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신귀환기-259화 (260/270)

259화

천일영과 서하린 사이에서 정적만 흘렀다.

바닷가에서 나는 파도 소리만이 고요함을 메울 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천일영은 잠시 서하린의 아버지인 독천마왕 서가흔을 떠올렸다.

‘전에 같이 술이 마실 때 하린이를 데려가라던 농담을 하더니만.’

과거를 떠올리던 중 갑자기 생각났다.

서하린의 말로는 자신이 혼례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했는데, 아무리 언제 그랬냐고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기억이 지금에서야 떠올랐다.

‘서가흔이 아직 일곱 살쯤 된 서하린을 두고 술을 마시던 중에 내 딸과 결혼하라고 했었지.’

그때 천일영이 대답했었다.

‘커서 미인이 되면 그러지.’

아무 생각 없이 농담처럼 내뱉은 한마디.

십오 년이 넘은 그때의 기억을 서하린이 계속 품으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은 천일영은 눈을 감았다.

서하린이 그때부터 변치 않는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봐 주었으니.

대답을 회피하는 것은 안 된다.

진심은 진심으로 대하는 것이 맞기에.

“하린아, 미안하구나. 네가 미인이 되었는데도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셨군요…….”

“지금 막 생각났다. 하지만 그때의 마음처럼 나는 너를 사모하는 사람으로 보지는 못하는구나. 십오 년쯤과 마찬가지로 너는 내게 친우의 귀여운 딸이다. 물론 너를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아니에요. 왠지 이렇게 대답하실 줄 알았어요.”

“하린아, 오랜 시간을 너와 함께하면서 네가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던 적은 없다.”

“알아요. 친구의 딸이니까요. 흐흑.”

울지 않으려고 버텼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서하린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한 가지.

마음을 거절당하고 추하게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기에 서하린은 방을 향해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천일영이 서하린을 잡았다.

“하린아,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하다.”

“흐흐흐흑.”

천일영이 서하린을 꼭 껴안았다.

이대로 보내는 것은 더한 죄를 저지르는 것만 같아서 놓을 수 없었다.

서하린은 천일영의 품에 안겨서 한참을 울었다.

그저 우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천일영은 그런 서하린을 안고 일 각이 지날 때까지.

그리고 이후로도 이 각과 삼 각이 지나고 반 시진이 될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그것만이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기에.

여전히 바닷가는 정적이 흘렀다.

다만 이제는 파도 소리보다 서하린의 울음소리가 더 컸다.

* * *

반 시진이 지나고 서하린은 천일영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아직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지만, 억지로 참았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말은 나오지 않고 눈물만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공자님, 저는 잠시 천마신교에 다녀오겠습니다.”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냐.”

“잠시만 떠나 있겠습니다.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때마침 천마신교에서 잠시 돌아오라는 전서구가 왔습니다.”

“그러냐. 하지만 약속 하나만 해 다오. 아무리 늦어도 두 달 안에는 돌아오거라.”

“수련을 계속해야 하니까 저도 그러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련 때문이 아니다. 네가 내 눈에 보여야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았느냐. 너는 소중한 사람이라고.”

소중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혼례를 올릴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것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래도 공자님의 곁에 있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하린은 천일영과 이 이상 같이 있다가는 또 눈물을 흘릴 것 같아서 몸을 일으켰다.

“내일 먼 길을 떠날 테니 미리 준비해야겠어요.”

“알았다.”

서하린이 뛰어서 별유천지의 뒤편에 있는 집을 향했다.

천일영은 등 뒤로 울리는 발소리를 들으며 밤하늘을 바라봤다.

입에서는 탄식이 흐르고 마음은 찢길 듯했다.

“미안하다, 서가흔. 네 딸을 울려 버리고 말았구나.”

이렇게 되기를 바란 적은 없건만.

천일영은 서가흔에게.

그리고 서하린에게 미안한 마음을 안고 그저 바다에 앉아 있기만 했다.

* * *

밤새 울다가 지친 서하린이 잠이 든 것은 해가 뜨고 난 이후였다.

한 시진 정도 졸았던 서하린은 퍼뜩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왔다.

이미 예서란과 혜령은 학당으로 가 버린 후였고, 다른 사람들은 살문도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제가 너무 늦게 잠에서 깼네요. 그런데 왜 아무도 깨워 주지 않은 거예요?”

