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20 - 없다가 있으면 알 수 있어
나는 지금 방송 중이다.
나도 이렇게 바로 방송인이 될 줄은 몰랐지.
시청자는 단 한명이었으나, 방송은 역시 쉬운 일이 아니더라.
너무... 부담스러웠다.
"와... 또 죽였어."
의자 너머로 내 허리춤을 잡은 손이 움찔하고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동생의 손이다.
공간이 협소한 탓에 내 컴퓨터 책상은 침대와 근접하게 배치되었는데, 이 덕분에 동생이 침대에 걸터앉을 수 있었다.
그러고는 의자를 제 쪽으로 당겨와 내 허리에 손을 얹고 계속 쪼물딱거리는 것이다.
부드러운 게 기분이 좋다나. 이것도 많이 나아진 것이다. 처음엔 옷 속으로 손 까지 밀어넣는 통에 게임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으니.
적당히 가까워야지...
불행인지 다행인지, 동생은 나이트폴 특유의 잔인한 연출에는 면역이 있었던 것 같다. 적 유저가 계속 죽어나가는 과정에도 감탄 외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나야 워낙 익숙하지만 처음 게임을 접한 사람이라면 지나친 현실감 때문에 조금은 꺼려질 만한 그래픽이다.
그래서 일부러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던 빌드를 고르기도 했다. 지근거리에서 적의 사지를 절단하는 광전사를 고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휙-
모니터 속 투박한 궁병의 손이 활 시위를 당겼다.
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화살은 의도한 대로 아군과 대치하던 적 창병의 왼쪽 팔에 박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대치중이던 아군이 검을 내리쳤다.
자연스러운 연계.
나이트폴 궁병의 알파이자 오메가, 아군 지원이다.
성격 상 궁병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마법사를 제외하면 나이트폴에서 가장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빌드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호불호와 현실은 별개인 법이다. 싫어도 해야할 일이 존재하는 법이지.
무식한 길드 멤버들과 팀 게임을 할 때면, 화살 적중도가 제로에 가까운 팀원들 탓에 궁병의 역할을 수행하는 건 주로 내 몫이었다.
통계는 없었으나 내 빌드 사용률을 따지면 궁병이 못해도 3등 안에는 들었을 것이다. 대회에 나가자고 미칠듯이 연습했던 기간이 있어서 더욱 그랬다.
그러니까, 광전사와 비슷한 수준의 숙련도를 가졌다 이 말이다.
휙-
화살 하나 하나가 유효한 성과를 만들어낼 정도로.
"언니 너무 잘한다."
누군가 지켜보기 때문에 생기는 게 비단 부담뿐만은 아니었다.
칭찬 한마디에 생기는 뿌듯함이 생각보다 크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겠더라.
동생을 배려해 활쟁이 빌드를 선택한 것도 꽤나 유효했던 모양이다. 적군이 무더기로 죽어감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가장 완벽한 궁병은 전장에서 관찰자가 되는 법이다. 눈 앞에서 죽음을 목도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전장의 무게감은 이리도 줄어든다.
Swordsman_Ash:아쳐 씨발련이 신성한 결전을 방해하네
Swordsman_Ash:그따구로 하니까 좋냐? 얌생이년
...전체 채팅을 꺼둔다는 걸 깜빡했다.
활을 들다 보면 저런 채팅을 생각보다 많이 경험할 수 있다. 앞서 궁병의 핵심이 아군 지원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 말은 곧, 대치중인 상대방의 의표를 찔러서 빈틈을 만든다는 말과도 같았으니.
한마디로 꼴받게 만든다는 말이다.
사실 게이머라면 '게임 좆같이 한다'는 말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극찬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을
먼저 욕설을 내뱉는다는 건, 본인이 실력으로 박살나 정신적으로 몰렸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당연히 저런 채팅을 훌륭하다는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동생에게는 어떻게 보였을지.
"채팅은 원래 저러는 거야?"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고 느끼는 건 기분 탓일까. 왠지 모르겠지만 동생은 혜진에게 너무 과보호였다.
