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쿠우우웅.
촤아아아악!
내공이 일 갑자에서 이 갑자에 이르는 무인들이 진형을 갖추고 공격을 해 오는 것은 상당히 위협적인 일이다.
진법은 일류 고수 이십 명이 초절정 고수를 이길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힘이 있고, 이류 무인이라 하더라도 사십 명 정도가 진형을 짜면 절정 고수 정도는 쉽게 이길 수 있다.
그래서 수는 폭력이고, 구름처럼 형태가 움직이는 진법에 익숙한 무인들이 모이면 강력한 힘이 된다.
‘내가 탈마의 경지에 머물러 있었다면 졌을지도 모르겠군.’
천일영에게 공격해 오는 광경은 무림에서 절대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중원의 모든 무림을 다 털어도 초절정 고수의 수는 이백에서 삼백 명 정도.
그러한데 초절정 고수 정도의 내공을 가진 자가 천 명이 넘도록 진형을 짜고 덤빈다면 그 누가 이길 수 있겠는가.
지금 마염지가 지휘하는 진형이 딱 그런 모양새였다.
하지만.
콰아아아아앙!
“커헉!”
“크헉!”
천일영은 굳은 얼굴로 사정없이 그들의 목을 날리고 몸통을 베어 냈다.
빠른 검속이 공기를 가르고 뻗어나갈 때마다 추형진을 만들고 있는 무인들의 목이 잘려 허공으로 떠올랐다.
각 가문의 무인들이 구름처럼 움직이며 압박해 오면 한 걸음 뒤로 무르기도 하고.
이내 추형진의 진형과 위곡진의 틈새를 찔러 무인들을 베어 낼 때면 한 걸음 앞으로 나가기도 했다.
천일영과 각 가문의 무인들은 서로 밀고 밀리기를 반복했다.
갈현평은 주의 깊게 상황을 살펴보다가 천일영이 두 걸음을 뒤로 무르는 순간 소리쳤다.
천일영의 무른 성격을 찌르기 좋은 때였다.
“지금이다! 독을 던져라!”
“네!”
사독 가문의 무인 일천 명이 독단을 날렸다.
독단은 천일영을 노린 것이 아닌, 천일영과 함께 온 여인들을 노리고 허공으로 떴다.
퍼퍼퍼펑!
허공에서 터진 독단이 하얀 연기를 내며 백유화와 금채홍, 그리고 이만 명의 천마신교 무인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후우우우웅!
독 연기가 있는 방향으로 갈현평은 탈제명부음으로 내공을 끌어 올려 바람을 쏘아 보냈다.
한 개의 독단은 일백 명을 죽일 만한 양.
그것을 천 개 터트렸으니 천일영과 같이 온 여인 두 명은 피할 길이 없을 만큼 넓게 퍼지는 독에 당해서 죽을 터다.
‘천일영! 과연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네 무른 성격이라면 저것들을 구하러 가겠지.’
진형을 짜고 덤비는 무인들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제아무리 탈마라 할지라도 말이다.
마염지와 갈현평의 얼굴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콰아아아아앙!
여태 들어 보지 못했을 만큼 거대한 충격음이 울렸다.
급하게 시선을 각 가문의 무인들에게 돌린 마염지와 갈현평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듯 굳었다.
천일영이 있던 자리로부터 거대한 바람이 불어와 마치 용이 승천하는 듯한 모습으로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올랐다.
휘이이이이잉!
독은 성벽 너머 천일영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치솟는 바람 속에 갇혔다.
게다가 흑뇌 가문의 무인들과 천검 가문의 무인들까지 모두 바람에 끌려들어 가며 독이 퍼지는 하늘까지 올라갔다.
“커헉!”
“크헉!”
허공에서 독을 들이마신 무인들이 피를 토했다.
빠르게 회전하는 바람이 만들어 내는 날카로운 예기가 무인들의 살을 베어 내고 뼈를 부쉈다.
바람은 피와 살점으로 물들어 붉게 변해 가고, 잠시 후에는 거대한 용의 모습이 되었다.
