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화 〉2 - 없는 것 빼고 다 있어요 (2/243)



〈 2화 〉2 - 없는 것 빼고 다 있어요

모니터는  컸다. 아마도 27인치 정도는 될까.
모니터 하단에 붙은 가성비로 유명한 브랜드의 이름이 익숙했다.

내가 쓰던 모니터의 브랜드와 같았다. 처음으로 찾은 공통점인 셈이다.

컴퓨터는, 딱 보기에도 잘 관리한 것 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모니터는 물론이거니와 키보드와 마우스를 비롯한 외부장비들의 꼬락서니가 영 시원치않다.
회색 빛에 때가  본체 케이스를 보기만 해도 컴퓨터의 내용물이 상상되는 것 같았다.

우웅-

전원을 키자, 내내 유지되던 실내의 정숙함이 깨진다. 침묵을 깨는 소음인 탓인지 유난히 시끄럽다.

...옛날 생각이 나게 만드는 기동음이다.

예상과 달리 부팅화면에는 익숙한 os가 표시된다. 역시 친숙한 로고다.

비교적 부정적인 생각으로만 머리를 가득 채우면, 다가오는 미래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게  첫 번째 원칙이었다.

좆같은 일을 예상한다고 해서 그 정도가 덜어지는건 아니지만.
적어도 헛된 희망이 산산조각나면서 발생하는 추가적인 절망은 막을 수 있지 않나.

아무튼 고대시절의 os가 튀어나오거나, 아예 컴퓨터 부팅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예상은 기분 좋게 빗나갔다.

물론, 그렇다고 없던 행복이 생겨나는 건 아니다. 행복은 기본적으로 총량이 정해져 있는 법이다.

부팅이 끝나고 나는 마우스에 손을 옮긴다. 꽤나 작은 마우스는 그보다  작은 손과 제법 잘 어울렸다.
손에 달라붙는 마우스의 감각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뇌와 별개로 몸이 기억하는 게 있는 걸까.


user

따로 잠금을 걸어두거나 시작 설정을 바꾸지는 않은 모양이다.
잠깐의 로딩이 끝나고, 익숙한 기본설정의 바탕화면이 모니터로 출력된다.

...난잡하기 짝이 없다. 화면은 온갖 아이콘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제법 친숙한 브라우저의 아이콘부터 시작해, 도통 무슨 프로그램인지 짐작하기 힘든 아이콘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이건 바탕화면이 아니라 쓰레기장이라 불러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질린다는 생각과 동시에, 한 켠에서는 왠지모르게 다행스럽다는 감정이 올라온다.

내게 있어 최악은 핸드폰의 경우와 같았다.

아예 텅 비어있어 일말의 여지도 남겨주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사막에서 바늘을 찾으라고 시키는게 낫다.

하물며 그게 컴퓨터의 내용물이라면야.

자기 딴에는 정리라고 한 것인지, 바탕화면의 절반 이상은 단일 파일이 아니라 폴더였다.


1,2,3,4,5...

아까도 그랬지만 숫자로 분류하는걸 참 좋아하는 처자다.
분류의 기본은 목록의 이름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게 아닌가, 빌어먹을.

나는 불평을 속으로 씹으면서 폴더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1번 폴더.
그림, 사진으로 가득하다. 대부분이 풍경사진이었다. 벚꽃이 흐드러지는 꽃놀이 사진부터, 나에게도 익숙한 해외의 유명 관광지까지 다양하다.

사진이나 그림에 일체 사람이 없다는 점이나, 주로 높은 곳에서 찍은 듯한 구도를 보면 직접 찍은 게 아니라 인터넷 등지에서 캡쳐한 사진으로 보였다.

예쁜 풍경사진을 모으는 취미라도 있었는지.

2번 폴더.
반대로 사람으로 가득하다.
우선 이름난 배우들이나 가수들의 사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미남 미녀들만 모아두었다고 하기에는 얼굴이 제법 다양했다. 대부분의 사진은 단독샷이다.
사람의 국적은 가리지 않는지, 이름은 모르지만 어디서   같은 친숙한 얼굴의 외국인 배우도 보인다.

