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12 -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방송을 종료한 스벅은 곧장 편집자에게로 연락했다.
스벅:집자야 이거 최대한 빨리 편집해줘 물들어올때 노 저어야지
스벅의노예:넵 근데 노르드님 허락 받으셔야 될 거 같은데요
스벅:ㅇㅇ 빨리 물어보고 알려줄게
스벅:야 근데 베코 닉좀 바꾸라고 청자들이 뭐라고보겠냐
스벅의노예:노예 맞잖아요
스벅:어떤 노예가 주인을 괴롭혀 ㅅㅂ
한숨을 쉬면서도, 스벅은 들뜬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16,000명이다. 무려 16,000명.
특별한 컨텐츠가 없을 때 스벅의 평균 시청자가 약 5,000명 가량이다. 대충 생각해도 세 배는 뻥튀기된 숫자다.
양학을 방제로 어그로를 끈 덕분에 오늘의 시청자가 많은 편이긴 했으나, 만명이라는 마의 벽을 넘은 건 순전히 노르드의 덕분이었다.
내용적으로는 지극히 단순한 방송이었다.
스벅이 랭크게임에서 우연히 초청한 고수에게 죽고, 죽고, 또 죽기만 하는.
교육 방송을 가장한 일대일 양학 방송.
평소 밉상 이미지가 강한 스벅의 특성 상 시청자들에게는 꽤나 통쾌할 수 있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그게 세 시간이 넘어간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통쾌하다는 감정이 느껴지는 것도 한두 번이다.
리스폰이 빠르고 매번 사인이 변한다고는 하나 저랭크 유저들이 보기에는 거기서 거기였다.
만약 중반 즈음 노르드가 음성채팅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스벅이 먼저 그만두었을 지도 모른다.
노르드가 말을 많이 하면서 방송의 사운드를 채우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중간 중간, 무심한 듯 툭 내뱉는 한마디가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더라.
사실 중간부터는 스벅도 시청자를 의식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못했다.
매섭게 몰아치는 노르드의 대검을 눈 앞에 두고 다른데 한 눈을 팔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전투에 집중하지 않고 방송을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벅의 오래된 방송 경력은, 방송을 살리기 위해선 오히려 노르드의 교육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으니.
그게 옳았다는 건 만 명이 넘는 시청자 수가 증명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노르드와 함께한 스벅의 교육 방송은 전대미문의 기발한 모습으로 연출됐다.
미성을 가진 의문의 나이트폴 여성 고수가,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는 유명 스트리머를 전력으로 학살하는...
인간 윤성호로서는 눈물 나지만 스트리머 스벅으로써는 더 없이 훌륭한 그림이다.
생방송에서의 흥행이 반드시 편집영상의 흥행으로 직결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스벅은 오늘 방송을 편집한 영상도 대박이 날 거라고 확신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스토리의 서사가 상당히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영상을 돌려 보지 않아도 무수한 편집접을 잡을 수 있는 수준이다. 노르드가 베코에 들어오는 장면은 그 영상의 하이라이트가 되겠지.
...영상을 업로드하기 위해선, 일단 노르드에게 자신이 스트리머라는 사실을 알려야 할 터.
내심 걸리는 게 있기는 했다. 교육을 받으면서도 방송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알리지 않았던 점이다.
스트리머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고 재밌는 장면을 많이 뽑아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 확신이 대박으로 이어지기는 했으나.
낯짝이 꽤 두꺼운 편인 스벅도 이제와서 노르드에게 사실을 밝히기는... 조금 부끄럽더라.
안 그래도 나름의 은혜를 느끼고 있는 상황이었다.
방송이 흥행한 것은 물론이요, 나이트폴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은 부분을 배웠던 것이다.
한창 죽는 과정에서야 고맙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지만.
교육이 끝나고, 많은 시청자를 버리기 아까워서 뒤풀이 차 돌린 솔로 랭크가 전환점이었다.
교육의 효과는 즉시 드러났다.
스벅은 그 뒷풀이 랭크게임에서 3연승을 따내고 극락으로 도배되는 채팅창을 보며 기분 좋게 방종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편집자에게는 당당히 말했던 스벅도 Nord라고 표시된 친구창 앞에선 쭈구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베타코드의 화면을 띄워 놓고 한참을 망설이던 스벅이, 결심한 듯 굳은 표정으로 노르드에게 메세지를 남긴 건 거의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물론 단잠에 빠져든 혜진이 그걸 확인할 수 있을리가 없다.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읽지 않음 표시를 보며 스벅은 또 한참동안 머리를 싸맨 채 전전긍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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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포만감에 기분이 좋았다.
몸이 바뀐 이후로 얻은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였다.
이 몸은 즉석밥 하나 분량으로 포만감을 완전히 채울 수 있었다. 연비 하나는 기가 막히다.
뭐, 그만큼 힘이 없기는 했지만.
원래 장점 하나는 대칭이 되는 단점 하나와 짝을 짓는다.
본인이 가진 장점을 길게 나열하는 사람과 쉽게 친해지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장점이 많으면 대개 단점도 많은 법이거든.
식사를 마친 이후는 당연히 게임이다. 후라이팬 채로 처리한 볶음밥의 잔재를 마저 정리하고 설거지를 빠르게 끝냈다.
그 다음엔, 마실거라도 하나 준비해서 컴퓨터 앞에 앉으면 준비 완료다.
연락올 곳이 없어 웹서핑과 시계로만 이용하는 핸드폰을 가져와 시간을 확인했다.
10시 10분.
