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19 - 너랑 나랑은 지금
동거라는 건 뭘까.
생활을 공유한다는 건 상상이상의 무게를 갖는다.
눈을 뜨고 다시 눈을 감는 순간까지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쉰다는 뜻은,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공개한다는 말과도 같으니.
하물며 그게 작은 원룸이라면야. 아예 숨길 수 있는 게 없다고 봐도 됐다.
그러니까 나는 필사적으로 동생을 설득해야 됐다는 소리다.
"...응? 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걱정되면 가끔 이렇게 찾아오면 되잖아. 내가 연락도 자주 할게. 집에도 찾아가고... 너도 할 거 많을텐데 갑자기 이런 데서 살면 어떡해. 술도 안 마실거야. 원래도 거의 안 마셨어."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눈물의 똥꼬쇼였다.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다 꺼내가며 설득해도 동생의 얼굴을 펴질 줄을 몰랐다.
혜진의 나이가 스물 둘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동생은 아마 학생 신분일 가능성이 컸다.
나는 마음 속으로 간절하게 동생이 고등학생이기를 바랬다.
학업에 얽매여 있다면 이런 곳에서 같이 산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도 일시적인 충동에 불과하겠지.
"하, 언니 그렇게 나랑 살기 싫어?"
그래, 이년아.
"아니, 그런 소리가 아니지... 나 때문에 네가 희생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
말이 끌리는 건 필연적이었다. 대화라는 건 이리도 어렵다. 거기다 그게 처음보는 '동생'이라면 더더욱 어려웠다.
처음 만나는 사람은 대개 낯선 사람A 정도로 지칭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이 세상에 '처음보는 동생'과 대화하는 방법은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겠지.
나는 지금 난제를 풀어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왠지 내 손을 잡고 있는 동생의 손에 힘이 더해진 것 같았다. 내가 약한 건지, 동생의 악력이 강한 건지.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아팠다.
"그, 조금 아픈데..."
"언니 너무 말랐어. 뼈밖에 없잖아."
내 손을 붙잡고 있던 동생의 손이 팔까지 올라온다. 부드럽고 따듯한 손이 서늘한 피부에 감겨서 나도 모르게 소름이 올라왔다.
생각해보면 이런 식으로 사람과 접촉한 것도 처음이다. 원래도 스킨십이 잦은 편이었나. 내 몸을 이리저리 훑는 동생의 손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역시 안되겠어. 같이 사는 건 무리여도 내일까지는 여기서 자고 갈게. 언니가 어떻게 먹고 사는 지는 확인해야겠어."
그러더니 내 대답도 듣지 않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주호야, 나 지금 언니 집이야. 응... 나 자고 가려고. 아빠 어차피 출장가셨잖아. 응. 엄마한테는 니가 말씀드려줘. 언니? 집은 괜찮은데 밥을 안 먹는 것 같아. 너무 말랐어. 내가 내일까지 보고 가려고. 그건 다음으로 미룰게. 응. 고마워."
핸드폰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남성의 저음이었다. 주호는 남동생이었나.
남매인데도 사이가 완만한 모양이다. 소리가 작은 탓에 전화 내용이 모두 들리지는 않았으나 느껴지는 분위기가 그랬다.
내 의사는 어디로 가버렸나.
나는 내 주장을 밀어붙일 수 없었다. 당장 이 원룸도 내것이라고는 말하기 힘들었다.
만약 동생이 혜진의 아버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한다면, 최악의 상황으로 나는 원룸에서 나가야 할 지도 모른다.
비좁았던 세상이 좋게 느껴질 수도 있구나. 갑작스레 밀어닥친 동생의 존재는 내 좁디 좁은 관계망을 너무도 크게 확장시켜 버렸다.
혜진의 아버지와 어머니, 주호, 내 눈 앞의 동생... 나는 그들을 모르지만 그들은 혜진을 알았다. 이건 무슨 최악의 상황인지.
그래도 당장 같이 살겠다는 의지를 접은 건 천만다행인가.