“그냥 피곤한가 보다 했지.”

백유화가 웃음을 지으며 서하린의 부은 눈을 지그시 눌렀다.

부은 것을 가라앉히는 혈이었다.

‘밤새 그렇게 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침에 어떻게 깨워.’

대충 무슨 일인지는 알 것 같았다.

공자님이 착잡한 표정으로 서하린을 그대로 두라고 했으니까.

“잠시 천마신교에 돌아간다지? 두 달 안에는 온다고 약속했다니까 그때 보자. 잘 다녀오고.”

“네, 두 달 후에 뵈어요.”

백유화가 서하린의 붓기를 가라앉히고 등을 돌리자 금채홍이 고개를 숙인 채 다가왔다.

아무래도 밤새 서하린이 운 이유가 자신이 초절정 고수에 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언니, 미안해요. 그래도 두 달 뒤에는 꼭 돌아오시는 거죠?”

“공자님하고도 약속했으니까 돌아올 거야.”

“언니가 돌아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릴게요.”

눈물을 글썽이는 금채홍을 보자니 마음이 저렸다.

이 착한 아이에게 모진 소리를 한 자신이 미워졌다.

서하린은 천일영과 함께 군항에 배를 대 놓은 곳까지 사람들을 마중했다.

본디 군항은 민간인이 쓰지 못하지만, 항주에서만큼은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유의선이 배려해 줬다.

그곳에서 금채홍과 다른 사람들을 살문도로 떠나보낸 서하린은 천일영과 단둘이 남자 부끄러운 느낌에 몸 둘 바를 몰라서 고개만 숙였다.

천일영도 그 마음을 헤아렸는지 먼저 말을 꺼냈다.

“항주 위에 있는 강소성의 장가항(張家港)에 오늘 요소령과 도현, 그리고 소초련이 도착한다. 나는 그들을 데리러 다녀오마.”

“돌아오시면 저는 없겠네요. 아침에 혜령과 서란이를 못 봤으니 학당에서 돌아오면 인사하고 바로 출발하려고 합니다.”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훅!

천일영의 신형이 사라졌다.

전에는 잔바람이라도 남기고 신형이 사라졌는데 이제는 그것조차 없었다.

소리조차 없이 천일영이 떠나자 서하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밤에 고백하고 마음을 거절당했는데 같이 있는 게 너무도 부끄러웠다.

“하아, 아침이나 먹…… 아니, 입맛이 없네. 짐이나 챙겨야겠다.”

서하린은 방으로 돌아와 봇짐을 챙겼다.

한동안 지냈던 방은 천마신교에 있는 방보다 훨씬 작았지만,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곳이었다.

이곳을 잠시라도 떠난다는 게 마음이 아팠다.

“그러고 보니 월영한테도 인사를 해야지.”

자경단을 지휘하느라 살문도에서 수련하지 않는 월영이 떠오른 서하린은 천일영의 생각도 머릿속에서 지울 겸 밖으로 나섰다.

아마 다녀오면 딱 혜령이 돌아올 시간일 터였다.

* * *

월영에게 인사를 하고 오니 딱 점심시간쯤이었다. 아마도 지금쯤 살문도로 간 사람들은 절반쯤 갔을 테고 공자님은 요소령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하린은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천이영에게 밥을 달라고 하고는 빈자리를 찾았다.

지금 먹고 출발하지 않으면 가는 길에 고생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마침 구석 한쪽에 빈자리가 보여서 그쪽으로 가는데.

“섬서성에 계신다는 독천마왕께서 왜 절강성의 항주에 계시는지요?”

싸늘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드는 순간 서하린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목소리만으로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특유의 낮으면서도 뭉개지는 탁한 소리.

검에 목을 뚫렸을 때 성대가 망가지면서 나는 음성이었다.

“서무길? 네가 여기에 왜!”

“수상해서 편지에 천리미향을 발랐습니다. 그랬더니 새가 이곳으로 안내하더군요.”

“천리미향?”

한껏 경계하면서도 서하린은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전서구가 가지고 온 편지에서는 아무런 냄새를 느끼지 못했다.

서무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였다.

“천마신교에 너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셔서 잊으신 모양입니다. 독을 다루는 또 하나의 가문이 있다는 것을요.”

“사독마왕 갈현평!”

“맞습니다. 그가 독천마왕께서 눈치채지 못하는 새로운 천리미향을 만들었습니다.”