평소같으면 아직도 침대에 있을 시간이다.
일찍 일어나는 인간의 하루는 이리도 길어지는가 싶다.
...응?
시간을 확인하는 중에, 익숙치 않은 알람표시가 보였다.
읽지않은 Betacord 메세지(1)
분명, 어제 교육을 위해 설치한 음성채팅 어플이었다.
메세지가 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다.
혜진은 인맥을 거세당했나하는 의문을 가질 정도로 고독한 사람이다. 연락처에 암호처럼 등록된 몇몇 사람들에게선 지금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아마 당분간은 연락이란 걸 받을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메세지를 받았다는 사실에 조금 우스웠다.
몸이 바뀐 후 처음 받는 메세지가 게임에서 얻은 인연이라니, 나는 역시 진성 게이머였나 싶기도 하고.
분명 스벅이 남긴 메세지일 것이다. 무슨 내용일까.
예상하건대 내 훌륭한 교육에 대한 감탄 내지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메세지일 것 같았다.
제법 예의를 지키는 유저였으니 감사의 말 한마디 정도는 남길 법도 했다.
나는 메세지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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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벅:선생님! 다름이 아니옵고... ㅠ 선생님한테 사과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사실 저스틴에서 방송을 하는 스트리머입니다. 선생님한테 가르침 받을 때도 방송중이었어요...
알려드렸어야 하는데 솔직히 방송욕심이 나서 그대로 진행했습니다.
선생님을 조롱하거나 비하하려는 의도로 가르쳐달라고 부탁드린건 절대!! 아닙니다.
너무 잘하셔서 교육 컨텐츠 느낌으로 요청드린거에요.
시간 나신다면 제 방송 다시보기로 확인해보셔도 괜찮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방송이 엄청 흥해서 시청자 수가 많았습니다. 시청자들도 선생님의 매력에 푹 빠진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가...(중략)
그래서 정말 죄송하지만 선생님의 교육 영상을 제 엘튜브 채널에 편집해서 올려도 될까요?
혹시 걱정되신다면 올리기 전에 먼저 보여드릴테니 검토하셔도 됩니다.
이 영상으로 발생하는 수익은 정확히 절반 나눠서 드리겠습니다.
밤 중에 길게 연락드려서 죄송하네요 ㅠㅠ 천천히 답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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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그냥 머리가 멍 하더라.
무슨 배신감 같은 감정을 느낀 건 아니었다.
애초에 신뢰관계를 쌓지도 않았는데 그런 낙차를 체험할 리가 없다.
내가 느끼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겪었을 때 오는 일종의 뇌정지 상태에 가까웠다.
전혀 몰랐다.
저 메세지에 따르면 나는 무려 세 시간 동안 스벅의 방송에 노출된 셈이다. 그런데 방송을 하는 것 같은 낌새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눈치채기 힘든 상황이긴 했다.
보이는 건 주고 받는 채팅과 상대방의 캐릭터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나 종국에는 음성채팅까지 했다. 잘 생각해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릴 수도 있었을텐데.
나는 누군가 나를 속인다는 행위에 민감했다.
그리고 항상 나를 속인 누군가에 대한 원망보다, 쉽게 속아 넘어간 나에 대한 자괴감이 훨씬 크더라.
몰려오는 자괴감에 핸드폰을 집어 던지고, 이불을 쥐어 뜯으며 몸뚱이를 굴리기를 몇 분인가.
나는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내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나긴 했으나 무슨 금전적인 피해를 입은 건 아니었다. 아니, 스벅의 말에 따르면 오히려 수익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하지 않는가.
자괴감이라는 감정은 지극히 자기소모적이다.
여기선 현실도피를 해서라도 그런 감정에서 벗어나는 게 좋겠지...
방송에 출현 당했다는 사실에는 생각보다 별 감흥이 없더라.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몸이 바뀐 뒤로 사람과 마주하는 일이 굉장히 꺼려지기는 했으나, 온라인 상에서는 별 지장이 없었다.
심지어 얼굴은 커녕 목소리만 출현했다면야. 걱정된다기 보다는 오히려 궁금했다. 사람은 본인 목소리를 듣는 게 생각보다 어색하다던데.
그럼 몸이 바뀐 나는 내 목소리가 어떻게 들릴까.
결론적으로 나는 스벅의 사과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말도 없이 방송을 진행했다는 게 괘씸하기는 했으나.
생각하면 할수록 괜한 호들갑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방송한다는 게 무슨 죄인 것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공중파 방송에서 허가도 없이 얼굴까지 노출되는 일반인들도 있었다.
그에 비하면 내 경우는 아무것도 아니겠지.
그보다는 방송이 흥했다는 스벅의 말에 놀랐다.
고작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온 정도로 시청자가 늘지는 않았을테니, 아마 내가 스벅을 가르치면서 보여준 고품질의 나이트폴 강의가 제법 먹혀들었나 싶었다.
재능은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찾을 수 있다더니.
혜진양은 교육의 재능도 가지고 있던 모양이다.
영상의 조회수가 잘 나오면 나름대로 재밌는 일이 되지 않을까. 어쩌면 나름대로 네임드 유저가 될 지도 몰랐다.
원래 명예욕은 모든 인간의 패시브였다.
나도 한 때는 나이트폴의 프로와 네임드 유저를 향해 선망의 시선을 보내지 않았던가.
뭐, 영상 하나로 네임드가 될 리는 없으니 가벼운 망상에 불과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스벅에게 메세지를 날렸다.
Nord:그냥 올리세요.
뭔 일이 있을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