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18 - 개새끼도 가족은 알아본다나
네 번째는 대가리 깨뜨리기.
투둑 하고 대가리를 깨부수는 것. 별다른 노력이 필요없다.
여기 애들은 굳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페이크라고 생각하고 대비를 했다가 사실은 이게 페이크가 아닌 걸 자각하지 못하고 죽고 마는 거지.
페이크를 걸지 않는 게 페이크다. 어, 방금은 페이크를 걸어버렸어. 이따금 다시 만나 다르게 공격하는 거에 당하는 친구들이다.
섬멸전은 무더기야. 사람들이 무더기로 기어나온다. 가끔 연속으로 여럿 잡으면 한 번에 몽땅 기어나와.
그럼 개미를 잡아먹는 개미핥기의 마음이 된다.
개미굴 앞에서 기다리면 개미들이 알아서 혓바닥을 타고 기어나오잖아.
빨려 들어가는 개미들은 자기가 어디로 들어가고 있는지를 알까?
저쪽에 마법사가 있구나.
마법사는 여왕개미다. 둥지 안에 박혀서 어지간하면 찾기가 힘들어. 여왕을 보호하는 병정들이 끊임 없이 기어나오는 것도 비슷하다. 보면 볼수록 개미들 같다.
나는 개미핥기와 달리 여왕을 특히 싫어했다.
한 놈 놓쳤다.
셋이 함께 달려들 줄 알았는데 유감이다. 도망이 재빨라서 따라갈 수는 없어. 먹잇감이면 포식자 앞에서 도망가는 게 당연한데 왜 몰랐을까.
화살이 날아오는 건 귀찮다. 궁병이 어딨는지는 알겠는데 처리하기가 힘들어.
폭죽이 터졌다. 꽤나 요란했다. 좌측에 띄워둔 인터페이스에서 무슨 메세지가 빠르게 올라갔다. 너무 작게 해놔서 볼 수가 없다. 초점이 어중간 했다.
몇 판 째지, 이게.
잔이 비었다.
으, 힘 조절을 잘못해서 조금 흘러넘쳤다. 남은 것도 별로 없는데 너무 아까워.
손에 묻은 방울을 조금 핥았더니 너무 달았다. 소주는 다 좋은데 너무 달아서 문제야. 조금 단 맛을 줄이면 만족인데.
소주 한 잔을 따르면 바로 한 게임이다.
로딩창은 잔을 꺾는 시간이야. 목으로 넘어가는 소주는 조금 미지근했다.
냉장고로 가기가 너무 귀찮아서.
미지근하면 미지근한대로 괜찮은 점도 있어. 찬 거를 먹으면 속에 안 좋다잖아.
게임이 시작하기 전에 한 잔을 모두 비우는 게 포인트다. 게임 도중에는 먹기가 힘들었다.
개미를 잡아야 하니까.
이번 판은 더러운 고성이다. 많이 잡지는 못할지도 몰라.
유난히 채팅창이 시끄럽다.
계속 반짝거리는 게 신경에 거슬려서 그냥 최소화시켜두기로 했다. 어차피 저런 걸 보지 않아도 이기는 걸. 뭐라 그러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개미들이 더 이상 기어나오지 않는다.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포기가 너무 빨라.
내가 한창 나폴을 할 때는 아무리 죽더라도 근성으로 싸웠거든, 요즘 것들은 정말로 근성이 없다.
개미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어야 하는거 아닌가.
서렌 까지도 시간이 남았다. 그럼 미리 한 잔이나 해야지.
여전히 소주는 너무 달았다.
다음엔 맥주를 조금 사와야겠다. 소주만 먹으니까 너무 단 것 같아. 오징어랑 땅콩이 생각난다. 땅콩이 이맘때쯤 맛있었는데.
팀은 숨은 개미찾기에 열심히다. 나는 굳이 저렇게까지 하나 싶었다. 짐승들은 도망치는 걸 못 견디고 쫓아간다는데, 짐승들 같기도 하고.
소주를 홀짝이다 보니까 게임이 금방 끝났다. 중간에 가만히 서있으니까 개미들이 눈치를 보는 게 조금 재밌었다. 접근은 하지 않아서 조금 아쉬운데.
어지러워.
조금, 과음을 했나? 혜진씨는 술이 센 편은 아닌 거 같네. 뭔가 부장이 떠올라서 웃음이 나왔다. 여직원한테 찝쩍대는 개새끼였는데.
발바닥이 차갑다. 보일러. 보일러를 키기는 좀 아까운 날씨라 안 켰는데. 전기장판 정도는 사는 게 좋을 지도 모른다.
아. 몇 판을 하려고 했더라.
한 판만 더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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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시 술을 마시면 나를 개새끼라고 불러라.
그렇게 나는 매번 개새끼가 되었다.
"끄응..."
머리가 더럽게 지끈거렸다. 그래도 침대로 고꾸라질 정신은 남아있었나 보다. 몸에 휘감기는 이불이며 머리카락이며 하는 것들이 전부 나를 옭아매는 것 같았다.
토악질은 안 했군.