뿌득.

서하린은 이가 갈리면서도 마땅히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서무길.

천마신교의 마왕 중에서도 특히나 무공이 약한 흑뇌마왕을 보좌하기 위해서 특별히 키워진 사람.

서무길은 다른 마왕들이 거느리는 수하들과 비교해도 유독 강한 편에 속했다.

약한 무공을 가진 흑뇌마왕을 지키려면 남들보다 더 강해야 했고, 마염지가 밖으로 나갔다가 정파에게 습격을 당했을 때 이십 대 일로 싸워 이긴 전적도 있었다.

뭉개지는 발음은 그때 입은 상처 때문이었다.

중원 십육 대 고수 중에서 열 번째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사람.

그가 소면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도현과 소초련은 어디에 있습니까.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는데요.”

“그 둘을 왜 나에게서 찾아? 나는 분명 섬서성에 있다가 얼마 전에 이곳으로 왔다. 도현과 소초련의 행방 따위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그런가요.”

연신 소면을 먹고 있는 서무길은 그릇째 들고 국물까지 마시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는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만약에 서무길이 어제나 오늘 아침에 항주에 왔다면 초월경에 오른 공자님이 모를 리가 없었으니까.

‘이대로 거짓말을 해서 잘 넘기기만 하면.’

서하린은 서무길의 앞에 있는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군. 기감으로 살펴도 이곳에 아무도 없다는 것쯤 알 텐데.”

“그러게요. 그래서 난감합니다.”

“어차피 나도 천마신교로 돌아가려던 참이다. 같이 가면 될 것 같은데.”

“끄윽!”

서무길은 소면 그릇을 내려놓고 트림을 했다.

그리고는 정말로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기본적으로 독천마왕님의 편입니다. 전 천마 천일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섬서성에 있다가 이곳으로 왔을 수도 있죠.”

“그 말대로다.”

“하지만 천마신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답니다? 아무래도 이곳이 수상하니 닥치는 대로 죽여서 도현과 소초련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때는 같이 천마신교로 돌아가시지요.”

“……!”

서무길의 얼굴에 잔악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것이 진짜 서무길의 얼굴.

소면을 먹을 때의 모습은 그가 한껏 꾸몄을 때의 얼굴이었고.

‘결국은 나를 믿지 않는다는 말이지.’

당연한 말이지만 천마신교의 마왕쯤 되면 객잔 하나 날아가는 것쯤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이것은 서무길이 서하린에게 시비를 거는 게 아니라 정말로 믿을 수 있는지 증명하라는 것이었다.

서하린은 의자에 편하게 기대었다.

“마음대로 해.”

“오호? 역시 마왕님이시군요.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서무길이 몸을 일으키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 아홉이 같이 일어섰다.

그들 중에서 하나는 절정 고수이고, 나머지가 일류 고수.

빠르게 전서구를 쫓아오느라 일류 고수보다 실력이 달리는 자는 데려오지 않은 듯했다.

‘천이영 여주인은 소란이 일어나는 대로 객잔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피신시킬 거다. 건청이 점소이들에게 그렇게 교육했으니까.’

애써 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며 서하린은 팔짱을 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기도 했지만, 실상은 보이지 않는 손가락의 틈으로 비침 통을 끼우기 위해서였다.

손님들에게 검을 날리는 즉시 비침을 날리면 일격필살(一擊必殺)의 기회가 쥐어진다.

‘서무길을 쓰러트리면 절정 고수를 죽이고 승기를 따낸다.’

서하린이 웃음을 지으며 서무길을 바라보는 순간.

그도 웃음을 지으며 어딘가를 바라봤다.

끼익.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신형 하나.

서무길이 그 신형을 보며 말했다.

“저 아이부터 시작하지요.”

“아이?”

서하린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혜령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필이면 학당이 끝나서 집에 오는 시간이었다.

서하린의 표정을 보고 뭔가가 있다는 것을 눈치챈 서무길의 검날이 검집을 떠났다.

빠르게 신형을 날려 혜령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순간.

콰직!

촤아아아악!

혜령을 막아선 서하린의 가슴팍이 통째로 갈라져 나갔다.

비침으로는 혜령을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은 탓에 몸으로 막아 버린 것이었다.

순간 객잔에 비명이 터졌다.

“하린 언니야!”

붉은 피가 허무하게 사방으로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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