전화를 마친 동생은 곧장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한쪽 손은 내 손목을 붙잡고 있는 상태였다.
"언니 집에 남는 칫솔있어? 없으면 지금 사러 가자."
없었다. 빌어먹을.
나는 졸지에 세수만 대충 하고 황급히 옷을 갈아입은 채 밖으로 끌려 나왔다.
화장을 기다려 준다는 동생의 말을 간신히 거절하고,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에 수분크림 정도만 바른 상태였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는 아직 혜진의 집에 있던 화장품이 어디에 쓰는 건지도 잘 몰랐다. 지금까진 그냥 로션처럼 보이는 것만 발랐지.
아니, 아는 게 이상하지 않나...
동생의 왼손은 외출을 나온 이래로 계속 내 손을 붙잡은 채였다. 주말 낮에 손 잡고 돌아다니는 자매라니.
자매끼리는 이게 일반적인가?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듯한 느낌이 내 기분 탓인지 모르겠다.
"괜찮아? 주말이라 사람이 좀 많네. 불편하면 나한테 기대도 돼."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혹시 혜진은 극도의 대인기피증이었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외출 좀 했다고 동생한테서 저런 말이 나올 정도면, 뭔가 이상이 있음은 확실해 보였다.
연락처가 공란이었던 것도 그 탓인가.
나는 내심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괜찮아. 근처에 마트있으니까 거기로 가자."
굳이 몸이 안 좋은 척을 할 필요는 없어서 좋았다.
전날 진탕 마신 술 때문에 내 몰골은 이미 아픈 사람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마트는 건물이 빽빽이 모여있는 골목길에서 벗어나 큰 길로 나오는 지점에 위치했다. 집에서 약 10분 정도 떨어진 거리다.
대형 마트는 아니지만 있을 건 다 있어서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꽤나 모여드는 곳이었다.
보통은 편의점에 의존하는 나였지만, 계란이나 식재료를 살 때 몇 번 방문했던 기억이 있다.
오늘 내일로 동생을 완전히 떨쳐 내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잘 먹고 잘 산다는 사실을 어필할 필요가 있겠지.
여기선 내가 직접 요리해 먹을 정도로 발전했다는 어필이 좋지 않을까.
"역시 사람이 많네..."
작게 중얼거린 동생은 내 손을 더 끌어당겼다. 졸지에 힘 없는 인형처럼 끌려간 나는 동생의 옆에 딱 달라붙었다.
키가 나보다 조금 더 컸다. 내 키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동생은 여자 치고도 꽤 큰 편인 것 같았다. 내 턱이 동생의 어깨에 닿았다.
"이렇게 안 해도 괜찮다니까."
"아냐. 내가 이게 더 편해."
내가 불편하다고. 단호한 년...
어쩔 수 없이 앞서나가는 동생의 곁을 따라 걸었다.
꽤나 이른 시간임에도 마트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호객행위를 하는 정육점 직원의 목소리가 입구까지 들려 왔다.
요리라고 해봐야 할 줄 아는 것도 별로 없었다. 몸이 바뀌기 전에도 요리에 취미를 두고 있지는 않았던 탓이다.
나는 요리를 위한 준비 과정이 길어지는 걸 싫어했다. 재료를 사고, 조리도구를 준비하고, 레시피를 훑어보는.
준비에 시간을 쏟아부어서 완성한 요리는 기껏해야 30분 안에 모두 사라지지 않는가.
내게 끼니는 배만 채우면 되는 시간이었다.
맛있는 게 있으면 물론 좋았지만, 굳이 시간을 쓰면서까지 찾을 이유는 없는.
그러다 보니 뭔가 건강에 좋은 음식을 떠올리려 해도 생각나는 게 없더라. 그런 음식은 대개 난이도가 높은 것들 뿐이었다.
건강은 포기하고 보기라도 괜찮은 걸로 하자.
외견 상으로 깔끔하면서 만들기는 비교적 쉬운, 그런 음식이 있나.
