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휘이이잉.
십만대산에 바람이 분다.
천일영은 남궁무애와 백유화, 그리고 금채홍과 무명암살대 천 명을 곁에 두고 눈앞에 있는 이만 명의 천마신교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정마대전을 일으키던 날.
아무도 모르게 천일영이 천마신교를 떠났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이미 무명암살대의 보고로 진형까지 파악한 천일영이 수월여낙을 들고 걸어 나갔다.
이만 명이 도열(堵列)한 가운데.
천검마왕의 수하 전재찬이 서 있는 곳을 기점으로 총 열다섯의 초절정 고수가 앞에 나와 있었다.
가장 앞서 있던 전재찬이 천일영에게 다가와 말했다.
“기어이 죽으려고 아득바득 여기까지 오다니. 전 천마께서는 무슨 이유로 이곳까지 다시 오셨습니까. 이미 새로운 천마가 들어섰으니 그냥 돌아가시지요. 그리하면 옛정을 생각해서 목숨은 보전해 드리겠습니다.”
“천검마왕의 수하인 전재찬이군. 너는 서하린이 죽음과 연관이 있는 자인가.”
“독천마왕이 죽었다고요? 푸하하하핫. 그거 잘됐네요. 마왕의 자리가 줄어들면 제가 모시는 천검마왕님께서도…….”
촤아아악!
전재찬의 목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피가 뿌려졌다.
신형이 땅으로 쓰러졌다.
이만 명의 군세를 믿고 되는대로 말하다가 죽었다.
하지만 모두가 침음을 삼키며 그 광경을 보고도 공격의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나이 육십칠 세의 초절정 고수.
천검마왕 목천향의 수하인 그가 죽었다는 것은 알지만 어찌 죽었는지도 아무도 못 봤다.
그러나 부득불 각 마왕의 수하들은 천일영의 앞을 가로막았다.
전재찬의 죽음을 보았기 때문인지 무려 열 명의 초절정 고수가 일제히 검을 뽑았다.
이들은 사실상 천마신교의 최고수들.
“너희는 서하린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자들인가.”
“관련이 있다면 어쩔 것인가!”
“그것이 너희가 살아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천일영이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서늘한 기운이 천일영의 몸을 감싸다가 순간 옆으로 퍼져 나갔다.
촤아아악!
목 세 개가 날아갔다.
두 번째 걸음을 내디뎠다.
쩌저적!
두 명의 신형이 반으로 갈라졌다.
내장이 튕겨 나오면서 뿌려지는 피 사이로 천일영이 세 번째 걸음을 내딛는 순간.
으저저저적!
남은 다섯 명의 초절정 고수들의 신형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으로 짓뭉개지고 쪼개져서 날아갔다.
그때를 같이하여 백유화의 손이 까딱거리자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던 초절정 고수의 몸이 수천 조각으로 잘리며 사방으로 뿌려졌다.
촤아아악!
그뿐인가.
남궁무애의 손에는 어느새 마염지가 두 번째로 아끼는 남자의 목이 들려 있었다.
이 역시 언제 잘려 나갔는지 눈앞에서 보고도 몰랐다.
남궁무애가 손에 들고 있는 목을 땅으로 던지는 순간.
촤아아아악!
금채홍이 강선으로 몸을 묶은 초절정 고수의 목을 날려 버렸다.
투두두둑.
동시에 두 개의 목이 땅을 뒹굴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신위.
세 걸음 만에 초절정 고수 열 명을 죽여 버린 천일영.
그리고 단 한 수에 초절정 고수를 도륙해 버린 세 명의 여인 앞에서 이만 명의 군세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천일영이 수월여낙을 들어 허공을 갈랐다.
의미 없어 보이는 허무한 동작에 이만 명의 무인들은 고개를 기울이면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앙!
무인들이 도열한 옆으로 높이 솟아 있던 십만대산의 커다란 산봉우리 중에서 두 개가 잘려 나갔다.
또한 검을 들어 올리자, 섬광이 터져 나왔다.
번쩍! 쩌저저저정.
콰아아아아아앙!
마른하늘에서 십만 개의 번개가 산으로, 평야로 내리꽂혔다.
쿠우우우웅!
산은 산산조각이 났고, 땅은 수만 개가 일 장에 이르는 깊이로 패여 들었다.
진형을 갖춘 무인의 주변 모든 땅이 박살 나고 초토화가 되었다.
꿀꺽.
이만 명의 무인들은 동시에 침을 삼켰다.
그때 천일영이 내공을 가득 담아 소리쳤다.
“죽고 싶지 않으면 천마가 가는 길을 막지 말거라! 내가 바로 천마이다!”
