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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화 〉13 - 생각하지 않는 법을 생각해주세요 (13/243)



〈 13화 〉13 - 생각하지 않는 법을 생각해주세요

역시 정신 표백에는 게임만 한 것이 없다고 내심 단언하며, 나이트폴로 접속한  불과 1분 전.

나는 지금... 머리가 굉장히 복잡했다.

친추요청(100+)
메세지(100+)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일까.

나이트폴에 메세지 전체 삭제 기능이 있던가.

깔끔해야 할 인터페이스가 점멸하는 꼴이 정신사납다. 과거 길드에 소속되었던 때에도 이런 경우는 없었다.
평균 접속자가 20명인 진성 겜창 길드였음에도 그랬다.

이런건 보통 유명한 프로 선수나 방송인들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지금은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다. 현실 도피를 위해 접속한 게임에서 되려 현실을 마주한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당연하게도 목록을 꽉 채운 친구요청 중에 내가 아는 닉네임은 존재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나는 나이트폴을 이제 시작한 2일차 뉴비아닌가. 뉴비가 뭘 안다고 이렇게 무수한 친구 요청을 날리는 것인지.

내가 볼 때  정도면 괴롭힘이었다.

정신을 나가게 만드는 끝 없는 메세지 목록에서, 시선이 가는 닉네임을 골라 열었다.



Blueprint:누나 사랑해요. 방송보고 바로 팬 됐슴니당ㅠㅠ 목소리 너무 좋아요. 제발 방송켜서 겜 해주세요!

팬? 팬이란 건 기본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에게 생기는 것 아닌가.  같은 인간에게 팬이라며 접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사기꾼이나 다단계일 것 같은데.


쓰벅고추왕꼬1추: 안녕하세요. 방송  봤습니다.  룩2인데 저랑 듀오하실래요? 제가 캐리해드릴게용 ㅎㅎ 참고로  왕꼬추입니다.

어쩌라고.

대검향우회1기:방송 잘봤습니다~ 대검 쓰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죠. 혹시 괜찮으시면 저희 길드 들어오실래요? 대검매니아들이 가득합니다!

길드 권유. 이건 그나마 그럴싸하다.

Kr Kingho: 송파구 거주 26세 183cm 81kg 다년간의 헬스경력으로 꽉 찬 언더아머 보유중. 주량 소주 세 병까지 커버가능. 나이트폴 최고랭크 비숍1 현랭크 비숍3. 관심있으시면 연락바랍니다. -010-7826-0000


이즈음되면 두려워진다.

하얀색니삭스o:눈나 사랑해요 눈나 사랑해요 눈나 사랑해요 눈나 사랑해요 눈나 사랑해요 눈나 사랑해요 눈나 사랑해요 눈나 사랑해요 눈나 사랑해요 눈나 발에 밟히고 싶어요


차단.

니다리핥짝:섹스섹스보지털


...차단.


fuewsnx:빨대년이 인기 빨아먹으려고 창녀짓하네 ㅋㅋ 그렇게 사니까 좋냐?

내가 예상했던 메세지와 비슷해 그나마 안심이 간다.

최강전사이무식:나는 너랑 싸운다. 17시 붉은 평원으로 와라.


...도전장?


나는 메세지 창을 닫았다.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다. 몇 개만 확인하니 나머지는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무슨 내용일지가 뻔했다.


짐작 가는 일은 하나밖에 없다.

스벅.  삐숍 유저는 내 생각보다 훨씬 유명했나 보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방송 출현을 대수롭지 않게 넘긴 건 그게 내게 미칠 여파가 없다시피 할 거라는 예측 때문이었다.


여파가 있어도 나중에나 있을 줄 알았지.

이건... 너무 즉각적이지 않은가.

관심을 받는다는 사실이 마냥 불편하지는 않았다.

모든 인간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타인의 관심을 먹고 사는 법이니까.

아마 몸이 바뀌기 전에 이런 관심을 받았다면 나도 기쁘게 환호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기쁨은 커녕 당혹이 앞선다.


내가 여자가 되었음에도 지금까지 그나마 평온할  있던 까닭은 혜진의 인간관계가 단절되다시피 전무했기 때문이다.

고립된 상태란, 즉 나를 여자로 바라보고 대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과도 같았으니까.


이 원룸 안에서 나는 몸이 바뀌었음에도 온전한 '나'였다.