"저건 지금 칭찬하는 거야."
"칭찬? 저게 칭찬이라고?"
"응... 원래 이런 게임은 상대한테 욕 먹는게 잘한다는 거라서."
게임을 하느라 뒤를 돌아보지는 못했다. 그래서 동생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PVP게임에 대한 경험이 없다면 이 기묘한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다.
사실 억지로 이해시킬 필요도 없다. 다음 판부터는 아예 채팅을 꺼두는 것이 좋겠다.
동생의 손이 다시금 내 배를 쓸어왔다. 내가 플레이하고 있지만 과연 여기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건지.
에라, 모르겠다.
되도 않는 감정 읽기는 이제 포기하자. 어차피 정답을 알려주는 것도 아닌데. 게임을 하는 동안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하고 싶었다.
난 게임 속 궁병에게 몰입하기로 마음 먹었다.
또 다시 한 명.
궁병은 날아간 화살이 목표물에 명중하는 것조차 확인하지 않았다. 곧장 또 다른 목표를 찾아 화살을 시위에 건다.
벌써 몇 번째인지, 이미 눈에 익은 광경이다.
혜민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려 그녀의 언니를 바라보았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 때문인지 조금은 날카롭게 느껴지는 인상이다. 햇빛을 못 받은 탓인지 창백한 피부와, 하얀 피부때문에 더 부각되는 눈 밑의 짙은 다크서클까지.
아무리 봐도 그녀가 알고 있는 혜진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분위기가 다른 건지.
그녀는 처음 원룸에 들어왔을 때를 떠올렸다.
충격적이었다.
단식 투쟁을 하면서까지 독립시켜 달라며 울부짖던 언니였다.
그렇게 해서 나갔으니,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한번 확인해보겠다는 마음으로 나선 길인데.
문을 열고 나오는... 반쯤 죽어있는 시체 같은 모습에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말이 모두 사라지더라.
사실대로 말하자면, 혜민의 입장에서도 혜진의 독립은 처음부터 걱정 투성이였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완전히 방 안에 갇혀 생활하던 그녀다. 어떤 날에는 집에서 마주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혜민과 주호가 외출하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그런 사람이 독립이라니.
집에서야 밥을 챙겨주는 아주머니가 있다지만, 혼자 살면 생전 해보지도 않았던 생활을 그녀가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그런 사실을 뻔히 알고있었음에도 그녀의 독립을 허락한 건 순전히 아버지의 선택이었다.
이대로 영원히 집에 갇혀 살 바에는, 어떻게 되든 좋으니 혼자 살아보라는. 아버지다운 결정이었다.
때문에 처음 혜진이 문을 열고 나온 순간, 혜민은 자신의 걱정이 그대로 현실이 된 줄 알았다.
기본적인 생활조차 못하고 서서히 죽어가는 중인 자신의 언니.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열고 살펴본 원룸에는 소주 페트병이 굴러다니고 있지 않았나.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시체를 마주하게 될 지도 몰랐다는 생각이 혜민의 머릿속에서 슬슬 피어나고 있을 무렵.
그녀의 언니가 보여준 모습들은 혜민의 예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들이었다.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그토록 꺼리던 군중들 사이로 지나 다니는 모습하며.
자신의 손을 이끌고 익숙하게 마트의 식재료 코너를 두리번거린다던가.
자연스럽게 파스타를 요리하고, 지금에 와서는 게임까지 하고 있다. 그것도 혜민이 보기에도 훌륭한 실력으로.
사람이 변화한 모습을 보면서 커다란 괴리감을 느낀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혜민은 자신이 알던 사람이그토록 급격히 변화한 것을 오늘 처음 목도했다.
자취라는 게 그 짧은 시간동안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는지, 혜민은 혜진을 통해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도 혜진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좁은 우물 안에서 살던 언니가, 어느샌가 우물 밖으로 나와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언젠가 자신의 손으로 언니의 손을 잡아끌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그녀였기 때문에, 이렇게 복잡한 마음이 생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집에서부터 떠나간 언니가 마치 혜민 자신의 곁에서도 멀어진 것만 같아서.