여전히 동생의 손에 이끌려 인파 사이를 넘어가면서 무슨 요리를 해야 할지 생각에 잠겼다.
처음 방문한 마트임이 분명할텐데도 걸음에 망설임이 없다. 아마 칫솔부터 찾고자 하는 거겠지.
짧은 관계지만 혜진의 동생이 똑 부러졌다는 건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동생은 어렵지 않게 곧장 생필품들이 모여있는 곳을 찾아냈다.
요리는 파스타로 하기로 했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면서 만들기도 간편했다. 요즘엔 기성품으로 나오는 소스들도 퀄리티가 괜찮은 편이다.
요리를 즐기지 않는 나도 파스타는 자주 해 먹었던 기억이 있다. 전 여자친구가 좋아했거든.
사이드 메뉴로는, 대충 샐러드 정도면 되겠지.
그 정도만 해도 평소에 내가 먹는 식단보다 월등히 발전된 식단이었다. 동생도 불만을 가지지는 않을 것이다.
"언니도 살 거 있어?"
"응. 너 왔으니까 뭐라도 해 줘야지."
그래, 저 눈이다. 저... 감탄인지 감동인지 모를 요상한 감정들이 뒤섞인 눈.
뭔가 혜진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했다는 생각에 당혹감이 들면서도, 한 편으로는 반발심이 생겨 났다.
어차피 내가 혜진이 될 수는 없는 법아닌가.
갑작스레 '사실 난 혜진이 아니라 태진이요.'라는, 정신병원에 끌려갈만한 고백은 하지 않겠으나.
언제까지고 혜진인 척 연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까 네가 적응해야 해. 변한 내 모습에.
나는 동생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파스타의 포인트는 면을 삶을 때 맛소금을 넣는 것이다.
치킨스톡을 대신 넣어도 좋다. 요는 조미료와 간을 더하는 것이다. 면을 삶는 과정에서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파스타의 맛은 몇 배나 뻥튀기된다.
특히 알리오 올리오 같이 오일 파스타 종류를 조리할 때 주요하다. 강한 맛이 나는 소스를 사용하지 않는 만큼 면에 조미를 해준다는 느낌이다.
그런 요리를 할 때 면에 간을 하지 않으면 맛이 밍밍하다고 느낄 가능성이 크다.
소스는 시판하는 토마토 소스를 골랐다. 동생에게 선호하는 파스타가 있냐고 물어보니까 망설이면서 대답하는 게 조금 재밌었다.
사실 토마토 소스에 로제 소스를 더해서 섞으면 매콤한 맛이 가미되어 더 맛있는 파스타가 완성된다. 그런데 소스를 두 개나 사버리면 한참동안 이나 냉장고에서 썩을 게 뻔하지 않는가.
그래서 그냥 그만두었다. 동생이 돌아가면 내가 파스타를 해 먹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언니, 드레싱은 얼마나 뿌릴까?"
"한 바퀴만 두르면 될 것 같아. 혹시 원하면 더 뿌리고."
나는 동생과 같이 점심을 준비하고 있다.
냄비에서 끓는 물을 바라본다. 혼란스럽기 그지 없었던 아침의 일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과음으로 뻗고, 정신을 못차린 상태에서 처음으로 여동생과 마주하고, 둘이 같이 장을 보고, 지금은 요리를 하고 있다...
어제의 나에게 말하면 무슨 개소리냐고 할 것이 뻔했다.
가만히 앉아서 쉬고 있으라는 나의 말에도 동생은 꿋꿋이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말리기 힘들어서 샐러드나 만들라고 맡겼다.
손질이 되어 판매되는 샐러드용 채소를 사온 터라 대충 접시에 담아서 드레싱만 뿌리면 되는 일이었다.
면만 다 삶으면 파스타도 금방 완성된다. 시판용 소스를 사용하면 익혀야 되는 재료도 없어서 조금만 조리해도 충분했다.
