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신귀환기-268화 (269/270)

268화

서가흔은 천마신교의 마왕 가문들이 사용하는 무덤에 잠들어 있었다.

산 위의 가장 좋은 자리에서 천마신교를 내려다보는 무덤에 천일영은 양꼬치 열 개와 서가흔이 좋아하는 화조주(花調酒)를 올렸다.

그리고 이내 잠시 마음을 추스른 후 서하린이 신고 있던 신발을 비석 앞에 두었다.

“미안하구나. 너와 네 딸, 둘 다 지키지 못했다. 사실은 네 무덤 앞에 나타날 자격도 없다만…….”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천일영은 고개를 들어 쨍한 햇살의 한가운데를 바라보았다.

쓸데없이 좋은 날씨가 눈을 흐리게 만들었다.

말을 하다 말고 하늘만 바라보는 천일영의 곁으로 금채홍이 나란히 서며 말했다.

“하린 언니의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어떤 사람이었냐…… 고?”

문득 천일영은 서가흔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런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웃기는 사람?”

“네? 하린 언니하고는 완전 반대인데요?”

“속도 없고 실도 없는데 희한한 짓까지 많이 하던 사람이었지. 한참이나 나이가 어렸던 나에게 친구를 하자고 하지 않나. 매일같이 술을 들고 찾아오면서 안주는 한 번도 챙겨 오지를 않고. 집에도 무슨 창고하고 금고를 만든다고…….”

과거 취기에 서가흔이 지나가듯 했던 말이 떠오른 천일영은 급히 말을 멈췄다.

‘왜 이것이 이제야 기억이 났을까.’

서가흔의 성격으로 봤을 때 그는 진지하게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서가흔의 집으로 가자.”

“네? 갑자기요?”

“서가흔의 성격상 분명 나에게 남겨 놓은 게 있을 거다.”

무덤에 손을 올린 천일영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와 하린이를 죽게 만든 혈천회의 놈들을 모조리 죽이고 난 후에 사죄하마. 조금만 기다려라.”

천마신교의 본문 위에 있는 독천 가문의 장원.

서하린의 흔적이 있기에 애써 피해 온 곳이지만 천일영은 친구가 남겼을 흔적을 따라서 장원의 문을 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천일영은 서가흔의 살아생전과 똑같이 청결하게 유지되고 있는 방의 구조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서가흔의 성격상 어딘가에 만들었을 금고의 위치를 가늠하는데, 독천 가문의 총관 송웅천이 방으로 들어섰다.

“잊지 않으시고 독천 가문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마님.”

“찾아오는 것이 늦어서 미안하구나.”

“하린 님도 돌아가셔서 이제 이곳도 없어질지 모른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일은 없다. 이곳은 이대로 계속 보존할 생각이다.”

“그리해 주시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벌써 오십 년이 넘도록 독천 가문에서 일해 온 송웅천의 주름진 눈가가 휘었다.

이제 이곳에 남은 사람은 자신을 비롯하여 열 명의 하인이 전부.

화려했던 가문의 마지막 마왕이 죽은 이후로도 그들은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송웅천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그럼 소인은 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불러 주십시오.”

“혹시 서가흔이 비밀 금고를 만들었다고 했는데, 위치를 아는…… 아니다. 비밀 금고라면 총관이 알 리가 없겠지.”

“비밀 금고라면 책장 뒤에 있습니다만?”

천일영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송웅천을 보았다.

그랬지.

서가흔, 이놈은 이런 성격이었지.

‘비밀 금고인데 총관이 알면 더는 비밀이 아닐 텐데. 하여간에 이놈은!’

총관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손을 내뻗어 책장 뒤에 숨겨져 있는 비밀 금고를 확인하자 제법 공들여 숨긴 걸 알 수 있었다.

책장과 같은 재질의 나무를 사용해서 그냥 보아서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정교했다.

천일영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금고를 열었다.

딸칵!

문을 연 천일영은 더욱 멍한 표정을 지었다.

괴상한 놈인 줄은 알고 있었는데.

‘금고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이 죄다 술뿐이라니.’

특히 화조주 중에서 가장 맛있는 해에 만들어졌다는 십칠 년 전의 술이 보물처럼 가득 들어 있는 것을 보고는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내가 뭘 기대한 것인지.’

금고의 문을 닫은 천일영은 왠지 하늘에서 자신을 보고 웃고 있는 서가흔의 모습이 상상됐다.

매일같이 이 금고에서 화조주를 꺼내서 들고 자신을 찾아왔을 모습에 천일영 자신도 웃음을 지을 뻔했다.

굳이 자신과 마실 술을 금고에 보관하다니.

그 순간 천일영은 문득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잠깐, 매일같이 술을 들고 찾아와서 나하고 이야기를 했다? 그 술을 이곳에서 꺼냈고. 그리고 집에 왔다면…….’

