련에 투덜거리기는 했어도 오늘 공자님이 초월경에 들어선 것을 보니, 마음속에서 가라앉아 있던 무공의 상승심에 불이 지펴졌다.
좀이 쑤셔서 무공의 수련을 하려고 밖으로 나온 금채홍은 연무장에 도착하자 깜짝 놀랐다.
“언니들과 오라버니들? 어째서 쉬지 않고 여기에 계신 건가요?”
“응? 채홍이 너야말로 왜 쉬지 않고 연무장에 왔어?”
서하린이 금채홍에게 되묻고, 곁에 있는 백유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건청과 타진표, 그리고 차경철도 마찬가지로 금채홍을 바라봤다.
그중 차경철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오늘 그런 엄청난 광경을 봐서인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다들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군.”
“하아, 초월경이라니. 그런 경지가 있기는 했네요.”
천일영이 초월경에 오른 것은 상당히 충격이었다.
전례가 없이 무림 역사에서도 천일영이 최초였고, 특별할 수밖에 없는 그 의미는 서하린에게 유독 가슴 깊숙이 박혀 들었다.
‘천마신교의 무공은 탈마가 끝이라는 게 정설이다. 그런데 그 벽을 깼다. 이것은 마공을 다루는 사람에게도 끝없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서하린은 이미 이십 대 초반에 절정 고수에 올랐으면서도 탐욕에 빛나는 눈길을 지우지 못하고 수련에 돌입했다.
그 모습을 본 금채홍도 수련에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가부좌를 했다.
‘아까 공자님의 몸에서 터진 기운이 뭔가 이상하게 익숙하게 느껴졌어. 그리고 신기하게도 기운이 공자님의 몸 안에서 도는 게 보인 것 같았는데.’
공자님 그 자체에 깨달음의 단서가 있는 것 같았다.
금채홍은 가부좌한 상태에서 과거 공자님이 내려 주었던 깨달음의 단서를 조금 전 본 것과 연관 지어 생각했다.
신선의 피를 이어받아 천일영의 기운을 다른 누구보다도 강하게 느꼈던 금채홍은, 전부는 아니어도 낮에 보았던 기운의 움직임을 떠올리고 그대로 흉내 내기 시작했다.
반 시진이 지나고.
이내 가부좌한 지 한 시진이 가까워졌다.
‘절정 고수는 단전의 기를 혈도로 고이게 하여 기운을 꺼내 쓴다. 초절정 고수는 온몸의 기운을 돌리고 혈도와 기도를 자유롭게 이용한다고 했는데.’
과연 어찌 온몸의 기운을 돌릴까.
정답은 기도는 더욱 열고 사방으로 통하게 만들면 된다.
지금은 온몸에 퍼진 혈도를 따라 정해진 기도를 통해서 기가 움직이지만, 그 제약을 없앤다.
발끝에 있는 혈도로 기운을 보내는 데 머리와 통하는 기도를 사용해 기를 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하면 온몸의 기운을 마음껏 돌릴 수 있다.
즉 그동안은 팔에 기운을 보내려면 팔과 가장 가까운 기도가 자연히 기운을 보냈지만, 이제는 온몸의 기도를 통해서 제약 없이 기운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광경은 공자님의 온몸을 휘몰아치던 기운의 움직임이 유독 선명하게 보여서 단서를 가지고 있었다.
금채홍은 기도를 활짝 열고 그동안 사용하던 기도 대신 다른 기도를 통해 온몸에 기운을 보냈다.
그리하자 그동안 금제처럼 혈도에만 고정되어 있던 기운이 온몸을 타고 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잘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을 때.
‘움직이는 기운을 한곳으로 집중시키기도 하고, 또한 몸 밖으로 꺼내어 호신강기와 검강을 사용한다는 것은…….’
빠르게 기도를 타고 흐르는 기운을 팔에만 모아 보았다.
된다.
이번에는 발에만 모아 봤다.
역시 자연스럽게 됐다.
그 순간.
화아아아아아악!
기운이 솟구쳤다.
경지를 넘어서며 내뿜는 기운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금채홍이 절정 고수의 벽을 깨고 초절정 고수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가부좌하고 기운을 흡수하고 있는 금채홍을 보는 눈길은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절정 고수가 된 지 일 년도 안 됐다.
그런데 나이 이십 대 초반의 여인이 벌써 초절정 고수.