검붉은 용이 입을 쩍 벌리는 형상이 되자 마염지와 갈현평, 그리고 목천향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입을 벌리고 천하를 바라보는 것 같은 형상에 겁부터 덜컥 났다.
“비룡추각(飛龍追却).”
천일영의 낮은 목소리와 함께 붉은 용은 천마신교의 전각 가장 위층으로 날아갔다.
용이 전각의 꼭대기와 부딪히는 순간 거대한 충격으로 땅이 울렸다.
콰아아아아아앙!
지붕을 비롯하여 천마의 거처가 모조리 부서지고 파괴되었다.
사방으로 잔해가 떨어지고, 피와 살점이 천마신교 본문의 전각을 뒤덮었다.
불길하게 피가 쏟아지는 전각을 향해 천일영이 내공을 담은 목소리로 일갈했다.
“언제까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것이냐, 패범휘!”
“제법이군, 천일영.”
패범휘는 자신의 어깨로 떨어지는 먼지를 불어 내며 인상을 구겼다.
“벌레 따위가 감히 내 이름을 입에 담다니. 천일영, 네놈이 미쳤구나.”
“네 말대로 나는 미쳤을지도 모르지. 하린이가 죽은 이후로 제정신을 유지하지도 못할 정도니. 자칭 천마인 패범휘는 기다려라. 곧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 주겠다.”
“지금 당장 끌어내리지 못하는 것은 실력이 나에게 미치지 못하기 때문 아닌가.”
“아니. 그 전에 죽여야 할 놈들이 있을 뿐이다. 너는 서하린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자들을 멸살한 다음이다.”
스으으윽.
순간 천일영의 눈에서 혈광이 사라졌다.
피와 살기로 물든 눈동자에서 언제나 돌아가던 붉은색의 테두리가 없어진 대신, 청명한 기운이 들어찬 눈동자가 죽음의 그림자를 품었다.
‘이건 무슨 기운인가!’
패범휘가 혈광이 빚어내는 살기보다 수십 배는 더한 예기가 서린 눈빛에 움찔하며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을 뒤로 무르는 순간.
갈현평과 마염지, 그리고 목천향의 머리 위로 죽음과도 같은 목소리가 내리깔렸다.
“천마의 이름으로 허락하마. 이제부터 마지막 발악을 해 보아라.”
“크윽! 팔려서 천마신교에 굴러들어 온 천한 놈이 어디서 그따위 말을!”
이를 악물고 천일영을 노려보던 갈현평이 자신의 수하인 포권춘에게 눈짓을 보냈다.
마지막 발악을 해 보라고?
‘천일영! 그따위 말을 한 것을 후회할 거다. 제아무리 만독불침이라 해도 이것만은 못 당해 낸다.’
포권춘이 뜻을 알아듣고 천 명의 수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독단 주머니를 바꿔라. 그 안에 든 모든 독을 던지고 폭화를 하여라!”
“네!”
파바바밧!
무인들은 훈련받은 대로 빠르게 독단 주머니를 바꿨다.
휘이이익!
그 즉시 천 명이 던지는 천 개의 독단이 날아갔다.
퍼퍼퍼펑!
터지는 독이 새하얀 연기를 만들어 냈다.
사독 가문의 무인들은 계속해서 독을 천일영에게 던졌다.
독단 주머니에 든 수십 개의 독이 전부 사라질 때까지.
갈현평이 잔학한 표정을 지었다.
‘십만 명은 죽일 만큼의 독이다. 만독불침의 경지인 탈마의 천일영이라 할지라도 이 정도의 독을 한 몸에 받으면 눈 한 번 깜박일 시간의 반의반의 반 정도는 내공이 흩어지게 만들 수 있다.’
수하들은 훈련받은 대로 독단 주머니를 금세 비웠다.
갈현평은 냉정함을 가장한 채 속으로 승리를 확신했다.
“폭화를 한 무인들은 저 가짜 천마를 죽여라!”
명령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천 명의 무인이 천일영을 향해 뛰어들었다.