안주도 없이 딱 하루에 한 병.

그것만 마시고 서가흔은 집으로 돌아갔다.

서가흔이 취했던 것은 오직 자신의 집에서 마실 때뿐.

술병을 들고 찾아왔을 때는 단 한 번도 취한 적이 없었다.

천일영은 금고의 문을 다시 열었다.

그리고 술병을 모조리 꺼낸 다음 천천히 하나씩 손으로 더듬으며 서가흔의 손길이 남긴 흔적을 찾았다.

딸칵!

금고의 가장 안쪽.

작은 돌기 부분이 손에 걸려서 누르니, 금고의 아랫부분이 열렸다.

그곳에서 나온 책 한 권.

분명 서가흔은 천일영에게 실없는 척 이야기를 하면서 넌지시 중요한 것들을 물었고, 그것을 자기 생각과 결합하여 여기에 적어 놨을 것이다.

술을 더 부르는 안주는 일부러 챙겨 오지 않았을 테고.

천일영이 책을 펼치고 서가흔이 사용하던 의자에 앉자 총관 송웅천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늦어지실 것 같으니 저녁 식사를 준비하지요. 같이 오신 소저분들 식사도 함께 준비하겠습니다.”

“고맙구나.”

천일영은 긴장된 표정으로 서가흔이 남긴 책의 첫 장을 넘겼다.

* * *

책을 읽는 동안 천일영은 한동안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의 행적이 고스란히 드러난 까닭이다.

처음에는 서하린의 자랑이나 천마인 자신과 술을 마시고 했던 헛소리를 적는 등, 추억 속에 잠겨 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글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죽기 일 년 전부터 마왕들의 행적과 영약이 사라지는 일을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로 갈수록 천일영에게 남기는 듯한 글들이 시작되었다.

[3월 25일. 영약으로 사람을 변하게 하는 약을 만든다. 선두에 선 것은 패범휘와 마염지. 그들은 천마신교에 들어오는 영약의 구 할을 빼돌리고 있다.]

[4월 13일. 그들의 이름은 아직 모르지만, 그들이 천마신교를 뒤흔든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천마에게는 모든 게 확실할 때까지 이야기하면 안 된다. 증거가 모여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다.]

[5월 28일. 그들을 조사하는 동안 기괴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들은 어디에 있는지 존재조차 가늠되지 않는다. 과연 본문은 어디인가.]

천일영은 그간 서가흔이 얼마나 많은 조사를 했는지 절절히 느끼며 책장을 계속 넘겼다.

그리고 책장의 마지막.

9월 21일, 서가흔이 죽기 전날에 쓴 글에 적힌 내용은 천일영의 가슴을 저리게 만들었다.

[그들의 이름을 알아냈다. 이름은 혈천회. 하지만 본문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실패했다. 또한 내가 뒷조사를 하는 것을 패범휘와 마염지가 눈치챈 지 오래된 듯하다. 혹시라도 이 글을 천마가 본다면 이 말만큼은 꼭 하고 싶다. 혈천회는 언제나 동쪽에서 나타난다. 이 법칙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그들의 흔적은 천마신교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조차 언제나 동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사라지는 것을 명심해 주길 바란다. 아마도 그곳에 혈천회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혹시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하린이를 부탁하마.]

책장의 마지막은 급하게 쓴 듯 휘갈겨 쓰여 있었다.

천일영은 책을 덮고 잠시 눈을 비볐다.

바보 같은 서가흔은 모든 것이 확실해질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놈 성격이 이랬지. 바보 같으니.’

책장을 덮은 이후로도 한참을 앉아 있었다.

결국 천일영은 이제는 주인이 없는 화조주를 열고 마시기 시작했다.

친구 없이 마시는 술은 유달리 쓰게만 느껴졌다.

* * *

서가흔의 책은 훌륭한 단서가 되었다.

뜬금없이 동쪽에서 나타나고 동쪽으로 사라진다는 말만으로 뭔가를 행동에 옮기는 것은 미친 짓임이 분명했지만, 천일영의 생각은 달랐다.

“채홍이는 이제부터 상단에서 표사로 일하거라.”

“공자님께서 하시라면 하기는 할 건데 표사라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요?”

“혈천회의 눈을 속이기 위한 방책이다. 산동성과 강소성, 그리고 절강성하고 복건성의 해안선을 다니면서, 혈천회에서 만든 비밀 통로를 찾아내거라. 선기를 느낄 줄 아는 채홍이라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금채홍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를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비밀 통로가 있다면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는 한데 왜 선기를 이용해야 하는지 당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천일영은 오늘의 금채홍이 바보라는 것을 눈치채고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비밀 통로의 입구는 진법으로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 채홍이는 선기를 느낄 수 있으니, 선기가 흩어지는 곳을 찾으면 금세 찾아낼 수 있을 거다.”