이것은 역사에 기록된 무공의 천재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일컬어진 남궁무애보다 겨우 삼 년 뒤졌을 뿐인 깨달음이었다.
신선의 피를 가진 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운을 돌린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바로 해내는 것은 다른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채홍이가 벌써!’
모두가 경악하면서도 축하하는 눈빛을 금채홍에게 보낼 때 서하린만은 씁쓸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처음 채홍이를 만났을 때, 저 녀석은 일류 고수였다.’
무인으로서는 수치가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절정 고수에서 아직도 머물러 있는데 한참을 앞질러서 가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라면 자존심이 상하는 것으로 끝나고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을 것이었다.
‘여태까지는 공자님께서 볼일을 보러 나가실 때 유화 언니를 주로 데리고 다니셨지만, 이제부터는 초절정 고수가 된 채홍이도 자주 동행시키시겠지.’
금채홍과 천마님이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신에게는 불리해진다.
서하린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나에게는 시간이 반년밖에 없어. 이후로는 천마신교로 돌아가야 해. 그런데 어째서 채홍이 네가 초절정 고수가 된 거니.’
탓할 마음은 없었는데도 자꾸만 원망의 가슴을 헤집었다.
자신의 연정이 점점 추하게 변해 가는 것을 느낀 서하린은 고개를 가로젓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냐. 천마님께서 같이 놀러 가자고 말씀해 주셨어. 그건 나에게 아주 마음이 없지는 않다는 것을 뜻하는 걸 거야.’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했다.
공자님을 정말로 사모하지만, 채홍이도 진심으로 좋아한다.
하지만 연심이라는 것은 별개다.
공자님이 채홍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깨닫기 전에 먼저 자신의 마음을 알리는 게 중요했다.
서하린은 내일 천일영에게 마음을 다해서 진심을 알리겠다고 결심했다.
* * *
운기조식이 끝난 금채홍의 손에 이끌려 백유화와 함께 우물가로 온 서하린은 온몸을 깨끗하게 씻었다.
괜찮은 척하려고 눈에 힘을 주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금채홍이 손을 잡아 왔다.
미안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금채홍이 말했다.
“언니, 미안해요. 내가 먼저 초절정 고수에 들어서요.”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내가 모자란 것뿐인데. 그만큼 네가 잘난 거니까 신경 쓰지 말아.”
“언니…….”
서하린은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는데.
“미안, 내 말투가 나빴네. 채홍아, 축하해. 초절정 고수라니 정말 대단하네. 대견해.”
“아니에요.”
배시시 웃는 금채홍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서하린은 빠르게 씻고 새 옷을 몸에 걸쳤다.
“천천히 씻고 내려와. 나는 먼저 가 있을게.”
“언니! 같이 가요”
그때 백유화가 금채홍의 어깨를 잡았다.
“하린아, 먼저 내려가라. 우리는 나중에 갈 테니.”
“고마워요, 언니.”
서하린이 서둘러 내려가자 금채홍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떡해요. 내가 먼저 경지에 드는 바람에 하린 언니가 마음이 상했나 봐요.”
“네 잘못이겠니. 무공을 수련하는 사람이라면 다들 이런 상황에서 웃기만 할 수는 없을 테지. 하린이뿐만 아니라 지금쯤 건청도 마음이 착잡할 거다. 얼굴은 웃고 있었다만.”
“하아, 어떻게 하면 좋아요? 이런 걸 바란 게 아닌데…….”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겠지. 다들 서운해한다고 해서 너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통 가족이니. 잠시의 감정에 혼란을 느낄 뿐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네, 언니.”
금채홍은 멀어져 가는 서하린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작고 초라해 보였다.
가녀린 어깨는 더욱 움츠러든 것같이 보이기도 했다.
어쩐지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가서 금채홍은 서둘러 옷을 입기 시작했다.
이대로 서하린이 천마신교로 떠나 버리기라도 한다면 금채홍은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다.
* * *
다음 날.
서하린은 밥을 먹고 별유천지 앞에 있는 바닷가에 나왔다.
어젯밤.
씻고 내려오는데 금채홍이 쫓아와서 다시 말을 걸었었다.
괜찮지 않았지만, 괜찮다고 금채홍에게 다시 말했다.
울음을 터트리려고 하길래 꼭 안아 주며 몇 번이고 말해 주었다.
신경 쓰지 말라고.
내가 오히려 속이 좁아서 미안하다고.
겨우 금채홍이 울음을 터트리기 전에 마음을 달래 주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서 누웠다.