혜민은 그 복잡한 심경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저녁까지는 시간이 금방 흘렀다. 동생을 곁에 두고 무슨 게임을 할 수 있겠냐는 내 의문은 막상 시작하자 금새 사라졌다.
한두 판이 지나자 게임에 몰입한 신체는 동생의 시선마저 지워내더라.
정말 관전을 즐기기라도 하는지, 가끔 게임에 대해 물어오는 걸 제외하고는 별다른 말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생각했던 것보다 동생의 존재가 신경쓰이지 않았다.
원래 금방 흥미를 잃어버리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줄 알았는데.
간혹 뒤를 살펴볼 때마다 여전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어 조금 놀랍긴 했다.
저녁은 동생과 함께 시켜먹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쳤다. 메뉴는 고민할 여지를 버리고 바로 치킨으로.
동생도 입이 짧은 편인지, 둘이 한 마리를 다 먹지 못했다. 통탄할 노릇이다.
함께 나눈 이야기를 종합했을 때 동생은 지금 고등학교 2학년인 듯 했다. 역시 절대 이곳에서 살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주호는 같은 학교의 다른 반이라고 한다. 제대로 들은 게 맞다면 아마 연년생이거나 쌍둥이 동생일 것이다.
가족관계를 따지는 데 무슨 추리를 하고 있냐는 생각에 머리가 아프더라. 더 놀라운 건 나는 아직까지도 동생의 이름을 모르는 상태였다.
동생이 돌아가면, 필히 가족관계증명서를 확인할 필요가 있겠다...
오늘 하루 자고 가겠다는 말은 확실히 농담이 아니었는지. 동생은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도 굳이 설득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했다. 설득이 쉽지도 않을 것 같았거니와, 지금 억지로 보내면 또 무슨 말이 나올 거라는 확신이 들더라.
그래도 최악이었던 첫 만남을 제외하면 그럭저럭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밤이라면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고.
"언니, 이제 웹툰은 안 그리는거야?"
간혹 나오는 이런 질문들만 제외하면 말이지.
혜진의 인생과 관련된 질문은 내게 너무나 무거운 물음이었다.
웹툰 작가가 지망이었던 혜진은 이제 없으니. 나로써는 책임지지 못할 것들이다.
침대에 걸터앉아, 아무 의미없이 인터넷을 기웃거리는 나를 보며 동생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응, 다른 걸 해보려고."
"다른 거?"
"성공할 때까지는 비밀이야."
다소 추잡한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잠시 동생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여기서 내가 돌연 방송을 하겠다고 선언한들 동생의 의문이 해소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단언컨대 나는 밤새 동생의 질문에 시달리게 될 수도 있었다.
비밀은 비밀로 해두는 게 좋다. 설령 가족관계라 할지라도.
"언니가 안쪽에서 잘래?"
"아냐. 니가 들어가서 자. 나는 상관없어."
휑한 원룸에 여분의 이불이 있을 리가 없다.
내겐 이른 시간이었다. 졸음을 호소하는 동생에게 침대를 내어주려고 했으나 한사코 거부하더라.
그럼 언니는 어디서 자려는 거야... 라니, 안 자면 되지 않는가.
그 대답을 듣고 나서는 반드시 같이 자야된다며 저런 상태다.
"아냐. 언니가 안쪽에서 자는 게 맞겠어. 그래야 중간에 나 몰래 안 빠져나가지."
내가 뭐라고 대답하겠냐고.
나는 얌전히 침대에 몸을 뉘일 수밖에 없었다.
옆에는 오늘 처음 만난 여동생이 누워 있고, 이제 열한 시를 가리키는 시계에 내 눈은 또랑또랑했다.
잠이나 들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슬금슬금 커져갈 만도 한 상황인데.
이상하게도 내 마음은 평온한 것이었다.