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15 - 마법사를 죽인다. 딱히 이유는 없다
전운이 감도는 전장의 분위기를 눈치 챘는지 하늘도 빛을 감춘 듯 했다.
구름이 드리운 하늘은 빛 바랜 무채색이었다.
찬란하게 빛을 반사하던 고성도 침묵하는 하늘 아래에서 적막함에 잠긴다. 여느 때와 같은 웅장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쿵- 쿵-
아마 숨을 죽이고 있으리라.
전운에 긴장하는 건 인간뿐만이 아니다.
전쟁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호흡을 하는 모든 것들이 경직되기 시작한다.
두려움 또한 인간만의 몫이 아니기에.
고성이 웅장함을 잃은 까닭은, 두려움에 몸을 움츠리고 있기 때문이리라.
쿵- 쿵-
더 이상 외면하지 못할 소리가 온몸의 떨림으로 바뀔 때.
쿵- 쿵-
전쟁은 시작된다.
두터운 성벽이 전장의 소음을 차단한 탓인지, 내성은 생각보다 고요했다. 시간이 깎아낸 외벽 사이로 흘러 들어오는 작은 소리가 없었다면 한적한 풍경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바깥은 사방이 포위되어 죽음이 난무하는 전투가 한창일 터.
이곳은 지금 고성에서 가장 안전한 공간이었다.
마법사는 그곳에 자리잡았다.
내성에서도 외진 곳에 존재하는 탑이었다. 탑의 꼭대기에서 전장의 양상을 살필 수 있으면서도, 적의 궁병에게 노출되지 않는 최적의 장소였다.
자고로 숙련된 메이지란, 마치 바둑판을 바라보는 기사처럼 전장을 내려다볼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확정한 마법사는 곧바로 탑의 꼭대기로 이어지는 계단에 병사들을 배치시켰다. 이 또한 전장에서 가장 귀한 존재인 마법사에게 주어진 일종의 자원이었다.
만약 쥐새끼처럼 잠입한 적의 첨병이 있더라도, 좁은 계단을 철통같이 지키는 병사들의 시선에서는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안전을 확보한 마법사는 곧장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안정적으로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마쳐야 할 작업이었다. 잠깐 살펴본 전황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듯 보였다. 아군이 시간을 벌어준다면, 보다 정밀한 마법진을 그릴 시간도 충분할 터.
그렇게 완성된 마법진에서 마법사가 가지는 폭발력은 전황을 뒤바꿀 것이다.
마법진을 그리는 행위는 정밀한 작업이 요구된다. 아무리 숙련된 마법사라도 전장의 한복판에서 마법진을 구성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전장의 어지러움과 동떨어진 외로운 탑의 고요함은 마법사가 활동하기에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꽤나 복잡한 형태의 마법진을 선택한 탓인지 완성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마법사가 사전작업에 들인 시간은 곧 현실을 일그러뜨릴 마법의 위용과도 연결될 것이다.
긴 시간의 작업 끝에 마법진을 완성한 마법사는 탑의 창을 통해 전장의 국면을 살폈다.
그 순간이었다.
철컥-
들리지 말아야 할 소리가 들린다.
문을 잠구고 있던 자물쇠가 해체되는 소리다.
이 전장이 모두 정리되는 순간까지 열리지 말아야 할 문이었다.
자의로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들은 전부 전장의 중앙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다.
경비를 맡고 있는 병사들 또한 마법사를 방해하는 죄가 무거움을 알고 있을 터.
그러니 저 불길한 소리는, 분명 자신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경고음일 것이다.
황급히 문을 향해 고개를 돌린 마법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본래 마법사는 즉각적인 대응에 취약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행히도 마법진이라는 준비를 끝마쳐둔 상태였다.
침입자가 누구더라도 실내에서 쏟아지는 불길은 큰 위협으로 다가갈 것이다.
맹렬한 화력으로 번질 불길은 마법사에게도 무시하지 못할 영향을 미치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마법사의 손에서 끓어오른 마력과 마법진이 공명을 시작하고.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마력은 이내 인간의 머리만한 크기의 불덩이로 변화한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는 발사를 위한 신호음이었다.
화염구를 준비한 채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의 손이 흔들림과 동시에, 반쯤 열린 문을 향해 불덩이가 쇄도한다.
콰앙!
짧은 순간에 마법사가 내린 판단은 정확했다. 만약 최초로 들린 소리에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면 문을 열고 들어온 침입자에게 기습을 허용했을 터.