한 발 뒤로 물러선 포권춘을 제외하면 지금 날린 독단이 맹독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미혼산(迷魂散)에 맹독인 학령초(鶴靈草), 거기에 금선사(金線蛇)까지 조합하여 만든 독이니 모두 죽는 것도 모르고 뛰어든 것.
폭화를 하면 빠르게 내공이 돌면서 독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평생의 선천진기를 태우는 만큼 잠깐은 살게 된다.
그 시간 동안 천일영의 몸에 칼 몇 번만 박아 주면 된다.
‘모두 죽는다고 해도 어쩔 수 있나. 천일영을 상대로 천 명을 희생하는 거라면 싸게 먹힌 거다.’
그때였다.
휘이이이이잉!
넓게 펼쳐져 있던 흰색의 독무가 거친 바람을 타고 한곳으로 몰려들었다.
천일영을 향해서 뛰어가던 천 명의 무인들은 그 광경을 보면서 침음을 삼켰다.
독무가 몰려간 곳은 다름 아닌 천일영의 손이다.
손바닥 위에서 응축되어가는 독.
이내 하나의 원형을 이루며 공 모양으로 변한 독이 손바닥 위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마지막 발악을 해 보라고 했거늘, 수하들까지 죽게 만드는 것이 네놈의 한 수였더냐. 그런 마음으로 하린이를 죽게 만드는 것에 동조한 것이냐!”
“독무가 어째서!”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 않는 것이 비단 천 명의 무인뿐일까.
갈현평은 천일영의 손에 놓인 독을 보며 침을 삼켰다.
하지만 더욱 놀랄 일이 갈현평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으으윽.
천일영의 손바닥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던 독이 그대로 몸 안에 녹아들 듯 흡수된 것이었다.
그 많은 양의 독이 몸 안으로 들어갔는데도 천일영의 몸에서 뿜어지는 청명한 기운은 흔들림 없이 그대로였다.
갈현평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면서도 다섯 병의 병을 들어 올렸다.
화골명천(化骨命千).
살과 뼈를 녹이는 화골산(化骨散)을 개량한 독이다.
이제 곧 죽을 천 명의 수하에게 뿌리는 순간, 사람 그 자체가 강력한 독이 된다.
‘독의 양이 부족하여 놈을 죽이지 못한다면 무한에 가까운 양을 퍼부을 뿐이다!’
천 명의 무인들에게 화골명천을 던지는 순간.
땡그랑.
갈현평은 바닥을 뒹구는 독 병을 보며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자신의 양팔이 잘려 나갔으니까.
떨어진 독 병 옆에서 자신의 피와 뒤엉킨 팔이 기괴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언제 당했는지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당했지만, 갈현평은 이내 이를 악물고 천일영을 향해서 소리쳤다.
“탈제명부음을 익혔다. 천 명의 영혼을 집어삼켰단 말이다! 팔이 잘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슈아아악!
빠르게 팔과 손이 다시 생기기 시작했다.
갈현평은 근육 덩어리와 살점이 만들어지자, 땅에 떨어진 화골명천의 병을 다시 주우려고 했는데.
서거거거걱.
다시 한번 눈앞에서 팔이 잘려 나갔다.
그 기괴한 느낌에 갈현평은 일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천일영의 곁에 있던 여인은 분명 한 명이었는데.
‘어느새 여인 두 명이 저놈의 곁에 온 것인가!’
언뜻 아이처럼 보이는 키가 작은 여인 한 명에 화려한 검을 안고 있는 여인까지.
그 순간이었다.
스거거걱!
괴상한 소리와 함께 몸의 균형을 잃고 갈현평은 주저앉았다.
어찌 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어서 주저앉은 채 당황스러운 눈길을 살펴보는 와중에 발목 아래가 허전한 것이 보였다.
새하얗게 드러나는 깨끗하게 잘린 뼈의 단면.
어느새 발목까지 잘려 나간 것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
슈아아악!
잘린 발목이 다시 만들어지자, 갈현평은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몸은 또다시 기울었다.
