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화 〉17 - 산이 거기 있으니까 (17/243)



〈 17화 〉17 - 산이 거기 있으니까

Nord:영상  봤습니다.



어쩔 수 없는 기대감이 생겼다.

편집된 영상 속 '노르드'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보여주던 시청자들이, 나를 계속 좋아해줄 지도 모른다는 허황된 망상.

왜, 풍선에 열을 가하면 내부의 압력이 높아져서 펑 하고 터져버리지 않는가.

나는 지금 풍선과도 같았다.

스벅의 엘튜브라는 자극적인 불꽃이 나에게 뜨거운 열기를 가해,  안의 헛된 희망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열기를 빨리 식히지 않으면 터져버릴지도 모르겠다.



인터넷 개인 방송이란 게 반드시 자기 신분을 노출시켜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도 나이트폴 유저 '노르드'라는 가면을 착용하고 방송을 즐길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람의 마음은 복잡하다. 이런 단순한 의사결정을 하는 데에도 내 머릿속은 지독하게 어지러웠다.

방송을 켜서 뭐하지? 영상에서 나온 폭발적인 반응이 일시적인 열광에 불과하다는 건 너무나 뻔한 사실이 아닌가.

뜨거운 열기는 불이 붙은 속도처럼 빨리 사그라들테고 나는 의미 없는 방송을 금방 그만두게  것이다.

내 머리는 이런 상황에서 대개 부정적인 생각을 쌓아올릴 뿐이었다.

생각이 많아지면 몸은 둔해진다. 판단에 주저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 많은 생각을 한 번에 정리해 명쾌한 해답을 내릴  있는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건만.

고민은 내게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



켜놓고 방치한 엘튜브는 어느새 자동재생 목록으로 넘어가 다음 영상을 틀어놓고 있었다.

연관된 스벅의 편집 영상이었다. 조회수가 높았다. 이 정도면 아마 스벅을 대표하는 영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영상  스벅은 잔뜩 긴장한 상태로 나이트폴을 플레이하고 있었다.  웨폰 유저라는 말이 농담은 아니었는지, 스벅이 다루는 캐릭터는 쉬지 않고 활을 쏘아댔다.

스피커를 통해 급박한 현장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돌아, 돌아! 쟤네 마법사 위치 파악됐어! 나랑 파피루스가 돌파할테니까 지원사격 좀 해줘!"]

팀 게임이었다.

프로 선수들의 경기처럼 고차원적이지는 않았으나, 급박한 오더와 사방에서 들리는 팀원들의 보이스는 그들의 치열함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꼭 왕들의 전쟁이어야만 보는 맛이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 못한, 병사들의 싸움이었기에 느껴지는 투지어린 전투도 분명히 존재했다.

스벅이 쏘아낸 화살이 기적과도 같이  전열의 일부를 무너뜨리고.

환호성과 함께, 마법사를 향해 질주하는 아군의 뒷모습은 위풍당당했다.

영상은 승리의 기쁨으로 환호하는  보이스를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길이는 짧지만 짜릿한 전율을 남기는 영상이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부럽더라.

내가  정도로 몰입해서 게임에 흥분했던 적이 언제였던가.

이 영상이 이 정도로 흥할 수 있던 까닭에는 게이머의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방송을 하려면, 적어도 스벅 정도의 열정을 보여줄 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내게 조건을 내걸었다.

내가 방송에서 내세울  있을 만한 게 뭐가 있겠는가. 말솜씨도, 유머감각도 부족한 내가 유일하게 보여줄  있는 컨텐츠는 나이트폴 실력 뿐이었다.

누구에게도 쉽게 꿀리지 않을 정도의 자신감이 있다면. 혜진이 아니라 광전사 '노르드'라면 꿀리지 않고 방송을 시작할 수 있을  같았다.

실력 방송 타이틀은 일종의 방패였다.

내가 방송을 하게 되더라도, 방송인으로써의 내가 여자라는 사실과 상관 없이 존립하게 하기 위함이다.

물론 나도 당연히 알고 있다.

영상에서 사람들이 그토록 열렬히 반응한 근간에는 내가 여성이라는 이유가 못해도  할은 차지하리라.

그러나 나는  앞에 붙을 타이틀이 '여성' 방송인이 아니라 '게임' 방송인이 되기를 바랬다.

이제와서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느끼며 밀어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완전히 사라져버린 이전의 '나'에 대한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

Nord11은 혜진보다 먼저 태진의 손에서 만들어졌으니까.

나이트폴을 할 때 조차 혜진이 더 부각된다면 너무 슬픈 일이지 않은가.



실력 방송이라고 당당히 말하기 위해선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실력? 이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룩5 따리에 불과한 내가  티어의 사람들을 무더기로 죽여 가며 실력이라고 말한들, 그건 공허한 외침이  뿐이다.

결국은 랭크다. 킹 랭크를 달고 있는 사람에겐 아무도 의문의 시선을 던지지 않는 법이다.

단기간에 킹을 달성하기는 무리가 있더라도, 적어도 퀸은 찍어야 게임  한다고 자부할  있을 터.

랭크 등반을 향한 내 의지는 여기서 더 굳건해 졌던 것이다.



스벅:오!! 감사합니다~~ 영상어떠셨나요? 원본이 너무 재밌어서 편집점 잡는 위주로 편집했습니다@@
조회수 증가도 빠른 페이스에용!!

Nord:재밌더라구요.

스벅:ㅎㅎ  선생님 덕에 연승 타면서 비숍1로 복귀했습니다.

Nord:룩 찍고 말하세요.