그런 사실에 감사하는 꼴이 어이가 없었으나, 이 정도로 그친 것이 다행이기는 했다. 빨래까지 할 필요는 없겠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기억을 되새기는 일은 고되기 그지없었다.
나는 인맥이 없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감사했다. 연락할 데가 없으니 바깥까지 지랄을 해 두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노동에 술은, 염병...
게임을 하면서 쳐먹는 술은 일종의 범죄 행위였다. 정도라는 걸 모르고 퍼먹게 되거든.
매칭이랑 로딩 시간을 틈타 쉬지 않고 쏟아 부었던 기억이 있다. 왜 음주에는 후회만 남는건지.
띵동-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집에 사람... 사람이 와? 안 그래도 어지러운 와중에 무슨 난리인지 머리의 두통은 심해졌다.
지금까지 집에 누군가 방문한 것은 기껏해야 배달 기사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손가락으로 헤아릴만큼 적었다.
그런데, 이 오전 시간에 올 사람이 누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최대한 기척을 내지 않게 조용히 일어섰다. 몸을 움직이자 지난 밤의 취기가 다시 되살아나는 듯 했다. 입에서 욕설이 절로 나왔다.
슬쩍, 현관문으로 향해 렌즈를 들여다본다.
여자가 있었다.
이제 스물, 아니 그보다 더 어릴까. 화장기가 옅은 얼굴은 성인이 아닌 학생을 연상시킬만큼 앳돼 보였다.
눈썹 위로 깔끔하게 정리된 앞머리와 어깨춤에 닿는 매끄러운 검은색 단발이 인상적이다.
커다란 눈망울과 애교 살 때문에 부드러운 인상을 주는 얼굴은 무감정한 표정 탓에 오히려 조금 차가워 보였다.
뭔가, 누군가가 연상되는 얼굴이다.
혜진의 신분증 사진과... 닮아있더라.
숨이 막히는 기분이다.
그야, 혜진에게도 가족이 있겠지.
이대로 살아가다보면 언젠가는 만나게 되겠지. 언젠가는.
'언젠가는'이라는 기약 없는 말로 얼마나 많은 책임을 미뤄왔던가.
그 대가가 정말 갑작스레 찾아온 것이다.
이대로 문을 열지 않고 집에 사람이 없는 척 할까?
정말 가족이라면 걱정되는 마음에 경찰서에 연락을 할 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문제는 더 커질 뿐이다.
이 세상 어디보다도 안락했던 원룸이, 사지로 바뀌는 건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띵동-
망설이는 나를 보채듯 벨소리가 다시 울렸다.
머리는 이미 온갖 생각들로 과부하에 이르렀다.
뇌가 폭발하기 직전인 그 어떤 임계점 같은 곳을 지나고.
나는, 그냥 문을 열었다.
"아, 혜진 언니...?"
내 꼴에서 뭘 느낀건지. 동생분은 말을 잇지 못했다. 무표정했던 단정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나는 그냥 눈을 바라봤다.
뭔가, 저지르면 안 될 일을 들켜버린 것만 같아서.
큰 눈망울에 고이는 복잡한 감정들 속에, '나'에 대한 책망도 포함되어 있는 것만 같아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눈만 바라본 것 같다.
"언니... 이럴 거면, 이럴 거였으면!"
참았던 무언가를 토해내듯 터져 나오는 목소리였다. 감정을 쏟아낸 동생은, 원망이 섞인 손으로 나를 밀쳐 냈다.
"흑...이렇게 살 줄 알았으면..."
내가 그 감정의 뿌리를 알 턱도 없었는데.
나는 왠지 모를 죄책감에, 고개를 숙였다.
아니, 술 좀 먹을 수도 있지...
"언니, 술은 매일 마시는 거야?"
"어? 아니야. 진짜 안 먹는데 딱 어제만 먹은 거야."
진짠데.
동생의 날카로운 눈초리는 가실 줄을 몰랐다.
현관에서 한바탕 눈물을 흘린 뒤로 분위기가 급변했다. 내 꼬라지가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태도에 단호함 따위가 엿보이는 게 뭔가 불안했다.
불행 중 다행인지 지금은 나에게서 미심쩍은 부분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평소 혜진과 동생의 관계는 어땠을까. 연기를 하고 싶어도 내가 혜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시도조차 못했다.
사실 그런 것보다, 나는 내 눈 앞에 있는 동생의 이름도 몰랐다.
"도대체 평소에 뭘 먹는 거야? 냉장고에도 계란밖에 없잖아."
"잘 챙겨 먹어. 볶음밥도 해 먹고, 어쩔 때는 시켜도 먹고..."
"볶음밥? 언니가 요리를 해?"
이런 젠장.
"아니, 요즘엔 엘튜브 같은 데에 요리하는 것도 다 올라오더라고. 쉬워 보이길래 나도 해봤지."
이게 무슨... 스릴러 게임도 아니고.
미친 사이코패스 살인마와 대면한 주인공처럼, 한마디 한마디에 신중함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마음 같아선 차라리 소주 한 병을 원샷하고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상대하고 싶었다.