모든 것을 잊고 싶어서 빨리 잠이 들려고 했는데.
‘결국 아침까지 뜬눈으로 지새웠지.’
잠이 오지 않았다.
끼이익!
하늘에서 참매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살문도에 가기 전에 천마신교로 전서구를 보냈는데 답신이 왔다.
서하린이 손을 들어 올리자 참매가 내려앉았다.
[계속 천일영을 추적하되, 빠른 시일 안에 천마신교로 복귀해서 자세한 추적의 경위를 설명하라.]
간단한 편지였다.
하지만 평소 같지 않은 문장에 서하린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동안은 추적의 경위는 편지만으로 충분했고, 빠르게 돌아오라는 말은 한 번도 없었다.
슬슬 돌아올 때를 정하라는 말은 있었어도.
게다가 문장을 보니 천마가 된 패범휘가 쓴 것이 분명했다.
‘평소라면 흑뇌마왕 마염지가 답신을 보냈을 텐데. 게다가 답신도 상당히 늦었다. 보통은 오가는 데 오 일 정도 걸리는 편지가 열흘이 넘어서 도착했어.’
편지를 마염지에게 보냈으니, 답장도 그에게 오는 것이 맞았다.
서하린은 급히 편지지를 들어 냄새를 맡았다.
혹시 천리미향이라도 발라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킁킁.
소리 나게 숨을 들이켰지만, 냄새는 없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오십여 개의 천리미향을 모두 구별해 낼 수 있는 독천마왕의 능력으로도 편지지는 의심할 여지 없이 깨끗했다.
안도하는 마음이 서하린의 가슴에 퍼졌다.
서하린은 발걸음을 돌려 천일영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천마신교에서 빨리 돌아오라는 말을 한 이상, 마음이 더 급해졌다.
* * *
천일영은 온종일 밀린 일을 하느라 바빴다.
특히나 요소령이 보낸 전서구에 많은 신경을 쓰는 듯했다.
파양호에 만들어진 이상한 공간에 대해서는 곧 항주에 도착할 도현과 소초련이 상세하게 설명할 계획인 것 같았다.
상단 역시 천일영이 허가를 내려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이 많았기에 그곳에서도 오랜 시간을 보냈다.
서하린은 천일영과 단둘이 있을 시간을 만들지 못해서 안절부절못했다.
그렇게 낮이 온전히 지나고 밤이 되었을 때.
이번에는 금채홍이 초절정 고수가 된 것의 축하연이 벌어졌다.
술판이 시작되고 꽤 많은 양의 술병이 탁자를 채웠다.
계속 금채홍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했다는 천일영의 눈매는 애정이 가득했고, 곧 금채홍을 좋아하는 마음을 깨달을 정도였기에 서하린의 마음은 더욱 다급해졌다.
술을 마시며 모두와 오랜 이야기를 나누던 천일영이 바람을 쐬기 위해 바닷가로 나왔을 때야 서하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기회가 온 것이었다.
서하린이 천일영의 뒤를 따라 바닷가에 나란히 섰다.
기척을 느낀 천일영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다. 오늘은 전에 약속한 대로 너와 놀아 주려고 했는데 바빠서 시간을 못 냈구나.”
“괜찮아요. 어쩔 수 없다는 걸 아니까요. 대신 다음에는 꼭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그러자.”
“단둘만이요.”
“하하하. 갑자기 묘한 말을 하는구나. 알았다.”
붉게 물들어 가는 얼굴의 서하린은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막상 따라 나오기는 했는데, 마음을 전하려고 하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서하린은 마음을 굳게 먹고 입을 열었다.
“사실은 천마님께 꼭 드릴 말씀이 있어요.”
“오늘 평소답지 않게 조금 이상하구나?”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예요.”
“말해 보아라.”
서하린은 가슴 깊이 숨을 들이켜고는 결심했던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저는 천마님을 정말로 좋아해요. 진심이에요. 그러니 저와 혼례를 올려 주세요. 제 마음은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고,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부디 저를 선택해 주세요.”
“하린아!”
천일영의 가슴이 철렁했다.
서하린의 말은 평소 해 오던 ‘혼례 해 주세요’와는 확연히 달랐다.
아무리 둔감한 천일영이라고 할지라도 모를 수가 없었다.
이것은 허무하게 허공으로 흩어지는 ‘말’이 아니라.
깊이 생각하고 오랜 시간 마음속에 품어 둔 ‘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