“크아아악!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등신 같은 새끼. 아직도 눈치를 못 채고 있네. 저거 진짜 마왕 맞아? 겨우 저런 새끼가 하린이에게 손을 댄 거야?”
키 작은 여인의 이죽거림이 갈현평의 귀에 들려왔다.
하지만 갈현평은 더는 이야기를 듣기 힘들었다.
촤아아악! 촤악! 촤아아아악!
순식간에 몸이 마디마디마다 잘려 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팔목. 팔꿈치. 발목과 무릎. 허벅지와 어깨뼈까지 모조리 차례로 잘라 나가자 갈현평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악! 사독 가문의 무인들은 무엇을 하는 것이냐! 어서 저년을 죽여라!”
천 명의 수하들은 아까부터 제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 있기만 할 뿐.
어째서인지 움직이지 않는 그들에게 갈현평은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때.
촤아아아아악!
천 명의 목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제야 갈현평은 보았다.
왜 수하들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지를.
키 작은 여인과 화려한 검을 든 여자의 손목으로부터 뻗어 나와 있는 얇은 강선.
그것에 피가 뿌려지며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백유화는 강선에서 떨어져 내리는 핏방울을 털어 내며 말했다.
“탈제명부음이 만능이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약점은 얼마든지 있다. 팔과 다리가 다시 자라기 전에 잘라 내면 그만이고, 발목이 만들어질 때 무릎을 잘라 버리면 몇 배나 되는 영혼을 써야 하지.”
“네년이 그것을 어찌 아는 것이냐!”
“알 거 없어. 그보다 천 명의 영혼을 삼켰다고 했나? 이제 몇 번을 더 자르면 영혼을 전부 소모하게 되지?”
“젠장!”
백유화가 앞으로 걸어 나오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부터 너는 내 거야. 듣기 좋은 비명을 입에서 토하게 해 주지.”
“으헉!”
백유화의 곁으로 남궁무애가 나란히 서며 말했다.
“네가 목천향? 천검마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검의 천재라면서? 나도 검에는 천재 소리를 들었는데 누가 더 강한지 해 보지 않겠어?”
“머저리 같은 년. 감히 네년 따위가!”
금채홍도 금룡참월하검을 뽑으며 마염지를 노려보았다.
“당신은 내가 맡도록 하지. 그 좋다는 대가리 속에 뭐가 있는지 봐 줄게.”
“건방진 년! 내가 아무리 마왕 중에서 무공이 약하다 해도 너 정도는 상대할 수 있다.”
“글쎄? 나를 이기려면 빠르게 움직여야 할걸?”
“그게 무슨 소리지?”
“그 좋다는 대가리로 생각해 봐.”
마염지가 불길한 눈길로 금채홍을 바라봤다.
성벽의 뒤에 있는 이만 명의 무인들이 어디론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느낀 것이었다.
그뿐인가.
기관 장치를 해체했던 무명암살대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신형을 날렸다.
마염지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설마 네놈들!”
“이제야 알겠어? 이제부터 천마신교의 무인 이만 명과 무명암살대 천 명이 너희 마왕 가문의 사람들을 전부 잡으러 갈 거야. 삼대뿐만이 아니라 그 밑의 먼 친척까지도.”
마염지를 비롯한 마왕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설마 뒤에서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당장 그만두거라! 이 천인공노할 놈들아!”
“이제 처지가 바뀌었네? 죄 없는 하린 언니를 죽이고 우리 가족을 위협했으니 그 대가는 치러야지. 그러니 너희도 가족을 내놔! 이 개만도 못한 새끼들아.”
“크윽!”
상황을 이해한 마왕들이 침음을 삼키는 사이.
쿠우우우우웅.
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천마신교의 본문 꼭대기가 터져 나갔다.
공중으로 떠오른 천일영이 패범휘와 얼굴을 마주하며 말했다.
“패범휘, 이제 땅으로 내려올 시간이다.”
“건방진 새끼가!”
촤아아아악!
그 순간 패범휘의 얼굴에 깊은 선이 그어지며 피가 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