스벅:아; 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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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에서 효율을 강조하면, 그건 단순한 반복 작업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사실 게임에서 효율을 따지는 일은 해선  된다.

레벨업을 빨리 한다느니 돈을 빨리 번다느니 하는 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게임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재미에 있다고 할 때, 효율은 따질 것이  된다. 기본적으로 경제성을 논한다는 뜻이니까.

그런데도 효율을 따지게 되는 건, 경제관념이 뼛속까지 침투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명확한 목표가 생겼기 때문인지.

지금 내 꼴이 딱 그랬다.

랭크 상승이라는 목표가 확고해지자,  머리는 어떻게 하면 빨리 등반할지에 대한 고민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당분간 마법사에 대한 개인적인 증오는 넣어두기로 했으니.

마법사를 혐오하는 동포들이 실망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게임에서 내가 가장 자주 사용한 빌드는 역시 광전사라고  수 있다.

대규모의 패치를 거듭한만큼 내가 모르는 신규 특성들도 많았으나, 광전사 빌드를 구성하는 큰 줄기의 핵심 특성들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내가 빌드 수정을 위해 이리저리 실험할 필요도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다시 나이트폴을 시작했을 때도 편했다. 정형화된 세팅을 맞춰두고 게임마다 세부적인 특성들을 이리저리 바꿔가면서 플레이했다.

써본 적이 없는 새로운 특성을 한번 체험해보자는 이유가 첫 번째였다.

그 말은 굳이 특성을 바꿔가면서 게임을 돌릴 필요가 없다는 뜻과도 동일했으니.

말하지 않았는가. 효율을 중시하는 순간 로망이고 뭐고 남는 건 없다.

나는 퀸이라는 랭크까지 극한의 효율충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때까지 나는 게이머가 아니라, 업무를 수행하는 노동자가 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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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증  보여주실래요?"

"여기요."

알바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다고 여기는  자격지심일까.

아니다. 저런 눈빛에 흔들릴 필요는 없다.

나는 엄연히 노동의 필요충분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노동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정의하면 몸을 움직여 일하는 행위요, 경제적으로 따진다면 무언가를 생산하는 행위가 아닌가.

이걸 내게 적용한다면 나는 '승리'를 생산하는 나이트폴 일급 노동자라고 할 수 있을 터.

그런데 생산이란 게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는 법 아닌가. 승리라는 생산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나에게도 어떠한 자원이 필요했다.

그건 바로 알코올. 다르게 말하면 소주.  달리 말하면 생명수.

원래 옛날부터 노동의 곁에는 항상 음주가 함께 했으니.

나는 유구한 전통을 계승하는 중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동안은 일부러 음주를 피했으니 혜진양의 주량을 알 턱이 없다. 그래서 딱 2병만 샀다.

640ml 페트병에 빨간색. 내 나름의 국룰을 따르기로 했다.

원래 캔맥주도 선호하는 편이었으나  몸에 그렇게 배부른 음료가 맞을까 싶었다.

몸이 얇은 걸 보면 이슬이랑 더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했고...

사는 김에 컵라면도 함께 챙겼다. 꼭 안주가 필요한  아니었다. 그냥 컵라면이 있으면 끼니도 함께 해결할 수도 있어서 골랐다. 술을  때 컵라면을 집고야 마는 습관이 따라온 것 같기도 하고.

식사에서 조차 효율을 추구하는, 이것이 바로 참된 노동자의 마인드가 아닐까.


소주와 컵라면이 담긴 편의점 봉투를 들고 터덜거리며 집으로 걸어갔다.

그러고 있으니 옛날 생각이 많이 나더라. 여유가 생기는 휴일이면 슬리퍼  짝을 질질 끌면서 편의점으로 걸어가고는 했는데.

주머니에 담배가 없는게 다르긴 했다. 나를 흘겨보는 알바의 뒷자리로 담배들이  존재감을 강렬히 뽐내고 있는  눈에 들어오긴 하더라.

내심 끌리는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으나. 한번 입에 물면 절대 떼어내지 못할  같아서 그만뒀다.

이랬는데 혜진양이 꼴초였으면 조금 웃길  같기는 했다.


평일 오후 한적한 시간 대에 인적은 드물고 세상은 조용했다. 간간히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정적을 채울 뿐이다.

내가 사는 오피스텔 근처는 비슷한 형태의 건물들이 규칙도 없이 어지럽게 모여들어 있는 구조였다.

건물 사이 사이를 살펴보면 그게 모두 길이었다.
가로등 몇 개는 등이 나가있어  구실을 못했다.

깊은  빛이 들지 않는 골목길을 조용히 지나가다 보면, 담력이 부족한 사람은 겁에 질려 점점 발이 빨라질  같은.

그런 동네였다.

나에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었다. 그러나 혜진양에게는 어땠을지.

스물 둘의 이혜진은 무슨 연유로 이런 곳에서 독립을 시작했을까.

이혜진이 되어 버린 박태진은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사람이 없는 집은 바로 티가 났다. 굳이 시각적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적막하고 싸늘한 공기.

한 때는 조금이라도 빨리 독립하기를 꿈 꿨는데. 막상 혼자가 되니 외로움을 느낀다.

어찌보면 가지고 있지 않은 무언가를 추구하게 되는 것도 같았다.

입고 있던 검은색 가디건을 벗어서 대충 옷걸이로 걸어놨다. 쉽게 늘어나는 소재는 아니니 괜찮을 것이다.

집에서 입고 있던 추리닝과 티셔츠에 외투만 걸치고 나간 터라 옷을 갈아입을 필요도 없었다.

이제, 복잡한 현실을 밀어두고 등반을 시작할 차례다.


우선... 한잔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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