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화 〉14 - 빌드깎기 인형 (14/243)



〈 14화 〉14 - 빌드깎기 인형

감각이 확장된다는 건 놀라운 경험이다.

인간이 인식하는 현실은 감각이 수용한 외부세계의 자극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감각의 확장은, 세계의 확장과도 같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그런 경험을  수 없다.

감각은 확장되기 보다는 쇠퇴하기 마련이다.
강렬한 자극에 혹사당하는 눈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뚜렷함을 잃어버린다.
도시의 소음에 노출된 귀는 처음의 선명함을 잃고 이명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감각은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혹은 과도하게 혹사당하기 때문에 퇴화한다.

인간이 나면서부터 천천히 죽어가듯.
감각도 인간의 삶에 따라 천천히 닫혀가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죽음의 과정이다.

따라서 감각의 확장이란... 오히려 더욱 이질적이었다. 자연스러운 죽음의 과정을 역행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가능하다면, 어떤 경우에나 가능할까.

지속적인 훈련으로, 특정 감각을 예민하게 단련했을 때?

도구의 힘을 빌려, 인간의 감각으로는 인지할  없는 세계를 인지할 때?

정답은 천부적인 감각을 지닌 22세 여성의 몸으로 빙의했을 때다.

과연 자연을 크게 역행하기는 했다.

###

공기를 가르고 휘둘러진 대검이 그대로 복부를 베어냈다. 비산하는 핏줄기가 아름다웠다.

광전사는 피를 머금고 한층 더 흥분한다.

적 기사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쏟아낸 대검을 회수했다. 적을 죽이고 더욱 기민해진 몸놀림은, 그 속도를 미세하게나마 높였으니.

전투에서 미세한 차이는 결과를 뒤바꾼다.

대검을 어깨춤으로 회수하자마자 광전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좌측으로 몸을 날렸다.
찰나의 순간 방금까지 광전사가 서 있던 자리에 거대한 화염구가 부딪혀 폭발했다.

뜨거운 열기는 애꿎은 시체만을 불태울 뿐이었다.

터져나온 폭발로 인해 발생한 강렬한 열기와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피어오르는 먼지는 지극히 어지러운 전장에 혼란을 추가한다.

회심의 일격에 실패한 마법사는, 성벽 위에서 황급히 자신이 놓친 목표물을 찾아내고.

이윽고 자신을 정확히 포착한 광전사의 붉은 눈과 마주한다.

소름이 돋았다.

분명 광전사의 사각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급박한 전투의 순간이었다. '위기감지' 특성을 찍었다 한들 무슨 수로 원거리 저격을 눈치채고 피했다는 말인가.

마법사의 경악을 계속 주시한 채.
광전사는 걸었다.

 어지러운 전장의 한복판에서, 여유로운 광전사의 모습은 지극히 이질적이었으니.

마법사로서는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퍼억!

파열 소리와 함께, 최후의 생존자였던 마법사가 쓰러졌다.

전투 중 기습적으로 날아온 화염구는 위협적이었다. 궁병의 화살보다는 느리지만 범위가 넓은 편이다.
미리 확인하지 못하면 폭발 반경에 말려들어가기 십상이다.

직격으로 맞는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마법사의 존재는 내가 알던 퇴물게임 나이트폴과 성공한 국민게임 나이트폴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였다.

그래, 내 기준에서 보면 하루아침에 좆망겜에서 갓겜으로 변한 셈이니 불평을 말해 무엇하겠냐만은.

마법사...는 좀 아니지않나.

나는 마법사의 머리를 터뜨린 대검을 회수했다.
화면에 깃발이 휘날리며 승리라는  글자가 나타나기까지는 금방이었다.

밸런스에 대한 불만은 아니다.

겪어본 바에 따르면 나이트폴의 마법사는 판타지 RPG게임의 마법사와는 결이 많이 다르더라.

마나라는 어처구니 없는 자원으로 강렬한 마법을 퍼부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범용성이 있는 다양한 유틸기로 전장을 휘두르는 것도 아니었다.

근접전 능력은 형편없기 짝이 없었다.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제대로 된 마법을 캐스팅하지도 못했다.

그럼 대체 이 나사 빠진 클래스가  존재하는가하면.

준비가 된 상태에서 전장에 터져나오는, 그 맹렬한 화력 때문이라고 말하리라.

그러니까 사실상 포병의 위치였다.


그러나 그 꿈 같은 화력을 펼치기 위해선 많은 조건들이 필요했으니.
앞서 말한 것처럼 내가 밸런스 때문에 마법사의 존재를 꺼려한 것은 아니었다.

전면에서 병장기를 주고 받는 걸 선호하고, 또 실제로 전투의 대부분을 최전방에서 주도하는  스타일 상 마법사는 게임의 막바지에나 구경할  있는 존재였다.

게임의 초반과 중반에 마법사를 견제하는 역할은 잠입 특화로 빌드를 구성한 좀도둑이나 궁병들이 맡았는데.

까놓고 말하자면, 마법사는 베는 맛이 없었다.

