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이틀 뒤.
천일영은 무명암살대에서 과거 9대대의 조장을 했던 천진문이 매일 아침 하는 보고를 들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패범휘와 마염지, 그리고 목천향과 갈현평이 죽었다고? 아직은 더 고통 속에서 발버둥 쳐야 할 텐데 어찌 그리 빨리 죽었느냐.”
“그게…… 천마신교의 신도들이 죽였습니다.”
곤란한 듯 식은땀을 흘리던 천진문이 고개를 숙였다.
“저희가 지키고는 있었으나 화가 난 신도들이 집단으로 돌과 몽둥이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그동안 그들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고 몇 번이나 죽이겠다고 찾아왔었는데…….”
“너희들이 그것을 말렸었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다.”
“네, 그런데 어제는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억울함을 풀기 위해 그들을 죽이겠다고 난리를 피우는 통에…….”
이후로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무명암살대로서는 같은 천마신교의 신도들을 강압적으로 밀어내기 힘들었을 터다.
복수심과 분노에 눈이 먼 신도들의 거친 행동을 말리려면 필시 사망자가 나오거나 크게 다치게 될 테니까.
“패범휘와 마왕들의 시신은 어찌 되었느냐.”
“돌에 찍히고 몽둥이에 맞아서 걸레짝이 되었습니다. 반 시진에 걸쳐 아주 잔혹하게 죽음을 맞이했는데, 그 시신조차 수천 가닥으로 찢겨 개 먹이가 되었습니다.”
“놈들에게 딱 맞는 최후이긴 하군. 헌데 신도들이 왜 그리 화가 난 것이냐. 자세한 내막을 이야기해 보아라.”
천진문도 여러 가지로 조사를 했는지 제법 큰 종이를 펼쳤다.
그가 조사한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고, 마왕들을 죽인 범인들이 누구인지 쓰여 있는 종이의 한쪽 편을 보던 그가 곤란한 듯 입을 열었다.
“천마님께서 과거 천마신교를 이끌 때는 굉장한 부흥을 이끌었고 배를 곯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천마님께서 사라지고 마왕들이 천마신교를 이끌자마자 굶어 죽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지요.”
“굶어 죽은 사람들의 수는 어찌 되느냐.”
“칠천 명입니다.”
“…….”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이 미친놈들이 자기 배를 불리겠다고 그만큼의 사람들을 죽게 만든 게 믿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참혹함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천마님께서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고 발표했을 때부터 신도들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모양입니다. 이유는 직후 징세가 크게 올랐기 때문입니다.”
“마왕 놈들이 세금을 올렸다고? 얼마나 올렸길래?”
“수입의 구 할입니다.”
“이, 구제할 길이 없을 지경의 쓰레기 놈들이!”
“그뿐이 아닙니다. 의원들에게 치료비를 비싸게 받게 하고 수익 대부분을 가져갔습니다. 이때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죽은 자들이 이천 명에 달합니다.”
“하아……. 내가 없는 새에 그 지경까지 갔었더냐.”
“학당을 없애고 훈장들도 잘라 냈습니다. 문맹을 없애겠다고 천마님께서 무상으로 학당을 다닐 수 있게 했잖습니까? 그런데 마왕 놈들은 그것이 돈이 많이 든다고 제일 먼저 칼질을 했지요.”
“신도들의 원한이 쌓일 만도 하구나. 마왕들을 죽인 자들의 죄를 묻지 않고, 이 일은 모두 불문에 부친다고 발표하거라.”
“알겠습니다.”
다른 곳이라면 반란이 일어나도 수백 번은 일어났을 만큼의 일이다.
힘으로 찍어 누르고, 강자를 따르는 천마신교의 특성상 억눌렸을 뿐.
결국 마왕들은 자신들이 쌓아 올린 패악의 탑에 깔려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천일영은 심각한 얼굴로 한참을 고민한 끝에 안하주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같이 좀 나가자.”
“어디를 말입니까?”
“돈 쓸 곳을 찾으러 나가는 거다. 붓과 종이를 들고 따라오거라.”
“설마 저에게 비단옷을 사 주시려고 돈 쓸 곳을 찾는다는 것은 아닐 테고요?”
“이번 일을 잘 해내면 비단옷뿐만이 아니라 금비녀도 사 주마.”
“피를 토할 때까지 일하겠습니다.”
안하주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천일영의 뒤를 따라나섰다.
* * *
세상에는 빈민가가 있다.
황제가 사는 화려한 북경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이 착각하기를 천마신교나 사혈련에는 빈민가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럴 리가 있나.’
오히려 천마신교나 사혈련에는 중원보다 더 큰 빈민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유는 크게 몸을 다치거나 죽을병에 걸린 무인들이 밀려나서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천일영은 천마신교를 위해서 검을 휘두르다가 다친 사람들이 빈민가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기존에 있던 빈민가를 모두 철거하고 다친 무인에게는 연금을 지급했었다.