쿠우우웅!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귀를 찢듯 천마신교 전체에 울렸다.
단지 목소리뿐이지만 신형이 뒤로 밀려 나갔다.
진형을 갖추고 도열해 있던 군세가 흐트러졌다.
개중에 무공이 약한 자는 피를 토하기도 했다.
저벅. 저벅.
천일영은 앞으로 걸어갔다.
이만 군세의 정면을 향한 발걸음이다.
그 순간.
‘쩌억’ 하는 소리가 날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키며 천일영이 걸어가는 대로 길이 열렸다.
무인들은 병장기를 땅에 내리고 한 명씩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이고 땅만을 바라보았다.
길이 열리고.
그 중간쯤까지 걸어 들어간 천일영의 옆에서 큰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독마왕 갈현평의 수하 중 한 명이었다.
“뭐 하는 것이냐. 이만 명의 군세로 저놈 하나를 당해 내지 못해서 무릎을 꿇다니! 실로 천마신교의 수치가 아니더냐. 빨리 공격을……!”
촤촤촤촤촤촥!
순간 남궁무애의 신형이 떠오르며 큰 소리로 말하던 남자의 몸을 여덟 조각으로 갈랐다.
그와 동시에 그의 수하로 보이는 남자 백여 명이 일제히 천일영에게 비침을 날리려는 순간.
촤라라라라라락!
백유화의 몸에서 강선이 뿜어져 나갔다.
백여 명의 목을 강선이 휘감는 동시에.
촤아아아악!
허무하게 잘린 목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금채홍도 백여 명의 반대편에서 몸을 날린 십여 명의 일류 고수들의 암기를 튕겨 내고 그들의 목을 베어 버렸다.
그들은 갈현평의 수하 중에서 멸살대(滅殺隊)로 불리는 암기의 달인들.
평소의 방법대로 초절정 고수가 소리치면 그 뒤를 따라 일백십 명의 살수들이 암기를 날려 독을 박아 넣는 자들이었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남궁무애가 싸늘하게 말했다.
“덩치는 큰 새끼가 뒤에 숨어서 선동질이나 해대다니.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네, 천마신교는.”
사방으로 잘린 시신은 이내 천일영이 진짜인지 의심하고 있는 자조차도 무릎을 꿇게 했다.
스스로가 천일영이라고, 자신이 천마라고 말한 사람과 같이 있는 여인조차 이런 신위라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분명히 천마인 천일영이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조금 전에 여인들이 보여 준 검은 엄청난 신위였다.
남궁무애가 여덟 조각으로 초절정 고수를 잘라 버린 것은 단 일검만으로 이루어진 일이었고, 강선은 보통의 무인들에게는 보이지도 않았다.
이런 귀신같은 사람들을 수하로 두고 있다.
십만 개의 번개를 떨어트리고 산을 일검에 두 동강을 내는 것도 오금이 저리는 일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천마 천일영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벅. 저벅.
그때부터였다.
무릎을 꿇었던 사람들은 천일영이 지나가면 다시 병장기를 들고 그 뒤를 따랐다.
거대한 군세의 한가운데를 천일영이 지나왔을 때.
등 뒤로는 어느새 이만 명의 무인들이 천일영을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천일영에게 큰 은혜를 입었던 자들.
천마신교 역사상 가장 큰 부흥과 평화를 가져왔던 천일영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따르는 데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그들에게 천마는 패범휘가 아니라 천일영뿐이었으니까.
마교 5문 8각 150대대의 선봉장인 황국태의 손이 올라오자 이만 명의 무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천마님을 뵙습니다. 영원히 따를 테니 거두어 주십시오.”
“그런가. 너희들은 독천마왕의 죽음과는 관계가 없는 자들이군.”
천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천일영이 정문으로부터 계속 걸어오는 이 길은 서하린이 천마신교를 나올 때 걸었던 길이었을 터다.
그 마지막 길을 따라서 걸어온 천일영은 눈앞의 거대한 문을 바라보았다.
서하린이 보았던 풍경을 담은 눈이 휘어졌다.
천마신교의 본문으로 이어지는 이중으로 된 성문.
이곳을 통과하면 서하린을 죽게 만든 자들을 만날 수 있게 될 터였다.
* * *
“이게 무슨 일이냐! 젠장! 천일영 저 개 놈의 새끼가!”
“흑뇌마왕! 진정 좀 하시지요.”
이만의 천마신교 무인들이 배신했다.
근데 진정하라고?