나는 정체성이라는  생각보다 단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인간의 자아는 타인의 시선에 민감히 반응해, 그들의 시선으로 본인을 재구성하기 마련이니.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20대의 여자로 바라본다면.
나는 지금의 자아를 온전히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나를 향해 모이는 관심이 조금은 두려웠다.


방송을 확인해봐야 할까. 인터넷 방송의 영향력을 너무 얕보고 있었나 보다.

그깟 방송 출연 한 번으로 이 정도의 관심이 몰릴 줄은 몰랐다.

그런데 이제 와서 방송을 다시 본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미 장문의 사과문을 보낸 스벅에게 편집영상의 업로드도 허가한 뒤였다.

마음이 바뀌었다고 말하고 업로드를 막아 봤자, 이미 집중된 시선이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이미 벌어진 일을 수정할 수는 없는  아닌가.
그럼, 결국 내가 할  있는 일은 없었다.

나는 설정에 들어가 친구요청과 메세지를 전부 차단했다.

이미 포화상태인 목록이 더 늘어날 리는 없겠으나 이러는 쪽이 마음이 편했다.

그러고는 바로 랭크게임을 돌린다.


원래 이럴 때를 위한 해답은 정해져 있다.


그냥 모르는 척 하련다.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 주실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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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d:그냥 올리세요.

사람이 쿨해도 너무 쿨한 게 아닌가.


어젯밤 끙끙 거리며 잠을 설친 성호가 일어난 시각은 오전 열시 즈음이었다.

세 시부터 정규방송을 시작하는 스트리머 스벅의 스케줄을 생각하면 굉장히 이른 기상이다.
사람은 못해도 하루 아홉 시간은 자야된다는 성호의 신념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아직 두 시간은  자야하는데.


노르드에게 보낸 장문의 사과문이 생각보다  신경쓰였나 보다. 알람도 없이 일어나 최초로 수행한 일이 베타코드의 메세지를 확인하는 일이라니.

답장은 달랑 저  문장이 다였다. 너무 간결했다.

보통 여자들은 문자를 길게 보내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자신이 여자친구를 사귄 지가  년이 지났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얼굴을 찌푸리고 마는 것이다.


사실 업로드를 거부해도  말은 없다고 생각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송 출연 한번 해보겠다고 저격을 일삼는 인간들이 있는 반면, 돈 주고 부탁해도 방송을 거부하는 사람도 존재했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다양한 법이니.

노르드가 후자에 포함될 수도 있는 이야기아닌가.

짧은 인연이지만 절대 관심종자 같아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거절했으면?

아마 무릎꿇고 비는 사진을 보내서라도 설득했겠지. 그 정도로 대박이 난 방송이었다.

그러니 노르드가 한번에 업로드를 허용한  분명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리 속이 찝찝한지.

잠을 잘못 잤는지 찌뿌둥한 몸이 불쾌감을 더하고 있었다.

'반성문이  그랬나... 아니 글이라고는 공지밖에 안 쓰니까 제대로 쓸 수가 있어야지...'

평소처럼 한번 만나고 그칠 관계라면 이런 감정도 느끼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성호는 노르드와의 인연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었다.


이유는 뭐라도 갖다 붙일 수 있을 것이다.

노르드가 방송 흥행을 도와주는 특급 게스트이기 때문이라든지, 보기 드문 실력의 여성 유저라 그렇다든지.

그러나 성호는 그런 것보다 한마디로 요약 가능한 설명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냥, 사람 자체가 매력이 있으니까.




'방송 시작하면 금방 대박날 거 같은데.'

실제로 그랬다.

단순히 여자가 나온다는 이유로 방송이 대박  리가 없다.
성호가 방송하고 있는 저스틴만 해도 여성 스트리머가 몇 명인가.

그 많은 여성 스트리머 중에서 대기업이라  수 있을만큼 많은 고정 시청자를 보유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방송을 흥하게 만들려면 무엇이든 능력이 필요한 법이다.

그런 점에서, 성호가 보기에 만명이 넘는 시청자를 불러 모은 건 노르드라는 유저가 지닌 매력 덕분이었다.

물론 성호가 무슨 MCN이나 기획사의 대표인 것도 아니니 생각만 할 뿐이지만.



노르드의 짧은 답변에 찝찝함이 남은 건 사실이었으나, 영상 업로드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안 그래도 성호의 편집자가 실시간으로 커뮤니티의 반응을 보내오고 있는 상황이다.