재정에 상당한 부담이 되는 일이었지만, 천마신교를 위해 충성을 바치다가 다치고 병든 그들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이 천일영의 신조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 앞에서 천일영은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빈민가는 전부 다 밀어 버렸을 텐데.”
“집 대신 천막? 아니, 거적때기 밑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네요. 마왕 놈들이 연금을 그대로 뒀을 리가 없지요.”
족히 일만 명은 될 법한 사람들이 거의 헐벗은 채로 쓰레기 죽을 끓여 먹는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말 그대로 개도 안 먹을 법한 썩은 음식 쓰레기를 주워다가 나무껍질을 같이 넣고 끓여 먹는 것이니 영양가가 있을 리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피골이 상접하여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는 몸을 하고 있었다.
천일영은 그들에게 걸어가서 쓰레기 죽을 끓이는 곳 앞에 털썩 앉았다.
“괜찮다면 나도 한 그릇 다오.”
“히익! 천마님께서 여기에는 왜 오셨습니까. 게다가 이것은 천마님께서 드실 만한 음식이 아닙니다.”
“내가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자네들이 고생하게 되었다. 그러니 나도 자네들과 같은 음식을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천마님!”
“괜찮다. 어서 다오.”
빈민 중에서 그나마 힘 좀 쓸 것 같은 남자가 마지못해 다 썩은 나무 그릇에 쓰레기 죽을 담아 내밀었다.
악취가 나고 곰팡이 같은 것이 둥둥 떠다니는 죽을 들고 한 입을 먹었다.
토할 것만 같은 맛이 났다.
속이 울렁거렸다.
목을 넘어 위장으로 들어가니, 한탄이 나왔다.
이것을 먹으며 그동안 버텨 왔단 말인가.
사람이 먹을 만한 음식이 절대 아니었지만, 쓰레기 죽을 한 숟가락씩 차분히 떠서 전부 다 먹었다.
깨끗하게 그릇을 비운 천일영이 말했다.
“잘 먹었다.”
“아이고! 천마님! 달라고 하셔서 드리기는 했는데요. 속은 괜찮으십니까요. 처음 빈민가에 오는 사람들은 이걸 먹고 삼 일은 토하면서 앓아눕는데요.”
“그래도 이걸 먹고 자네들은 견뎌 오지 않았는가. 정말로 자네들에게는 면목이 없다. 진심으로 미안하네.”
천일영이 고개를 숙이자 빈민들이 기겁하며 뜯어말렸다.
그중에서 새파랗게 질려서 땅바닥에 머리를 박고 제발 그러지 말라고 말하는 자까지 있었다.
고개를 든 천일영이 곁에 있는 안하주에게 말했다.
“첫 번째로 시행할 명령이다. 이들을 위한 집을 지어라. 그리고 오늘부터 식량을 끌어모아서 절대로 배를 곯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스스로 돈을 벌 수 있을 때까지 지원을 아껴서는 안 된다.”
“죽은 마왕 놈들에게서 빼앗은 재산으로 충당 가능합니다. 다만 의원들에게 보여야 할 분들도 많은 것 같은데요.”
“천마신교 본문의 의원 집단인 활생명인당(活生命人堂)에 말해서 무상으로 치료를 시작해라.”
“알겠습니다.”
안하주가 손가락을 몇 개 접었다가 펴면서 천일영에게 보였다.
죽은 마왕들에게서 몰수한 재산이 금화 삼십칠만 냥.
그중에서 집을 짓는 데 삼만 냥이 들어가고, 먹을 것을 지원하는 데 일만 냥이 들어간다는 표식이었다.
천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들에게서 마왕들이 빼앗은 돈이다.
그러니 다시 돌려주는 게 당연한 일이다.
천일영은 몸을 일으키며 빈민들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몸이 안 좋아서 사경을 헤매는 사람은 없는가.”
“있습니다.”
마른 목소리지만, 귀에 익은 탁한 음성에 천일영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빈민가에서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건만.
어찌하여 천마신교에서도 중책에 있던 자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고개를 돌린 방향에 보이는 사람은 함선빈.
“마교 5문 8각의 수뇌였던 자네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
“허허, 드디어 오셨군요. 오래도록 기다렸습니다, 천마님.”
“자네! 다리는 어찌 된 것이고!”
과거 천일영이 천마로 있을 때 마교도 이만 명의 정점에 서 있던 그가 허벅지부터 다리가 잘린 채로 천일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는 인자한 웃음과 함께 씁쓸함이 묻어나는 채로.
천일영은 즉시 함선빈에게 달려갔다.
“어찌 된 일인가!”
“별일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마왕들에게 충성을 거부했기에 다리가 잘렸을 뿐입니다. 제게 천마님은 천마님뿐이니까 말입니다.”
“바보 같으니! 충성을 다하는 척이라도 해서 몸을 보존했어야지! 가족은! 가족은 괜찮은가.”
“원래는 죽어야 했지요. 하지만 차경철 총관께서 굶어 죽은 빈민의 시신과 가족을 바꿔치기하고 천마신교 밖으로 빼돌려 주었습니다.”