천마신교 본문의 가장 위층에서 모든 것을 본 마염지가 눈이 돌아간 채 뒷목을 잡자 천검마왕 목천향이 애써 괜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본문의 정문엔 수많은 기관 장치가 달려 있습니다. 천일영이 천마신교를 떠난 후에 수많은 기관 장치를 추가로 달았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게다가 성벽은 이중의 화강암으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백 년 전에 남궁무애라는 년이 성벽을 검으로 모조리 잘라 버리는 바람에 화강암을 사용해서 무너지지 않는 것으로 바꿨다고 기록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어찌 안심합니까.”
“새로이 천마가 되신 패범휘께서 계시는데 무엇이 걱정입니까. 그분은 천일영과 같은 탈마의 경지입니다. 게다가 탈제명부음도 있습니다.”
목천향의 자신 있는 말에도 마염지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기관 장치는 수천 명을 죽일 수 있을 만큼 강력했고, 이중의 화강암으로 만든 성벽은 탈마의 경지라 할지라도 쉽사리 베어 내기 힘들 터다.
두께가 이 장에 달하는 성벽이다.
성문은 또 어떠한가.
쉽사리 뚫지 못하는 기관 장치가 스무 개나 달려 있다.
그럼에도 마염지는 불안했다.
‘무려 탈마의 경지다. 아무리 탈제명부음이 있다고 해도 목천향은 천일영의 경지를 너무 우습게 보고 있다.’
표정이 어두운 것은 마염지뿐이 아니었다.
사독마왕 갈현평도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천검마왕 목천향은 과거 있었던 귀주성 전투에서 천일영의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저렇게 말할 수 있겠지.’
심지어 전전 천마가 아무리 살심에 취하여 사지 분간을 못 한다 해도 그를 단 일검에 죽인 사람이다.
갈현평은 지금이야말로 모든 전력을 동원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넘어가 버린 이만 명은 어쩔 수 없습니다. 게다가 성문이 뚫린다 해도 좁게 만들어진 곳이다 보니 일부만 들어올 수 있지요. 그러니 모든 전력을 꺼내어 문 뒤에 배치하면 각개 격파가 가능할 것입니다. 저는 사독 가문의 무인 일천 명을 배치하겠습니다.”
“저희 천검 가문에서도 일천 명을 내놓겠습니다.”
마염지도 갈현평과 목천향의 말에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병법으로 생각해도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저희는 무인의 수가 적으나 그래도 오백 명은 데려올 수 있습니다.”
“도합 이천오백이군요. 충분히 승기가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혈천회에서 알려 준 무공을 배웠습니다.”
“그 무공을 사용하면 아무리 천일영이라 해도 당해 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무림의 절대 고수를 잡기 위해서 혈천회에 사정하여 배운 것이 아닙니까.”
마염지가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기관 장치로 방어 태세를 굳히고 특별한 무공을 배운 이천오백 명으로 상대하면 천일영이라 해도 별수 없을 터다.
전서구를 통해 무인을 부른 마염지가 상황을 살피기 위해 창밖을 내다봤다.
“……!”
그 순간 마염지는 등 뒤로 이만 명의 무인을 거느린 천일영과 눈이 마주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아니다. 저놈! 분명 나를 보고 있다.’
잘못 볼 리가 없었다.
눈동자에 선명하게 붉은색의 테두리가 있었다.
그 눈에는 분명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고, 얼음처럼 차가운 눈동자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볼 것만 같은 서늘함까지 서려 있었다.
성벽과 성문을 앞두고 왜 나를 정면으로 바라봤을까?
마염지의 모골이 송연해지는 순간.
타다다닷!
천일영의 곁에 있던 천 명의 무명암살대가 각 방향으로 튀어 나갔다.
마염지는 그것을, 무력함으로 마음이 잠식당한 채 불안에 떠는 눈길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간 방향은 바로.
‘기관 장치가 있는 곳이 아닌가! 무명암살대를 해체하면서 그들을 성벽의 수비나 기관 장치의 관리 쪽으로 돌렸으니……!’
천마신교 내에서 가장 미천한 직위로 그들을 끌어내린 것인데 그것이 반대로 되돌아올 줄이야.
마염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각 가문은 무인들을 빨리 불러들이십시오! 저놈들이 기관 장치를 해체합니다!”
“뭐라고? 성문은 어찌 되었는가! 열렸는가?”
“답답하십니다! 성문도 기관 장치로 열리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 말은……!”
이제야 목천향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무명암살대는 좋지 못한 대우와 함께 성이나 문, 기관 장치의 관리를 맡으며 해체당했었다.
천일영에게 힘이 집중되는 것이 못마땅해서 강력하게 밀어붙여 없애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천마였던 천일영이 그것을 순순히 승낙했던 이유가 훗날을 대비했던 거라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도록 한 수를 두고 나갔던 것이란 말인가!’
목천향은 새파래진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