식탁이라 할만한 게 없어서 구석에 처박혀 있던 간이탁자를 꺼내다 닦았다.
의자도 하나 뿐. 한 명은 침대에 앉아서 먹기로 했다. 내가 파스타를 하는 계속 쳐다보는 통에 행동거지가 불편하더라.
무슨 생각인지, 나를 도와 접시를 옮기는 와중에도 동생은 조용했다.
"자, 먹자."
동생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 무거운 정적을 풀어보려 내뱉은 말에 가까웠다.
해장을 파스타로 하는 날도 있구나.
파스타는 무난하게 맛있었다. 시판용 소스를 가지고 맛 없게 만드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동생은 내가 먹는 걸 잠깐 지켜보더니 자기도 젓가락을 들었다.
"이제 요리도 잘하네."
왜 저렇게 아련하게 말할까.
파스타를 한입 먹고는 저런 반응이다.
사람의 감정을 읽는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저 살짝 내려간 눈꼬리가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너는 혜진이 변화한 모습을 보면서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식기가 접시와 부딪히면서 나는 소리가 원룸의 정적을 채웠다.
잘 넘어가지 않는 파스타를 억지로 넘겼다. 이럴 줄 알고 양을 좀 적게 잡은 게 다행이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건 제일 귀찮은 일과니까.
묵묵히 파스타를 먹던 동생이 입을 열었다.
"요즘은 어떻게 살고 있는 거야?"
쉬운, 쉬운 질문을 해줘.
"응? 컴퓨터 많이 하지. 엘튜브도 보고, 게임도 하고..."
"게임? 언니 게임도 했었어?"
"어... 시작한지 얼마 안 됐어. 엘튜브로 봤는데 재밌어 보이더라고."
"어떤 게임인데? 나도 주호가 하는 거 많이 봤어. 언니가 하는 게임이면 나도 해보고 싶은데."
응. 나는 나이트폴이라고, 전쟁터에서 사람 대가리를 대검으로 터뜨리는 게임을 하고 있어.
마음 같아선 그냥 그렇게 말하고 싶더라.
나는 당연히 망설였다. 왜, 게임이야기가 나왔다고 공감대를 형성한 것 마냥 달려들면 십중팔구는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응...? 아하하. 나는 잘 모르겠는데.'
이런 반응이 나타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말하는 걸 보면 동생이 게임을 즐긴다기 보다, 나와 대화를 더 이어가고자 저런 말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여기선 대충 동생도 좋아할법한 게임을 읊어주는 게 좋을 것이다.
"...나, 나이트폴이라는 게임인데."
생각해보니까 내가 아는 게임 중에 그런 게임은 없었다.
다 피가 낭자하고, 사람끼리 죽고 죽이는 그런 게임밖에 떠오르지가 않더라...
이래서 무엇을 하든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지식이 부족하면 대화조차 이어나가기가 쉽지 않다.
"아! 나 그 게임 알아. 주호가 하고 있는 거 봤어. 요즘엔 그것만 하던데."
뭐...라고?
이게 국민게임으로 진화한 나이트폴인가 싶었다. 인기 게임 순위나 커뮤니티의 변화로 꽤 유명한 게임인 건 알았지만 이렇게 피부로 느낀 건 지금이 처음이다.
창창한 나이대의 여자애도 아는 게임이라니.
"와, 근데 언니도 그 게임하는 거야? 상상이 안 간다. 나는 보기만 해도 어지럽더라구."
나는 너를 보고 있으면 어지러워.
그냥 어설픈 웃음으로 넘겼다.
상대가 게임을 알고 있다고 눈에서 불을 켜고 게임 이야기로 넘어가면 안 된다.
알지도 못할 주제는 가볍게 넘어가고, 상대가 흥미로워 하는 주제로 자연스럽게 전환하는 게 여성을 상대하는 방법일 터.
"나 언니 게임하는 거 구경해도 돼?"
생각해보니까 나도 여자더라.
동생도 여성을 상대하는 법을 잘 아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