“아! 다른 사람들은 선기를 느끼지 못하니 진법으로 숨겨진 곳을 찾지 못하는 거군요.”

넓디넓은 동쪽을 무작정 뒤질 필요는 없었다.

비밀 통로를 이용해서 움직이는 혈천회의 길을 막아 버리면 그들은 결국 모습을 드러내게 될 터.

천일영은 금채홍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몸조심해야 한다. 유화 곁에서 떨어지지 말아라.”

“유화 언니도 같이 가는 건가요? 언니는 걷는 거 엄청나게 싫어하시잖아요.”

“오히려 유화는 좋다고 앞장설걸?”

남궁무애의 손길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백유화는 무엇이든 다할 기세였다.

아마도 남궁무애는 백유화가 현경에 들어서기 전에는 놔줄 생각이 없는지, 천마신교에 와서까지도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수련을 시키는 중이었다.

“난 천마님의 명령대로 하는 거니까 그렇게 노려보지 마, 남가은.”

“크윽!”

백유화가 남궁무애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딴청을 피우는 동안 안하주가 서류를 천일영 앞에 올렸다.

패범휘의 방에 있던 전장의 전표였다.

“전에 혈천회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서 화약의 거래를 진행했었는데 패범휘가 제법 많은 돈을 빼돌린 것 같습니다.”

“천마라는 것이 쪼잔하게 그런 짓까지 했나. 한숨밖에 나오질 않는군. 그래서 얼마나 빼돌렸느냐.”

“금화 팔천 냥 정도 되네요.”

“제법 많은 돈이군. 그렇다면 그 돈은 천마신교에서 삼켜라. 학당을 새로 짓고 훈장을 고용하면 되겠군.”

“화약 거래는요? 천마신교의 주인이 바뀌어서 혈천회는 지금쯤 애가 달아 있을 것입니다. 돈은 먼저 주었는데 화약을 받을 길이 없지 않습니까.”

안하주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기껏 깔아 놓은 함정이 날아가면 금화 팔천 냥이 생겼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었으니까.

“아마도 혈천회에서 사람을 보낼 거다. 그 때문에 천마신교를 개방하고 거래의 자유를 허락한 까닭도 있다.”

“아! 그게 그런 의미도 있었나요?”

“하주야, 만약 네가 혈천회의 주인이라면 이럴 때 어찌하겠느냐.”

“화약을 내놓으라고 하겠죠. 다만 천마신교에는 말을 못 하고 천룡상단에게……. 아! 그렇군요!”

“이제야 알아들은 모양이구나. 천룡상단에 금방 이야기가 들어올 것이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지 알겠지?”

“흐흐흐. 맡겨 주십시오. 뜯어먹을 대로 뜯어먹겠습니다.”

한껏 음흉한 얼굴을 한 안하주가 악당 같은 얼굴로 웃음을 지었다.

저런 악당 같은 표정으로 그동안 악당들을 잡아 왔다니 믿기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안하주는 음흉한 표정으로 입가를 씰룩거리면서 밖으로 나갔다.

한편 남궁무애는 백유화를 빼앗긴 게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천일영을 바라봤다.

“나는 뭐 하면 돼?”

“잠시 쉬는 것은 어떠하냐.”

“오십 년 동안 쉬어서 그런지 몸이 근질거리네. 나 다른 사람들 굴려도 돼?”

“누구를?”

“천마신교의 이만 명. 그리고 무명암살대 천 명. 그렇게 많은 사람을 한 번에 굴리면 재미있을 거 같아.”

“아…… 적당히 한다면 허락하마.”

“하여간에 무르다니까.”

아무래도 남궁무애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사악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밖으로 나갈 리가.

아무튼 천마신교가 강해진다는 부분에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다들 명복을 빈다.’

이제 얼추 정리되는 것 같아서 천일영은 의자에 앉은 채 생각에 잠겼다.

뭔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뭘까. 아주아주 중요한 것 같은데. 뭘 잊고 있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중요하지 않을 일일 터.

천일영은 이내 생각하기를 멈췄다.

바빠 죽겠는데 기억나지 않는 것까지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다.

이 찜찜한 느낌은 아마도 분명 기분 탓일 거다.

* * *

살문도.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땅에 다 죽어 가는 신음이 울려 퍼졌다.

땅바닥에 널브러진 두 노인의 몸에서 일어나는 경련은 그들의 몸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천량도사는 물기가 없어 갈라진 입술을 억지로 떼며 말했다.

“큭! 아무래도 우리를 완전히 잊은 것 같구먼.”

“하아. 하아.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나저나 제발 물 한 방울만 먹었으면…….”

“이제 끝인가. 물고기를 잡을 힘도 없네.”

“크윽! 천일영, 이 망할 놈! 죽어서도 원망할 거다.”

두 노인의 원한에 찬 눈빛이 하늘을 향했다.

오늘도 참으로 맑고 청명한 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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