화제성이 높을 때 터뜨리는 게 가장 폭발력이 크겠지.

스벅의 엘튜브를 관리하는  사실상 편집자의 관할이었으니.

성호가 할 건 그저 채찍질이었다.


스벅:아니 커뮤니티 링크 그만 올리고 편집이나 빨리 하시라구요

스벅의노예:~_~

스벅:ㅡㅡ
스벅:감봉?

스벅의노예:스트리머 윤X호씨 갑질 논란,  퍼진 노예관계.

스벅:한마디를 안지네

스벅의노예:아 무요 일하고 있다구요


채찍질...이긴 했다. 효력이 없다는 건 제쳐두고서라도.


말은 저렇게 해도 아마 편집 작업을 소홀히 할 일은 없을 것이다.
성호가 편집자와 티격태격하면서도 질긴 인연을 이어온 게 거의 이 년은 됐으니까.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려둔 성호는 컴퓨터를 켰다.

방송 시작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다. 랭크전을 한두판 정도 하고 밥을 시키면 시간이  맞을 터였다.


 시간 동안 쉬는 시간 한번 없이 진행된 노르드의 하드한 교육은 스벅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어줍잖은 잔기술은 시도조차 못했다.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공격을 시도하면, 바로 목숨이 날아가는 판에 무슨 시도를 할까.

내심 숙련도가 낮은 양손검을 탓하며 무기를 교체하길 수 차례.

스벅은 그제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무기고 나발이고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걸.

 뒤로는 거의 수비 일변으로 광전사의 움직임을 관찰하기에 바빴다.

처음엔 움직임을 따라가기도 벅찼으나, 눈도 적응이란 걸 하는지 나중에는 제법 막아낼  있을 정도로 발전했다.

그것도 노르드가 페이크를 섞기 전까지였지만.


아무튼 수십 번의 죽음을 겪으며 왜 죽었는지를 생각하다 보니 무엇이 문제인지는 알았다.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고자 영상을 보며 익혔던 정석적인 패턴들이 죄다 파훼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걸 알아차려도 바로 고치기가 힘들었다.
습관은 무서웠다. 몇 년의 세월동안 나이트폴을 하며 적응한 손은 자연스럽게 익숙한 패턴대로 움직이더라.

스스로에 대한 답답함을 호소하는 스벅에게, 노르드는 담담하게 무기를 바꾸라고 조언했다.

검과 방패. 이른바 검방이라 불리는 나이트폴의 표준적인 장비였다.

뭐, 시청자들은 웨폰마스터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저버리는 거냐며 맹렬히 비난했으나.

'퀸 이하 올웨폰 금지'라는 노르드의 한마디에는 입을 다물더라.

노르드의 말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안정적인 검방으로 지켜보는 위주의 플레이를 하면, 새로운 패턴이나 운영을 비교적 쉽게 구축할  있다는 설명이었다.

실상은 더럽게 못하니까 그나마 괜찮은 피지컬로 패링이나 치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스벅은 노르드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하여 스벅은 검방을 들고 랭크전 3연승을 이뤄낸 것이다.

비숍2까지 떨어진 이후로 나이트폴에 대한 일종의 매너리즘을 느끼고 있던 그였다. 스타일을 바꾸고 얻어낸 연승은 생각보다도 달콤했다.

이 분위기를 타면 다시 룩을 노려볼 수도 있겠다는 희망찬 기대감도 생겼다.


방송적으로도 승급전은 언제나 훌륭한 컨텐츠가 될 수 있었다.

스트리머가 망하길 기대하는 시청자와 티는 안 내면서도 은근슬쩍 승급을 바라는 시청자들.

게임의 국면에 따라 채팅창의 여론이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바뀌는 게 승급전의 포인트였다.

그러기 위해선 아직 익숙치 않은 검방의 숙련도를 조금이라도 올려둬야겠지.

스벅은 랭크게임 매칭을 시작했다.


매칭을 누르고 습관처럼 열어버린 친구목록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이름이 있었다.


Nord11 게임중 (비숍1)



왠지 모를 이끌림에 스벅은 방금 돌아가기 시작한 매칭을 취소했다. 검방의 숙련도? 그런 건 언제든지 올릴 수 있지 않나.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스벅은 망설임없이 '관전하기'를 누른다.

스벅의 눈 앞에, 잊지 못할 광전사의 붉은 눈이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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