내가 마법사를 벨  있는 위치에 있다는 건 이미 게임에서 이겼다는 말과도 같았다.

게임이 그 지경까지 가면 마법사를 호위하는 플레이어도 남아있을 리가 있나.
그냥 걸어가서  건들면 죽어버리는 종이 쪼가리인 것이다.

그래. 무슨 호불호에 대한 설명을 이유까지 붙여가며 길게 이야기하겠는가.

나는 마법사가 싫었다.

그게 지금 내가 새로운 빌드를 구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이트폴은 마법사라는 예외를 제외하면 따로 클래스를 구분하는 게임이 아니었다.

 게임 세팅에서 건드릴 수 있는 무기와 특성에 따라 캐릭터의 특징이 명확하게 변하는 것 뿐이었다.
이걸 유저들은 빌드라고 불렀다.

따라서 기사, 창병, 궁수, 광전사... 이런 클래스 분류들은 게임에서 지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유저들이 편의에 따라 구분해서 부르는 명칭에 가까웠다.

부르는 사람마다 클래스의 이름이 미묘하게 다른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대방패를 중심으로 방어에 초점을 맞춰 세팅한 캐릭터는 주로 거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나 그 밖에도 방패병, 탱커, 쉴더 등 동일한 세팅을 일컫는 다양한 이름이 존재했다.

게임이 영미권에서 처음 출시되었을 때, 영어로 게임을 즐기던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시절의 기억이 남아있는지 영어로 된 명칭을 즐겨 사용했다.

물론 한국에서 정식 출시된 이후로 틀딱 노인네 취급을 받고 그 수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아무튼, 빌드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캐릭터를 만들  있다는 사실은 게이머들의 열정에 불을 붙이는 법이다.

나이트폴이 유명해지면서부터는 빌드를 공유하는 사이트도 크게 활성화됐다.

랭크는 룩 하위 티어에 불과 했으나 기발한 빌드를 많이 개발해 유명해진 유저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 걸 보면 이 게임에서 빌드의 중요성을 알만 하리라.

그러나 특성의 가짓수가 얼마나 많더라도 절대 무한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떤 컨셉에 맞는 빌드를 만들다보면 핵심이 되는 특성은 대부분 중복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난투에 유리한 빌드를 만들고 싶으면 체력이 떨어질수록 폭발력이 증가하는 광전사(Berserker) 특성을 안 찍고 넘어갈 수는 없다.

이 특성을 중심에 두고 마인드맵을 펼치듯 유효한 특성을 찾아다니다 보면 대개 비슷한 느낌의 빌드가 완성이 된다.

다시 말해 빌드의 정형화는 필연적이라는 소리다.

승리를 원하는 게이머는 가장 효율적인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과거 나이트폴에 입문한 시점 내가 자주 플레이하던 광전사 빌드는 정형화된 빌드에서 세부적인 특성만 취향 껏 수정한 모양새였다.

그런데 항상 효율적인 선택만 하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많은 게이머들이 게임에서 괜히 로망을 찾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효율을 넘어서, 단지 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고를  있는 선택지도 존재했다.

모든 생존 특성을 포기하고 공격에 올인한 유리대포 광전사라든가.
반대로 무기조차 버리고 방특에 몰빵한 인간 성벽이라든가.
이동속도가 증가하는 모든 특성을 다 찍고 전장을 질주하는 폭주기관차라든가, 하는.

누군가는 이기기 위해 게임을 하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그저 즐기는 걸 일순위로 두고 전장에 나서는 것이다.

그런 선택을 하는 인종들은 주로 자기만의 빌드를 깎는 변태들이 많았다.

굳이 포장된 길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괴짜들.


본래 나는 그런 괴짜들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마법사라는 직종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음을 밝힌다.

이 세상 모든 마법사가 사라지기를 기원하며, 나는 빌드깎기를 시작했다.


###

빌드를 새로 만들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것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컨셉이다. 모든 창작 이전에는 설정이 있다. 무엇을 목적으로 만드는 지를 명확히 하는 게 훌륭한 창조의 첫걸음이다.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정면에서 중갑기사를 압도하고, 후열에서는 비열한 마법사를 암살하는 만능캐를 만드는 게 아니다.

밸런스와 중용의 미는 현실에서나 아름다운 미덕인 법.

나이트폴에서 올라운더라는 깔끔한 포장지를 가진 빌드는 대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완성도에 하자가 있어 공격과 방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놓친 쓰레기 빌드거나.
사용자에게 극한의 상황 판단과 컨트롤을 요구하는 고인물 전용의 상급자 빌드이다.

그마저도 '이론  완벽'에 불과하다.
이론으로 따지면 난 레이피어로 거북이 여섯 마리를 돌파할 자신이 있다.

그만큼 개소리라는 뜻이지.

때문에 목적은 구체적일수록 좋았다. 그걸 분명히 해야 빌드를 만드는 과정에서 욕심이 생기는 것을 막을  있다.
 나가던 빌드가 중간에 망가지는 이유의 태반이 좋은 특성을 하나만 더 챙기자는 욕심에서 나왔으니까.