방어 수단이 전무한 마법사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많은 전장에서 활약한 마법사의 경험은 고요한 탑의 침묵을 깨는 소음을 놓치지 않았다.
아마 미숙한 마법사였다면 살아남지 못했겠지.
종전의 폭발음이 사라지고.
다시금 찾아온 적막은 이전보다 무거웠다.
그 침묵으로 상황이 정리되었음을 확인한 마법사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병사들을 그렇게 많이 배치했음에도 탑의 꼭대기까지 적이 진입했다. 그건 침입자가 한 명이 아닐 확률이 높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그렇기에 폭발 이후에도 경계심을 낮출 수 없었는데. 공격수단으로 폭발력이 강한 화염구를 선택한 게 주요했다. 적은 아마 빠른 진압을 위해 한 번에 돌입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마법사가 아직 전투에 영향력을 끼치기 전이어서 다행이다.
본격적으로 마력을 집중하기 시작한 이후였다면 신속히 진입한 침입자에게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도 마법사를 잡기 위해 파견한 인원이 죽은 만큼, 전투에서 아군이 짊어져야 할 무게도 한층 가벼워졌으리라.
이제 폭발의 여파로 손상된 마법진을 보수하고 마법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일만 남았다.
그게 마법사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폭발로 무너진 벽의 잔해 사이에서, 소리도 없이 화살 하나가 날아오고.
화살은 정확히 마법사의 머리를 꿰뚫는다.
마법사는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못했다.
허망하기 그지없는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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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모든 마법사를 죽인다. 딱히 이유는 없다.
킬 카운트에 통계를 내는 기능이 생겼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내가 죽인 마법사를 따로 기록해서, 내가 세상을 위해 이만큼 이바지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자랑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그런 기능이 없다는 게 아쉬웠다.
빌드의 수정을 위해 돌린 게임도 이제 막 10판이 넘었다.
전적은 7승 3패.
연승에 구애받는 스타일은 아니었으나 꽤나 길었던지라 확실히 아쉬운 마음이 남더라.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다.
게다가 좋은 일은 그 경우가 더했다. 행복은 절대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 운수 좋은 날은 뒤에 있을 참담한 불행을 암시하는 법이다. 차라리 무미건조한 하루가 편했다.
결국 언젠가는 해야 할 패배였으니, 새로운 빌드를 위한 밑거름이 됐다면 그걸로 좋았다.
가장 끔찍한 패배는 일곱 번째 게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나이트폴을 다시 시작한 이래로 마법사가 없는 게임을 그때 처음했다.
트롤링이라고 불러도 할 말은 없겠더라.
마법사죽이기의 카운터? 마법사를 안 고르면 돼.
아군과 대치하고 있는 적 한명의 사각을 잡아 뒷목에 단검을 꽂아 넣기는 했으나, 그 게임에서 내 존재감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래도 욕 한마디 없던 걸 생각하면 아직 게임이 깨끗한가 싶기도 했다.
망조가 든 나이트폴이었다면 빌드부터 보고는 부모님 안부가 날아왔을텐데.
아무튼 처참하게 굴렀던 그 게임을 제외하면 꽤나 얻을 것이 많았던 게임들이었다. 빌드의 가닥도 제대로 잡았다.
실제로 플레이하다 보니 단검으로 마법사를 직접 찌르는 경우보다 석궁을 통해 암살하는 빈도가 훨씬 높더라.
하기야 마법사를 하는 얌생이들이 아무런 방비도 없이 주문만 시전하는 멍청이일 리는 없겠지.
방비의 핵심은 AI병사들이다. 마법사를 플레이하면 마치 체스말처럼 지휘할 수 있는 하수인.
하나 하나는 당연히 쉽게 죽일 수 있었으나 그 숫자가 늘어나면 문제가 발생했다.
광전사처럼 보이는 족족 썰어넘길 수 있는 빌드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나이트폴 내에서 일종의 잠입액션 게임을 하기 위해 은밀 특성에 꽤 많은 투자를 한 빌드다.
유저를 속여 넘기기에는 부족했으나 NPC정도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문제는 맵이더라. 어떤 수를 써도 마법사가 배치한 병사들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맵이 존재했다.
예를 들어 '고성(The old castle)' 같은 경우는 맵의 구조 상 마법사가 철저히 은폐할 수 있는 건축물들이 많았다.
내성 탑의 꼭대기에 진지를 구축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꼭대기까지 이어지는 외길을 우회할 방법이 없었으니.
마법사를 죽이기 위해 매우 험난한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단검 하나로 수십의 병사를 죽이는 건 너무 고된 일이더라.