이상하다는 눈길을 보내던 동생은 이내 고개를 돌리고 다시 순찰을 시작했다.
순찰, 그래. 순찰이라는 표현이 딱 적절했다.
불을 켜고 화장실에 들어간 동생의 뒷모습에선 내가 어떻게 사는 지를 반드시 확인해야겠다는 일종의 집념이 느껴졌다.
원래도 언니한테 과보호인 편이었나?
맥락은 커녕 일말의 정보도 없으니 어떻게 대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수동적으로 대답만 하는 내 모습에 이상함을 느끼지는 않는 걸 보니, 일반적인 자매관계는 아닌 것 같았다. 이래서는 저 쪽이 언니같은데.
"그, 마실 거라도 줄까? 커피랑 콜라도 있어."
"괜찮으니까 물이나 한잔 줘."
고개도 안 돌리고 대답한다. 무슨 상사한테 검사 받는 기분이다.
사실 지금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미 등은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아니, 침착하자. 내용물이 어떻든 지금 내 외형은 온전한 혜진이 아닌가. 무슨 이상한 점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그걸 심각하게 추궁받을 일은 없을 터였다.
화장실을 훑어본 동생은 거실로 나와 내게서 물을 받았다. 그러고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내가 청결은 중요시하는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이 모습에 집까지 돼지우리였다면 어떤 반응이 터져나왔을지,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언니로써의 위상같은 건 없었나. 혜진씨...
"저 컴퓨터는 뭐야?"
"응?"
"언니 집에서 가지고 나간 컴퓨터 저거 아니잖아."
컴퓨터 정도는 내 자유의지로 살 수 있는 거 아니요?
"새로 산 거야. 원래 있던 게 너무 오래 돼서..."
"언니가 샀어? 또 이상한 사기당한거 아니지! 그런 거 살 거였으면 나나 주호한테 물어봤어야지!"
주호. 주호는 또 누군가. 혹시 동생이 한 명 더 있나. 그리고 대체 혜진은 무슨 짓을 했길래 컴퓨터 하나 샀다는 사실에 동생이 이렇게 달려드는 건가.
나는 어지러웠다.
"아니야. 잘 알아보고 제 값 주고 산 거야. 인터넷에서 유명한 곳에서 샀어. 걱정 안 해도 돼."
이 대답은 유효했나. 찡그리던 미간이 조금 풀렸다. 다만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꼴이, 내가 마냥 대답을 잘 한 건 아닌 것 같았다.
누가, 누구든 좋으니 나에게 답지를 다오.
"계속 서 있지 말고 침대에라도 앉아 있어. 밥은 먹고 왔어? 내가 뭐 시켜줄까?"
내 손에 이끌려 침대에 앉은 동생의 시선은 내게 고정된 채로 떠날 줄을 모른다.
나는 여전히 이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밥이라도 시키게 해 주면 잠시나마 시선을 돌릴 수 있을텐데.
"언니... 혼자 살더니 많이 변했네."
동생의 손이 내 손을 놓아주지 않는 탓에 나도 옆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손등을 쓸어오는 손이 따듯했다.
원룸에 들어오고부터 유지하던 분노가 조금은 식었는지, 동생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낮고 부드럽다.
말의 억양을 생각하면 긍정적인 의미인 것 같았다.
그 변화는 어떤 변화일까. 내가 모르는 혜진의 이미지가 쉽게 그려지지 않아 여전히 행동이 어려웠다.
"언니. 지금이라도 다시 들어가자. 응? 나랑 주호가 설득하면 아빠도 뭐라 그러시진 않을 거야. 언니 이렇게 사는 거 보면 너무 안쓰러워."
이렇게 사는게 대체 뭔데... 내가 그 정도로 잘못 살고 있었나?
속에서 끓어오르는 반박과는 별개로, 동생의 말이 암시하는 바는 굉장히 많았다.
혜진은 모종의 이유로 집을 나왔다는 것. 아버지가 언급된 것으로 봤을 때 그와 관련된 일일 가능성이 컸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아마 부녀 간에 다툼이 있었겠지.
그런데도 원룸에 돈 천만원까지 주고 보낸 거라면 꽤나 경제적 여유가 넘치는 가정으로 보였다.
처음 핸드폰 통화내역을 봤을 때를 생각하면, 아직 화해와는 거리가 먼 수준인가.
상황이 어떻든, 지금 내가 돌아갈 곳은 아니었다.
"아니야. 난 여기가 편해.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당분간은 이렇게 혼자 살고 싶어."
더 많은 어필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이 길어지면 꼬리가 밟히는 법이다. 괜히 말을 길게 늘리고 싶지 않았다.
동생은 내 말을 듣고는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기는 듯 했다.
집 안에서 싸우고 독립까지 한 언니를 찾아왔다면, 관계가 어떤 형태든 꽤나 돈독한 사이였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연락기록에 동생의 문자가 없었다는 사실이 걸리는데-
"언니."
동생의 맑은 목소리가 내 상념을 깨운다.
"응?"
"나 결심했어. 언니가 안 돌아올거면 내가 당분간 언니랑 같이 살게."
이런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