그럼 내가 지금 만들 빌드의 목적은 무엇인가.

'마법사죽이기'.
나는 바로 커스텀 설정의 공란에 이름을 채워 넣는다.

 제목은 앞으로의 고된 빌드깎기 과정에서 내가 길을 잃지 않게 도와줄 등대가 될 것이다.

무기를 고르는 게  번째다.

특성으로 빌드의 중심을 잡고 장비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으나, 내가 만들 빌드는 장비에서 시작하는 게 좋았다.

오로지 마법사만 죽인다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우에는 무기를 이미 정해두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단검이다.

나이트폴에서 주무기로는 거의 활용되지 않았다. 애초에 무기의 설계부터가 소지의 편의성을 중시하여 만들어진 무기다.

이 장점은 전장에서는 빛을 보기 힘들었다.

중갑을 두른 플레이어가 태반인 환경에서 길이가 극히 짧은 단검으로 무슨 시도를 할 수 있을까.

때문에 단검은 보통 주무기를 활로 선택한 궁병이 부무장으로 사용하는 걸 제외하면 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카운트를 올릴 대상을 마법사로 국한시키면 이야기가 다르다.

중갑을 착용하지 못하는 메이지 클래스의 특성  중요한 건 무기의 길이나 살상력 따위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접근해 칼을 꼽거나, 멀리서 화살 한방만 제대로 맞출 수 있으면 그만이다.

게임의 구도에 따라 필연적으로 다른 플레이어를 만날 수도 있다는 합리적인 가정은 버려라.

마법사 살해는 감성이다.

단검을 주무기로 설정했을 때,  손이 자유롭다는 장점은 뛰어난 기동성과 유연함으로 이어진다.

동시에 선택할 수 있는 부무장의 가짓수도 늘어나니.

여기서부터는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되는 구간이다.

마법사 주위의 호위가 두터운 경우를 가정한다면, 접근이 힘들테니 원거리 공격 수단을 하나 정도 챙겨두는 게 좋을 것이다.

나는 투척용 단검과 석궁 사이에서 고민에 빠졌다.

두 부무장의 장단점은 명확하다.

투척용 단검은 휴대가 용이한만큼 움직임에 전혀 제약을 주지 않았다. 내가 만들 빌드의 핵심은 기동성에 있으니 이 장점은 확실히 돋보였다.

반면 석궁과 비교했을  투척 사거리가 매우 짧다는 단점이 있다.
게다가 살상력도 부족했다. 아무리 유리대포에 비유되는 마법사라지만 멀리서 투척 무기에 한번 맞았다고 빈사상태가 되지는 않는다.
이런 부분은 확실한 한계점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석궁은 정확히 대척점에 있다.

부무장으로 선택할  있는 석궁은 장력에 제한이 있다. 중갑을 뚫을 정도로 강한 장력을 가진 석궁을 보조로 들고 다니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이런 석궁은 장전을 위한 요구사항도 매우 까다로웠기 때문에 애초부터 고려 대상에서 제외했다.

때문에 부무장으로 사용이 가능한 석궁은 일반적으로 한손 무기를 활용하는 빌드에서 견제를 위해 채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적의 중갑이나 방패에는 막히지만, 치명적인 부위를 맞출 경우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으니 적에게 방어를 강요하는 수단이다.

역시 내가 만들 빌드에서는 전혀 고려할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내 석궁은 상대 마법사에게만 날아갈테니까.

이무튼 석궁은 살상력과 사거리는 투척 무기에 비해 월등하지만 소지가 어렵고 장전이 까다롭다는 단점이 있었다.

나는 석궁을 고르기로 결정했다.

휴대 시 기동력이 떨어진다는 단점은 주무기가 단검이라는 점으로 어느정도 상쇄할 수 있는 문제다.
반면 주무기가 단검이라 부족할 수 있는 사거리의 부재를 석궁이라면 메꿀  있을 것이다.

장전? 그건 첫 발을 맞추면 문제가 아니잖아.

나는 그제야 특성 페이지로 넘어갔다.



그렇게 빌드를 다 만들었을 때는, 해는 지고 바닥에서 찬 기가 도는 밤 중이었다.

빌드를 처음부터 만드는 과정을 괜히 '빌드깎기'라고 부르는  아니다.

베이스도 없이 제로에서 시작하는 빌드 만들기는 꽤나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설령 그렇게 만들었다고 해도 끝이 아니다. 직접 빌드를 굴리면서 문제점을 찾고 보완하는 작업까지 마쳐야 비로소 제대로  빌드가 완성된다.

빌드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뇌내 시뮬레이션을 굴린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망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전에서는 감히 생각치도 못한 변수들이 무더기로 발생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이제 힘겹게 만든 빌드를 실험할 차례였다.

빌드를 만드는 내내 머릿속에서 몇 명의 마법사가 스쳐 지나갔던가.

지금은 밥을 먹는 것보다 마법사가 죽는 꼴을 직접 목격하는 게  배부를 것 같았다.

그런고로.
나는 주린 배를 붙잡고 랭크 매칭을 시작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