그림은 그 종류가 더 방대하다.
사람의 전신을 실사처럼 세밀하게 묘사한 그림부터 얼굴은 가리고 신체만 나오는 그림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숨김파일 같은 건 따로 없는 듯 했다.  그대로 사람만 가득하다.


3번 폴더. 이번에는 폴더 내부가 다른 폴더들로 세분화되어 있었다. 포함된 폴더는 세 개였다.
설정, 스토리, 그림.
설정과 스토리 폴더에는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텍스트 파일이 하나씩 들어있다.
텍스트 문서에는 아무런 내용도 적혀있지 않았다.

그림 폴더에는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 확장자의 파일이 하나 들어있었다. 미리보기로 언뜻 보이는 형상은, 아마 만화인가.

그림은... 자동차에 밟힌 쇠파이프처럼 삐뚤어진 선이 매우 인상적었다고만 말해두자.

3번 폴더까지 확인한 나는 잠시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아마 22세 창창한 나이의 혜진양은 웹툰 작가에 관심을 두고 있었나보다.

그렇게 생각하면, 다소 난잡하고 두서없게 느껴지던 이전의  폴더도 이해가 갔다.
그림을 위한 자료 내지는 참고용이었겠지.

당연하지 않은 상황에서 당연한 상식을 논하기가 조금 우습게 느껴졌으나.

'나'라는 인간의 의식이 이 자리를 차지하기 이전에도 '이혜진'이라는 인간은 존재했던 것이다.

그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질문이 있다. '원래 있던 이혜진의 의식은 어디로 갔을까'하는, 그런 의문.
그리고 나는 무슨 원인과 맥락으로 이 뜻하지 않은 자리에 들어오게 됐는지 하는, 그런... 그런 당연한 의문들.

이 세상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있다. 그것도 꽤나 많이 있다.
호기심을 원죄로 타고 나는 인간들이 그 의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건, 그게 현실의 삶과는 꽤나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겠지.

그러나 이번에 생긴 의문들은... 그렇게 외면하기에는 너무나도 나와 가까웠다.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움켜쥔 손에서, 예상하지 못한 다른 '가슴'이 붙잡히는 꼬라지를 바라보며.

 새로운 머리는  다시 두통을 호소했다.

분명 누군가가 채워넣었을 푸른 바탕화면 속의 아이콘들. 그 난잡함이 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데 힘을 보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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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생각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컴퓨터 정리를 끝낸 시각은 오후 두 시였다.

거진 두 시간을 꼬박 갈아넣은 셈이다.

폴더 이름의 숫자가 한 자릿수를 넘어간 이후 부터는, 그건 사실상 폴더가 아니라 쓰레기통에 가까웠다.
...혜진양은 정리와는 거리가 멀었던 모양이다.

과거에 만났던 어떤 지인은 지저분한 공간을 청소하는 일에서 꽤나 강렬한 쾌감을 얻는다고 말했다.
더러운 쓰레기가 조금씩 사라지면서, 점점 방 안이 깨끗해지는 모습에 속이 시원하다나.

당시에는 그 이해하기 힘든 취향에 고개를 저었던 전적이 있었다.

내가  행위가 문자 그대로 방 안을 정리해야하는 청소였다면 고된 노동에 고통을 호소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집주인의 컴퓨터를 정리하는 일은,  지인의 말이 조금은 공감될 만큼 나름대로의 뿌듯함이 있는 작업이었다.

컴퓨터는 내게 있어 가장 친숙한 도구였던고로.
나는 어느 시점에서부터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고민들로부터 잠깐 벗어나, 컴퓨터를 가득 채운 쓰레기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남의 은밀한 치부를 훔쳐본다는 사실에서 오는 음침한 짜릿함이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바탕화면을 온갖 파일로 뒤덮을만큼, 혜진양의 컴퓨터에는 쓰잘데기 없이 용량만 차지하는 쓰레기 파일 외에도 꽤나 다양한 자료들이 숨겨져 있었다.