역시 마법사는 모두 죽어야 한다.
완벽한 빌드라는 건 없었으니, 내가 만든 빌드도 고작 열 판의 피드백만으로는 완성도가 턱없이 모자랐다.
내가 플레이한 열 판 중에 고성에 걸린 판이 단 두판에 불과했다. 짧은 경험에 따르면 마법사들이 가장 설치고 다닐 수 있는 맵이 바로 고성이다.
제대로 된 빌드 수정을 위해선 고성 맵에서 더 많이 플레이해봐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숨을 고르기 위한 휴식 타이밍을 가지려 했으나.
그저 조금의 휴식만 취하며 밤을 새기에는 게임이 너무 고된 일이었다..
나도 게임에 고되다는 표현을 붙이게 될 줄은 몰랐다. 해가 뜨는 걸 그대로 보는 경우가 있더라도 컴퓨터 앞에 앉아있으면 지친 줄을 몰랐건만.
어쩌면 이게 정상적인 신체의 신호일 수도 있겠지. 나는 그대로 컴퓨터를 종료했다.
방 안을 비추던 유일한 광원이 사라지는 순간, 내 방은 조용히 적막에 잠긴다.
하루가 저무는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시작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멀쩡한 정신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겠지.
세상에는 달이 떴음을 하루의 시작으로 아는 사람도 있을 텐데.
한껏 허기를 호소하던 배는 이미 지쳐버렸는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보상 없는 울음을 이어가기보단 포기를 선택했나 보다.
그 대가인지, 의자에서 일어난 내 몸에는 힘이 없었다. 온 몸이 노곤히 늘어지는 기분이다.
...양치는 하고 자고 싶은데.
이 찝찝함을 걷어내기 위해 화장실에 가면, 지금 몸에 퍼지는 이 적절한 졸음이 사라질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
나는 그냥 침대로 몸을 던졌다.
침대에 누웠을 때, 허리까지 흩어지는 기나긴 머리카락에 언제쯤 익숙해질 수 있을까.
목덜미에 와닿는 머리카락의 감촉은 부드러웠으나.
그게 마냥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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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벅의노예:편집다했습니다.
스벅:ㄹㅇ??
스벅의노예:제가 어찌감히 주인님께 거짓말을 치겠어요~
스벅:지금도 치고있네
스벅의노예:노르드님한테 컨펌받아야되는거 아님까??
스벅:그냥 올리라고 하시더라고
스벅:그니까 내가 컨펌하고 업로드한다
스벅의노예:아; 쓰벅님은 싫은데
스벅:감봉ㄱ
스벅의노예:영상안보냄 ㅅㄱ
스벅:ㅈㅅ
인정하기 싫지만, 저 얄미운 편집자의 손에서 만들어진 영상물은 언제나 훌륭한 퀄리티를 자랑했다.
범람하는 나이트폴 엘튜브 사이에서 괜히 스벅의 채널이 구독자 50만을 넘긴 게 아니다.
특별한 CG나 영상기법 따위를 쓰지 않고, 어디를 편집점으로 잡아야 할 지를 명확히 아는 것만으로도 영상은 이리도 재밌어진다.
이번 영상은 특히나 깔끔했다. 아마 재료가 재료이니 만큼 건드릴 것도 없었겠지.
영상 업로드를 준비하는 스벅의 마음은 정말 오랜만에 설렘으로 가득했다.
엘튜브 초창기에는 매번 이랬다.
편집자도 구하지 못했던 시절, 직접 편집한 영상을 하나 하나 올리며 오늘은 어떤 반응이 나올까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기대했던가.
엘튜브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고 나서는 사라졌던 감정이다. 경험이 쌓이다 보니 굳이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어떤 반응이 나올까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지금은 어떤 영상을 올려도 그때의 설렘을 느낄 수가 없었다. 흥망의 여부는 딱 봐도 알아볼 수 있었으니, 영상이 잘 나오면 기분은 좋았으나 그 뿐이었다.
편집자와 함께 조회수가 얼마나 나올지를 예상하며 내기하는 재미 밖에는 없었지.
그러나 이번 영상은... 스벅이 생각하기에도 어떤 반응이 나올까 예상하기 힘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노르드라는 유저에 대해서겠지.
만약 영상이 상상 이상의 관심을 받아, 스벅으로서도 도통 노리기 힘든 조회수를 기록한다면.
감정의 동요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노르드라는 유저에게 전혀 예상외의 일격을 날릴 수 있지 않을까.
스벅의 마음은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