“차경철이?”
“네, 그리고 천마님을 찾으러 나간다고 했습니다. 그를 만났습니까?”
“만났다. 내 밑에 두고 있다.”
“그렇군요. 총관께서 무사하시니, 다행입니다.”
차경철이 자신을 찾아 나선 이유를 알게 된 천일영의 얼굴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당장이라도 천마신교로 데려오고 싶었을 텐데, 혈천회라는 것들과 대치하고 있던 탓에 말도 못 하고 속으로 끙끙 앓았을 터다.
천일영은 함선빈의 잘린 다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그대는 병법에서 사혈련의 손대법과 채주란에게도 밀리지 않는 천재가 아니던가. 당장 천마신교의 책사이자 병법가로 복귀하거라.”
“허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제가 바로 죽어 가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며칠을 넘기기 힘들 터. 저는 잊어 주십시오.”
함선빈이 잘린 다리 위쪽을 보이자, 천일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다리를 자를 때 녹이 슨 검을 사용했는지 온몸이 썩어들어 가고 있었다.
천일영은 즉시 손을 올려 선기와 진기를 쏟아부었다.
선기를 다루게 된 이후로 더욱 빠르게 상처를 치료할 수 있었고, 함선빈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감탄 어린 소리를 내었다.
“믿기지 않습니다! 천마님께서는 이 정도의 무공에 도달하신 것입니까.”
“잘린 다리는 다시 만들지 못하니, 그저 그런 무공일 뿐이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다. 다시 한번 천마님을 모실 수 있다니, 제 마지막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참으로 소박한 소원이구나. 바보 같으니.”
“허허.”
천일영은 함선빈을 치료하고 사경을 헤매는 사람들을 하나씩 찾았다.
손길이 닿는 사람마다 모두 생명을 건지고, 웃음을 되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치료할수록 천일영의 마음은 착잡해졌다.
‘하린이도 이렇게 살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무거운 마음이 조금씩 심장을 파고들었다.
천일영은 급한 환자를 모두 치료하고 무명암살대에 연락해서 함선빈을 천마신교의 본문으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빈민들에게도 말했다.
“모두 조금만 참아라. 당장 오늘부터 음식이 들어올 테니 쓰레기 죽은 모두 버리고.”
“아이고! 천마님,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을지요.”
“은혜가 아니다. 너희들은 모두 내 식구가 아니더냐. 같이 살아가자.”
“감사합니다. 흐흐흐흑.”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는 사람들에게 천일영은 한참 동안 위로의 말을 건넸다.
가장 낮은 자를 돌보지 못하는 사람은 높은 곳에 올라갈 자격이 없으니.
천일영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자부터 품기로 하고, 안하주와 온종일 천마신교를 다니며 힘든 곳을 찾아다녔다.
한동안 천일영과 돌아다니던 안하주가 지출 목록이 가득 적힌 종이를 들고 천일영의 옷깃을 잡았다.
“저 비단옷이랑 금비녀 안 받을래요. 그 돈으로 한 사람이라도 많은 빈민을 도와주세요.”
“네게 주려는 것은 내 개인 돈으로 사주는 것이다만?”
“그래도 괜찮아요.”
안하주의 눈매가 살짝 휘었다.
천마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너무 무서웠지만, 애써 강한 척을 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해 왔다.
며칠을 지내면서 되도록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다 천마와 마주하게 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참으로 이 사람이 진심으로 따를 만하다는 것이었다.
‘뭐, 천마도 꼭 나쁜 건 아니네. 설마 내가 황실에서 천마를 모시는 자리로 옮겨질 줄이야. 사람 인생 참 모르겠어.’
여차하면 황실로 도망갈 생각이 한가득하였던 안하주가 배시시 웃으며 천일영의 뒤를 따랐다.
그때 천일영이 천마신교를 훑어보자 안하주는 한 번 더 웃음을 지었다.
아련한 그 시선이 뜻하는 것은 하나였으니까.
“아직 멀었지만 조금은 천마신교가 정상이 되어 가는 것 같구나. 이제 하린이를 데려와도 괜찮을 것 같다.”
“이제야 마음을 먹으신 것입니까?”
“하린이의 고향인 곳이니 이곳이 좋아지면 데려오려고 했다. 이제부터 그 아이가 잠들 곳이 아니냐.”
“그럼 저는 장례 절차를 밟겠습니다. 필요한 것들의 목록도 작성해야 하고요.”
“마왕의 죽음이다. 성대하게 치르도록 해라. 그리고 장례에 들어가는 돈은 내 재산에서 사용하거라. 천마신교의 돈을 쓰지 말고.”
“예.”
천일영의 말뜻을 알아들은 안하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라는 것은 서하린의 이름으로 마지막 음식을 천마신교의 신도들에게 나눠 준다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빈민과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들에게 서하린이 마지막 선물을 주고 떠나는 것이니, 길을 떠나는 사람도 마음 편히 좋은 곳으로 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