컴퓨터 하나 뜯어봤다고 한 사람을 파악했다고 말하기는 힘들겠지만.
한 사람이 자주 이용한 파일과, 자주 방문한 인터넷 사이트 등을 생각하면 의외로 꽤나 많은 부분을 추측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나는 적어도 집주인의 성적 취향은   있었다.
꽤나... 꽤나 자극적이더라.




뒤바뀐 몸도 인간의 기본적인 기능은 제대로 수행하는 듯 했다.
집중이 끝나자 곧바로 허기가 존재감을 드러낸다.

나는 현관 앞에 위치한 작은 싱크대로 향했다.

화장실과 마주하는 싱크대는 물기 하나 없이 건조했다. 무심코 수도에 손을 대 물이 나오나 확인한다.

인간은 현재에 살면서 미래를 생각하는 동물이다. 그건 영문모를 상황에 처한 지금의 나에게도 변함없이 적용되는 법칙이었다.

내가 '나'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내지 않는 이상.
나는 마냥 앉아서 기다릴 수 없었다.  의식이  몸에 들어온, 이 불가사의한 현상이 언제 다시 일어날 줄 알고 기약 없는 기다림을 시작하겠는가.

결국 나는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일상을 만들고 적응해야 했다.
내가 새로운 '나'에 대해 여전히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제쳐두고서라도.

싱크대의 옆에는 사무실에서나 볼 법한 작은 냉장고가 있었다.

500ml 페트병이 간신히 들어갈까 싶을 정도로 작은 냉동실은  빈 채로 차가운 냉기만을 뱉어댔다.

하단부도 비슷할 정도로 휑했으나, 다행히 마실 물 정도는 찾을 수 있었다. 친숙한 브랜드의 페트병이 눈에 들어온다. 역시 물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냉장고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손에 와닿는 물통의 감촉이 차다. 목으로 넘어가는 차가운 물에 답답한 머리가 조금은 식는 듯했다.


갈증을 해소한 뒤에는 허기를 채울 차례였다. 먹을 수 있는 건 의외로 쉽게 찾았다.
싱크대 아래 선반에 라면을 비롯해 참치캔과 즉석밥 몇 개가 들어있었다.

식기는 작은 후라이팬과 냄비 하나가 다였다. 지금으로서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라면을 끓이는 와중에는 별 생각없이 끓는 물을 바라보니 마음이 편했다.
원래는 짧은 기다림이 너무나 길게 느껴져서  시간을 싫어했던  같은데.



익숙한 맛의 라면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배가 고팠던 탓인지, 아니면 이전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예민한 미각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나는 모른다.

정신 없이 라면을 먹어치웠다. 라면 하나로 해결될 공복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국물을 조금 남길 정도로 배가 불렀다.
몸이 작은 만큼 연비가 좋은 모양이지.

식비는 생각보다 안 나올지도 모르겠다.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먼저, 먼저... 계좌를 찾아봐야겠지. 이 방도 공짜로 얻은 게 아닐테니 분명 여유자금이 어느 정도는 남아있을 것이다.
계좌는 지갑에 있던 카드를 조회하면  수 있을 터다.

22살에 원룸에 자취하고 있다면, 부모가 돈을 대주거나 혹은 나도 모르게 하고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대학에 다니나? 학생증도  보이고, 컴퓨터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으니 아마 대학생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혹시 모른다. 대학에 다닌다면 지금은 학기가 시작할 무렵일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도 알아봐야겠지.

몇 안되는 지인에게 연락해서 상황을 물어보는 것도...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간 처리해야  문제다.

나는 하나 둘씩, 해결해야할 문제들의 우선사항을 정한다.

정작 가장 해결되어야  문제는 오리무중이었으니.
현실에 산적한 문제들과 직면하는 건, 결국 역설적으로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내 나름대로의 발악이었던 것이다.

나 또한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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